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언트 윌
이현희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잘못하면 팀 전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엄청난 행운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정동혁이 누구인가 연합은 그와 만나지 못해 안달한다. 그의 한 마디면 이모탈 시티에서 마인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 자치령은 정현규가 죽고 새로운 사업 상대를 찾아야 한다.
이현희는 자신이 정동혁과 엮인 것은 정말 환상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은 누구보다도 정확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처음 자신에게 떨어진 명령은 파인드 아이 제거였다. 하지만 그녀는 정동혁의 잠재된 능력을 단번에 알아봤다. 정동혁과 친구가 되면 엄청난 득을 얻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또 다른 능력 중 하나인 사이오닉 능력은 정동혁이 미래 어떠한 인물이 될지 어렴풋이 그 존재감을 느끼게 해줬다.
그를 단번에 사로잡을 방법으로는 육체적인 유혹이 최고의 소재였다.
불사의 회람 수뇌부가 완전히 붕괴했으니 자치령이나 연합이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해 봐야 한다. 인간의 수급 문제와 이모탈 시티와의 상업적 거래처 개척,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선 남자가 정동혁이다.
그가 제 발로 찾아 왔으니만큼 여기서 단독으로 거래를 튼다면 자치령은 엄청난 이권을 손에 쥐게 된다.
악마들에게 둘러싸여 위험천만한 고비를 넘기는가 싶더니 엄청난 보물이 품 안으로 굴러 들어온 것이다. 절대 놓지 말아야 하는 엄청난 보물이다.
그녀는 땀에 젖은 머릿결을 뒤로 넘기며 하늘을 올려 봤다.
오늘은 오랜만에 신나는 하루가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이현희를 돌아봤는데 그녀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얼굴에 미소가 잔뜩 걸려 있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농염한 육체를 전투복이 다 가리질 못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그녀와 끈적했던 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린다.
박현의 목소리에 정신이 후딱 들었다.
"한강 위로는 놈들이 많이 없을 겁니다."
"북쪽에서 내려왔다고 했으니 위쪽이 더 많지 않습니까?"
"이놈들 마치 파도치듯이 밀려 내려옵니다. 위쪽은 이미 파도가 지나간 자리입니다. 놈들은 계속 남쪽으로 남하하고 있습니다. 남쪽은 연합이 담당하니 그네들이 알아서 토벌하겠지요."
"남쪽이라고 말하니 섬뜩 하군요."
"왜 그런지는 몰라 아마 본능이 시키는 것일까? 레더스컬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침공하는 순간부터 눈에 걸리는 것은 모두 죽이긴 하지만 멈추지 않고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고 있어."
"남쪽은 하우레스 라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거대한 방어막인 셈이네요."
"그렇다고 봐야지. 지속해서 토벌은 하지만 놓친 몇 무리의 레더스컬이 하우레스 라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어."
"악마군이라고 하는데 그 종류는 레더스컬뿐입니까?"
"아니 더 많아. 이번에 온 놈들의 주축이 레더스컬이고 다른 녀석들도 있어. 완전 인간형인 세슬로이드도 있지. 나중에 한 번 구경 시켜 줄게. 북쪽으로 올라가면 다양한 놈들을 만날 수 있어."
우리는 강변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겨울의 문턱이라 그런지 바람이 시원했다. 새로운 환경이 낯설긴 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창원처럼 폐허가 된 건물이나 숲처럼 자란 초목들이 주변 풍경의 모두다.
간혹 스파이더 윕 따위가 어슬렁거렸지만 이현희는 눈에 보이는 족족 처리했다.
"여기도 ITB를 쓰고 있군요."
나는 박현이 드랍된 아이템을 ITB에 넣는 것을 봤다.
"엄청난 구형이지. 이모탈 시티에서 공수해온 거야. 그것도 전원이 다 가진 것은 아니고 일선이나 사냥을 나가는 전사들만 사용할 수 있어."
"이것은 정말 대단한 물건입니다. 솔직히 에덴의 과학력이 부럽습니다. 이런 물건을 더 구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만."
이것만 보더라도 이들의 과학 수준이 이모탈 시티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악마들과 싸우느라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언제나 생존이었다. 여가 따위가 있을 수 없었고 그에 따라 과학을 발전시킬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이 정도 분위기만 봐도 대충 마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은 전부 던전에서 드랍된 아이템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런 전투복을 만들 자원도 없고 수고를 들일 시간도 없습니다. 그 시간에 몬스터 한 마리를 더 잡는 것이 이득이니까요."
"먹는 것을 제외한 잡다한 생필품은 대부분 던전에서 조달합니다."
"던전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우리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에덴에서는 어떻게 자원을 충당합니까? 에덴에는 모든 자원이 넉넉히 존재합니까?"
"저희도 자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한정된 자원을 부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마인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각성하지만 평범한 인간은 다양한 능력을 갖추고 각성합니다. 그것이 이모탈 시티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이 다시 철교가 이어지는 다리가 나왔다.
그리고 이들과 다른 마인의 무리를 처음으로 만났다.
"쉐도우 이펙트 팀이다."
세 명의 마인은 나와 이현희가 접근하자 단번에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이제 다 왔어. 저들은 한강철교를 방어하는 애들이야. 테라노바 자치령으로 들어가는 최전방의 경계병이지."
"한강철교를 따라 올라가면 용산역이 나옵니다. 여기서부터 마인의 손길을 탔기 때문에 다른 폐허보다는 한결 사람 사는 곳 같은 모습이 보일 겁니다."
용산역을 따라 올라보니 박현의 말대로 폐건물보다는 뭔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건물이 보였다. 그것은 마인의 힘으로 유지 보수가 되는 건물이라는 뜻이다.
"와, 저건 뭡니까?"
고층 건물과 건물 사이에 폐자재를 가득 쌓아 올린 희한한 벽을 보았다.
"자이언트 월. 테라노바 자치령을 보호하는 울타리 같은 것이야."
건물과 건물 사이에 폐자재를 수십 미터까지 쌓아 올려 일종의 성벽을 만들어 놓은 셈이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길이로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대충 높이만 해도 십 미터는 넘어 보였다. 그런 폐자재의 벽이 계속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네크로폴리탄이라고 부르지만, 이곳은 인간의 옛 도시 서울이야. 우리의 본거지인 서울역과 서울 시청을 중심으로 주변을 빙 둘러 자이언트 월을 쌓아 놓았지."
그제야 군데군데 돌아다니는 마인이 보였다. 이들은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인간으로 보인다. 전투가 아닌 평상시에는 마인 폼을 할 필요가 없으니 그냥 노멀한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이언트 월을 통과하여 드디어 테라노바 자치령으로 들어섰다.
건물도 깨끗한 편이고 오히려 이모탈 시티보다 더 화려한 건물도 눈에 띄었다. 갑자기 사람 사는 냄새가 확 풍겼다.
언뜻 보기에는 이모탈 시티와 거의 흡사한 수준으로 보였다. 건물의 밀도나 높이는 오히려 이곳이 더 커 보일 지경이었다.
"이모탈 시티에서 엘리시움 발전소의 설계도면과 기술자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 지옥 같은 곳에서 살고 있을 겁니다."
"어? 그럼 그 기술자가 이곳에 있습니까?"
"부끄럽게도 우리에게 납치당한 분이시지. 이젠 어쩔 수 없이 이곳 생활에 적응했지만."
"이명우 그분이 있어서 우리는 밤에 빛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 전까지는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죠. 시멘트 건물이 가득한 곳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확실히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군요. 이곳이 테라노바 자치령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에덴의 과학력을 받아들여 이곳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개조시키고 있죠."
"자이언트 월을 쌓은 것은 몬스터를 막기 위함입니까?"
"당연하죠. 자이언트 월은 주변 자생종은 물론 북쪽에서 내려오는 악마종까지 방어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 같은 곳이죠."
"자, 자 이곳에 왔으니 천천히 둘러볼 것이 많을 거야. 그전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있어."
"그게 뭡니까?"
"이곳을 이끄는 자들을 만나 보는 것. 동혁이 너는 이모탈 시티를 이끄는 사대 거물 중 하나잖아. 그런 입장에서 이곳 우두머리를 만나지 않을 수 없지 않아?"
"석천이란 사람 말입니까?"
"그래 그분이 테라노바 자치령을 이끄는 최고 사령관이야."
박현은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테라노바 자치령이 존재하는 것은 오롯이 석천 사령관의 피나는 노력 덕분입니다. 그는 우리의 희망이며 빛인 존재시죠."
"그리고 저번 데빌 사건 때 전세운 장로를 보았지? 이곳에서 가장 나이 많은 네 명의 마인이 있는데 그들을 사대 장로라고 불러."
"그 아래 직급은 옛날 인간들이 조직했던 군이란 조직의 계급을 따서 사용하고 있어. 그건 연합과 반군 녀석들도 마찬가지야. 계급 사회를 구성하는데 군 계급만큼 효율이 좋은 것이 없거든."
나는 이현희의 설명을 들으며 거리를 걸었다. 이모탈 시티의 복잡한 시내 한복판과 비교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모탈 시티의 사람들의 얼굴에는 번민이 거의 없고 밝은 웃음이 가득하다.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는 악착스러움이 얼굴에 담겨있다.
그러나 이곳의 감성은 첫 번째가 피폐다. 사람들의 얼굴은 무엇엔가 쫓기는 것 같은 찡그림이 가득 묻어났다. 답답함. 한숨 그러한 것들이 이곳의 공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얼굴을 보고 이현희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바로 알아차렸다. 이건 이현희가 가지고 있는 사이오닉 능력 때문이다. 그녀는 그 능력 때문에 쉐도우 이펙트라 불린다.
처음 나를 제거하러 이모탈 시티에 내려왔지만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단번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인물이 될 거라는걸 느끼고 나에게 접근해 왔던 거다. 물론 나는 그 끔찍한 올가미에 제대로 걸려 버렸다. 역시 미인계란 옛날이고 지금이고 남자를 미치게 한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어둡지 않았어. 이번 악마들이 쳐내려오면서 사상자도 좀 나왔고 무려 한 달을 토벌에 매진하다 보니 모두 다 지쳐 있을 뿐이야."
"그렇군요. 사람들의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입니다."
박현은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했다.
"사실 이곳은 늘 이렇습니다. 뭔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멋진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습니다. 죽음의 도시 같은 느낌이실 겁니다. 한없이 밝은 에덴과는 다르죠?"
"현아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원로와 석천 사령관님에게 엄청난 손님이 오셨다고 전해 드려."
"네, 대령님 그렇게 하지요."
박현이 떠나고 이현희는 나머지 팀원을 보고 말했다.
"너희들도 수고했으니 오늘을 좀 쉬도록 해."
"네, 그럼."
팀원이 다 떠나자 이현희는 내 팔을 잡고 이끌었다.
"테라노바 자치령에 온 것을 환영해."
"저도 감개무량하군요."
"아마 제 발로 여기 온 이모탈 시티 사람은 네가 처음일 거야."
"이곳도 그렇게 낙후된 것은 아니네요. 상점도 군데군데 보이고 무엇보다 건물이 세련되어 보입니다."
"백오 년 전에는 이곳이 가장 번성한 곳이었대. 남쪽 끝에 있는 이모탈 시티보다 더 활발한 곳이 옛 도시 서울이야."
나는 이현희와 나란히 걸으며 네크로폴리탄 이곳저곳을 보았다. 확실히 건물 밀집도와 건물의 웅장함은 이모탈 시티 보다 훨씬 뛰어나 보였다.
"어라, 이상한 건물이 있군요."
"후후, 그래 보여? 저건 숭례문이라고 해. 저건 더 이전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유산이라고 하는 거지."
"그렇군요. 고대 인간이 만든 건축물을 보존하는군요."
"뭐, 우리가 하는 것은 아니고 오래전부터 저 자리에 있었던 거야."
우리는 숭례문을 가로 질로 위로 올라갔다.
"도로는 텅 비어 있군요. 차량은 거의 없네요?"
"이런 좁은 동네에서는 차량을 이용할 필요성을 못 느껴 급하면 뛰면 되거든 골목길로 뛰어 다니는 게 훨씬 빨라. 마인은 생각보다 빠르거든."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석천 사령관이 있는 곳. 테라노바 자치령의 핵심이 자리 잡은 곳으로. 너는 매우 중요한 손님이야. 손님 대접을 함부로 해야 하겠어? 성심성의껏 내가 안내하는 거라고. 누가 감히 유령의 안내를 받아 볼 수 있겠어?"
"저는 아직 자치령과 사이에 어떤 계획도 머리에 담고 있지 않습니다."
"급하게 서두를 것 없어. 오늘은 단지 인사를 나누는 정도로 그칠 테니까. 너는 좀 더 이곳의 삶을 느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급하지 않다면 며칠 아니 몇 달 동안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땀을 흘려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이모탈 시티의 그 바보들이 가진 우리에 대한 인식을 고쳐 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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