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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번

환생해 보니 낭만 따윈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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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번
작품등록일 :
2024.08.21 19:29
최근연재일 :
2024.09.05 12:35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178
추천수 :
30
글자수 :
55,795

작성
24.09.03 12:35
조회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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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2쪽

거짓말(6)

DUMMY

란돌프의 얼굴이 물 짜낸 행주같이 구겨졌다.


오늘은 그의 연설을 빙자한 마술쇼가 있는 날.

하지만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어야 할 시민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오늘 내 연설이 있다고 제대로 알리고 다니긴 한 거냐!”

“예옛···! 틀림없이 사흘 전부터 온 거리에 알리고 다녔···.”

“변명은 집어치워라, 이 게으른 녀석! 네가 제대로 일했으면 이렇게 됐을 리가!”

“죄, 죄송합니다!”


란돌프의 손이 올라가자, 겁 먹은 하인이 잔뜩 움츠러든다.


이렇게 된 데엔 다소 내 책임도 있으니 구해주는 게 도리겠지.


“스승님. 요즘 괴소문이 나돌고 있던데. 그 영향이지 않을까요?”

“괴소문이라고?”

“예. 스승님의 마법이 위험하단, 그런 터무니없는 낭설이 도는 모양입니다. 참나···.”

“뭐라? 내 마법이!?”


란돌프는 ‘대체 어쩌다 그런 소문이?’라는 표정이다.

그러니까 맨날 방에 처박혀서 명상만 하지 말고, 밖에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했어야지.


“스승님! 이런 때일수록 스승님의 훌륭함을 제대로 보여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이 우매한 것들에게 나의 위대함을 다시 각인시켜 줘야겠다!”


별안간 닥친 난관에도 불구하고, 란돌프는 당당한 걸음으로 무대 위에 오른다.


역시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지.

그래야 내가 힘들게 준비해 놓은 것도 헛수고가 되지 않을 테고 말이야.



* * *



란돌프는 넋 나간 얼굴로 무대 바닥에 널브러졌다.


“으아아아! 도망쳐!”

“괴물이···! 심연의 괴물이 기어 나온다!”


광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 달아난다.

무대 중앙에 피워놓은 화로에서, 검은색 촉수가 꿈틀거리며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뭐냐! 왜 저런 게···!”


뭐긴 뭐야.

설탕과 베이킹소다만 있으면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간단한 과학 실험이지.

물론 이 세계에선 희귀한 재료들이라 구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


어쨌든 불을 사용하는 만큼, 착한 아이들은 반드시 어른과 함께 실험하자!


“설마···. 이런 게 나의 힘이라고···?”


란돌프는 혼란스러움에 떨리는 눈동자로 자기 양손을 내려다본다.


“스승니임!”


나는 모래가 든 자루를 안고서 용맹하게 달려가 화로에 들이부었다.

이윽고 불이 꺼지면서 촉수의 성장도 조금씩 더뎌진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나, 나는 괜찮다. 그보다···. 대체 뭘 한 거냐?”

“불이 소환의 촉매가 된듯하여 꺼트렸더니, 저 흉물의 힘도 다한 듯합니다.”

“그렇군···. 잘했다.”


란돌프는 말하는 거와 달리 표정은 정작 썩어 들어간다.


자기는 꼴사납게 넘어지기나 했는데, 다른 사람이 사태를 해결했으니.

어지간히도 배알이 꼬이겠지.


“그런데 스승님. 어째서 저런 걸 불러들이신 겁니까? 설마···.”

“오, 오해 마라! 아무래도 잠깐 방심한 사이, 내 강대한 힘에 삿된 게 이끌렸을 뿐일 거다!”

“아···! 그런 거군요!”




“죄송합니다! 한순간이나마 괴소문을 믿을 뻔한 불충한 제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괴소문 말인가···.”


어느새 모두가 도망가 버리고 텅 비어버린 광장.

란돌프는 그것을 바라보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녀석이 그동안 쌓아 올린 기반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 * *



빌모어같이 온화한 사람도 화를 내는 순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그토록 아끼는 영지민에게 누군가 위해를 끼쳤을 때.


설령 이는 자신이 신뢰하는 심복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란돌프! 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해 보게! 근래의 괴소문에도 자네를 믿으려 했거늘!”


호통에 뒤이어, 콰직! 하고 둔탁한 소리가 이어진다.


분노에 찬 빌모어가 탁자를 어찌나 세게 내려쳤는지, 상판이 움푹 내려앉았다.


지금은 사람 좋은 이장님 같은 느낌이지만, 젊은 시절엔 수많은 전장을 다닌 무인이라던가.

갑자기 사람이 다르게 보인다.


“겨, 결단코 시민들에게 위해를 끼치려 한 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아무도 다치거나···.”

“그런 변명이나 듣자고 자넬 부른 게 아니네!”

“···죄송합니다, 영주님.”


란돌프는 결국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녀석의 성격상 조금 더 자존심을 부리다가 알아서 선 넘어줄 줄 알았는데.

역시 찐 귀족 앞에서는 저 오만한 녀석도 어쩔 수 없나 보다.


“게다가 자넨 가만히 있기만 하고, 리안이 사태를 해결했다고 들었네만?”

“그건···.”


고개 숙인 란돌프가 곁눈질로 날 노려본다.

억울하진 않지만 조금 억울하네.


“스승님께서 그 흉물을 통제하느라 집중하고 계셨기에, 남들에겐 그리 보였을 겁니다. 전 그저 조금 거들었을 뿐이지요.”


일단 일관된 컨셉을 유지하기 위해, 란돌프를 살짝 두둔해 봤다.

어차피 저놈 성격상 나대다가 다시 초 쳐놓을 게 뻔하거든.


“그, 그렇습니다. 설마 이 미숙한 녀석이 혼자서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란돌프! 자네는 가만히 있게!”

“윽···!”


역시 란돌프야!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


빌모어는 시무룩하게 고개 숙인 란돌프를 지나쳐선, 내게 다가와 어깨 위에 손을 얹는다.


“리안. 오늘 일은 잘해주었네. 자네가 내 백성들을 살린 걸세.”

“과찬입니다.”


사건의 진범으로서 아주 살짝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다.

하지만 멀리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니 맞다고 치자.


“란돌프. 자넨 한동안 가두연설 금지는 물론이고, 근신 처분일세.”

“명···받들겠습니다.”


나를 노려보는 란돌프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왜? 덕분에 요즘 취미로 들인 명상을 잔뜩 할 수 있게 됐잖아?


어쨌든 이걸로 스승과 제자 놀이는 거의 끝난 거나 마찬가지라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이제 슬슬 플랜 B로 전환한다.



* * *



시민들에겐 아쉬운 일이지만, 오늘 요정 라디오는 아무래도 휴방해야 할 것 같다.


‘네가 심부름 좀 다녀와 줘야겠다.’


저녁쯤 란돌프가 불러서 찾아갔더니, 대뜸 내게 심부름을 맡겼다.

근신 처분 때문에 움직일 수 없어 별수 없다나?


왜 하인에게 시키지 않느냐는 센스 없는 질문은 굳이 하지 않았다.


요즘 이 시간만 되면 요정 라디오 때문에 사람들이 돌담 근처를 어슬렁거려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한적하기 그지없는 밤거리.


누군가 거리를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슬슬 나오시죠? 거기 숨어계신 거 다 압니다.”

“우리 수제자님. 눈치 한번 참 빠르신데?”


아니나 다를까.

내가 심부름 가던 길목 중간에 건장한 사내 다섯이 매복하고 있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눈칫밥만 고봉으로 먹고살아서 말이죠.”

“하핫! 그렇게 눈치 좋은 친구가, 눈치가 없이 굴어서 일을 이렇게 만드시나?”


사내들 다섯 모두 사슬갑옷 위에 웨이룬의 문장이 새겨진 서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더러운 부패 공무원 놈들 같으니라고.

다들 란돌프와 한패라는 건 진작 알고는 있었지만, 하필 기사들이 움직일 줄이야.


그나저나 가운데 한 놈이 묘하게 낯익은데···?


“웨이룬의 밤거리는 안전하다고 들었습니다만. 다들 이렇게 저를 호위하러 나와주셨습니까?”

“그래. 우리가 친히 저세상까지 친절하게 모셔주마.”

“이것 참 기뻐서 눈물이 다 날 것 같네요”


지금 내게 무장이라곤, 허리춤에 숨겨둔 단검 한 자루가 전부.

반면에 상대는 갑옷도 검도 완전히 무장한 상태의 기사.


아무리 난전에 익숙한 나라도 이런 악조건에서 1대 5는 좀 많이 빡세다.


물론 예전과 같았다면 말이지.


“어! 저기···!?”


나는 입을 가리며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서, 놈들 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 어디서 그런 얄팍한 수를.”

“크흐흣. 그런 건 동네 꼬마도 안 속겠다.”


그렇게 기사들은 날 비웃었지만.


“자네들! 대체 거기서 뭣들 하는 건가!”


그때, 그들 뒤편에서 호통치는 빌모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영주님!?”

“허억···!”


기사들은 화들짝 놀라며 동시에 뒤돌았다.

하지만 소리가 들려온 곳엔 커다란 나무 한 그루만 서 있을 뿐.


“아차! 마법이다!”

“제기랄! 이런 환술을!? 이거 얘기가 다르잖아!”


그리고 놈들이 속임수를 뒤늦게 깨달았을 땐.

난 이미 녀석들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거봐, 속잖아.”


우선은 제일 앞에 있는 한 놈.

허리춤에 숨겨놓은 단검을 빼 들며, 놈의 목덜미를 찌른다.


“끄어억···!”

“넷.”


동시에 놈의 검을 가로채며, 그 옆에 놈을 올려 벤다.


“커거걱!”

“셋.”


여기서 욕심내면 금방 둘러싸인다.

일단은 물러서자.


나는 지면을 박차고 크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세 자루의 검이 차례로 허공을 허무하게 가른다.


“이 녀석 되다만 마법사가 아니었나···!”

“방심하지 마! 정확하게 급소만 노리는 솜씨···. 보통 놈이 아니다!”


순식간에 1대3으로 변했지만, 아직은 내게 불리하다.

그렇다면 내게 최선의 선택지는···.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나는 재빨리 뒤돌아서 전력으로 내달렸다.


“엇! 이 자식이 도망을!”

“쫓아가! 놓치면 안 돼!”


놈들은 당연하다시피 곧바로 추격해 온다.


역시 기사는 기사랄까, 사슬갑옷도 꽤 무거울 텐데 잘 뛴다.

하지만 각자의 달리기 실력이 다르다 보니, 조금씩 서로 거리가 벌어진다.


그렇다면···!


“둘.”


나는 갑자기 멈춰서서 몸을 돌리며, 그 원심력을 이용해 단검을 던졌다.


“어억···!”


역시 드워프 강철!

날아간 단검은 한 녀석의 사슬갑옷을 뚫고 가슴팍 깊숙이 박힌다.


“이, 약아빠진 녀석 같으니! 네가 그러고도 사내냐! 정정당당하게 겨루자!”

“니들은 기사가 한 명을 다굴치는 주제에 그런 말 하면 안 쪽팔리냐?”

“시, 시끄럽다!”


이제는 1대2.

그런대로 해볼 만해졌다.


“좋아. 일단은 정면승부 콜.”


나는 자세를 바짝 낮추며 앞에 녀석의 사선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상대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깃든다.


“멍청한 녀석! 완전 빈틈투성이군!”


라고 녀석이 생각하며 훤히 드러난 내 목을 내려치려 할 때.

나는 손가락을 까닥여, 바닥에 떨어진 검이 놈이 안면을 향해 튀어 오르게 했다.


그러는 사이.

앞에 녀석을 방패 삼아 움직인 탓에 뒤에 녀석은 아무것도 못 했다.


“으악! 뭐야 이건!”

“멍청아! 상대는 마법사라고!”


상대는 날아온 검을 재빨리 쳐냈지만, 덕분에 허리 아래가 완전히 비었다.


“끄아아악!”


오금을 베어내자, 녀석은 중심을 잃고 자세가 무너진다.

이후엔 상대의 턱 아래에 검을 갖다 대는 것만으로 깔끔하게 마무리.


“끅끄그극···!!”

“하나.”


나는 마지막 남은 녀석 쪽으로 시체를 밀쳐내며 자세를 잡았다.


“마, 말도 안 돼. 네 녀석···. 설마···!”


그러자 녀석은 사색이 되어선 조금씩 뒷걸음친다.

검을 쥔 자세를 흩트리지 않는 점만큼은 칭찬해.


그런데 역시나 이 녀석.

뭔가 면상이 익숙하단 말이지.

특히나 저 겁먹은 얼굴이.


“급소만 노리는 짐승 같은 칼솜씨! 그에 어울리지 않는 곱상한 얼굴!”

“어? 갑자기 칭찬? 고맙다.”

“흑곰 형제단의 미친 여우···!”

“어? 이야, 그 별명 듣는 게 얼마 만이야? 추억 돋네.”

“제기랄! 분명 3년 전에 죽었다고 들었는데!”


과거의 나를 아는 낯익은 기사라.

덕분에 잊고 지낸 옛날 추억들이 소록소록 다시 떠오른다.


그땐 수급에 미쳐있어서 정말 막 나갔었지.

그러고 보면 기사를 보고도 겁 없이 덤벼들게 된 것도 다 계기가 있었는데···.


“아아! 맞다, 너! 한 4, 5년 전이었나? 헤스트 평원 전투였지? 어쩐지 구면인 것 같더라니.”

“으으으···.”

“이야, 반갑다! 그런데 내 앞에서 똥오줌 싸며 도망간 새끼가 왜 여기 있냐?”

“씨바아아알!”


하긴, 빌모어가 아니면 누가 저런 낙오자를 기용해 주기나 할까.

웨이룬은 구조조정이 시급하다니까, 진짜.


“좋아. 우리 구면이니까, 너는 특별히 살려는 드릴게.”


물론 그전에.

녀석이 모든 걸 순순히 불만한 상태로 손질 좀 해야겠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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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거짓말(7) 24.09.05 29 1 12쪽
» 거짓말(6) 24.09.03 35 3 12쪽
9 거짓말(5) 24.09.02 45 1 11쪽
8 거짓말(4) 24.08.30 67 2 12쪽
7 거짓말(3) 24.08.29 86 3 11쪽
6 거짓말(2) 24.08.27 104 3 13쪽
5 거짓말(1) 24.08.26 120 3 12쪽
4 졸업(3) 24.08.25 140 3 12쪽
3 졸업(2) +1 24.08.24 152 4 13쪽
2 졸업(1) +1 24.08.23 195 3 13쪽
1 프롤로그 +1 24.08.23 205 4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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