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보람찬 하루를 마치며
신사역 게이트가 클리어된 그날 저녁.
강남 어딘가의 고급 횟집.
고풍스러운 인상의 방 안에 홍주한과 추성민이 호화로운 만찬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한껏 취기가 올랐는지 뺨이 붉어진 채 기분 좋은 표정을 한 추성민과 달리 홍주한은 술도 마시지 않고 얼굴에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 제정신이야?”
“에이. 왜 그러십니까, 형님.”
“기자들 앞에서 그렇게 덜컥 약속해버리면 어떡하나?”
이기면 A급을 보장해달라.
그 말도 안 되는 부탁을 추성민은 덜컥 받아줬다.
홍주한은 그 결정이 상당히 불만스러웠다. 기껏 뒤를 봐주려고 기자들을 포섭하는 중이었는데 이래선 의미가 없었다.
거기다 만에 하나라도 최선호가 이겨버리면 정말 A급으로 승급시켜줘야 할 판이었다.
추성민이야 핑계를 대며 추천을 번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조금 전 확인한 여론은 최선호를 떠오르는 괴물 신인으로 추앙하고 있었다.
만일 승급 결정을 번복한다면, 이런 인재가 왜 승급하지 못하냐며 협회에 항의해올 게 불 보듯 뻔했다.
계속 표정이 좋지 않은 홍주한을 본 추성민이 그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이거, 섭섭합니다. 형님은 지금 내가 진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형님. 저 추성민입니다. 제가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놈한테 질 리가 없잖습니까.”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홍주한은 술잔을 기울였다.
사실 다 쓸모없는 걱정인 건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추성민이다.
한때 서울 전체를 주름잡았던 조직의 탑 5중 한 명. 그 실력을 가장 잘 아는 건 그에게 자주 의뢰를 맡겼던 홍주한 본인이었다.
다만 대비책이 필요하단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최근 최선호의 행적으로 따지면 정말 실력이 늘었다고 보는 게 맞다. 이번 펜리르 건도 고려하면 정말 만에 하나가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추성민을 믿고 안심하기엔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잔을 비운 추성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 그러면 시험을 두 번 보게 하시던가.”
“그게 무슨 소리야?”
“원래 심사라는 게 올라가려는 등급의 심사 위원 세 명과 싸워야 하는 거잖수. 녀석은 C급 심사를 신청한 건데 내가 심사 위원으로 참가하겠다고 한 것뿐이고.”
“그렇지.”
“규정 들이밀면서 C급으로만 구성된 승급 시험을 먼저 보게 하는 거요. 내가 억울하다고 말해도 규정을 따라야 한다며 안 된다고 하는 거지.”
“그럼 여론이 시끄러울 텐데.”
“그러니 특별 승급 심사라는 명목으로 날 따로 빼주쇼. 뭐, 여기서도 규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면 정식 A급 심사처럼 3명이 심사를 보는 식으로 가도 될 테고.”
제안을 들은 홍주한의 얼굴이 그제야 풀어졌다.
“체력을 두 번 빼자는 거군?”
“그렇지. 그 녀석이 아무리 잘났어도 6명을 상대하고도 체력이 버티겠소?”
“그럴 리 없지. 자네는 정말 유능하단 말이야. 어쩜 이렇게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는 건지.”
“내가 괜히 조직 탑이었겠소. 아무튼 여기서부턴 형님 영역이니까 잘 해보십쇼. 만약 틀어져도 내가 절대로 지지 않을 테니까 걱정은 마시고.”
“알겠네, 알겠어.”
서로의 잔을 부딪친 두 사내는 밖에서 들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
“치료 끝났습니다.”
“아, 네.”
침상에서 일어나는 몸이 한결 가벼웠다. 옆에 걸린 거울에 비친 내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했다.
“정말이지. 저번에 보고 나서 얼마나 됐다고 벌써 옵니까?”
“이쪽 일이 하다 보면 다치는 게 일상다반사잖아요.”
“그래도 단기간에 두 번이나 이렇게 다쳐오는 사람은 흔치 않거든요?”
잔소리를 들으며 벗어뒀던 상의를 입었다.
“저로선 자주 안 뵈었으면 하네요. 이런 치료가 뭘 대가로 이뤄지는지 잘 아실 테니까요.”
“노력해보죠.”
짐을 챙기고 나서려는데 의사가 말했다.
“참. 오늘 병원비는 안 내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오늘은 신사역 게이트. 버스에서 웬 어르신이 헌터님 머리 때리셨죠?”
“그걸 어떻게······.”
“그분이 저희 아버지십니다.”
“아.”
우연도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전화하셔선 내가 생명의 은인을 몰라뵙고 때렸는데 어떻게 하냐고 하시던데, 제 선에서 갚아드려야죠.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별말씀을.”
“그럼 들어가세요. 다음엔 좀 늦게 오시고요.”
마지막까지 덕담해주는 의사의 말과 함께 진료실에서 나왔다.
강병훈이라. 나중에 병원 올 일 생기면 이쪽으로 오라고 추천해줘야지.
병원을 나서자 밖은 벌써 어두워진 뒤였다. 먼저 협회에 가서 승급 심사 신청과 부산물 정산을 맡겨두길 잘했다.
협회가 아무리 24시간 운영된다고 해도 실질적인 업무는 해가 떠 있을 때만 이뤄진다. 지금 가서 맡겼다면 하루 더 기다려야 한다.
승급 심사는 신청했으니 이제 날짜만 기다리면 된다. 심사 위원만 정해지면 당장 내일에라도 할 수 있다.
“과연 어떻게 되려나.”
추성민을 도발해 심사 위원으로 참가시킨 것까지는 계획대로다. 다만 이 뒤는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애당초 겪어본 적 없는 일이다. 어떤 식으로 추잡한 수를 써올 거라 예상해도 빗나갈 가능성이 크다.
그럼 어때.
무슨 수작을 부리든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면 될 뿐이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스마트폰이 쉬지 않고 떨리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럽나 싶어 꺼낸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문자 99+]
셀 수 없이 많은 문자가 쌓여 있었다. 살면서 메신저 톡도 이렇게 쌓인 적이 없었는데.
거기다 내용도 스팸 같은 게 아니라 대부분이 인터뷰 요청이었다.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둘째치고, 기분이 묘하다. 이런 걸 다 받아보네.
그리고 실시간으로 갱신되고 있는 메신저 알림.
[유하늘 : 야!]
[유하늘 : 보면 빨리 전화해!]
[유하늘 : 너 지금 알림만 보고 무시하냐!!!]
이거 무시했다간 한 소리 듣지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한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가 이어졌다.
-야, 최선호! 지금 이게 다 무슨 이야기야!
“뭔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난 잘 모르겠는데.”
-모르긴 뭘 몰라! 기자들이랑 인터뷰한 것 하나하나 다 챙겨봤어. 거짓말할 생각 하지 마.
바쁠 텐데 그걸 일일이 다 챙겨봤다니. 우리 유하늘이 맞다.
“인터뷰라고 해봐야 하나밖에 안 했는데. 뭐가 더 있어?”
-없긴 뭐가 없어. 여기저기서 C급 게이트 클리어하고 다닌 거, 봉화산 던전에서 기록 세웠단 거. 그리고 오늘 있던 일까지. 아주 그냥 네 이야기로 도배가 되어 있던데?
세상 돌아가는 일 챙겨보려고 기사를 본 적은 많지만, 내 이야기를 보려고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있어도 안 좋은 이야기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듣는 이야기가 좀 얼떨떨하다. 이젠 조금 챙겨봐야 하나?
-언제 이렇게 유명해질 정도로 강해진 건지 원. 비법이라도 알려주시죠, 최선호 님?
“하시는 거 열심히만 하세요, 유하늘 헌터님.”
-치사하긴. 아, 나도 시간만 됐으면 인터뷰해서 자랑하는 건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서.
“지금이라도 하지 그러냐?”
-얘는. 그냥 말이 그렇단 거지.
“그래서. 전화한 이유는 그게 다야?”
-그것뿐이었으면 전화하라고 안 했지.
유하늘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걱정되어서 전화했어. 승급 심사 위원에 추성민 헌터가 들어간다며?
“어.”
-그 사람 헌터들 사이에선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한 거 알지? 나도 직접 만나봤었는데 확실히 좋은 사람은 아니더라.
“미디어에서 그렇게까지 치켜세워주는 게 이상하긴 하지.”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협회의 높은 사람하고 연이 있다나 봐. 물론 누군진 모르지만.
누군지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정보니까.
-아무튼 조심해. 시험 전에 사람을 보낼 수도 있고, 시험 중에 뭔가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신경 써주는 건 고마운데,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 네가 걱정해줄 만큼 안 약하다.”
-기사 내용만 보면 걱정 하나도 안 하지. 그래도 상대가 상대잖아.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저녁은 먹었냐?”
-도시락으로 때웠어. 30분 뒤에 게이트 열린다고 밥차는 못 부른데.
“그럼 조금이라도 쉬어야겠네. 이만 전화 끊어도 되지?”
-내가 끊을게. 몸조심해!
전화도 번개같이 받더니 끊는 것도 번개 같다.
넌 모르겠지.
내가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이유에 너도 껴있다는걸.
문자들은 일단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인터뷰 같은 걸 하고 있을 시간은 없으니까.
거기다 나중엔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은 피하고 싶었다.
저녁을 간단한 외식으로 때운 뒤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 가득 채웠던 전리품들이 사라지니 조금은 공허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곤 거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칭호 전생을 기억하는 장착.”
[칭호 ‘전생을 기억하는’이 장착되었습니다.]
[동기화 진행률 10%. 추가 동기화를 진행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주변에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봉화산 던전을 클리어한 뒤 나온 칭호. 이건 좀 특이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전생(前生)을 기억하는]
[전생에 뭘 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요.]
[하루에 한 번. 전생의 능력치 10%를 고정 수치로 계승 받습니다. 1시간이 소요됩니다.]
[열 번 사용하면 칭호는 사라집니다.]
[칭호가 사라지면 칭호 ◇□◇△◎◁가 해금됩니다.]
지금의 난 4년이란 시간의 차이를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 지난 일주일간 몸을 혹사하기도 했지만, 아끼려던 능력치 물약을 먹은 게 가장 컸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역시 빠른 성장이 부족했다. 그래서 뭔가 좋은 게 없을까 고민했는데 마침 이게 떴다.
능력치 물약 몇 개를 먹는 것과 같은 효능. 폭발적인 성장을 원하는 내겐 더할 나위 없는 칭호였다.
그런데다 다 쓰면 다른 칭호가 열린다. 글씨가 깨져있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보통 이럴 땐 성능 좋은 게 나오는 게 법칙이다.
계승 중에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게 가장 큰 제약이지만 이 정도 제약은 애교다. 업적 중에는 효과가 좋은 대신 행동에 제약이 걸리는 것도 있다.
······설마하니 칭호에도 그런 게 있는 건 아니겠지?
한 시간이 지나고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반가운 문자가 와있었다.
[Web 발신]
[헌터 협회로부터 55,0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금액을 보니 펜리르의 마정석이다. 역시 A급이라 그런지 액수가 다르구만.
세금하고 부가가치세, 중개 수수료로 좀 떼이긴 했지만 귀찮은 일을 덜 수 있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낼 만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인터넷 쇼핑으로 한우 세트를 주문했다. 수고한 나여, 내일은 꼭 기름칠하자.
- 작가의말
아무리 봐도 로또 번호를 기억하게 시켰어야 하는 건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제목 변경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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