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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번

환생해 보니 낭만 따윈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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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번
작품등록일 :
2024.08.21 19:29
최근연재일 :
2024.09.05 12:35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170
추천수 :
30
글자수 :
55,795

작성
24.08.25 12:35
조회
139
추천
3
글자
12쪽

졸업(3)

DUMMY

그러잖아도 촌장이 건네준 유물에 한글 자음을 닮은 기호가 새겨져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비석을 보면 그것도 진짜 한글이었던 같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왜, 어떻게 한글을 적어놓은 거지.

설마 고대인 중에 나처럼 환생한 현대 한국인이라도 있었나.


“농담이라뇨. 이 제자가 잘만하면 비석의 문자를 읽는 법을 가르쳐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내가 콧대를 잔뜩 세우며 으스대자, 영감님은 뭐 이런 등신이 다 있냐는 눈으로 날 바라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그 어디에도 기록이 없는 이 문자를 네가 어찌 읽는다고.”

“제가 천재라서요? 딱 보니까 알겠던데요?”

“쯧. 장난칠 시간 있으면 주변에 다른 글귀나 없는지 찾아보거라.”


역시나 영감님은 그저 코웃음을 치며 내 말을 전혀 믿어주지 않는다.

당연한 반응이긴 한데, 이러니까 괜히 더 깐죽대고 싶어지네.


내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영감님을 이겨 먹겠냐고.


“이게 생각보다 쉬운데 말이죠. 이 글자 하나하나를 상형문자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자음과 모음이 조합된 하나의 음절이라고 보시면···.”

“애송이, 네 녀석···.”


처음엔 내 말을 믿지 않던 영감님의 얼굴에 다양한 감정이 스친다.

평생 연구해 온 걸 제자에게 추월당한 그런 느낌이려나.


그동안 단서도 없이 막막했을 연구.

내 덕에 크나큰 진척이 생길 테니, 그동안의 은혜는 이걸로 다 갚고도 남지 않을까.


“읽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데. 뜻풀이까지 하시려면 조금 어려울 겁니다.”

“···설마. 이 비문의 뜻마저 알고 있단 게냐?”

“궁금하세요?”

“허허···.”


당황하는 영감님 표정을 보니 입꼬리가 자꾸만 실룩거린다.

내가 이러려고 환생했구나!


다만 여기 적힌 내용은 그냥 평범하게 잘 쓴 시일 뿐.

영감님이 말한 그런 마법과는 그다지 상관없어 보였다.


“애송이 널 발견했을 때, 내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하다 직감했었지.”

“에이, 영감님. 갑자기 쑥스럽게···.”


그런데 갑자기 등골을 따라 서늘한 한기가 흐른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용병으로서의 본능이 내지르는 경고.


“그런데 아무래도. 내 실수였나 보구나.”


나는 재빨리 몸을 뒤로 날렸다.

곧이어 콰광! 하는 굉음이 귓가를 때린다.


“···역시 눈치 빠른 녀석 같으니라고.”

“여, 영감님?”


내가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는 슬레지해머로 내려친 듯 움푹 패어 있다.

노인네가 나무로 된 지팡이로 내려친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위력.


아니, 그보다···.

방금 진심으로 날 죽이려고 한 건가.

하나뿐인 제자를?


“잠깐만요, 영감님! 갑자기 노망났어요?”


영감님은 입을 꾹 다물고 살벌한 눈빛으로 다시금 지팡이를 휘둘러온다.


“···씨입! 영감님이 먼저 시작한 겁니다!”


나는 망설임을 버리고 검을 뽑았다.

스승이고 은인이고 나발이고.

상대가 날 죽이려는 데 일단 살고 봐야지!


어차피 영감님에겐 날 살릴 때 썼던 생명의 반지가 있으니, 엔간해선 안 죽을···.


“시발 돌겠네···.”


영감님 주변으로 대여섯 개의 불덩어리가 생겨난다.


“언제는 그딴 요술쟁이의 잔재주가 무슨 쓸모가 있냐면서요!”


나의 정당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불덩이가 동시에 나를 향해 날아온다.

쳐낼까?

아니, 저런 걸 정직하게 받아내는 건 미련한 생각이다.


나는 바로 뒤로 내달리며 기둥에 몸을 숨겼다.

지척에서 불덩이들이 연속으로 터지며 후끈한 열기가 전해져온다.


“그대로 도망칠 생각은 버리거라.”


영감님이 지팡이로 바닥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멀리 건너편에서 철컹하고 두터운 금속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냥 닫기만 한 게 아니라, 마법으로 잠그기도 했을 터.

퇴로는 없다.


“영감님! 진짜 왜 이러십니까? 저한테 배우는 게 싫다면 싫다고 하시던가! 대화로 해결하셔야죠!”


혹시 기둥을 쓰러트릴 방법은 없을까.

잘하면 이걸 영감님 위로···.


“시발!”


나는 재빨리 몸을 굴려 옆의 기둥으로 피했다.

좀 전에 숨어있던 기둥을 흰빛의 파도가 때리며, 쿠르릉하는 굉음과 함께 와르르 무너진다.


하마터면 내가 깔릴뻔했네.

동시에 같은 전략을 떠올리다니.

그래봤자 스승의 손바닥 위라는 거냐고.


“돌겠네.”


기둥이 엄폐물이 되어줄 거란 기대는 하지 말자.

어떻게든 거리를 좁혀야 한다.

작전을 떠올릴 시간도 없다.


우선은 직감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자.


나는 가볍게 손짓으로 기둥의 파편을 조종해 영감님 쪽으로 날리며, 나도 함께 달려갔다.

영감님은 주먹만 한 돌덩이는 가볍게 무시하며, 매서운 기운으로 지팡이를 휘둘러온다.


나는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전생의 기억 속에서 어떤 소리를 끄집어낸다.


-끼이이잉!


“크읏···!”


내가 날린 파편들로부터 시끄러운 고주파 음이 쏘아졌다.

영감님은 생전 처음들은 소음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검을 영감님 복부에 깊숙이 찔러넣었다.


“커헉!”

“저 원망 마십쇼. 제가 분명 대화로 풀자고···.”


하지만.

이는 명백히 잘못된 판단이었다.


갑자기 발밑에서 심상치 않은 빛이 올라오더니, 한순간에 중력이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시야가 정신없이 빙그르르 돈다.


“···건방 떨지 말거라, 애송이!”


곧이어 트럭에라도 받혀버린 듯한 격통이 여러 차례 온몸에 찾아왔다.

어느새 난 바닥에 드러누워, 영감님 발밑에 깔려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눈치채지도 못했다.


머리가 웅웅 울리고 눈앞이 돈다.

뼈도 몇 군데 부서진 것 같다.

마치 거인에게 붙잡혀 몇 차례 바닥에 패대기쳐진 느낌이다.


“컥···! 쿨럭!”

“이렇게 돼서, 유감이구나. 네 재능은 내 후계자로서 더할 나위 없었거늘···.”


영감님은 배에 박힌 검을 뽑아, 그대로 내 쪽을 향해 거꾸로 쥐었다.


제기랄, 생명의 반지!

배때기에 칼 박힌 늙은이치고 너무 멀쩡한 거 아니냐고.

역시 처음부터 목을 노렸어야 했나.


“그렇지만 저 비문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널 살려둘 순 없느니라.”


여전히 영감님의 말이 이해 안 된다.

대체 저 비석이 뭐라고.

몇 번이나 다시 봐도 적혀있는 건 그냥 평범한 시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영감님이 저걸 저렇게나 경계한다면···.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


이젠 낯설어진 한국어 발음으로 비문의 내용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그 순간, 영감님이 움찔거리며 검으로 날 내려찍으려던 동작을 멈춘다.


“이런! 신들의 마법을 쓸 셈이냐! 대체 어떤···!?”


그리곤 날 찌르던 검을 방향을 바꿔 비석 쪽으로 휘두른다.


“그렇게 놔두지 않겠다!”


카앙! 하고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섬광탄 같은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비석이 산산조각 난다.


난 죽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힘껏 휘둘렀다.


“으윽···! 이런!”


뜨거운 선혈이 튀어 올랐다.

영감님의 왼손가락 두어 개가 생명의 반지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다.


“으아아! 제기라알!”


나는 그 기세 그대로 영감님을 어깨로 들이박았다.

영감님이 넘어지며 지팡이와 검도 바닥을 나뒹군다.


이젠 생명의 반지와 지팡이를 잃었으니, 한낱 기력 없는 노인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아직 안심할 순 없다.

난 영감님의 가슴팍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끄으윽···!”

“하아, 하···. 시발.”


나는 몸을 일으켜 지팡이를 멀리 차버린 뒤, 검을 주워들었다.

굴러다니는 손가락에서도 반지를 빼서 손에 쥐었다.


“말해봐요. 대체 왜 그런 건데요? 시발! 저 비석이 대체 뭐길래!”


내가 비문을 읽을 때 분명, 영감님은 신들의 마법이 어쩌고 했지만···.


“저기 적힌 건 좇도 아무 의미 없는 시라고요! 신의 마법이고 그딴 건 없단 말입니다!”


나로서는 그저 노망난 노인네의 헛소리로밖에 안 들린다.

세종대왕이 아무리 위대하지만, 한글에 그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리가.


“그렇군···. 자네 눈에는··· 그렇게 보인 건가···.”


영감님의 눈빛이 크게 흔들린다.


처음에는 불신이 머무르다가.

그러다 점점 혼란스러워한다.


“시발···. 이건 아니잖습니까? 저도 영감님을 죽이고 싶지 않다고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생명의 반지를 건네줄까.

하지만 나중에 또 돌변하면 그때 막을 자신이 있나?


“···애송이.”

“···!?”


영감님이 품속에 손을 넣는다.

나는 곧바로 검을 고쳐 쥐어 그에게 겨누었다.


하지만 영감님이 꺼낸 건 웬 낡아빠진 주화.


“천칭이 기운 곳으로···. 나아···가거라···.”


의미 모를 말을 끝으로, 영감님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진다.

주화는 그대로 내 발밑으로 데굴데굴 굴러온다.


나는 영감님에게 검을 겨눈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영감님은 움직이지 않는다.

나도 제자리서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지팡이에서 나오던 빛이 서서히 사라지며, 칠흑 같은 어둠이 뒤덮여 온다.



* * *



3년 전.

영감님이 살려준 건 단지 목숨만이 아니었다.


예전부터 난, 그저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에게 버림받고, 욕망의 도구로 굴려지다, 전쟁터를 전전하며 진탕을 구른 인생.

이 야만의 세계에서 내가 바라는 삶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 가능성을 처음으로 엿보게 된 게 영감님과 함께한 3년이었다.


글을 배우고, 지식을 얻고, 약간이나마 마법도 익히는 등.

출세할 수 있는 수단을 얻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자네에겐 아무래도 사람의 호의를 믿는 법을 먼저 가르쳐야겠어.’


영감님의 그 첫 번째 가르침에서 처음으로 사람 냄새를 느껴봤다.

야만투성이라 생각한 이 세상에도 선의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 줬다.


분명, 그렇게 믿고 있었다.


“시발. 호의는 개뿔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영감님의 지팡이를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역시 내 손에 쥐어져 있으니 그냥 평범한 나무막대에 불과하다.


혹시라도 영감님이 보여준 다양한 마법들이 템빨이길 기대했는데, 역시 그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나.”


나는 손에 숨을 불어넣으며 손가락을 가볍게 비볐다.

손끝에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자, 지팡이 끝부분을 쥐고 가만히 있었다.


잠시 뒤 불꽃이 피어오른다.

부디 여기서 빠져나갈 때까진 버텨주길.


나는 지팡이를 횃불 삼아 영감님의 시신을 비췄다.

우선은 가슴팍에 박힌 드워프 강철제 단검부터 회수.

그 밖에도 영감님의 소지품도 몇 가지 챙겼다.


생명의 반지는 이미 끼고 있지만, 몸 여기저기가 아직도 쑤신다.

분명 좋긴 한데 역시나 뭔가 미묘한 성능이랄까.


“아, 맞다. 그 이상한 동전···.”


영감님이 숨이 끊이기 직전 내게 건네려 한 그 낡은 주화.

느낌상 뭔가 중요해 보이는 것 같으니 그것도 일단 챙겼다.


“영감님이 비록 절 죽이려 했지만···. 한번 살려주신 적 있으니 그걸로 퉁쳐드릴게요.”


그러고 보니 결국엔 끝까지 이름을 듣지 못했네.


서로 영감님, 애송이 이렇게 부르기만 했을 뿐.

리안이라는 내 이름도 한 번도 불러주지 않아, 하마터면 그것마저 잊을 뻔했다.


“그동안 빌어먹게 감사했습니다.”


두 번 큰절하고, 반절.

스승에게 마지막 예우를 차린 후, 뒤돌아서 기둥이 가득한 공간 너머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가 봐야겠지.”


여기까지 온 길을 다시 떠올려 보려 했지만, 곧 포기했다.


뭔가 길목에 표시라도 남겨놓는 건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냐고.


“그걸 한번 실험해 볼까.”


그래도 내게 아직 비장의 수가 남아있다.

모름지기 제자는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야 하는 법.


“부디 내게 올바른 길을 알려다오.”


나는 검을 칼날이 아래로 가게 해서 똑바로 세운 뒤, 슬며시 손을 놓았다.

만약에 이 검이 문 쪽으로 쓰러진다면 실험 성공.


“···은 개뿔.”


반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전통적인 길잡이 점술마저 나를 배신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한번 가봐야지.”


그렇게 난 언제 꺼질지 모를 지팡이 횃불을 들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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