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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번

환생해 보니 낭만 따윈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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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번
작품등록일 :
2024.08.21 19:29
최근연재일 :
2024.09.05 12:35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172
추천수 :
30
글자수 :
55,795

작성
24.08.27 12:35
조회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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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3쪽

거짓말(2)

DUMMY

나는 데렌을 따라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지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런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장소’로 가는 중이라고.


“여기 웨이룬에는 어쩌다 왔나? 만월 어르신이 귀띔해 준 건가?”

“아뇨, 물 흐르듯 떠돌다 우연히요.”

“그렇군. 단지 우연인가.”


데렌은 내 대답을 듣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참고로 만월이란 수상한 조직 안에서 영감님을 지칭하는 호칭인 것 같다.


“자네 스승은 남다른 통찰력을 가진 분이셨지. 자네가 여기 온 것도 그분의 어떠한 인도가 있었을 거네.”

“음. 그러려나요?”

“아무렴!”


어찌 보면 영감님과 해온 방랑의 관성에 따라 도착한 곳이긴 하니.

영감님의 인도가 있었단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말하는 걸 보면 이 작은 시골 도시에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건가.


“다 왔군. 여기일세.”


데렌과 함께 도착한 곳은 시장 한가운데에 있는 건물.

문 옆엔 간판 대신 기다란 태피스트리가 깃발처럼 걸려있다.


“여긴··· 포목점인가요?”


포목점이 대화를 나누기 적절한 장소라고?

굉장히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난다.


“자자, 멀뚱히 서 있지 말고 들어가자고.”


나는 데렌을 따라 포목점 안으로 들어섰다.

형형색색의 천들이 쌓여있는 선반 아래, 해골에 살점을 대충 붙여둔 인상의 사내가 우릴 맞이했다.


“어머, 어서 오시구려.”


이런 죄송.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죄송한데, 길 좀 여쭤도 되겠소?”


데렌은 해골 같은 여자에게 낯익은 운철 주화를 내밀며 묻는다.

표식이라더니 저 아재도 갖고 있었구나.


잘 보니 그의 주화는 나와 달리 앞뒤가 똑같이 비늘 문양만 새겨져 있다.


“그러시구려. 어디로 가는 중이셨는지?”

“천칭이 기운 곳으로.”

“저쪽이우.”


두 사람이 낯익은 암구호를 나눈 뒤.

여자는 고갯짓으로 안쪽의 문을 가리킨다.


“자, 가세. 리안.”


이거 분명 전생에 첩보 영화 같은 데서 본 적 있는 시츄에이션인데.


데렌과 함께 안쪽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왔다.

아래로 내려가니 그곳은 창고로 보이는 공간이었다.


“여기가 얘기를 나누기 적당하다는 그 장소인가요?”

“뭐 얘기만 나누기엔 여기도 적당하지만, 그건 아닐세.”


데렌은 웃으며 창고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더니, 기울어진 천칭이 놓여 있는 선반으로 향했다.

아니, 진짜로 천칭이 있는 곳으로 가는 거였네.


가까이 가서 보니, 천칭이 기운 이유는 한쪽에만 깃펜 같은 게 놓여 있는 탓이었다.


“자네 표식도 꺼내서 여기에 올리게.”


데렌은 그렇게 말하며 시범을 보이듯 자신의 표식, 운철 주화를 깃펜 비어있는 접시에 올렸다.

천칭이 반대편으로 약간 기울었지만, 아직 평행은 이루지 못했다.


나는 바로 그를 뒤이어 내가 가진 운철 주화를 천칭의 접시에 올렸다.

그러자 천칭이 평행을 이룬다.


-드드드득


바닥에서 약간의 진동이 느껴지더니,

나와 데렌이 서 있는 바닥이 선반과 함께 빙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오···.”

“이런. 기대와 달리 싱거운 반응이로구먼.”


내가 이 숨겨진 기믹에 깜짝 놀라서 호들갑 떨기라도 바랐던 건지,

데렌은 살짝 실망한 얼굴로 쓴웃음을 짓는다.


잠시 뒤, 살짝 쿵 하는 충격이 전해지며 바닥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선반 뒤에 숨겨져 있던 길고 어두컴컴한 복도에, 벽에 걸린 촛불이 스스로 불을 피우며 길을 밝힌다.


“표식 잊지 말고 챙겨두게.”


데렌은 주화를 회수한 뒤, 앞장서서 복도 안쪽으로 향했다.

나 역시 주화를 챙겨 그의 뒤를 따라갔다.


잠시 후, 뒤에서 다시 바닥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지하에 숨겨진 비밀공간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깊고 거대했다.


뭐랄까.

마치 거꾸로 된 탑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공간이 이렇게 크다는 말인즉.

이 수상한 조직의 규모도 생각보다 꽤 크다는 뜻이었다.

데렌과 함께 여섯 층계를 내려오는 동안, 마주친 사람의 숫자만 해도 스무 명을 넘는다.


우리는 이렇게 쭉 내려와, 크고 고풍스러워 보이는 문 앞에 도착했다.


문 옆에는 구부정한 자세로 책을 필사하는 사내가 있었다.

은색 가면과 검은 옷.

달의 신 클로르를 섬기는 수도사의 복장이다.


“만월 어르신 일로 하현께 찾아왔네.”

“기다리십시오. 여쭈고 오겠습니다.”


수도사는 여쭈고 온다더니, 제자리에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그나저나 만월과 하현.

달의 위상과 관련된 이름이 조직의 간부를 나타내는 건가.

그렇다면 상현이나 다른 간부도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들어오시라고 합니다.”


잠시 후, 수도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문을 열어줬다.

뭔가 텔레파시로 안쪽과 얘기를 나눈 건가.

아니면 유체이탈?


안쪽은 어두컴컴한 서고였다.

이런 데서 책 읽으면 눈이 나빠질 것 같다.


“오랫동안 기별 없던 만월의 소식을 누가 가져왔나 했더니. 데렌, 자네였군.”

“예, 하현 어르신. 소금 장수 데렌입니다.”


안쪽에는 검은 로브를 입은 노인이 책상에 앉아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는 영감님보다 훨씬 하얗게 셌지만, 피부는 생각만큼 주름지지 않았다.


“음? 자네 말고 다른 이의 기척이 느껴지는군. 누구인가?”


그런데 노인은 눈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초점이 맞지 않는 그의 양쪽 눈동자는 하얗게 색이 혼탁해진 상태였다.


“그는 만월 어르신의 제자, 리안입니다.”

“호오. 그 친구가 바로 소문의···. 그런데 어찌하여 스승은 오지 않고, 제자만?”


그러자 데렌은 나더러 대신 대답하라는 듯, 살짝 옆으로 비켜선다.


“영감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오오, 세상에! 어찌 그런 비극적인 일이···. 대체 무슨 연유로?”


나는 대답하기 전에 데렌을 흘끗 쳐다봤다.


결국 진실을 말해야 할 때가 와버렸나.

어설픈 거짓말을 해 봤자 바로 간파하겠지.


하지만 괜찮다.

내겐 다 계획이 있으니까.


“영감님은···. 살해당했습니다.”

“뭣이···?!”

“뭐라곳??”


저 하현이란 노인네는 그렇다 치고.

데렌도 진짜 사인을 듣자 깜짝 놀란다.


아니 그럼.

뭐 어떻게 죽었겠다고 생각한 건데?


“데렌. 이 친구의 말이 사실인가?”

“예···. 아무래도 그런 듯합니다.”


데렌은 당황한 얼굴로 목 언저리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인다.

목에 뭔가 거짓말을 판별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차고 있는 걸까.


“흐음. 그 친구를 죽이다니. 필경 보통 인물은 아니겠군···.”


뭐, 내가 좀 보통 인물이 아니긴 해.


“리안, 혹여 자네 스승을 살해한 자가 누구인지는 아는가?”

“영감님과 대화 나누던 걸 보면 구면인 듯했는데, 정작 전 그자의 얼굴을 못 봤습니다.”


내가 영감님과 구면인 것도 사실이고.

사람은 자기 얼굴은 직접 보질 못하니까.


“···사실입니다.”


거짓말 탐지기 데렌이 곧바로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인증해 준다.

거봐, 거짓말은 안 했다니까.


그러자 하현 노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진다.


“리안, 좀 더···.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주게.”


뭘 말해주는 게 좋을까.

역시 그것부터 짚고 넘어가 보는 게 좋겠지.


“우선, 영감님이 살해당한 장소는 어느 유적이었습니다.”

“···유적? 어떤 유적 말인가?”

“영감님 말론, 어느 문헌에도 기록되지 않은 잊혀진 시대의 유적이라더군요.”

“이런···! 하필 그런 곳에서?”


그런 유적이 있다는 건 진즉 알고 있다는 반응.

분명, 이 조직도 영감님의 그 망상 같은 연구 활동과 관련된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들도 내가 한글을 읽을줄 아는 걸 알면, 영감님처럼 급발진하려나.

역시 그건 가능한 숨기는 게 좋겠지.


“만월 어르신이 유적에서 살해당했다면···. 설마 다른 형제에게?”

“데렌, 성급한 소리 말게! 애초에 우리 중에 그럴 능력이 있는 자가 누가 있는가?”

“하지만 어르신! 기사단 외부에 그 유적의 존재를 아는 이가 있다면, 그게 더 큰 일 아닙니까!”


역시 영감님의 동료답다.

적당히 밑밥을 깔아주니까 알아서 시나리오를 써주네.


“그런데 리안.”


차분하지만 무겁게 깔린 음성.


“자네는 어떻게 그자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나?”


제법 날카로운 지적이다.

내 이야기 속에 감춰진 허점을 잘도 찾아냈다.


하지만 이마저도 준비해 놓은 대답이 있다.


“그는 영감님을 죽인 뒤에 적잖이 당황한 것 같더군요. 절 죽일 생각은 없어 보였습니다.”

“음. 그런가?”

“애초에 영감님이 그를 먼저 공격했기도 했고요.”

“허···.”


영감님이 선빵 쳤다가 되레 역습당해서 졌다는 얘기에, 데렌과 하현 노인은 말을 잊지 못했다.


“솔직히···. 제게 그날의 일은, 여전히 많은 것들이 미궁 속에 남아있습니다.”


솔직히 난 아직도 영감님이 그렇게 급발진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니까.

끝에 가서 또 돌변한 이유도 전혀 모르겠고.


“하현 어르신. 리안이 지금껏 한 말에 거짓은 한 톨도 없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여러모로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할 듯하군···.”


그렇게 내 마지막 한마디까지 데렌의 검증을 거치고 나자.

두 사람은 잠시 떨어져, 조용히 실체 없는 배신자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제 이걸로 내가 골치 아파질 일은 없으려나.


“설마 중앙에서 저지른 일 일까요?”

“단언할 순 없네. 지부들끼리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않은지, 벌써 몇십 년이나 되었으니···.”

“알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제가 상현께 보고해 놓도록 하죠.”

“그래. 자네에게 맡기지.”


그 둘을 그러고서 한참 더 이야기를 나누더니.

갑자기 하현 노인이 내게 다가온다.


“리안. 만월의 표식을 자네가 들고 있다고?”


그 말을 듣고서, 품에 넣어뒀던 운철 주화를 꺼내봤다.


여기 한쪽 면에 새겨진 동그란 원.

아마도 이건 보름달을 표현한 문양이었던 것 같다.


“이 주화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영감님이 숨을 거두기 직전, 제게 건네줬습니다.”

“그런가. 그게 그 친구의 뜻인가···.”


하현 노인은 다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그 친구가 제자를 들였다 했을 땐, 반신반의했는데···. 진심이었던 거군.”


그러고 보니 영감님이 내게도 말한 적 있었지.

내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그의 제자라고.


그런데 그런 제자를 급발진 해서 죽이려 했다고?

다시 생각하니 열받네.

망할 노망난 노인네.


“그렇다면. 그 표식은 당분간 자네에게 맡겨두도록 하지.”


하현 노인은 도로 넣어두라는 듯.

주화를 들고 있는 내 손을 내 품 쪽으로 밀어낸다.


이 사람 앞이 안 보이는 거 맞나?


“리브라 기사단의 일원이 된 것을 환영하네, 형제여.”


그는 온화한 미소를 띠며 내게 그렇게 말했지만.

기분 탓인지, 내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도망가면 끝까지 찾아내서 반드시 죽이겠다.’라고.



* * *



옛말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던가.

그런 의미에서 제법 성공적인 침투였다고 생각한다.


이런 비밀 조직은 그들과 항상 같은 곳에 머무르는 게, 상대하기 가장 좋은 대처법이니까.


“그래서 전 이제 뭘 하면 되나요?”

“음. 잘 모르겠어. 자네의 경우, 여러모로 특별하다 보니 말이야.”

“제가 영감님의 후계자라서요?”


낙하산이라.

그것도 나쁘진 않을지도.


물론 의무와 책임만 있고, 그만한 보상이 안 따라와 준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나로서는 만월 어르신의 뜻이 가장 첫째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을 걸세.”

“뭐, 이해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설치는 꼴을 누가 보고 싶겠어요?”


데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그 하현 노인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더니.

내가 영감님 제자로 들어간 일이, 예전부터 내부에선 여러 가지로 말이 나왔던 모양이다.


“어쨌든 자넨 당분간 웨이룬에서 머무르는 게 좋을 것 같네.”

“얼마나 오래요? 노잣돈이 되려나 모르겠는데요.”

“원한다면 성소 안에서 생활하는 것도 괜찮지. 기사단에 대해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야.”

“아뇨. 그거는 좀···. 제가 답답할 것 같아요.”


정착할 곳을 알아볼 겸 이 도시를 찾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지하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다.


“하긴. 방랑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그런 생활을 하는 것도 무리가 있지.”


그러고 보니 이 남자.

거짓말 탐지기로서 어디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데렌. 혹시···.”

“음?”

“이곳 영주님 밑에서 일한다는 란돌프란 마법사를 아세요?”

“아, 그 사기꾼 말인가?”


역시나!

이런 시골 영지마저 마법사가 있을 정도로 레드오션일 리가 있나!


그렇다면 마법사의 제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


“잘됐네요.”

“음? 잘됐다니?”

“그보다, 저랑 일 하나 해보지 않을래요?”


모름지기 나랏밥만큼 든든한 게 또 없거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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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거짓말(7) 24.09.05 29 1 12쪽
10 거짓말(6) 24.09.03 34 3 12쪽
9 거짓말(5) 24.09.02 45 1 11쪽
8 거짓말(4) 24.08.30 66 2 12쪽
7 거짓말(3) 24.08.29 85 3 11쪽
» 거짓말(2) 24.08.27 104 3 13쪽
5 거짓말(1) 24.08.26 119 3 12쪽
4 졸업(3) 24.08.25 140 3 12쪽
3 졸업(2) +1 24.08.24 151 4 13쪽
2 졸업(1) +1 24.08.23 195 3 13쪽
1 프롤로그 +1 24.08.23 204 4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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