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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번

환생해 보니 낭만 따윈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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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번
작품등록일 :
2024.08.21 19:29
최근연재일 :
2024.09.05 12:35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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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글자수 :
55,795

작성
24.08.26 12:35
조회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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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2쪽

거짓말(1)

DUMMY

유적에서 빠져나오기는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횃불로 사용한 지팡이는 도중에 다 타버렸고, 중간부턴 칠흑 속에서 벽만 짚고 이동했다.

심신이 여러모로 피곤한 상태라 도중에 눈도 잠깐 붙이기도 했고.

무사히 유적을 빠져나왔을 때엔 이미 날이 밝은 뒤였다.


이후, 처음 나흘은 아무 목적 없이 정처 없이 떠돌기만 했다.

지난 3년과는 다른 너무나도 무던하고 지루한 나날이었다.


덕분에 슬슬 정착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아직 마법사를 자칭하기엔 미묘한 스펙이지만, 어디 시골 영주 밑에서 일하는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혹시, 돈 많은 귀족 과부의 기둥서방이라도 돼서 편하게 놀고먹을 수 있다면 더 좋고.


전생처럼 또 과로사하는 건 사양이다.


어쨌거나 계속 떠돌든, 정착하든.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기에 우선 가까운 도시로 향했다.


“거기, 잠깐 정지.”


수레를 끌고 성문을 지나려 할 때, 경비병이 내 앞을 막아선다.


검문인가.

영감님과 다닐 때는 별로 겪어본 적 없는 일이었는데.


“예, 무슨 일입니까?”

“이 근방에선 본 적 없는 얼굴이군. 뭐 하러 온 거지? 딱 보니 상인은 아닌 것 같은데.”


짐이라곤 봇짐 하나가 전부인 수레를 경비병이 지그시 노려본다.


“순례 중인 학사입니다. 노잣돈이 떨어져서 여기엔 돈벌이 좀 하려고 찾아왔죠.”

“학사라고? 그런 중무장을 하고서?”


브리간딘 갑옷에 장검 한 자루.

내 생각엔 여행자에 어울리는 가벼운 무장인데, 경비병이 보기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제 한 몸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못 믿겠으면 저 봇짐이라도 뒤져보시죠.”

“흠. 수상한 행동은 하지 마라.”


경비병은 창끝으로 날 한번 위협한 뒤, 수레에 실어놓은 봇짐을 뒤적거렸다.

잠시 후, 그자의 미간에 점점 주름이 생겨난다.


“책이랑 건량이 전부인가. 이런 걸 들고 다니는 보면 먹물쟁이는 맞나보군.”

“그렇죠? 그러면 이제 통과해도···.”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 보낸 첩자일 수도 있고.”


그러나 경비병은 좀처럼 나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는다.

···라기보단 생트집 잡는 거라고 봐야겠지.


이런 한적한 시골 도시에서, 경비병이 부수입을 벌 기회는 그리 흔치 않을 테니까.


“좀 봐주십쇼. 남은 노잣돈이라곤 이것밖엔 없단 말입니다.”


나는 주머니를 탈탈 털어 아껴뒀던 비장의 은화 세 닢을 내밀었다.

용병 시절엔 하루 일당으로 벌던,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지는 않은 돈.


“흠흠.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첩자는 아닌 것 같군!”


다행히 경비병도 그 정도로 만족해 주며, 바로 날 놔준다.


더러운 부패 공무원 자식.

내가 혹시나 여기 성에 취직하게 되거든, 널 꼭 다시 찾아와 주마.



* * *



고집스러운 얼굴의 드워프가 은빛 덩어리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눈을 반짝인다.

그가 감정하고 있는 건, 강 마을의 촌장에게 받은 유물을 녹여서 나눈 덩어리의 일부.


영감님과 그 일 때문에 영 찝찝해서 원형 그대로 들고 있기는 좀 그랬다.


“이거 꽤 순도 높은 은이로군.”


그리고 기대한 대로 유물의 재질은 은이었다.

역시 녹슨 금속도 다시 봐야 한다니까.


“흠. 이 정도면 같은 무게의 은화로 드리리다.”

“이봐요, 노인장. 드워프 은화의 순도도 8할밖에 안 될 텐데, 그걸 똑같은 무게의 은으로?”

“수수료나 이것저것 다 제하면 이게 딱 정가요.”


틀림없이 그게 정가는 맞다.

그런데 물건을 정가로만 거래하면 세상에 흥정이란 게 왜 있겠냐고.


“드워프가 정직하단 것도 다 옛말인가 보네요. 아, 혹시 엘프 혼혈이었습니까?”


내 싸구려 도발에 전당포 주인의 얼굴이 단박에 구겨진다.

역시 드워프 자존심 긁는데 엘프 얘기만 한 게 없지.


“이런 고순도 은이면 정제할 수고도 덜지 않습니까? 나도 큰 욕심 안 낼 테니 몇 푼만 더 올려주시죠?”

“···좋소. 동 무게의 은화에 열 닢 더 쳐 드리지.”

“역시 엘프 같은 좀팽이들과는 다르게 시원시원해서 좋군요.”

“흥! 비교할 놈들이랑 비교하시게.”


전당포 주인은 천칭에 은덩이들을 올린 뒤, 반대편에 은화 더미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일흔. 여든. 아흔···.

은화의 개수가 두 자리에서 세 자리로 넘어갈 때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그런데 천칭을 보니 영감님의 의미 모를 유언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주인장. 혹시 이게 뭔지 압니까?”

“그게 뭐요? 어디 한번 봅시다.”


나는 영감님이 죽기 직전에 건넨 낡은 주화를 전당포 주인에게 보여주었다.


그 늙은 드워프는 주화를 앞뒤로 살펴보고, 손톱으로 긁거나, 쇠막대로 톡톡 때려 보는 등.

온갖 방법으로 감정을 하더니, 수염을 벅벅 긁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건 운철이로군. 쯧!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이런 귀한 물건으로 동전이나 만드는 건지.”


누가 금속 성애자 드워프 아니랄까 봐 바로 재질부터 본다.


“흐음. 이 문양은···.”


주화의 한쪽 면에는 비늘 문양이.

반대편에는 둥근 원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압인이 아니로군. 뭐, 경성이 높은 재질이니 당연해.”


그런데 이 드워프는 물건의 배경이나 문화적 가치엔 좀처럼 관심 없는 것 같다.

물어볼 상대를 잘못 골랐네.


그나저나 운철로 만든 주화라니.

뭔가 종교적인 의미라도 있는 건가.


“이런 건 소량으론 의미 없소. 잘해야 동화 네댓 닢밖에 못 쳐주오.”

“아뇨. 딱히 팔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소?”


나는 운철 주화를 돌려받으며, 은덩이를 판 은화도 함께 챙겼다.

역시 주머니가 두둑해지면 마음이 안정된다.


“아참. 한 가지만 더 여쭤도 괜찮습니까?”

“···물어보쇼.”

“혹시 여기 영주님 밑에서 일하는 마법사가 있습니까?”

“란돌프인가 하는 젊은 놈이 하나 있긴 한데, 마법사치고 어정쩡한 놈이오. 뭐 부탁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젊은 마법사라니 뭔가 좀 특이하다.

그래도 드워프 기준에서 젊다는 걸 테니 중년쯤은 되겠지.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또 물어보면, 이제부턴 요금 받을 거요.”

“아, 예에 예. 갑니다. 수고하세요.”


어쨌거나 안타까운 소식이다.

이런 시골 영주 밑에도 벌써 마법사가 일하고 있을 줄이야.

어느새 마법사 취업 시장이 레드오션이 된 건가.


그 란돌프라는 자가 마법사인 척하는 사기꾼이 아닌 이상, 이 영지에 취직하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다.



* * *



영감님은 마법사답게 신기한 물건도 제법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신기한 마법 깃펜.

잉크도 없이 자유롭게 쓸 수 있지만, 특이하게도 뭐라고 적든 알아볼 수 없는 이상한 암호로만 적힌다.

이른바 자동 암호화 깃펜이라고 할까.


그렇지만 여기에 한가지 비밀이 있었으니.

깃펜의 깃털로 글자를 가볍게 쓰다듬으면, 일시적으로 원래 글자가 드러난다.


“여기 맥주 한잔이랑, 닭고기 한 접시.”

“예에! 잠깐만 기다리시구려!”


나는 주점 구석에 앉아, 그렇게 쓰인 영감님의 수첩을 대충 훑어보았다.


역시나 영감님은 나를 만나기 전에도 그 한글 비석이 있는 유적과 비슷한 곳을 많이 다녀본 듯했다.

수첩에 적힌 것 대부분이 비석의 필사본과 그것을 분석한 내용이다.


“역시 영감님이 노망난 거였나···.”


그리고 한국어 원어민이 보았을 때 대부분 망상에 가깝다.


무슨 국뽕 찌라시도 아니고, 한글이 삼라만상을 담은 신의 글자란 해석은 어떻게 해야 나오는 거냐고.


‘ㄱ’이 생명을 상징하고, ‘ㄴ’이 불이며, ‘ㅅ’이 바람이라거나 ‘ㅁ’이 땅을 의미한다는 둥.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고개만 자꾸 옆으로 기울게 된다.


이러다가 기억 속의 영감님 모습이 태극기 둘러맨 할배로 바뀌겠네.


“이보게, 자네 혹시···.”


언젠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온다.

나는 수첩을 덮고 고개를 돌렸다.


어느 유명한 배관공이 연상되는 중년 남성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서 날 빤히 쳐다보고 있다.


“아! 역시 자네였군! 어쩐지 밖에 익숙한 당나귀가 있다 싶더니!”

“이런 데서 뵙게 되네요? 그러니까···. 성함이 뭐였더라?”

“아차! 그러고 보니 제대로 소개한 적이 없었군! 데렌일세.”

“리안입니다.”


그는 영감님과 꽤 오랜 세월을 알고 지낸 소금 상인이었다.

한 석 달 전에도 다른 마을에서 만난 적 있던가.

하지만 그와 이렇게 직접 얘기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자네 스승은 어디 가셨나?”


데렌은 내 건너편 자리를 바라보더니, 시선을 옮겨 주점 주변을 둘러본다.


영감님의 지인이라고 생각하니 자그마한 행동 하나하나가 괜히 신경 쓰인다.


“영감님은···.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뭣? 그분이?”


어설프게 숨기는 것 보단, 이건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나 대신 영감님의 지인들에게 부고를 전해줄 사람도 필요할 테고.


“허···. 대체 어쩌다···?”

“워낙에 나이가 있으신 분이었으니까요. 곤히 주무시다 갑자기···.”


그때, 서늘한 기류가 목덜미를 스쳤다.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듯, 주변이 고요해진 듯한 착각이 든다.


“저런. 그렇게 가실 분이 아니었는데 안타깝구먼.”


눈앞의 남자, 데렌은 모자를 벗으며 지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적어도 겉으론 그래 보인다.


그러나 평범 뒤에 감춰진 흉흉한 살기를 직감이 경고해 온다.


“그러면 자네···.”


데렌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영감님의 물건을 훑는다.

그의 시선이 운철 주화에서 잠시 멈췄다가 다시 내 쪽을 향한다.


“지금은 어디로 가는 중인가?”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내 목을 노려온다.


나는 슬그머니 칼자루로 근처로 손을 가져갔다.

여기서 잘못 대답했다간, 둘 중 하나의 머리는 바닥과 만나게 되겠지.


그런데 아마도. 난 그 뒤에 와야 할 올바른 대답을 알고 있다.


“···천칭이 기우는 곳으로 향할 겁니다. 그게 영감님의 유언이기도 하고요.”

“그렇구먼.”


날카롭게 당겨져 있던 공기가 다시 느슨해졌다.


역시 그게 정답이었다.

데렌은 방금과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푸근하고 유해진 분위기를 한껏 풍겨댄다.


그래서 방금 나눈 암구호 같은 수상한 대화는 대체 뭐였지.


“실례지만 그 표식 좀 자세히 봐도 되겠나?”

“이거 말입니까?”


표식이란 건 이 운철 주화를 말하는 건가.

나는 태연한 척, 손바닥에 맺힌 식은땀을 바지에 대충 닦아낸 뒤 운철 주화를 건넸다.


데렌은 그것을 앞뒤로 살펴보더니 반쯤 벗겨진 그의 이마를 탁 내려친다.


“어이쿠! 역시나! 하필이면 이걸 자네에게···!”

“뭔가 문제 있습니까?”

“당연히 있고말고! 아주 큰 문제가.”


뭔가 엮이고 싶지 않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외면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닐 터.


“영감님이 갑자기 돌아가신 바람에 아직 못 배운 게 많습니다. 설명해 주겠습니까?”

“음···. 하지만 그건 여기선 좀 곤란하네.”


데렌은 영감님이 연상되게 실없이 웃더니, 주화를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


“아무튼 사정을 모르는 다른 형제들은 오해할걸세. 자네 표식은 가능한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게 좋겠어.”


방금 그의 입에서 형제라는 단어가 나왔다.

수상한 조직에서 같은 조직원들을 지칭할 때 가장 선호하는 1순위인 단어.


환장하겠네.

그러면 영감님처럼 급발진해서 날 죽이려 들 사람들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그러면 리안.”


데렌은 의자를 끌어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살의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안심되지 않는다.


“자네 스승이 죽은 이유가 뭔지, 이번에는 제대로 말해주겠나?”

“그건···.”


역시나 이 남자.

내가 영감님이 죽은 이유에 대해선 거짓말한 것을 진즉 눈치채고 있었다.


뭔가 다른 사람의 거짓말을 간파할 수단이나 능력이 있는 건가.

그렇다면···.


“이런 곳에선 대답해 드리기 곤란합니다.”


요컨대 거짓말만 안 하면 된다, 이거잖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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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말(1) 24.08.26 120 3 12쪽
4 졸업(3) 24.08.25 140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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