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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elWr. 님의 서재입니다.

멸망한 세계의 미친놈들 : The Melting P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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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elWr.
작품등록일 :
2023.03.25 21:01
최근연재일 :
2023.04.02 18:00
연재수 :
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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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9,169

작성
23.03.3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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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첫 시련 - 2

DUMMY

“굴방끼리 줄은 제대로 설치됐지?”


켄트가 물으며 밖으로 이어진 줄을 툭툭 잡아당겼다. 잠시 뒤, 다시 툭툭- 하며 줄이 저절로 움직였다. 백 명의 대 인원을 수용하기엔 굴방 하나는 지나치게 좁았기에, 그들은 대략 열네 명씩 인접한 일곱 굴방에 나눠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 줄은 이렇게 원시적인 생존 신호를 보내거나 이동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기술총괄이 금세 설치한 장치였다.


“좋아. 수고했어, 주환.”

“벼, 별말씀을.”


주환이 더듬었다.


“아까 창고가 무너진 것 같던데, 누구 제대로 본 사람?”


행정관은 마치 누가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을 얘기하는 듯한 여상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의 질문에 누군가가 대답했다.


“무너지는 것을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그때까지 누가 남아있었는지는 알아.”

“말해줘.”

“사토시와 네드, 엘리엇과 오웬, 그리고······ 뱅가드와 리더.”


켄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


“발은 좀 어때?”

“제대로 부러졌어.”


크리스는 끙끙거리며 기어가 벽에 몸을 기댔다. 그와 도일은 이미 수납장과 책상 판, 그리고 허접한 침대 프레임으로나마 입구를 막았으며, 짚으로 엮은 매트리스와 나무 의자를 이용하여 모닥불을 피운 상태였다.


슁슁 거리는 바람 소리가 벌써부터 지긋지긋했다.


크리스는 허리춤을 더듬더니 조그만 가죽 케이스를 허리띠에서 풀어냈다. 그곳에는 주황빛 액체를 담은 주사기 몇 개가 꽂혀있었다.


그의 이마에 벌써 식은땀이 가득했다. 도일은 공허한 눈으로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크리스는 그중 하나를 꺼내 들고는 입으로 마개를 뜯어냈다.


“난 정말 쓸모없군.”

“이제 알았나?”


노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픽 웃었다.


“네 탓 아니야. 그 네 명의 죽음도, 지금 이 상황도.“


“날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맞아. 난 네가 싫어. 하지만 아닌 걸 맞다고 할 만큼 낯짝이 두껍진 못해. 물론 네가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다고는 절대 말 못 하지. 다만, 이 참사는 서기관과 행정관 녀석들의 잘못이란 소리야. ‘똑같은 시련은 단 하나도 없다’라고? 그걸 아는 녀석이 왜 시


련의 전조는 늘 일정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어이가 없군.”


그는 대답하며 신발을 벗었다. 양말은 온통 검붉은 색으로 칠갑 되어 있었다. 양말마저 벗겨내자 부러진 뼈가 발목 부근의 피부를 거의 뚫고 나온 것이 보였다. 그곳에는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시련은 우릴 더 강한 인간이 되게 하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힘만 센 짐승이길 자처한단 말이야. 야만인? 집어치우라 그래. 그들은 그냥 사육당하고 있는 짐승이야······ 이건 진짜 하기 싫은데.”


그는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을 하는 표정으로 발목을 잡고 힘을 주기 시작했다. 입에서 뿌득뿌득 이 갈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도일이 주사기를 담던 가죽 케이스를 입에 물려주고는 그의 발목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손끝으로 그가 움찔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셋 셀게. 하나, 둘, 셋.”


뼈가 제자리로 맞춰지며 형용되기 어려운 마찰음이 울렸고, 크리스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새 흰 자의 붉은 실핏줄이 모조리 터진 듯, 붉게 충혈되었다.


잠시 후 그는 가죽 케이스를 퉤- 하고 거칠게 뱉어내곤, 주사기 끄트머리에 달린 날카로운 침을 왼쪽 발목 부근에 천천히 꽂아 넣었다.


“뭐야 그건. 급속 치료제?”


그는 대답하지 않고 플런저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가, 뽑아냈다. 말없이 눈을 꽉 감은 그의 볼 위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다시 눈을 떴다. 도일은 무시된 질문 대신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이봐 뱅가드.”

“왜?”

“그럼, 왜 날 싫어하지?”

“싫은데 이유가 있나?”

“넌 있을 것 같은데.”

“맞아, 있어. 하지만 내 성격 상 돌려 말하는 방법을 몰라. 그래도 듣고 싶어?”

“가능하다면.”

“좋아. 간단해, 너도 결국 후원자에게 빌붙어 먹을 짐승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는 몹시도 폭력적인 그의 말에 잠시 머리가 어찔해질 정도로 화가 치밀었지만 그 이유에 대한 호기심이 그것의 폭발을 억눌렀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벌써 그의 발목 근처에는 실핏줄들이 울룩불룩 솟았다가 꺼지며, 뼈에 의해 찢어진 부위가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다가 말을 시작했다.


“전 리더, 멀린은 따뜻하고 착했지만, 단 한 가지. 후원자를 매우 증오했어. 언젠가 그들을 죽여버리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었지. 뭐, 그들이 우릴 도와준다고? 허, 이곳으로 집어넣은 게 누군데? 그걸 잊은 채 후원품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놈은 그저 짐승일 뿐이야. 이곳의 진짜 야만인은 그와 나 둘뿐. 유일하게 우리 둘만 초콜릿을 단 하나도 먹지 않았지. 나를 따르는 녀석들도 초콜릿에는 죽고 못 살더군.”

“근데 방금 쓴 급속 치료제는 후원품이 아닌가?.”


도일의 비아냥에도 크리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급속 치료제는 초콜릿과 바꾼 거야. 다른 녀석들처럼 후원자들에게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구걸한 게 아니라. 참고로 그 주인들은 이미 전부 죽었어. 하, 아마 급속 치료제가 있었다면 그들 중 몇 명은 살았을 텐데 말야. 목숨과 잠깐의 즐거움을 바꾸는 멍청함이라니. 그야말로 짐승의 행동인 거지.”

“좋아. 근데, 그게 왜 날 싫어하는 이유로 연결되는 거지?”


크리스는 점점 핏대를 올리기 시작했다.


“듣기나 해. 반대로, 행정관, 서기관, 기술공들은 어떻게 해서든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지. 그 의견 차이 때문에 둘은 많이 다퉜어.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멀린을 죽이려 했다고 믿진 않아. 다만, 만약 그게 사실이어도 난 전혀 놀라지 않을 거야. 아무튼 간에 멀린은 죽었고, 후원자들은 십 칠 년 동안 썩힌 이가 어느 날 시원하게 빠진 기분이겠지. 그런 녀석들이 새 리더랍시고 들여보낸 놈이 후원자들에게 뻗댈지, 고분고분할지는 그 멍청한 땅거미들도 단숨에 알아차릴걸. 그게 내가 널 싫어하는 이유고.”

“······고정관념이야. 그들과 타협할지 적대할지는 내가 나 스스로 정할 거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이곳에 들어올 때 그들이 네 머리에다가 무슨 짓을 했을 줄 알고?”

“만약 그런 짓을 했다면 내 눈앞에 있는 너도 후원자들을 열렬히 추종했겠지. 안 그래?”


왜 스스로만 자유 의지를 갖추고 있다고 확신하냐는 물음이었다. 크리스는 큭큭 대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래서 네 이름은 누가 지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대회의에서 지은 기억은 없어서 말야.”


굴방 안의 공기가, 밖과는 다른 의미로 사나워졌다.


-------


“뭐 좀 알아냈어?”


켄트가 노트와 시계를 번갈아 보며 무언가를 메모하고 있는 기술총괄 주환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

“지난번이랑은 조금 다른데.”


노트에는 지난 여덟 시간 동안 바람의 세기가 약간의 규칙을 가지고 변화해 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첫 한 시간 동안은 삭풍이 강하게 몰아쳤고, 음음, 십 분쯤은 비교적 약하게. 다시 한 시간 강하게 몰아치다가, 오분쯤 약하게. 그다음에 또 하, 한 시간, 그리고 다시 십 분, 그다음부터는 십오 분, 오 분, 십 분.”

“약하게 불 때의 세기는? 시간 규칙은 따로 없어?”

“비, 비교적 약하다뿐이지, 가시거리는 여전히 오 미터가 안 돼, 음. 마찬가지로 피부가 찢겨나갈 정도는 아니지만, 정면에서 불어닥치면 누구나 뒤로 나뒹굴걸. 그리고 시간 규칙은······ 없어. 물론 더 지켜보다 보면 드러날지도 모르지.”

“무너진 창고에서 물자를 더 가져오려면-”

“만약 오 분짜리가 걸린다면, 그야말로 떼 몰살 일지도 모, 몰라. 방법을 찾아야 해.”

“좋지 않군. 물자가 부족해. 특히 물이.”

“노란 정수기는?”


그것은 소년들이 오줌을 증류하여 마실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부르는 말이었다.


“물론 잘 쓰고 있어. 그래도 며칠 뒤면 다시 부족해질 거야. 게다가 뱅가드와 리더 둘의 행방을 모르니까 다들 불안해하는군.”

“주, 죽진 않았겠지?”


켄트가 힘없이 웃었다.


“그렇지 않길 바라야지. 만약 살아있다면 분명 다른 굴방에서 버티고 있을 거야. 하지만 걱정이 되긴 해. 그들에겐 아무런 물자도 없을 텐데. 그렇다고 우리가 수색하는 것도 힘들고 말야.”

“그들이 여길 찾아올 거야, 분명.”

“그래야 할 텐데.”


-------


“목말라 죽겠군······ 이 봐, 뭘 그렇게 쓴 거지?”

“규칙.”


그들의 언쟁은 피를 많이 흘린 크리스가 기절하듯 잠에 빠지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었다. 그동안 도일은 바깥의 바람이 조금 약해졌다는 것을 소리로 짐작하곤, 그 패턴을 돌로 간단히 그려두었다.


도일로서는 크리스가 몇 시간 전의 언쟁으로 혹시나 달려들진 않을까 손바닥만 한 돌멩이를 손에 꽉 쥐었으나, 그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크리스는 대신 그가 조악하게나마 적어놓은 것들을 보다 고개를 간단히 끄덕거렸다.


“그리 복잡한 규칙은 아니군.”

“복잡하진 않지만 까다로워. 무작위라니. 그래도 몇 시간이 더 흐르면 조금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럴 시간은 없어, 리더.”


크리스가 거의 잿더미만 남은 모닥불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저게 곧 꺼지면 우린 두 시간 안에 얼어 죽을 거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난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오래는 못 버텨.”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인 듯 말하는 그의 모습은,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꽤 창백해 보였다.


“너도 약한 소리를 할 줄 아는 구나.”

“정확한 상황 판단이야말로 최선의 결정을 낳으니까.”

“그럴 듯한데. 좋아. 그럼 바로 다음, 바람이 약해지는 시간에 출발하자.”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는 아나? 난 어느 어리버리한 자식을 구하다가 뒹군 탓에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몰라. 참고로 그 개자식은 그 이후에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안 하더군.”


도일은 그 도발을 애써 무시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왜지? 바람이 약해진다 해도 완전히 잔잔한 건 아닐 텐데?”

“······귀신이군.”

“육 년의 세월을 무시하지 말라고. 내 예상으론 이십 분이 주어져도 힘들 것 같은데.”

“단순히 밖으로 나가서 그들을 찾으려면 그렇겠지.”

“그럼 어디 한 번 네 계획을 말해 봐.”

“간단해. 우린 가로질러 갈 게 아니라 굴방을 따라서 한 칸씩 움직일 거야. 그러다가 바람이 다시 거세질 기미가 보이면 잽싸게 가장 가까운 방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숨는 거지. 굴방에서는 여기처럼 침대와 책상이 있을 테니 한 시간 동안 다시 모닥불을 만들어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 정확한 방향은 모르지만 왼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까, 일이 잘 풀린다면 서너 번 만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내 체력이 걱정이긴 하지만, 그래, 지금으로선 별달리 방법이 없네.”


소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처음으로 쓸만했어, 리더.”

“어떤 개자식이 은혜 갚는다고 생각해.”


도일의 말에 크리스가 픽 웃었다.


“바람이 약해지려면 십 분 정도 남았으니까 그 전에 준비를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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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첫 시련 - 4 23.04.02 9 0 18쪽
8 첫 시련 - 3 23.04.01 10 0 9쪽
» 첫 시련 - 2 23.03.31 12 0 12쪽
6 첫 시련 - 1 23.03.30 12 0 10쪽
5 시련의 시작, 그에 앞서. 23.03.29 14 0 9쪽
4 신고식 - 2 23.03.28 15 0 13쪽
3 신고식 - 1 23.03.27 15 0 10쪽
2 첫날 23.03.26 16 0 10쪽
1 프롤로그 + 늙지 않는 소년들 23.03.25 33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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