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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호 님의 서재입니다.

피의 군주는 귀환하기 싫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지하호
그림/삽화
작하47
작품등록일 :
2021.05.12 11:21
최근연재일 :
2021.06.17 12:55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9,407
추천수 :
312
글자수 :
154,761

작성
21.05.16 12:06
조회
434
추천
14
글자
9쪽

5화 (E급 게이트 3)

DUMMY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눈이 띄어진 것은 그때였다.


-철퍽!


몸이 액체와 맞닿는 감각에 움찔거린다.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냄새.


세상 무엇보다 익숙한 냄새에 눈이 떠진다.


“여, 여긴 ··· 어디야?”


눈을 뜬 준표의 몸은 ‘공허’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생전 처음 와보는 공간에 그가 당황하며 몸을 일으킨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확인한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어떤 것도 없는 칠흑(漆黑)의 공간.


바닥에 얕게 깔린 붉은 피.


그때 어두운 하늘에서 미동이 느껴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간의 떨림.


그가 고개를 들어 천천히 하늘을 바라본다.


별 같은 게 떠있는 하늘에 균열이 생기듯 공간이 일그러져있다.


-피가 필요하다 ···.


미세하게 열린 균열 사이로 꺼림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너는 누구지?”


-네 안에 있는 공허다.


“그러니까 ··· 공허가 뭐냐고?”


“네가 가진 무료함의 결정ㅊ ···.”


“말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


준표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균열을 노려본다.


-피가 필요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에게 있던 무한한 피가 사라졌다.


“피?”


‘피’라는 단어에 준표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내 몸이 바뀌어서 그러는 거야?”


피의 군주에서 평범한 민간인이 되었기에 피가 모자란 건 당연했다.


사실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을 소환한 자들의 피를 전부 흡수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


“조금만 참아봐 ··· 고블린 피라도 줄 테니까.”


준표가 지금쯤 모래알과 뒤섞여 있을 고블린들의 피를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피가 ··· 필요하다 ···.


“아 쪼금! 줄 테니까 나 좀 내보내 줘!!”


처음부터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공허를 향해 준표가 소리친다.


-고블린의 피로는 부족할 거다.


“나도 알아.”


-그리고 너는 내가 부른 게 아니다.


“그래?”


끝없이 펼쳐진 공허의 공간을 보며 준표가 질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 이야기라도 할래?”


준표가 피가 깔린 바닥에 주저앉으며 편한 자세를 찾았다.


-정말 미친놈인가? 도대체 무슨 적응력인 거냐?


공허의 말소리가 울릴 때마다 바닥에 피가 미동한다.


“뭐 ··· 별의별 경험을 다 해봤으니까 ···”


준표가 죽음 후 마계에 떨어진 자신의 과거를 짤막하게 회상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레전드 인생 그 자체였다.


“근데 ··· 너는 언제부터 나랑 같이 있던 거야? 지구에 처음 왔을 때?”


-나는 처음부터 너와 함께 있었다.


“처음?”


준표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나는 너와 함께였다.


“그래? 그럼 너도 나랑 같이 성장한 거잖아?”


준표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닥에 얕게 깔린 피에 손을 담갔다.


“재미있네.”


-이곳에는 신기한 게 많더군.


“응? 그럼 너는 공허가 아닌 거야?”


-공허라고 해서 너의 모든 공허함을 알지는 못한다.”


“그렇구나 ···. 근데 신기한 거라니? 뭘 말하는 거야?”


준표가 아무리 봐도 피 말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서 신기한 게 있을 리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곳에 피만 있는 건 아니다.


“뭐가 더 있는데?”


-지금은 너무 넓어져서 나조차도 전부 보지 못했다.


“뭐야? 원래는 작았어?”


준표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의 형태는 너와 함께 변했다. 물론 지금 이 모습에서 안 변한 지 몇만 년이 넘었지만.


“오호 ···”


준표가 흥미로운 이야기에 균열을 올려본다.


“어떻게 바뀌었는데?”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곳은 새하얀 백지 같았다.


“내가 아기 때여서 그런가?”


준표가 태어났을 때부터 공허가 있었다는 것은, 이곳이 그의 인생에서 생겼던 모든 공허함을 겪었던 공간이라는 뜻이다.


-그다음은 아마 장난감이 가득한 놀이동산이었다.


“어릴 때는 누구나 그럴걸?”


-흠 ··· 너무 많이 변해서 기억이 많이 남지는 않지만, 확실히 잊히지 않는 게 하나 있군.


“뭔데?”


-몇 만년 전 여자들이 가득한 호텔로 변했던 적이 있었지.


“ ···. 사춘기라 그래···.”


준표가 민망한 듯 고개를 떨구며 뒤통수를 긁적인다.


“아무튼 ··· 내가 이쪽으로 소환된 이유가 뭘까?”


-나도 모르겠군.


준표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문질렀다.


몇 만년 동안 살아오면서 처음 겪는 일.


이럴 때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가까울수록 멀리 돌아가기다.


“그럼 ··· 어디 한번 돌아다녀 볼까?”


준표가 몸을 일으키며 천천히 관절을 풀었다.


혹시나 근처에 출구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과 함께 준표가 발걸음을 옮겼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어딘가에 도달하겠다는 의지를 상실 시켜버리는 막대한 크기의 공간이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산 지도 어느덧 수만 년.


아마 준표는 그 누구보다도 시간을 잘 다스릴 것이다.


휘휘 거리는 휘파람을 불며 준표는 걸었다.


이곳이 정말 자신의 공허라면 자신은 도대체 어떤 공허함에 차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수만 년간 피와 힘 만 바라보던 그의 마음은 도대체 무엇에 무력함을 느끼고 있는지.


그렇게 준표는 말없이 걸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했다.


지평선 끝에 다른게 보일 때까지.


***


시간은 흘렀다.


몇십 년이 지나도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몇십 년 동안 똑같은 핏길만 걷고 있다.


그나마 중간중간 말동무라도 되는 공허 덕분에 아직 미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지친지는 꽤 됐다.


도대체 언제 돌아갈 수 있는 거지?


제대로 된 날짜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몇 년이 지났다.


지구가 아니어서 일까? 신체의 부담은 전혀 오지 않았다.


오직 정신력과의 싸움이다.


“하 ···”


준표의 입에서 비통한 한숨만 뿜어져 나왔다.


육체는 무한하지만, 정신은 똑같은 것만 보고 있다.


준표가 아닌 다른 누군가 이런 상황에 처해있다면, 진즉에 미쳤을 것이다.


-저 앞에 무언가 있군.


그때였다.


몇 주일 만에 공허가 입을 연 것은.


“장난이지?”


평소에도 비슷한 장난을 많이 했었기에, 준표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한다.


-아니. 이번에는 확실히 무언가 있다.


“없기만 해봐.”


그의 말에 속는 샘 치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평선의 끝을 확인했다.


“진짜네?!”


그리고 지평선 끝에 보이는 어색한 실루엣에 준표의 동공이 커진다.


해가 뜨고 있는 한 도시.


높게 선 건물들 사이로 일출의 빛이 들어온다.


준표는 드디어 몇십 년간의 여행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차분히 발걸음을 옮겼다.


-기쁘지 않은 건가?


비현실 적으로 차분한 준표의 반응에 공허가 어리둥절한 듯 물었다.


몇십 년간의 여정 끝에 처음으로 찾은 것이었지만, 준표의 반응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시큰둥했다.


“아니. 기뻐, 그냥 지쳤을 뿐이야.”


준표가 풀린 눈으로 도시를 향해 달려갔다.


-처벅! 처벅!


마음은 지치고 허물었지만, 몸의 컨디션은 최상이었기에, 도시까지 가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도시 내부로 들어온 그가 기대감에 벅찬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게 몇 년 만에 보는 사람이냐?”


공허의 내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도시 안은 한국과 동일한 풍경을 하고 있었다.


길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분주히 움직이는 차.


눈 씻고 찾아봐도 지긋지긋한 피는 보이지 않았다.


“근데, 여기 왜 이렇게 익숙하지?”


도시 중심부로 뛰어오던 준표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진다.


“여기 ··· 내가 아는 장소야.”


이네 발걸음을 멈춘 준표가 한 상가 건물을 올려다봤다.


“여기는 ···.”


준표가 관자 도리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네 공허다. 나보다 네가 잘 알겠지.


머리를 쥐어짜는 준표를 보며 공허가 말했다.


“분명 ···. 여기는 ···”


그때였다.


수만 년 동안 듣지 못했지만 잊지 못하고 있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야!!!”


귀를 타고 들어온 목소리에 그의 몸이 강하게 움찔거린다.


목소리가 세포를 타고 머리로 들어온 순간, 그의 눈 실이 붉어졌다.


수만 년 동안 피에 묻혀 잊고 있던 이름.


“사, 상혁아 ···.”


준표의 입에서 오랜 친구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당신의 공허함이 더욱 강해집니다.]


[‘피의 군주’로서 피의 공허함을 넓힙니다.]


*


“형씨! 정신 좀 차려봐! 이봐!”


수십에 다라는 고블린 시체들 사이로 쓰러져있는 준표를 발견한 준성이 그의 몸을 강하게 흔든다.


“게이트 소멸한다고!”


작가의말

오늘도 좋은 하루 보네요! 사랑해요! (꾸박)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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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화 (E급 게이트 3) +2 21.05.16 435 14 9쪽
5 4화 (E급 게이트2) +2 21.05.15 518 14 9쪽
4 3화 (E급 게이트) +4 21.05.14 606 14 10쪽
3 2화 (먼저 씻을게요) +2 21.05.13 812 16 8쪽
2 1화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데 ...) +8 21.05.12 1,253 23 11쪽
1 [프롤로그] +6 21.05.12 1,336 45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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