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 속 마법사로 살아남기

프롤로그

샤워를 끝내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맥주 한 모금을 마신 뒤, 마우스를 움직이자 멈춰있던 화면이 켜졌다.

[OS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항상 느끼는 건데 OS 업데이트는 참 귀찮다. 갑자기 불쑥 업데이트 알림이 뜨거나, 나중에 하기 버튼을 안 누르면 저 스스로 재시작해 버려서 영 마음에 안 든다.

‘보안에 관련된 거니까 어쩔 수 없나.’

달리 생각하면 OS회사에서 시스템을 유지보수하고 고객에게 서비스한다고 생각하면 그러려니 하게 된다.

곧바로 바탕화면에 있는 게임 아이콘, 라스트 에라를 실행했다.

라스트에라. 고전 액션 RPG 명작.

스토리는 대충 나쁜 놈을 쓸어버리는 게임이고, 가장 큰 특징이라면 보스에게 뺨 맞고 잡몹에게 화풀이하는 게임이다. 시원하게 녹는 잡몹에 속도감과 재미를 느끼다가 보스를 상대하다 멘탈이 터진다.

“뭐야. 왜 안 넘어가.”

타이틀만 덩그러니 있고 실행이 안 됐다. 혹시 OS 업데이트 때문에 문제가 생겼나.

게임을 껐다가 다시 켜려고 했을 때, 검은 화면으로 바뀌고 곧바로 어두컴컴한 숲, 파괴된 마을을 배경 삼으며 게임 시작화면이 떠올랐다.

‘한글이 깨졌네?’

업데이트 때문에 실행이 안 되는 건 봤어도 한글이 깨진 건 또 처음이네.

업데이트가 문제인가. 아니면 라스트 에라가 출시된 지 십 년은 가뿐히 넘었으니, 게임이 문제일지도.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해당 오류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명작게임이라지만 업데이트 없는 싱글 게임. 이미 유저가 알아서 사골을 수백 번 우려서 맹물만 나올 지경.

‘영어로 하지 뭐.’

한글화 나오기 전부터 했으니 문제 될 건 없어서 언어만 바꾸고 계속했다.

캐릭터 창으로 넘어가 하드코어 모드를 누르자, 주변이 붉게 물들며 묘비가 나왔다.

[총 133명의 캐릭터가 사망했습니다.]

[마지막 죽음]

[성기사. LV99 생존시간 : 33시간]

[최장 생존]

[마법사. LV99 생존시간 : 49시간]

[최단 생존]

[광전사. LV5 생존시간 : 0시간]

“성기사는 진짜 아깝네.”

하드코어 모드는 잡몹 중에 정예몹이 추가되어 굉장히 까다로우며, 캐릭터가 한번 죽으면 끝인 모드.

그만큼 아이템과 몬스터 운빨이 중요한데, 성기사는 선택받았다고 할 만큼 좋았다. 그런데 하필 성기사의 카운터 속성이 달린 몬스터가 연달아 나올 줄이야.

‘진짜 억까가 너무 심하다니까.’

아무리 고인물이라도 재수 없으면 5분 만에 폭사해 버리는 하드코어 모드다. 물론 그런 경우는 진짜 드물다. 생각해 보니 그날 로또가 당첨됐었지. 4등짜리로.

그럼, 이번엔 3등? 그다음은···.실실 웃으며 캐릭터 생성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뭘 해볼까. 운이 좋다고 가정하면, 포텐셜이 높고, 컨트롤에 자신 있는 캐릭터를 해야겠지.

마법사를 선택했다.

광전사에 뒤지지 않는 손맛, 특수 몬스터 대처능력이 장점. 단점은 주문시전 타이밍 잡기, 부실한 생존기다.

단점은 상관없다. 음식에 원조할매비법이 있다면 게임에는 고인물 아저씨 빌드가 있는 법.

캐릭터 외형은 대충 무작위로 돌렸다. 회색 올백 머리가 인상적이군. 다음으로 캐릭터의 성장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본성.

[불타는 몰입 : 지속시간 30초. 재사용 대기시간 1분. 스킬 사용 시 모든 군중 제어 효과를 제거하고, 지속시간 동안 움직이며 주문 시전이 가능합니다.]

[마지막 원소: 재사용 대기시간 5분. 죽음에 이르는 피해를 한번 막아줍니다. 체력과 마력이 회복되며 주문 네 개가 즉시 시전 됩니다.]

[경직된 합일: 5초 동안 움직이지 않고 집중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가속도와 부정효과 저항력이 대폭 증가하고 마력 소모량이 감소합니다. 움직일 시 해당효과가 사라집니다.]

불타는 몰입은 범용성이 높고 평균 데미지 기댓값을 높여준다.

마지막 원소는 든든한 생존기가 생겨서 조금 더 공격적으로 게임 운영이 가능하다.

‘하지만 둘 다 고점은 낮지.’

마법사의 고점은 중고랩구간 마법스킬에서 나온다. 하지만 시전 시간이 길어서 사용하기에 껄끄럽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속도를 올려야 하는데, 문제는 가속도 수치가 붙은 아이템을 구하기 힘들다.

특히 마법사는 타 직업에 비해서 더욱 박하다. 대신 치명타와 속성저항은 구하기 쉽지만.

반면 경직된 합일은 5초 동안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 제약이 있지만, 기댓값만 놓고 보면 전설 아이템 한 개를 착용하고 있는 수준이다.

운이 정말 좋으면 중반부에 겨우 한 개 얻는 전설아이템을 초반부터 착용하는 메리트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5초 동안 움직이지 않기?

공격으로 찍어 누르거나 막거나 피하면 그만.

“무엇보다 익숙한 게 최고지.”

괜히 마법사로 최장 생존시간을 달성한 게 아니다.

다음은 전승포인트. 게임을 오래 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추가 능력치다. 증가하는 수치가 낮고 무한정 얻을 순 없지만 있으면 좋다.

가속도 소폭 증가, 체력, 이동속도, 타격시 마나회수, 마법저항력이 주로 찍혀있는, 직접 만든 마법사 빌드를 선택했다.

‘재수 없으면 다시 시작해야지.’

마법사 캐릭터 생성을 마치고 게임 시작을 눌렀다.

메뉴가 사라지고 캐릭터가 뒤를 돌자, 어두운 숲에 초점이 잡히며 화면이 어두워졌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로딩바를 지켜봤다. 떨어지는 피가 점점 느려지다 어느새 멈췄다.

“게임 끄고 업데이트나 삭제할까.”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예전에 했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 어?

검은 화면. 멈춰있던 핏방울이 발작하듯 글자를 만들며 화면을 뒤덮었다.

[обнаруживать,сазнати,查出,βρίσκω, descubrir,wergirtin,atopar,findeesheraus, zistiť,kitalál,tìmra,findout,scoprire, saznati,олжмэд,見つける,cognoscere,หา ]

[찾았다.]

그 순간 화면에서 검붉은 빛이 발광했다. 얼마 후 서서히 불길한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방안. 맥주캔 표면에 맺힌 물방울만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