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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번

환생해 보니 낭만 따윈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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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번
작품등록일 :
2024.08.21 19:29
최근연재일 :
2024.09.05 12:35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169
추천수 :
30
글자수 :
55,795

작성
24.09.05 12:35
조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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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2쪽

거짓말(7)

DUMMY

인체는 참 효율적인 것 같다.


아킬레스건과 손목 인대 양쪽 하나씩.

이렇게 네 번의 칼질만으로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 수 있다.


“너무 날 원망하지는 마. 어차피 기사가 적성에도 안 맞는 거 같은데, 이대로 은퇴하는 게 어때?”

“끄으으···. 미친···놈···.”

“칭찬이지? 고맙다.”


나는 녀석을 질질 끌며 성으로 향했다.


과다출혈로 죽지 않게 지혈도 제대로 해뒀다.

녀석은 란돌프가 한 짓을 증언해 줄 소중한 증인이니까.


“어? 수제자님··· 이랑 던햄 경?”


성의 정문을 지키던 경비병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본다.


“수고 많으십니다. 좀 지나갈게요.”

“예? 어, 저기···.”


성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된다.

방금 경비병처럼 당황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날 노려보는 자들도 더러 보인다.


피 묻은 검을 들고 있는 나.

그리고 그런 내게 질질 끌려다니는 영지의 문장을 가슴에 단 기사.

확실히 남들이 보기엔 그리 썩 좋은 그림이 아니긴 해.


하지만 날 노려보는 녀석들은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리안! 대체 무슨 일인가···!”


그새 보고가 들어갔는지 빌모어가 허겁지겁 달려왔다가 사색이 되었다.


“자, 던햄 경이랬나? 혓바닥은 멀쩡하니, 직접 얘기해 보시죠?”

“으헉···!”


나는 던햄을 빌모어 쪽으로 힘껏 던졌다.

녀석은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빌모어의 발아래서 길게 엎어진다.


“이보게, 던햄! 대체 이게 무슨 난리인가! 자네 팔다리는 왜 그렇고!”

“으으···.”


빌모어는 황급히 몸을 숙여 던햄을 손수 부축해 주려 했다.

그러다 이내 그의 얼굴이 굳는다.


“마법사가···. 란돌프가 제자를 죽이라고 사주를···.”

“자네, 지금 뭐라고···? 란돌프가 뭘···.”

“전부! 전부 란돌프가 시킨 겁니다! 저는 그저···!”


빌모어는 여전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지, 내게 눈빛으로 설명을 요구한다.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자를 포함한 다섯에게 말이죠. 전부 웨이룬의 기사였습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아직 거리에 시체가 굴러다닐 테니, 사람을 보내셔야 할 겁니다.”

“허어···.”


이 타이밍에 그놈들 무구를 전리품으로 넘겨달라 하면 눈치 없는 소리려나.


“···알겠네.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 터니. 자네는 들어가서 쉬게나.”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면목이 없네.”


빌모어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탄식했다.


빌모어에겐 이번 일이 제대로 충격 요법이 됐으면 좋겠다.

이래도 뭔가 깨닫는 바가 없다면 사람이 암만 좋아도 그건 노답이지.


선의도 분별없고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이다.


“그러면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는 검에 묻은 피를 대강 소매로 닦아내고, 어깨에 턱 하니 걸쳤다.

그리곤 주변을 둘러본다.


전후 사정이 밝혀졌음에도 바뀌지 않는 몇몇 시선들.


이 일을 쉽게 믿기 힘들어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은 둘째치고.

아직도 적의를 갖고 지켜보는 눈들이 많다.


“과연 쉴 수 있으려나?”


빌모어의 바람과 달리.

이 일은 절대로 그의 선에서 해결될 것 같지 않다.



* * *



나는 성의 내 방에 돌아오자마자, 침대 밑에 넣어둔 꾸러미를 꺼냈다.


3년의 방랑 생활로 꽤 낡아 있는 브리건딘 갑옷.

웨이룬에 온 뒤에 한번 수선을 맡겼는데도 여전히 허름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한동안 일상복처럼 입고 다닌 덕에 이것만큼 몸에 맞는 게 또 없다.


“이번 기회에 쌍검으로 가볼까?”


나는 기존 검과 새로 입수한 검을 양손에 들고 빙글빙글 돌려봤다.

두 검이 애매하게 균형이 안 맞아서 거슬린다.

쌍검은 관두자.


그냥 나머지 한 자루는 예비용으로 차고 있는 게 좋겠다.


“역시 이거지.”


갑옷을 입고 검까지 차고 있으니, 마음에 안정감이 찾아온다.

역시 천직은 이쪽이랄까.

그러지만 이번 일이 잘 안 풀린대도, 용병단으로 돌아가는 건 사양이다.


이번 생에서라도 정규직이란 걸 좀 해보자고!


“수제···. 아니, 리안님. 계십니까?”

“예, 무슨 일이죠?”

“그, 그게 말입니다. 영주님이 보냈습니다.”


저 익숙한 얼타는 목소리.

란돌프에게 괴롭힘 당해오던 그 하인이다.


“문 열려있습니다.”

“아, 예. 실례하겠습니다.”


방문이 열리며, 하인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내 방에 들어온다.

저 사람은 어딜 가든 위축되어 있는 건가.


문득 그가 보물단지 마냥 소중하게 품고 있는 술병이 눈에 들어온다.


“그건 뭐죠?”

“어, 그게···. 오늘 일의 사죄로 영주님이 선물하신 겁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나는 술병을 받아 마개를 열고 냄새를 맡았다.

진한 포도주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이런 건 전생에서도 별로 마셔본 적이 없어서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 그리고 마법사님···. 란돌프는 지하감옥에 가뒀으니, 이제 안심하셔도 된다고···.”

“그거 잘됐군요. 생각보다 빨리 결단을 내리셨네요.”

“아, 예옛. 영주님이 곧바로 체포하시라고···.”


자기를 괴롭히던 상사가 감옥에 갔단 소식이 안 기쁜가?

그 얘기를 전하는 하인의 얼굴은 어째 딱딱하게 굳어있다.


나였으면 출 줄도 모르는 문워크까지 추면서 들어왔다.


“여튼 축하드립니다.”

“예? 뭐가···? 뭐가 말입니까?”

“란돌프가 투옥됐다면서요? 꽤 오래 괴롭힘당하신 것 같던데, 안 기쁘십니까?”

“아, 예! 당연히 기쁘달까···.”


그런데 하인의 시선이 아까부터 술병에 계속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입가에 술병을 가져가 기울이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몸이 뒤로 젖혀지다가.

그러다 도로 내리면 공기 빠진 풍선처럼 축 처진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속이 훤하게 보이지.


“그런데 왜 그렇게 식은땀을 흘려요? 무슨 협박이라도 받는 사람처럼.”


나는 술을 그대로 바닥에 부어버렸다.

그러자 하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사색이 된다.


“히이···!”


나는 하인을 벽 쪽으로 밀치며 입을 틀어막았다.


“쉬잇.”


그의 목에 칼을 들이 댄 뒤.

문가에 귀를 대고서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작게 짤각거리는 미세한 금속 마찰음.

문을 기준으로 좌우에 각각 하나씩.


“두 명?”


하인인 잔뜩 겁먹은 눈으로 머리를 위아래로 떤다.

겁먹어서 떠는 건지 고개를 끄덕이는 건지 구분이 잘 안되네.


“얌전히 있지 않으면 네 모가지부터 딴다. 알겠지?”


이번에는 고개를 확실하게 위아래로 끄덕인다.


나는 하인의 멱살을 잡고 뒤쪽으로 밀쳤다.

그런 다음 문고리를 세차게 잡아당겼다.


동시에 밖에서 짤각하고 사슬갑옷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지만, 움직임은 없다.


“거 밖에 있는 거 다 아는데 계속 숨어있으려고?”


나쁘지 않은 판단이다.

원래 이런 상황에서 좁은 문틈 사이로 몸을 먼저 들이미는 쪽이 죽는 거니까.


“그럼 그러던가.”


물론 내가 평범하게 싸우는 스타일이었다면 말이지.


나는 과감하게 문을 돌진했다.


“읏챠아!”


그리고 문 바로 앞에서 무릎 슬라이딩.

내 머리 위로 검 두 자루가 허망하게 허공을 가른다.


“아닛!?”

“이런···!”


나는 검을 거꾸로 돌려 칼날 쪽을 쥐고서, 검막이를 이용해 한 녀석의 발을 걸었다.

놈의 몸이 크게 휘청이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넘어진다.


“이 녀석! 어디서 잔재주를···!”


그리고 그 관성을 살려 반대쪽 녀석은···.


“끄아아아악!”

“어우 잔인해라.”


나는 다시 검을 고쳐잡아, 방금 남자로서 죽어버린 녀석의 목을 쳤다.


고자가 죽으면 먼저 가 있던 알이 마중 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주도자는 누구지? 란돌프? 아니면 다른 녀석?”


넘어져 있던 녀석의 목에 칼끝을 들이밀었다.


“큿! 죽여라.”

“그 대사 남자 새끼한테 듣고 싶지 않거든?”


하지만 방금 걸로 대충 상황을 알겠다.

기사가 마법사를 대상으로 신의를 지키려 할 리가 없지.


지휘하는 기사는 따로 있나.

그렇다면 사실상 영지의 기사들 전부가 내 적이라고 봐야겠다.


“됐어. 너도 그냥 정리해고다.”


나는 검 끝을 몇 센치 더 앞으로 전진시켰다.


“끄그극···!”


이 영지에 기사가 몇 명 있더라.

대충 스무 명 조금 넘던 것 같기도.

그들이 지휘하고 있을 병사들도 내 편으로 보긴 힘들겠지.


나는 이런 상황이 오면 그래도 내 편이 되어줄 줄 알았던 배신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나는 도와주려 했는데, 이런 식으로 은혜를 원수로 갚으면 곤란하지.”

“죄, 죄송합니다! 살려만 주십쇼! 저도 목숨을 위협받아서···!”


내가 피 묻은 칼끝을 빙글빙글 돌리며 다가가자, 하인은 넙죽 엎드리며 빌었다.


“마지막 기회다. 현재 상황을 보고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영주님이 란돌프를 체포하라고 했더니, 오히려 기사님들은 영주님이 리안님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면서···.”

“그래서 지금 영주님은?”

“기사님들이 방에 가뒀습니다! 그리고 이제 란돌프가 영주님을 치료하겠다고···.”

“완전 개판이네.”


녀석은 화학 쪽으론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 것 같으니까, 대충 약이라도 쓸 셈인가.

서두르게 좋겠다.


“저, 그럼···. 저는 살려주시는 겁니까?”

“가. 나는 약한 애 안 괴롭혀.”


“가, 감사합니다!”


하인은 얼굴을 화색을 띠며 잽싸게 줄행랑친다.


그리고 잠시 뒤.


“끄아아악!”


복도 저 너머에서 그의 단말마가 울려 퍼진다.


앞으로 방생할 땐 때와 장소를 잘 구분해야지.

까딱하다간 이렇게 야생동물이 곧장 낚아채 가곤 한다니까.


“저자를 잡아라! 영주님을 조종하고 있는 사악한 마법사다! 죽여도 상관없다!”


복도 반대편에서 기사 한 명이 열댓 명의 병사를 이끌고 나타나 소리쳤다.


복도에서의 일대 다 전투라.

옛날에 본 영화의 전설적인 롱테이크 액션씬이 떠오른다.


이 일이 끝나면 군만두 비슷한 라비올리라도 먹어야지.



* * *



푹!

내 뱃속으로 적의 검이 깊숙이 들어온다.


“드디어 해치웠다!”

“아니, 목을 노렸어야지.”

“크흐억···!”


나는 숙련된 조교의 시범을 보여줬다.

목이 베인 기사는 힘없이 옆으로 고꾸라진다.


이런 걸 해치웠다고 하는 거야.


“니들도 계속 싸울 거야?”

“으으···”

“오면 오고. 말 거면 얼른 도망가고.”


나는 지휘관을 잃고 주저하는 병사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어차피 저들 대부분은 기사들 말만 믿고 따를 뿐인 죄 없는 멍청이들.


“나는 무리야! 저런 괴물이랑 어떻게 싸우라고!”

“으으···. 하, 하지만···.”

“너희도 봤잖아! 놈은 칼에 찔려도 안 죽어! 난 저런 괴물이랑 싸우려고 여기 들어온 게 아니라고!”


결국 병사 하나가 창을 내팽개치고 달아난다.

그러자 하나둘씩 눈치 보며 슬금슬금 내빼기 시작한다.


어느새 성의 마당에 남은 건 널브러진 시체뿐.


“하, 이제 얼마나 더 남았지···? 세금 도둑들 더럽게 많네.”


방금 죽인 기사가 대충 열네 번째였던가.


빌모어의 방으로 향하는 동안 이와 비슷한 전투를 너덧 번 치렀더니, 온몸이 너덜너덜하다.

대충 한 열몇 군데 정도 구멍이 뚫린 것 같다.

자잘하게 베인 것만 해도 세는 걸 진작에 포기했고.


생명의 반지가 없었으면 열 번은 더 죽었을 거다.


“시발. 정규직 한번 되기 힘드네···.”


그래도 세금 도둑들이 전부 사라지고 나면, 연봉 두둑하게 협상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희망찬 내일을 꿈꾸며.

피투성이의 몸을 이끌고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나날에 비하면, 이 정도 고생쯤이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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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거짓말(5) 24.09.02 45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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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거짓말(1) 24.08.26 119 3 12쪽
4 졸업(3) 24.08.25 139 3 12쪽
3 졸업(2) +1 24.08.24 151 4 13쪽
2 졸업(1) +1 24.08.23 194 3 13쪽
1 프롤로그 +1 24.08.23 204 4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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