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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의 글 쓰는 터

나와 여자애와 동영상.avi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로맨스

김태신
작품등록일 :
2016.11.28 19:46
최근연재일 :
2017.08.05 23:25
연재수 :
12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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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92
추천수 :
825
글자수 :
986,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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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09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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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8쪽

24화 - 2

DUMMY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흥.”



극도로 새침한 하민이의 대답. 진수와 현기는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쩔쩔 맨다. 연기라고 하기엔 진심 300%인 모습. 메쏘드 연기라는 건 이런 걸 뜻하는 것일까.


남자애들끼리 얘기하고 남자애들끼리 촬영하는 영상. 영상감독을 맡고 있는 경훈이는 옆에서 가만히 팔짱을 끼고 서 있고, 준경이는 그 옆에서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다. 영상을 실제 기획·감독하는 경훈이가 찍는 편이 더 낫겠지만, 일종의 일자리 나누기 일까나. 창조경제라는 게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극의 구성은 지극히 간단한 꽁트 같은 느낌. 양아치 역할의 진수와 그 동료 역할의 현기. 정우는 아마, 이 삼인방의 친구이자 이 영상의 주인공인 친구 역할인 것 같다. 근데 정작 주인공인 그 친구는 정작 우리는 외모도 이름도 모르는구나.


양아치가 지나가는 여자애한테 갑자기 시비 걸고, 여자애는 당차게 한 마디 하지만 남자애 두 명의 강한 힘을 이길 수는 없는 법. 이 때 주인공 역할의 정우가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꿈에서라도 보기 싫은 촌극. 여자애 역할이 필요한 건 그 부분. 그래서 지금 하민이가 열연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완벽해.”

“핳. 이 정도야 뭐, 나한텐 아무것도 아니지.”



‘컷’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휴식. 현기는 잠자코 짝짝 박수를 치며 무덤덤하게 말한다. 특유의 무표정한 시니컬한 얼굴이 어울리는 현기. 하민이는 우쭐해져선 어깨를 쭉 펴고 괜히 세하 쪽을 쳐다보며 말한다. 자격지심? 정작 세하는 구석 자리에서 책을 보고 있지만.



“내 머릿속에서 상상한 날라리 양아치 여자애가 책에서 뚫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이야.”

“뭐, 뭐라고오?! 내가 왜 양아친데?”

“그건 연기라고 하기엔 너무 진짜지. 전직 양아치 아니세요?”

“뭐, 뭐라는 거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폭언을 일삼는 현기. 칭찬에서 돌연 디스로 바뀌자 하민이는 적지 않게 당황해선 현기를 바라본다. 한 성깔 하는 하민이. 티격태격. 쉬고 있던 준경이가 말린다. 잠시 쉬고, 촬영은 계속 된다.






//






‘쏴아아아─’

“아. 하민이 연기 잘하네?”

“흐흫.”



화장실. 손 씻고 있는데 하민이도 나온다. 싱긋 웃으며 먼저 말을 거는 나. 여자애들 중에 유일하게 영상 찍으면서 수고 하고 있는 하민이니까. 이 정도 격려의 말은 아무것도 아니지.



“열심히 해야지, 관심 있는 애가 지켜보는데.”

“응, 그렇지 아무래도, 관심 있는 애가 있으면 열심히 하게 되는 경향이 있─ 에에에에에에?!!”



난데없이 폭탄발언을 하는 하민이. 별 생각 없이 대답하다 화들짝 놀라 세면대에서 뒤로 세 걸음 떨어지며 반응하는 나. 하민이는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는다.



“왜, 뭐 그리 놀라?”

“아니······ 아, 현기?”

“미쳤어? 그딴 새X랑은 엮지도 마, 짜증나니까.”

“응, 미안.”



생각해보면 그렇게 호들갑스럽게 놀랄 일도 아닌데. 여자애들끼리는, 화장실에서 이런 얘기 자주 오가고 그러려나. 그만큼 하민이가 나를 신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긴다는 걸까, 조금 기쁘기도 하고, 복잡미묘한 기분이다. 넌지시 아까 영상 찍을 때 두 사람의 캐미를 보고 한 마디 던져 봤다가 대번에 기분 팍 상해버린 하민이의 얼굴을 보게 됐다. 아. 현기는 진심으로 아니구나.



“그럼······ 누구?”

“사준경.”

“엑!”

“왜 그리 놀라는데, 아까부터.”

“아니 아니 아니······!”



사준경을 좋아한다고, 하민이가?! 뭣 때문에! 하민이,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키도 크고 늘씬하고 화려하고! 뭔가 여왕님이나 팀의 중심 같은 느낌의 여자애인데! 예쁜거나 공부 잘 하는 거나 전부 세하보다 한 단계씩 약해서 미묘하게 콩라인이지만! 아, 뭔가 디스하는 것처럼 됐네. 그래도 가슴이나 몸매만큼은 하민이가 확실히 우월하지. 그런 하민이가, 대체 왜!



“사준경이 어디가 뭐가 예뻐서······?”

“아, 그거 때문이야? 확실히, 그렇긴 한데.”



나는 참, 애매한 입장이다. 하민이가 사준경을 칭찬해도 기분이 미묘하고, 그렇다고 방금 대답처럼 못난 걸 인정하거나 디스하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썩 좋진 않다. 우선은, 전(前) 나 였으니까, 기뻐해야 하는 타이밍이려나······?



“막 뭐, ‘얘는 내 운명의 사랑이야!’ 같은 건 아니고. 관심 가는 정도니까. 미영이가 모르는 비밀도 있고.”

“비, 비, 비밀······?”

“비밀이니까 안 알려주지☆ 헤헷.”



하민이의 가치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성격이니까. 운명의 사랑이 어떻네, 하고 진지하게 따지고 사귈 것 같은 성격은 세하지. 하민이는, 다소 가볍게 그냥 ‘좀 더 친한’ 정도로 남자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 같은 성격이니까. 좋게 말하면 ‘쿨하게’ 사귈 수 있는 타입이지? 나나 준경이는 결코 그러지 못 하는 소시민이지만.


의미심장하게 실실 웃으며 말하는 하민이. 내가 모르는 ‘비밀’이라니······ 설마······ 설마······?! 에이,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아는 사준경은, 그렇게 패기 넘치고 행동력 넘치는 녀석이 아니야. 그 6개월 사이에 그렇게 변하지도 않았고, 사준경 행동 패턴이.



“나, 나한테는 그런 거 왜 알려주는 거야?”

“왜, 소문 내게 미영이?”

“그, 그러진 않지만! 가, 갑작스럽잖아?!”

“헤헿.”



나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말하게 된다. 그런 중대한 걸 왜 나한테······? 하민이는 싱긋 요망한 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소문을 낸다거나 그런 성격은 아니지만, ‘나’에 대한 예우로 어지간한 건 준경이에게 공유하는 나인데······ 이건 절대 말 못 하지. 그래선 안 되지.



“미영이, 준경이랑 사촌이잖아? 이것저것 알려줄 수 있는 거 많을 것 같아서. 말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어서. 뭣하면 상담 같은 거 부탁할 수도 있고.”

“어, 응,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

“응응, 하하 되게 적극적이네?”

“응응! 어, 응!”



그렇구나. 그런 의도와 목적이라면 얼마든지, 맡겨만 주세요! 아무리 내가 사준경 병X이라고 평소에 까대도, 이런 식으로 대외적으로 누구 좋아하고 그런 거는! 전폭적으로 지지해야지!


화장실에서 동아리방으로 돌아가며, 힐끔 하민이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말로는, 농담삼아 한두마디 ‘사준경 하렘이야~’ 하고 놀려댔는데. 실제로 사준경에게 관심 갖고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을 줄이야. 정말······ 세상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세하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은근 사준경 늘 디스하는 하민이인데.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동아리방에 들어선다.












--












“저, 저기.”

“응, 정우 안녕! 왜?”



주뼛거리며 다가오는 정우. 소라와 얘기하다 얼른 시선을 돌려 정우에게 인사한다.

한가로운 아침. 우리반. 아침이라고 꼭, 동아리방에 짱박여 있는 건 아니다. 예전부터 누누이 말했지만, 야자 때 말고 아침·점심·저녁시간 대의 동아리방은 오고 가고 자유니까.



“할 말이 있어서······.”

“할 말?”



뭔가 망설이며 말하기를 꺼려하는 듯한 정우. 그러면서도 말은 우선 꺼낸다. 뭔지 궁금해 옆의 소라도 눈이 동그래져서 정우를 바라본다.



“우리 영상 만드는 거, 이제 그만 만들어도 될 거 같아.”

“엥? 아직 다 만들지도 않았는데?”

“쓸모······ 없게 돼 버려서.”

“응??”

“미안, 정말 미안해.”



주말에 반짝 만들고 아직 촬영도 다 안 했는데. 월요일에 모여서 보충 촬영 하고 편집하면 되겠다, 하는 경훈이 말 들은 게 엊그젠데. 정우는 눈을 질끈 감고 억지로 쥐어짜듯 말하더니 사과하고 그대로 뛰쳐나간다. 어째 말하는 것도 여자애 같은 정우. 그건 그거고, 도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다.



“뭐지.”

“뭔가 사정이 있는 걸까?”

“그러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라를 쳐다보며 말하니 소라 역시 의아한 표정. 우리끼리 알 수 있는 건 전혀 없다. 갑자기 오늘 아침에 찾아와선 저렇게 말하곤 자세한 내막도 알려주지 않고 뛰쳐나갔으니.



“뭔데, 무슨 일인데 그래.”

“안알랴줌.”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준경이는 경훈이와 얘기하며 놀다 내쪽으로 다가와 묻는다. 상큼한 무시. 준경이는 그러려니, 심드렁하게 대답하곤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넌 하민이랑이나 잘 해. 둔감한 멍청이니까 그런 것도 전혀 모르겠지만.


근데 진짜, 왜 하루만에 영상 찍는 걸 그만둔다는 걸까. 아무리 우리 UCC 동아리가 흐지부지 끝나는 미덕이 있지만. 의뢰받은 영상까지 그런 식이면, 뭔가 동아리 자체가 큰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게 되잖아. 좀 더 정우에게 물어봐야 할 필요성이 느껴진다.






//






“앗 차거.”

“이런 데서 뭐해?”



차가운 음료수를 정우 볼에 가져다댄다. 움찔 놀라 어깨를 들썩이는 정우. 헤헤 웃으며 음료수를 정우에게 건네며 옆자리에 앉는다. 점심시간, 지나가는데 문득 정우가 멍하니 벤치에 앉아서 축구 하는 애들 보고 있어서. 미묘하게 시무룩한 표정이 귀여운 정우. 말을 걸고 싶은 욕구가 생겨, 얼른 자판기 가서 음료수 뽑고 와선 말을 붙인다.



“그냥, 애들 구경하고 있었어.”

“무슨 공원 나온 할아버지 같네?”

“그런 소리 꽤 들었어, 애늙은이 같다고.”

“하핳. 애늙은이, 그렇네.”



느긋하게 애들을 바라보며 대답하는 정우. 하하 웃으며 정우와 마찬가지로 축구하는 애들을 바라본다. 저런 건,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지. 아, 여기서 나는 사준경 시절. 지금의 준경이에게도 해당하는 거지만. 21명의 친구가 필요한 축구라는 종목은, 나 같은 찐따에겐 무리지. 오, 저거 은준석 아니냐. 낄 때 안 낄 때 상관없이 어디서는 돋보이는구나, 은준석이는.



“영상은 왜 그만 찍겠다는 거야?”

“응······ 미안.”

“아니 미안이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래.”

“응.”



안 찍는 건 그렇다고 치고, 왜, 어째서. 그 이유가 궁금해 강요하듯 묻는 나. 정우는 아까의 시무룩한 태도로, 우선 사과부터 하고 말을 시작한다.



“내 친구가.”

“응응.”



본 적도 없는 그 친구 얘기를 또 듣는구나. 아니 뭐, 정우가 우리 동아리에 영상을 의뢰한 게 그 착한 마음 때문인걸. 친구를 위한다는 기특한 마음인데. 그래서 정우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


고백하려고 했던 정우의 친구. 하지만 이내 엄청 우울하고 울적해져선 농담이라지만 ‘나 자살할 거임’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그랬다는데. 어째서일까, 궁금해진 정우.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내에서, 어떻게든 알아보고자 한 정우. 충격적인 것을 알게 되었다.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애, 사실은 다른 남자애랑 사귀고 있었다고. 근데 그 사귀고 있는 남자애가, 정우와 정우친구도 알고 있는 친한 친구였고.


······음?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난 내 친구도 믿었기에 난 아무런 부담없이 널 내 친구에게 소개 시켜줬고 그런 만남이 있은후로부터 우리는 자주 함께 만나며······ 뭐 그런 거야?



“──그래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고백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정섭이.”

“음.”



자기 일인양 시무룩해져서 말하는 정우. 그런 일이 있다면 확실히, 정우와 친구들이 하고 있는 영상 작업은 무의미한 게 되지. 정우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이미 다른 남자애랑 사귀고 있다는데. 더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건?



“그러니까, NTR 같은 거야.”

“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정우 너는?!”

“아 미안. 못 알아들었으려나.”

“못 알아들은 건 아닌데······.”



귀엽게 생겨선 뜬금없는 말을 내뱉는 정우. 생긴 것과 다르게 의외로 오타쿠 일지도. 그나마 전직 사준경이자 전직 오타쿠였던 나니까 알아듣지. 일반적인 여자애들한테 그랬다간 대번에 정색했을 거야. 아무리 귀엽게 생겼어도 말이지, 정우야.



“정섭이 시무룩해져 있는데······ 나나 현기, 진수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연관돼 있는 문제니까.”

“······.”



남자의 자존심이라. 뭔가, 생소한 듯 익숙한 그 개념. 저런 상황이라면, 그······ 말로 할 수 없는 남자의 쫀심이 있지. 내 친구가 그런 상황이라면, 예를 들면 경훈이나 준석이가 그랬다면. 위로의 말도 못 건넬 것 같다. 잠자코 다가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 하고 말하려나. ······아니 술도 한 번도 안 먹어본 놈이 무슨 말은. 거기다 지금은 여자애니 더욱, 그런 걸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미안, 미영이한테 얘기해봐야 모를 텐데, 남자애들 마음 같은 거.”

“아니아니, 잘 알 것 같은데.”

“단순하다고 해도, 남자애들도 나름대로 이런저런 사정이 있으니까.”

“그렇지.”



누구보다 잘 알아요. 전직 남자애거든요.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어쨌든 정우에게 공감하고 있음을 강하게 어필한다. 정우는, 내가 배려해준다고 생각하겠지. 뭐,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려나.



“그래서, 영상 찍는 건 그만 둘 수밖에 없는데, 모두에게 이런 사정을 말하기는 좀 그래서······ 뭔가, 떠벌리고 다니는 것 같으니까.”

“나한테는 왜 말해주는데?”

“미영이는, 내가 좋아하고 나 배려해주는 착한 애니까?”

“······뭐, 뭐래, 헤헿.”



예고도 없이 저런 말을 하는 정우. 괜히 부끄러워져 말을 얼버무리게 된다. 내가 남자애인 적이 있어서 아는데, 저런 말 어떻게 하는 거지. 안 창피한가? 소심한 듯하면서 아닌 것 같은 특이한 녀석이다, 정우.



“정우, 뭔가 귀엽네?”

“······응?”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소심하긴 한 것 같은데 제 할 말은 다 하는 것도 그렇고. 지금 가까이에서 보니까 남자애답지 않게 덩치도 작고 속눈썹도 길어서. 피부도 하얗고. 여장시키면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야. 내 말에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은 듯 정우는 힐끔 나를 쳐다본다.


······잠깐만, 나 뭐 어떻게 된 거야? 남자애 보고 귀엽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제 갈 때까지 간 거냐, 사미영!? 남자애가 귀엽다고 느끼면 안 되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이건 정우가 이만큼 귀여운 게 잘못인 거다. 정우가 너무······ 그······ 여자애 같은 게 잘못이야.



“아니 그! 음······ 말투가 귀여워서! 아 이것도 이상한가. 뭔가, 여자애 같은 느낌이라? 아으······ 이것도 이상한데. 어쨌든, 그냥 귀여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



정우는 단단히 기분이 상했는지 입을 꾹 다문다. 내 안의 자격지심과 더불어, 정우 기분을 나쁘게 한 것 같아 더욱 당혹스러운 감정이 된 나. 어떻게든 대처해보려 하지만 말하면 말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느낌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자주, 여자애 같다는 말 듣곤 했는데.”

“어어, 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정우. 잠자코, 마실 나온 할아버지처럼 축구 하는 애들을 바라보며 한 마디 한다. 나는 괜히 죄 지은 사람처럼 잠자코 조신하게 앉아 그런 정우의 말을 듣는다.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남자애라고 무조건, 마초적으로 생각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고. 반대로 여자애라고, 무조건 여성적일 필요도 없잖아. 남자애들이 개구쟁이인 건 남자애니까 넘어가고 여자애가 활달한 건 왈가닥이라고 놀리고, 반대로 남자애가 얌전하면 계집애 같다고 놀리고. 그런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

“······정우야.”



약간 흥분한 듯, 열변을 토하는 정우. 잠자코 듣고 그 뜻을 마음에 헤아릴 때마다 뭔가, 가슴 한구석이 찔리는 기분. 꼭 정우의 의견이 아니더라도, 나한테도 상당히 와닿는 말이라서. 남자애, 여자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정우의 말. 너무 미안하고, 너무 고맙고, 또 너무 귀엽다.



“!”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우를 바라본다. 덤덤히 나를 쳐다보는 정우. 키도 나랑 비슷한 정우가, 너무 귀여워서 참지 못 하고 다가가 꼬옥 안아주었다. 움찔 놀라는 정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정우를 폭 안았다. 그런 편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 줘서. 여자애가 된 나에게, 뭔가 마음이 움직이는 말을 해 줘서. 그게 고마워서, 나도 모르게 정우를 껴안게 됐다.



“미안, 미안해.”

“아니, 나는 미영이가 안아주면 개이득인데.”

“그, 그런 말 쓰지 마! 이상하잖아! 지금 미안하다고 한 건, 멋대로 껴안아서 미안하단 게 아니야! 여자애 같다고 한 거 미안하다는 거야!”

“응, 알고 있어.”



내 사과에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정우. 어째 내가 더 창피해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정우, 소심하게 보이는 거 사실 다 연기지?! 지금 하는 꼴 보면 오히려 내쪽보다 더 능숙한 것 같은데!



“······가, 가볼게.”

“응, 영상 찍어줘서 고마워. 모두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줘.”

“어, 응! 아무한테도 말 안 할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응, 미영이는 그런 애 아니니까, 믿고 있어.”

“······갈게!”



나는 당혹스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정우에게 작별인사 하고 얼른 자리를 뜨려는데, 정우의 대답들이 날 더 창피하게 만든다.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걸 나 스스로도 느끼며 얼른, 대충 대답하고 자리를 뜬다. ‘믿고 있어’라니, 무슨 일본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내가 다 창피하고 부끄러워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후아. 며칠 만에 너무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서 정신없네. 하민이가 준경이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정우에 대한 것도······ 그렇고. 아니야. 난 그런 게 아냐. 그냥, 정우가 이상해서 그래. 여자애 같은 정우에게, 여자애가 된 내가 동질감이나 그런 걸 느끼는 거야. 어떤 그런 미묘한 이상한 감정 같은 게 아니야.


······툭 까놓고 말해서, 아직까지 이성관이 사준경에 가까운 내가, 남자애인 정우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리 없잖아!? 그런 거야, 그런 거야!


작가의말

기근이 들어 사람이 엄청 굶었을 때. 갑자기 음식을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되도록 쌀알도 남지 않도록 끓인 미음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죽, 씹을 수 있는 음식, 이런 식으로 단계를 거쳐 소화기관들을 재활치료 해주는 느낌으로 가야한다고 합니다.


......아니 그냥 그렇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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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22화 - 4 +2 17.04.26 286 4 15쪽
112 22화 - 3 +6 17.04.21 303 5 18쪽
111 22화 - 2.5 +6 17.04.17 310 5 8쪽
110 22화 - 2 +6 17.04.13 290 5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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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21화 - 9 +5 17.04.06 250 5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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