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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번

환생해 보니 낭만 따윈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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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번
작품등록일 :
2024.08.21 19:29
최근연재일 :
2024.09.05 12:35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179
추천수 :
30
글자수 :
55,795

작성
24.09.02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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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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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거짓말(5)

DUMMY

웨이룬 성의 가장 높은 첨탑 위.

나는 앉아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란돌프와 마주 앉아있었다.


녀석은 날 보자마자 마법의 비밀을 캐내려 할 줄 알았건만.

한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폼만 잡고 있다.

아마도 자기 스승이 하던 행동을 따라 하는 거려나.

영감님도 만성이 되어버린 안구건조증 때문에 종종 저랬었지.


어쨌든, 덕분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자, 리안. 시작하자.”

“예, 스승님.”

“우선은 가장 기본적인 걸 확인해 보마. 마법의 근원이 무언지 한번 읊어봐라.”


그러면 그렇지.

조금은 본심을 숨겨볼 노력이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마법은 우주 만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우주 만물이란 무엇이지?”

“우주 만물은 나무와도 같습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무수한 가지를 이루고 있지만. 결국 그 본질은 하나입니다.”

“그렇지. 제대로 배우기는 한 모양이로군.”


되는대로 내뱉은 나의 헛소리에 란돌프는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이 녀석 마법과 관련되면 되게 잘 속네.


“하지만 인간은 결국 가지에 달린 나뭇잎에 불과합니다.”

“자세한 뜻풀이도 해보아라.”

“예. 낙엽이 되어 떨어지기 전. 즉, 육신을 잃고 영혼이 되기 전엔 우주 전체를 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 그러면 살아있는 동안 그것을 엿보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도 배웠겠지?”


자기가 원하던 이야기에 점점 가까워지자, 흥분을 감추지 못한 란돌프가 자꾸만 목을 앞으로 내민다.

내가 지금 검을 안 들고 있는 걸 감사히 여겨라, 임마.


“예. 우리는 명상과 올바른 호흡법을 통해, 육신을 초월한 정신을 얻어야만 한다고 배웠습니다.”

“뭐? 그게 정말이냐!?”


깜짝 놀란 란돌프의 코 평수가 두세 배는 더 커졌다.

순간 녀석의 모가지가 튀어 나가는 줄 알았네.


“네? 스승님께서도 그런 연유로 명상하고 계셨던 게 아닙니까?”

“어···. 그래 맞다. 네가 제대로 알고 있는 건지 재차 확인해 본 거였다.”


란돌프의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표정이 복잡 오묘하다.


등잔 밑이 어둡지만, 이제야 퍼즐이 들어맞은 느낌이려나.

미안하지만 너희 스승도 안구건조증 때문에 그러는 거였을걸.


사실 마나 연공법 같은 걸 최초로 개발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 한번 시도해 본 적 있었지만 안되더라.

덕분에 영감님한테 비웃음만 잔뜩 샀었다.


“이제 제일 중요한 게 남았구나. 초월한 정신을 얻기 위한 명상의 요령을 말해봐라.”

“우선은 몸에서 힘을 빼고, 배꼽 아래에 의식을 집중한 뒤···.”


전생에 옥장판 공장에서 잠깐 일했을 때였지.

휴식 시간만 되면 반장 아재가 막무가내로 가르친 단전호흡법.

그걸 이렇게 써먹게 될 날이 올 줄이야.


그나저나 맨날 마음수련 어쩌고 강조하던 그 아재.

결국 고혈압으로 쓰러져서 실려 갔었는데, 그 이후론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석 달쯤 수행하고 나니, 처음으로 작은 돌멩이 하나를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뭐라? 석 달이나!?”


란돌프 녀석, 하루아침에 마법을 쓸 수 있게 되길 바랐던 건지.

자기 기대에서 조금 어긋나자, 눈빛에 의구심이 생기려 한다.


“하핫···. 역시 좀 오래 걸린 겁니까? 스승님은 저보다 훨씬 일찍 그 경지에 도달하셨겠죠?”

“음! 당연하지! 나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었다.”

“그렇군요! 역시 굉장하십니다!”


하지만 조금만 띄워주니 금방 의심을 지운다.

그 대신 아랫입술을 자꾸만 오물거리며, 다리를 달달 떠는 모습에서 초조함이 느껴진다.


몇 달이나 걸린다고 하니 일분일초가 아깝겠지.


“가만히 들어보니 내 지식과 대체로 비슷하긴 하나, 조금씩은 다른 부분들이 있군.”

“그렇습니까?”

“일단 그 간극을 메꿀 방법을 신중히 고민해 봐야겠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거라.”

“예, 스승님.”


란돌프는 내가 떠나기도 전에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한 달쯤은 속여먹을 수 있으려나.

물론 내 목적을 이루는 데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다.



* * *



계획대로 자유시간을 얻은 뒤.

나는 성의 구조도 익힐 겸 복도를 어슬렁어슬렁 거닐었다.


그런데 그때 반대편에서 성에서 일하는 하녀가 걸어온다.


“어머! 안녕하세요, 수제자님!”

“네, 안녕하세요.”

“혹시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뇨. 예상보다 스승님의 첫 수업이 일찍 끝나서, 산책할 겸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지위란 참으로 신기하다.

난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이방인에 불과했건만.

지금은 이렇게 란돌프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존대해 주고 있다니.


그런데 종이호랑이의 권세를 빌리는 것도 호가호위라고 볼 수 있으려나?


“그러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지하라던가 함부로 가면 안 되는 곳도 있거든요!”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런 곳은 병사분들이 지키고 있을 테고···.”

“저, 그럼···. 그게 아니더라도···.”


그런데 이 하녀는 다른 이유로 내게 친절하게 구는 것 같다.


우물쭈물하며 홍조를 붉히는 게,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녀.

전생과 다르게 쓸데없이 잘생긴 이번 생에선 너무나 많이 본 표정이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정말로 괜찮습니다.”

“저, 그래도 혹시!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시거든 저를 꼭···!”

“아, 예에.”


나를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미안하지만 돈 많은 귀족 여자가 내 이상형이라서 말이지.


어쨌든 이렇게 성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덕분에 목적을 이루기가 한결 쉬워졌다.


선동과 날조도 어느 정도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 신빙성을 얻는 법.

그중에서도 성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고급 정보가 최고의 소재라 할 수 있겠다.


“음? 저 사람은 분명···.”


그렇게 성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이야깃거리에 귀 기울이고 있을 때.

저 앞에서 어디서 본 기억 있는 얼굴의 사내가, 손수레를 밀며 지나가고 있었다.


광장에서 랜돌프가 마술쇼를 할 때, 그 옆에서 조수 비슷한 노릇을 하던 사내다.


“저기, 실례합니다.”

“어엇!? 수제자님! 아, 안녕하십니까!”


내가 다가가자, 그는 고양이 앞의 쥐 마냥 긴장한 얼굴로 굳는다.


“그거 혹시 저희 스승님 물건입니까?”

“예,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네? 뭐가 죄송하단 거죠?”

“아, 그게···. 습관적으로 그만···. 죄, 죄송합니다!”


굉장히 위축된 표정과 몸짓.

그리고 말끝마다 사과하는 버릇.


이거 완전 고딩 시절에 일진 빵셔틀 하던 녀석을 보는 것 같은데···.


“긴장 푸세요.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답니까?”

“히이익! 절 돼지로 만드시려고요!?”

“하핫, 재미있는 농담을 하시네요. 누가 그런 짓을 한답니까?”

“어···. 그, 그렇습니까?”


느낌이 왔다.

내가 찾는 건 분명 이 사람에게 있다.



* * *



비록 환락과 번영과는 거리가 멀지만, 오늘도 평화로운 웨이룬.

해가 떨어진 뒤에도 남녀노소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점은 이 도시만의 장점.


그리하여 오늘도 한 취객이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서 밤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어흐으으. 세상아, 너도 취하고 나도 취했구나아. 돈다, 돌아···!”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던 사내는, 돌부리에 발이라도 걸렸는지 갑자기 몸을 휘청거린다.


“엇! 어어엇!? 어엇?”


사내는 깽깽이걸음으로 용케 넘어지지 않고 버텼다.

그러다가 돌담에 몸을 기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되찾는다.


“허헛! 평소보다 한 잔 덜한 보람이 있군···!”


그렇게 넘어지지 않고 버텨낸 자신을 대견스러워하던 찰나.

사내의 귓가에 생전 처음 들어보는 신비한 음색의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아닌가? 평소보다 한 잔 더 마셨나···.”


환청이 들려올 정도로 만취하다니.

내일은 꼭 평소보단 적게 마셔야지, 그런 다짐을 하고 몸을 일으키니 음악이 들려오지 않는다.


“엉?”


사내는 다시 한번 자신이 기댔던 돌담에 귀를 가까이 댔다.

그러자 음악이 또 들려온다.


그가 환청을 들은 게 아니라 돌담 사이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자세히 들어보면 아이의 웃음소리 같은 것도 간간이 섞여 있다.


“옳거니! 내가 취한 게 아니라, 이 담벼락이 취한 거였군!”


그러면 내일도 전처럼 마셔도 괜찮은 거겠지!

사내가 그렇게 기분 좋은 결론을 내리고 있을 때.


“킥킥! 인간들은 정말 어리석어! 자기들이 죽을뻔한 것도 모르고!”

“그러게에! 정말 멍청해!”


이젠 돌담 사이에서 사람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혹시 요정들이 연회를 여는 거려나!

그런데 사람들이 죽을뻔했다니, 대체 무슨 얘기인 걸까.


사내는 호기심에 숨죽이고 돌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마법사도 대체 무슨 생각이람! 그런 위험한 마법을 광장에서 왜?”

“글쎄에? 그런데 그 녀석. 저번에는 하인을 돼지로 바꿔서 구워 먹으려고 했잖아!”

“맞아, 그랬지! 그 새로 온 제자도 분명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걸!”


사내는 믿기지 않는 얘기에 입을 틀어막았다.


마법사라면 영주 밑에서 일하고 있는 그 란돌프를 얘기하는 건가?

그런데 그 분이 사실 위험한 사람이었나?

사내는 요정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얼굴을 돌담에 바짝 붙였다.


술로밖에 달래지 못하던 지루한 일상에 생겨난 작은 파문.

그는 그것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 * *



어느덧 노잼 도시 웨이룬에 새로운 흥밋거리가 생겨났다.

그건 바로 시민들 사이에서 빠르게 번져가는 요정의 돌담에 대한 소문.


시작은 어느 취객의 경험담이었다.

밤사이 돌담에 귀 기울이면 요정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단 이야기.

그 덕에 해만 떨어지면 사람들이 하나둘 돌담에 기웃거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내게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다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의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매일 물그릇에다 질문을 던졌다.


란돌프 이야기만 계속 들려주면 의도가 뻔히 보일 터.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물색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는 요정 라디오의 신뢰도를 높여주는 중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좋아! 오늘 밤엔 이거다!”


다만 물이 내게 보여주는 정보는 단편적이다 보니, 나머지 부분은 내 상상력으로 메꿔야 했다.


하지만 괜찮다.

원래 언론은 진실보다 사실이 더 중요한 법이거든.


“저, 저기 수제자님!”


우리 라디오의 첫 번째 사연 제공자께서 내가 머무르는 방문을 두드렸다.


“네, 무슨 일이시죠?”

“마법사님이 곧 광장으로 출발할 테니 준비하시랍니다!”

“알겠습니다. 곧 갈게요.”


오늘이 연설하는 날이었나.

여러 의미로 중요한 날인데 하마터면 깜박할 뻔했다.


내가 란돌프의 제자 행세를 하게 된 지가 어느덧 한주가 훌쩍 넘었다.


역시나 녀석은 날 제대로 가르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수업이랍시고 하는 게 매번 뜬구름 잡는 소리뿐이다.


란돌프는 그 대신 명상과 단전호흡에 푹 빠져있었다.

어찌나 깊이 몰두하고 있는지.

덕분에 주변에 다른 건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있는듯했다.


심지어 시민들 사이에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오늘 꽤 볼만하겠는데?”


라디오의 첫 번째 성과를 확인할 생각에 벌써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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