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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번

환생해 보니 낭만 따윈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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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번
작품등록일 :
2024.08.21 19:29
최근연재일 :
2024.09.05 12:35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171
추천수 :
30
글자수 :
55,795

작성
24.08.23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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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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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3쪽

졸업(1)

DUMMY

나를 리안이라고 부르라.


나는 똥통 같은 시골에서 농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와중에 얼굴은 쓸데없이 곱상하게 생겨 먹었지만.


그런데 미천한 신분에는 이 얼굴이 오히려 독이더라.


닮은 구석 없는 부모는 요정에게 아이를 바꿔치기 당했다면서 남 취급하질 않나.

심지어 13살엔 영주놈 아들에게 엉덩이 뚫릴뻔했다.

정작 뚫린 건 내가 아니라 그놈 대가리였지만.


평소에 낫을 잘 갈아둬서 다행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란 작자들이 푼돈에 날 그놈에게 팔아넘긴 게 틀림없다.

다만 도망치느라 그 사실을 확인해 볼 시간은 없었던 게 아쉽다.


그러고선 한 보름 정도 유랑생활을 했던가.

어쩌다 인신매매단에 잡히긴 했지만, 그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안 그랬으면 숲길에서 객사해서 짐승 먹이나 됐을 테니까.


이후에 난 어떤 돈 많은 과부에게 노예로 팔려 갔다.

물론 그렇고 그런 용도의 노예로.


솔직히 이 시절은 내 인생 최고의 시기였다.


세끼 다 챙겨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호사였는데, 식사엔 항상 고기가 함께 나왔다.

좋은 옷을 입고, 매일 따뜻하고 푹신한 이부자리에서 잠을 잤다.

주인님도 나이치고 그럭저럭 미인인 데다, 무엇보다도 가슴이 컸다.


정말 끝내주게 컸다.


어쨌거나 이때 나는 이대로 팔자가 필 줄만 알았다.

이대로 주인님에게 장가들어 그녀의 재산이 전부 내 것이 되는 소박한 꿈을 꾼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런데 아니, 시발.

이 미친 변태 아줌마가 날 남창으로 팔아먹으려 할 줄이야.

그것도 돈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지 취미생활로.


그래서 결국 튀었다.

내가 사람 모가지 따는 데에 재능있는 건 그때 확실히 알게 됐다.


그 뒤로는 잠깐 떠돌이 생활을 하다 용병단에 들어갔다.

이쪽 지역은 춘추전국시대 마냥 허구한 날 전쟁이라 밥줄 끊길 걱정은 없었다.


이래 봬도 난 용병으로 잘나간 편이었다.

한두 해 만에 이름값이 오르고 나니 흑곰 형제단이란 꽤 유명한 용병단에서도 날 스카웃해갔다.

사실 거긴 악명에 가까운 유명세이긴 했는데, 거 용병단이 돈만 잘 벌면 되는 거 아닌가?


하여간 오늘도 우린 적 후방의 보급대를 털어먹는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고, 야습에 나선 것이었는데.


아니 글쎄.

딱 봐도 거기서 제일 비싸 보이는 갑옷을 입은 놈이, 내 앞에서 잡아달라며 알짱거리잖아?

그래서 냉큼 덤벼들었고, 이 지랄이 났다.


이상으로 내가 이 기나긴 주마등을 감상하며 뒤져가게 된 사연 되시겠다.


그런데 니미 씨벌.

내 명줄 한번 더럽게 기네.


왜 아직도 안 죽냐?

뒤지게 아파 죽겠잖아.



* * *



타닥타닥.

귓가에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지.

설마 나 화장당하고 있나.


“끄으···. 나 아직···.”

“허허. 자네, 드디어 깨어났군.”


이번에는 녹슨 쇠를 긁는 것 같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지.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다.

적인가?


“아직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걸세. 반지의 힘으로 죽지는 않겠지만, 상처가 벌어지면 죽을 만큼 아플 거네.”

“반···지?”


왼손의 이물감에 엄지로 약지 부근을 더듬었다.


노인의 말대로 손에 웬 반지가 끼워져 있다.

뭔가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듯한 게 마법 반지 같다.


이거 꽤 비싼 거겠지?


“생명의 반지일세. 착용자에게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지. 목이 날아간 게 아닌 이상, 어떤 상처든 나을걸세.”


노인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묻지도 않은 설명을 줄줄 늘어놓는다.

그러니까 좇나 비싼 반지란 거네.


“좀 더 눈붙여 두게나. 반지의 힘을 빌린들 회복에 며칠은 걸릴걸세.”


노인은 그렇게 말하지만, 쉽게 잠들 수는 없을 것 같다.


숨 쉴 때마다 누군가 칼로 계속 쑤시는 것 같다.

목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올라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 한들, 낯선 사람을 옆에 두고 편히 잠잘 만큼 무신경한 성격이 못 된다.


“그래도 내일 아침쯤이면 움직이는 건 문제없겠군.”


후우우.

길게 내뱉는 노인의 숨소리.

그와 함께 기묘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


머릿속이 점점 몽롱해진다.

노인의 목소리가 자꾸만 멀어져간다.


안된다고.

이대로 잠들면···.



* * *



시벌. 겁나 꿀잠 잤네.

이렇게 숙면한 게 대체 몇 년 만이지.


“쓰읍. 아직도 아프네.”


몸을 양옆으로 뒤척여 보니 가슴의 상처가 욱신거린다.

확실히 어제보단 덜하다.


“잘 잤나 보구먼. 안색이 훨 좋아졌어.”


늙으면 아침잠이 없어진다더니, 노인은 벌써 일어나있었다.


“그, 어젠··· 구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허허. 보기보다 예의를 아는 친구였군.”


이래 봬도 전생에 동방예의지국 출신이라서 말이죠.


“몸은 좀 어떤 것 같나? 움직일 만한가?”

“네. 아파 죽겠지만요.”

“다행이군. 반지는 나을 때까지 계속 끼고 있게나.”


나는 그제야 내 몸 상태를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상의는 벗겨져 있지만 다행히도 바지는 무사히 잘 있다.


가슴에 피 묻은 붕대가 감겨있는 걸 보면, 마법의 반지가 있어도 응급치료는 해야 했던 모양이다.

성능 참 미묘하네.


그런데 다른 자잘한 상처는 벌써 불그스름한 흉터로만 남아있다.

이거 성능 확실하구만.


“자네 물건은 저기에 뒀네.”


노인은 작은 바위 위에 놓인 피 묻은 꾸러미를 지팡이 끝으로 가리켰다.


나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켜, 바위에 놓인 물건들을 확인했다.


돈값 못하고 뚫려버린 내 비싼 브리간딘 갑옷은 잘 있고.

재산 2호인 검도 무사히 잘 있다.

상의는 피범벅이지만, 대충 잿물에 빨면 적당히 표백되겠지.


그리고 이건···.

어라?


“저, 영감님. 이거··· 제 가슴에 박혀있던 거 아닙니까?”

“그래서 자네 물건이 아니란 건가?”

“아뇨. 이젠 제꺼죠.”


잘 보니 꽤 비싸 보인다.

칼자루에 새겨진 섬세한 무늬가 보통 장인의 솜씨가 아닌 것 같다.

검파두식에 새겨진 건 그놈 가문의 문장인가.


특히나 이 검은색 칼날.

말로만 듣던 드워프 강철이 분명하다.


다행히 내 브리간딘이 돈값 못한 게 아니었다.

이거면 당연히 못 막지.


“이것 좀 들게나. 피를 흘린 만큼 먹어줘야지.”


노인은 내게 한 주먹 크기의 빵 덩어리를 내밀었다.

나는 그 빵을 받을지 말지 잠시 망설였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해코지하려 했으면 진작에 했을 테고.

배는 고프니 먹을 건 먹어야지.


그런데 고작 요만한 거로 배가 차려나.


“이거 혹시 한 입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르다는 그 빵인가요?”

“호오. 세상에 그런 빵이 있나?”

“아님 말고요.”


비록 양은 적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지.

이 세계 기준에선 꽤 좋다고 해야 하나.


처음엔 거칠고 퍼석한 호밀의 느낌이 들다가, 새콤한 건과일이 느껴지며 입안이 금세 촉촉해진다.

반죽에 꿀을 넣었는지 빵 자체에서도 단맛이 살짝 돈다.

견과류도 넉넉히 들어 씹을수록 점점 고소해진다.


여러 가지 칼로리가 잔뜩 느껴지는 맛.

틀림없이 고급 여행용 빵이다.


“그런데 영감님. 절 왜 도와주는 겁니까?”

“허허. 사람이 사람을 돕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보통은 그렇더라고요.”


적어도 내가 리안이란 이름으로 살아온 세월은 그러했다.


게다가 내가 어디 길바닥에 혼자 쓰러져있던 것도 아니고.

한차례 격전이 벌어졌던 전쟁터에서 굳이?


“자네에겐 아무래도 사람의 호의를 믿는 법을 먼저 가르쳐야겠어.”

“예?”

“요컨대 내 제자가 되란 그 말일세.”


무슨 동료 수집가 밀짚모자 해적도 아니고, 갑자기 제자?


하지만 감이 왔다.

이거 분명 무협지 같은 데서 말하는 기연이라는 그거 거겠지.


“영감님은 혹시 마법사입니까?”

“허, 왜 그리 생각하나?”


그야 꼬부랑 지팡이에 긴 수염.

그리고 회색 로브와 고깔모자.


이거 암만 봐도 간ㄷ···.


“이런 반지를 갖고 계신 것도 그렇고. 어젯밤 절 잠들게 한 거도 마법 아닌가요?”

“제법 눈치 빠른 친구로구먼.”

“평생 눈칫밥만 먹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노인은 내 대답이 뭔가 마음에 들었는지 껄껄 웃어댔다.


어쨌든 저 노인이 마법사라면 내게서 뭔가 특별함이라도 찾아낸 게 아닐까.

그래서 굳이 날 제자로 삼기 위해 시체 구덩이 속에서 찾아 건져낸 것일 테고.


“그래서 제자가 될 텐가?”

“당연하죠. 어른들이 사람은 자고로 기술을 배워야 먹고 산다고 했거든요.”


마법사의 제자가 될 수 있다니 천운의 기회다.

칼질도 신분 상승의 정석 루트지만 경쟁률이 지나치게 빡세단 말이지.


이 세계의 마법사는 게임에서 본 것처럼 전술무기 수준의 인간병기는 아니다.

기껏해야 안개를 일으켜 시야를 가리거나, 눈속임용 환상을 만들어 엉뚱한 곳으로 유인하는 정도랄까.

그래도 상대에 마법사가 끼어있는 부대를 만나면, 상대하기 골치 아팠다.


게다가 왕이나 영주들은 그런 마법사조차 없어서 기용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즉, 출세가 보장된 엘리트 전문직이란 말씀.


“그런데 혹시 수업료 같은 거 받습니까? 저 돈 없는데···.”


나는 조용히 칼자루를 꼭 쥐었다.


아니, 영감님 찌르겠단 건 아니고.

이게 얼마 전에 전 재산 털어서 산 기사들이 쓰는 검이거든.


“그럴 리가. 자네는 내가 무일푼에게 뜯어낼 후안무치로 보이나?”

“진짜죠?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입니다?”

“자네야말로 나중에 제자 관두겠다는 둥 딴소리 말게.”


노인은 오히려 실실 웃으며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거 나 혹시.

잘못된 선택을 해버린 건가.



* * *



난 아무래도 사기당한 것 같다.

마법사란 족속들은 사기꾼이나 다름없다는 걸 진작에 깨달았어야 했는데.


영감님의 제자로 들어가고 한 달이 넘게 지나도록 배운 거라곤, 별 쓰잘데기 없는 잡학뿐.

정작 마법다운 건 동전 마술 같은 거라도 못 배워 봤다.

그러고선 사람은 또 얼마나 부려 먹는지.


“이 녀석아. 책 읽으랬더니 안 읽고 뭐 하는 게냐.”


딱! 하는 소리가 골에 퍼지며 눈앞에서 불똥이 튀었다.


“끄아악! 열심히 읽고 있는데 왜 때립니까!”

“아까부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읽기는 뭘 읽는단 말이냐.”

“그야 속으로 읽고 있으니까 당연하죠!”


가뜩이나 흔들리는 수레 위에서 책 읽느라 멀미나 죽겠는데, 사람 머리는 왜 때리고 지랄이야.


시부럴 망할 영감탱이.

내가 언젠가 저 말라비틀어진 모가지를 꼭 분질러놓고 만다.


“호오. 글을 배운 지 얼마나 됐다고, 가르치지도 않은 묵독을?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구먼. 허헛.”

“때릴 때는 언제고 갑자기 칭찬하기입니까?”


그래도 영감님이 보기에 한 달 사이에 꽤 많은 지식을 흡수한 내가 대견해 보이나 보다.

주입식 교육에 찌든 뇌가 이럴 때는 도움이 되네.


이 대륙의 글자는 영어와 비교하면 쉬운 편이었다.

지랄 같은 예외 발음도 없고, 그냥 적힌 대로 읽으면 술술 읽힌다.

오히려 이렇게 쉬운 걸 대부분 평민은 못 읽는단 게 신기할 정도.


이래서 공교육이 중요하다니까.


“그래서 마법다운 건 대체 언제 가르쳐줄 겁니까?”

“이 녀석아 내가 뭐라 했더냐? 마법사란 항상 준비된 자라고 하지 않았느냐?”

“예. 그랬죠.”

“넌 아직 준비가 안 됐다.”


노망난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내가 흘끗 곁눈질로 노려보자, 지팡이가 위로 쓰윽 올라간다.


“무릇 배움에 순서가 있는 법. 도시의 요술쟁이가 부리는 재주에 현혹되어 서두르지 말거라.”


당장이라도 또 머리를 때릴 듯 지팡이가 허공에서 흔들거린다.


“당최 불덩이나 쏘아대고 허공에 칼날이 춤추게 하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이냐?”

“쓸모가 없긴요. 돈은 벌리는 것 같던데요.”

“예끼, 못난 놈.”


따악! 또 한 번 경쾌한 인간 목탁 소리가 울려 퍼진다.


비록 이런 신세긴 하지만, 그렇다고 영감님이 마법사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무슨 일이든 지팡이 한번 휘두르면 다 해결되더라.


어두울 땐 조명이 되어주거나, 모닥불로 스위치 누르듯 불붙이고 꺼드린다.

길을 막고 쓰러진 나무나 바위로 막힌 길도 간단히 치워주고.

비에 불어나 건너기 힘든 강물도 단번에 잠잠하게 만들거나 했다.


물론 더럽게 말 안 듣는 제자놈도 한방에 착하게 만드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지.


그렇지만 내가 영감님이 마법사가 분명하구나, 느낀 이유가 따로 있었으니.


“으아악! 사람 살려어···!”


저 멀리 사람이 나무 위에 매달려 있고, 그 아래에 곰이 나무를 흔들고 있었다.

멀지 않은 길목엔 쓰러진 짐마차와 목이 돌아간 채 죽어 내장을 흘리고 있는 말이 보인다.


아마도 말이 먹히는 사이에 나무 위로 도망친 듯하지만, 영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거, 거기 나리들 좀 도와주십쇼!! 아, 안돼! 흔들지 마, 망할 짐승아! 으악! 떨어진다아!”


이렇듯 무슨 지나가던 선비라도 되는 양 가는 길목마다 항상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고.

그것도 하나같이 타이밍마저 기가 막혔다.


이쯤 되면 무슨 예지력이라도 있어서, 그런 사람들만 일부러 찾아가는 수준이랄까.


“애송이, 네가 얼른 가서 도와줘야겠구나. 저러다 곧 떨어지겠다.”

“예? 제가요?”

“그러면 이 늙은이가 곰이랑 싸우리?”

“곰 앞에서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찢기거든요? 으악! 잠깐만요! 지팡이 내려요!”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망할 영감탱이에게 속아서 부려 먹히고 있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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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거짓말(1) 24.08.26 119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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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1 24.08.23 204 4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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