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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임의 글 공장입니다.

싱글벙글 고시원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드라마

완결

홍차임
작품등록일 :
2015.10.23 23:35
최근연재일 :
2016.04.02 21:40
연재수 :
38 회
조회수 :
69,237
추천수 :
969
글자수 :
181,952

작성
15.10.25 15:15
조회
1,501
추천
29
글자
12쪽

4화. 딸랑딸랑 자판기 커피.

DUMMY

셀프의 시작이다.


이 연습실에서는 손님이 방에 들어가는 시간을 손님 자신이 종이에 직접 썼다. 나오는 시간도 사용하고 나올 때 스스로 적는다. 그리고 요금은 입구의 검은색 서랍장 윗칸에 넣어 놓으면 된다.


지난번에 이용했을 때, 딱 60분은 너무 야박한 것 같아 5분의 사용 시간이라도 더 벌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직접 손님더러 쓰라고 하니 1분 1초까지도 더 정직하게 쓰게 되는 이상한 강제 효과가 있었다. 더군다나 한낱 보따리 강사인 분홍은 주인장과 관계를 잘 유지하고 싶었다. 괜히 돈좀 아끼려고 줄여서 썼다가 주인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다시는 이용을 못하게 될 테고, 그러면 연습실을 다시 새로 알아보고, 답사하고, 피아노 등 수업장비 확인하고... 할 일이 많아진다.


분홍은 학생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도착해서 혼자 목을 좀 풀고 싶었다. 하지만 이용 시간이 문제였다. 만일 분홍이 20분 정도 목을 풀려면 수업 시간 한 시간을 더해서 총 1시간 20분이 된다.


'그럼 돈을 얼마를 내야 하지? 한 시간 요금을 내야 하나? 그럼 좋겠다. 하지만 여기 분위기는..... 한 시간 요금에 2천5백원을 얹어서 내야 하나?'


분홍은 손님들의 손글씨를 빤히 쳐다본다. 1시간 5분, 1시간 7분, 1시간 0분...... 기존의 손님들은 이 연습실의 자발적 시간 관리 시스템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보니 보라색 슬리퍼를 신은 아주머니는 성질이 있던데, 사정 봐서 한 시간으로 깎아달라고 부탁해도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 무슨 목을 푸냐 풀기는... 노래를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학생들 목 풀어줄 때 같이 풀지 뭐.’


분홍은 미숙씨가 도착하면 같이 방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입구 소파에 앉았다. 뽀글머리 할머니가 눕는 자리에 직접 앉으니 분홍은 기분이 묘했다.


분홍이 엉덩이를 대자마자 보라색 슬리퍼 아주머니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그녀는 옆구리에 누런 개 한 마리를 끼고 있었다.


“어? 그때 왔던 아가씨네?”

“안녕하세요. 개 키우시네요.”

“똥개.”


그녀는 분홍 옆에 개와 함께 앉는다.

분홍이 ‘오쪼쪼쪼’ 하자 누런 개는 꼬리를 치면서 다가와 분홍의 냄새를 맡는다.


“... 하하. 개가 사람을 진짜 잘 따르네요. 얘가 저를 좋아하나봐요.”

“이 년은 아무나 좋아해.”

“......”

“할머니가 고생이셔. 아니, 사장님은 이 지하에서 피자를 시켜서 먹고, 짜장면을 시켜서 먹고, 아이고~ 드~러워.”

“아, 그때 그 할머니가 사장님이신가 봐요.”

“아니야!”

“...... 그럼 언니가 사장님이세요?”

“언니?”


보라색 슬리퍼 아주머니는 ‘언니’라는 말을 듣고 분홍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독기가 서린 눈동자인데, 그런 눈동자 안에 순간 호기심이 인다. 번쩍.


“언니는 무슨... 에휴. 나 나이 많어.”


이럴 때는 나이를 좀 깎아야 한다. 분홍은 어떡하든 연습실을 관할하는 이 아주머니와 잘 지내고 싶다.


“사십 대시죠?”

“아이고~ 아니야!”

“어. 그 정도밖에 안 보이시는데.”


분홍은 꼭 보라색 슬리퍼 아주머니가 아니더라도 사람을 ‘아줌마’라고 부르는 걸 웬만하면 꺼리는 편이다. 결혼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무턱대고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은 실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분홍 자신도 살면서 아줌마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끔찍한 경험은 과일가게에서 이루어졌다. 부스스하고 안 감은 머리를 대충 잡아 틀어올려 집게 핀으로 찝은 분홍이 고개를 숙여서 과일을 고르고 있는데 과일가게 아주머니가 분홍의 정수리에 입을 정조준하여 말했었다.


"아줌마. 그 큰 바구니, 그냥 다 가져가. 이천원에 다 줄게."


그때 엎드려 있던 분홍은 겨우 고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아줌마,라는 단어를 아예 안 쓰고 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안 쓰겠다고 다짐을 해도 무의식적으로 써버리고 말 때도 있다.


“나물을 일일이 다~ 다듬어서 내가 다 무쳐놨어. 그게 시간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다듬어야지, 씻어야지, 더운데 삶아야지, 그것도 오래 삶으면 힘알맹이가 하나도 읎어. 이모, 맛있어요. 우리 엄마도 나한테 나물을 안 해줬는데 여기서 먹네요, 이것들이 이런다니까. 헤헤헤헤헤. 두부를 부쳐놓으면 퉁퉁한 대학생 하나가 남자 층에 있는데, 이름이 뭐였드라. 호... 호... 아니, 왜 갑자기 이름이 생각이 안 나?! 아! 호석이! 맞아. 호석이, 그 호석이란 애가 한 접시를 다 먹어. 그래도 어떡해. 내 음식 잘 먹는데 좋지. 내가 너는 호돌이 동생이냐, 그러면 말수가 원체 없어서 소리 안내고 요러고 밑에 보면서 씨익 웃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를 모두 다 접수하기에는 이야기에 대중이 없고 연습실과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이야기다.


“나물은... 왜 나물을 만드세요?”

“내가 해야지! 내가 밥하는 사람인데! 야, 이년아! 안 올루와?!”


분홍은 혼이 날아갈뻔 했다. 자신한테 욕한 게 아닌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이 너무 짧았기에 욕을 바로 먹은 것 같은 충격파가 있었다. 정밀 분석해 보면 누런 개가 소파 아래로 내려가자, 아주머니가 개에게 소리를 지른 것이다. 누런 개는 놀란듯이 얼른 다시 소파 위로 올라왔다.


‘아... 정말......’


분홍의 머리는 점점 더 꼬이기 시작한다. 분명한 건 단 하나다. 오늘은 뽀글머리 파마 할머니가 없고 아주머니만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오늘은 분명 연습실에 아무도 없었는데, 분홍이 도착하자마자 곧이어 그녀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마치 세상에 모르는 게 없는 사람처럼 타이밍을 맞추어.


그리고 그녀는 나물을 만든다.


“여기는 거의 늘 방이 꽉 차. 엄마들이 전화해서 그래. 우리 애가 이모님 밥이 너무 맛있대요. 감사해요~ 그런다구. 나처럼 밥 해주는 사람이 없어. 고시원 밥이 뭐, 국이나 김치나 한 가지 놓고 식사 제공한다~ 하구 광고하지, 가보면 먹을만한 게 뭐 부침개 꼬랑댕이 하나라도 있나. 절대 없어! 내가 장사를 했었다구. 내가 신발을 팔았었지. 그게 수제 신발이라 한 클레가 비쌌어. 막 현금이 들어올 땐 너무 종이때기처럼 많아서 그 돈을 다 주머니에 막 쑤셔넣어. 헤헤헤헤헤. 아이구 내 팔자야. 남편이라고는 어디서 그지 같은 걸 만나가지고 신세를 조졌지. 남의 밥이나 하고... 에휴.”


“어떤 방이요? 연습실 방이요?”

“고시원방! 눈 달렸는데 입구 들어오면서 못 봤어?”


평생을 남편 덕을 못 봤다면서 아주머니의 한탄이 이어진다. 분홍은 머리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반사적으로 엄마 생각이 났다.


“아빠가 성격은 좀 그렇지만, 그래도 돈은 팍팍 준다. 보통 남자랑 달라. 결혼해 보니까 알겠드라.”


언니의 말이다.


사업을 했던 분홍의 아버지는 돈을 잘 벌 때는 언니 말대로 팍팍 벌고 팍팍 썼다. 어린 시절 아버지 사업이 잘 될 때는 아버지랑 외출하면 호텔 뷔페며 샤브샤브 일식집이며, 고급스러운 곳을 가곤 했다. 어린 분홍은 호텔잠을 자지 않은 사람들도 호텔 1층에 있는 피아노가 있는 넓직한 커피숍으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찾아온다는 것을 아버지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곳엔 대체로 아저씨들이 많이 있었고 계약이니 선거니, 증축이니, 매매니, 하는 어려운 단어를 쓰다가 대체 뭐가 재밌는지 크게 한바탕 웃어댔다. 그리고 서로가 헤어질 무렵 분홍의 작은 숄더백 안에는 아저씨들이 준 용돈들이 가득 채워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굴곡이 심한 삶을 살아왔다. 한 번은 갑자기 어려워져 산동네에서 살기도 했던 분홍의 가족이다. 학교 끝나고 그 언덕을 언니에게서 물려받은 네모난 책가방을 메고 오를 때는 어린 분홍은 무척 숨이 찼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고 빚 독촉도 있었다. 전업 주부셨던 어머니는 한동안 울다가 멍하게 계시다가 하더니, 어느날 얼굴 표정이 바뀌었고 얼마 안 있어 직장에 들어가셨다. 반면 아버지는 천하의 연두식이 어디 남의 밑에서 일을 하겠느냐며 집에만 계시기 시작했다.


‘천하의 연두식......’


병원에 누워있는 아버지 생각을 하니 또 한숨이 나왔다.


분홍은 보라색 슬리퍼 아주머니와 엄마가 겹쳐 보이더니 그녀에게 감정이 이입되기 시작했다. 그 아주머니의 팔자가, 엄마의 팔자는, 사실 그 자체로 '여자의 일생'이고 결국 같은 삶의 모양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 여기 고시원은 방이 몇 개나 돼요?

“오십세 개.”

“네?!”


분홍의 가슴 어디선가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분홍은 혼자 살면서 자기 밥을 챙기기도 힘들 때가 많다. 세 끼는 저절로, 원래 그런듯 두 끼로 줄었다. 남의 밥을, 그것도 오십세 명의 밥을 매일 만드는 사람이 그녀의 옆에 앉아 있다! 그것도 나물 반찬을!


“어유. 정말 힘드시겠어요. 저는 저 하나 밥 챙겨먹기도 힘든데, 대단하시네요.”


보라색 슬리퍼는 깜짝 놀랄말한 소식을 들은 사람의 얼굴이 되었고 그녀의 눈동자에서 다시 한번 번쩍, 빛이 발한다.


“... 힘들긴 뭐가 힘들어. 요것도 못하면 뒈져야지. 사장님은 맨날 애들하고 친해져서 어떤 방은 오십오만원, 어떤 방은 오십칠만원. 아주 엉망진창이야. 내가 하니깐 이나마 돌아가는 거지. 할머니도 나만 믿어, 나만.”


누군가의 발소리가 나더니 미숙 씨가 두리번거리며 입구로 들어선다. 수업을 해야 해서 이만 방으로 들어가야 되겠다고 양해를 구하려고 했는데, 보라색 슬리퍼는 양해를 구할 틈을 주지 않는다.


“선생님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구만. 어서 공부해요. 어서 공부해!"


노래 수업을 공부라고 부르는 아주머니의 표현이 분홍의 귀에 어색하게 들렸다. 생머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엄연한 중년인 미숙 씨에게 그녀는 반말로 공부하라 격려했다.


"에휴. 나 없으면 이 건물이 돌아가지가 않아. 돌아가지가. 쉴 틈이 없어.” 하고는 얼른 윗층으로 올라가버린다. 올라가던 그녀는 “잠깐만!” 하며 다시 내려온다. 연습실 입구에 있는 미니 커피 자판기에 동전을 두 개 넣는다. 딸랑딸랑.


종이컵 커피를 한 잔씩 쥐어든 분홍과 미숙은 방으로 들어간다.


“누구세요, 저 분은?”

“저도 잘 몰라요. 하하.”

“......”

“처음이라 찾기 힘들었죠?”


아주머니의 반말에 미숙 씨는 크게 언짢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분홍은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숙은 수줍은 얼굴로 연습실 분위기를 둘러본다. 감개무량한 얼굴이다. 레슨을 해달라고 보채던 미숙 씨가 저렇게 얌전한 사람이었나 싶어 분홍은 순간 미숙 씨가 낯설어진다.


“아니예요. 다른 데로 갈뻔했는데, 우리 연 선생님이 친절하게 약도를 보내주셔서... 아 근데, 우리 나이 되면 약도도 잘 안 보여. 그냥 말루 해주는 게 낫지. 어허허.”


수업을 위해서 분홍은 이 연습실에 두 번이나 사전 방문을 했다. 이제는 앰프 전원도 척척 켜고, 피아노 전원도 가뿐하게 켠다.


“도레미파솔라시도~시라솔파미레도~”


가볍게 양 손을 푼 뒤, 분홍은 미숙과의 노래 수업을 시작한다.


- 리얼리즘 코미디 <싱글벙글 고시원>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싱글벙글고시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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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99 Nuan
    작성일
    16.03.13 15:55
    No.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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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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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 딸랑딸랑 자판기 커피. +1 15.10.25 1,502 29 12쪽
3 3화. 보라색 쓰레빠. +2 15.10.25 1,481 30 8쪽
2 2화. 미숙 씨의 열정. +2 15.10.24 2,457 32 12쪽
1 1화. 7만원의 경건함. +6 15.10.24 5,377 4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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