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CruelWr. 님의 서재입니다.

멸망한 세계의 미친놈들 : The Melting Pot

웹소설 > 일반연재 > SF

CruelWr.
작품등록일 :
2023.03.25 21:01
최근연재일 :
2023.04.02 18:00
연재수 :
9 회
조회수 :
131
추천수 :
0
글자수 :
49,169

작성
23.03.27 18:00
조회
14
추천
0
글자
10쪽

신고식 - 1

DUMMY

번쩍-


눈이 떠졌을 때, 그는 도로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은 어느 아늑하고 풍요로운 가정에서, 하룻밤의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짚단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너무나 생생했다.


“어이, 일어나. 식사는 스스로 해야지. 왜, 왕자님 대접받고 싶어?”


또다시 지드였다.


도일은 그 말에 벌떡 일어나 침대를 내려왔다. 허리띠에 매어진 권총이 덜렁거렸다.


“죽어도 싫은가 보군.”

“네가 그렇게 불려볼래?”


그가 통통한 귓불을 성의 없이 비비적거리며 대꾸했다.


“사양하지. 그 보다, 빨리 나와. 자꾸 늦으면 정말로 구십 구명의 난쟁이와 왕자님이 될지도 모르니까.”

“재촉은.”

“닥쳐, 그건 선생의 특권이야. 물론 닥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고.”


하늘은 여전히 회색빛이었고, 밝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면 무언가 다닥다닥 달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드. 하늘에는 탈출구가 없는 건가?”

“있으면 올라가기라도 하게?”

“내 말은······ 아니다. 맞는 말이네.”


앞서 걸어가던 지드가 서로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속도를 늦췄다.


“사실,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야.”

“결과는?”

“우린 아직 이 똥통에 있지.”


그가 발을 턱턱 굴렀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석조 건물을 짓고, 짚을 엮어 침대를 만드는 수준에서 어떻게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겠는가.


“이건 내가 들어오기 한참 전의 이야긴데,”

“그럼 이십 년쯤 됐나?”

“무슨 소리야, 멀린이 십칠 년 전에 들어왔어. 그보다 훨씬 오래. 그러니까 리더가 다섯 번쯤 바뀌기 전의 일. 물론 멀린이 아주 오랫동안 생존한 편이긴 하지만.”

“그전부터 이곳이 존재했다고?”

“기록상으로는 훨씬 이전부터. 더 알고 싶으면 나중에 서기관 보리스에게 물어봐. 아무튼 이곳 냄비에도 저기 밖의 탐험 구역에도 도저히 탈출구가 없으니까 하늘로 시선을 돌리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지. 결국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냄비 벽체를 타고 오를 수 있도록 쌓아 올린 계단의 높이가 사십 미터. 만드는 덴 삼 년이 꼬박 걸렸대.”

“그리고?”

“무너졌어. 삭풍의 시련이 닥쳤거든. 그 사고로 이십 명이 한꺼번에 죽었고, 우리 멜팅팟 역사상 처음으로 다섯 번 연속의 인간 보급을 받았지. 보통 시련은 열 다섯 명이 죽으면 자동으로 끝나서 한 번에 그 이상으로 죽을 일은 없거든. 그 이후로는 하늘은 완전히 포기. 이제 몇몇 탐험대원들이나 연구자들은, 특정 조건을 충족시켜야 출구가 나타난다는 방향으로 믿고 있는 모양이야. 아니면-”

“애초부터 내보내 줄 생각이 없거나.”

“그렇지. 어떤 미친 집단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이 많은 사람들을 가둬두겠어? 오히려 실험 공간으로 쓰고 있다는 게 더 그럴듯한 설명 같아. 그렇다면 당연히 탈출 가능성은 이미 막아놨겠지.”


그의 말이 몹시도 옳다고 느껴졌다.


도일은 언젠가 서기관 보리스에게 그 기록이라는 걸 받아보겠다고 다짐했다.


둘은 긴 대기 줄의 제일 끝에 섰다. 지드는 냄새를 킁킁 맡더니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아침부터 알감자구만.”


대기 줄은 금세 줄어들었고, 도일은 나무 접시에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삶은 감자 두 알과, 훈제된 조그만 고기 한 덩이, 괴상하게 생긴 샐러드를 받았다.


“열악하다더니, 꽤 괜찮은걸?”

“어제 보급품이 들어왔잖아. 모양은 그래도 맛은 꽤 좋아. 시련이 시작되면 그마저도 없으니, 기회 있을 때 얼른 먹어두라고.”


메뉴야 어찌 됐든 간에 도일의 텅 빈 위장은 벌써부터 꼬르륵 소리를 내었다.


삶은 감자면 어떠한가, 지금의 그로서는 나무껍질마저 벗겨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여나 떨어뜨릴까 조심조심 줄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툭- 하고 지드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삶은 감자 한 알이 접시를 벗어나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분명 칠칠치 못한 어느 소년의 실수라고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검은색 신발이 떨어진 감자를 짓이겼으니까.


지드의 눈을 따라 옮긴 시선의 끝에는,


그에 비해 한 뼘은 더 큰 키. 일그러진 미소. 낯익은 얼굴.


“사냥도, 모험도 안 다니는 겁쟁이가 과연 먹을 자격은 있는지 궁금하군.”


크리스였다.


주변이 금세 웅성거리며, 소년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냥도, 모험도 안 다니는 보급원들이 관리한 보급품을, 마찬가지인 요리사들이 조리해서, 기술공이 만든 접시에 담아 나무 포크로 집어 먹고 있다는 걸 네 가여운 머리통은 알고 있을까?”

“역시 날카로운 입담이야. 그런데, 보급이 다 떨어지면 뭘 먹을 생각이지? 그 잘난 보급품의 비닐 껍질을 핥아먹을 생각인가?”


지드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딱 육 년 전에, 내가 너에게 배식받는 법을 가르쳤지.”

“그래서?”

“아직도 가끔 기억이 나. 나무 접시를 붙잡고 울먹거리면서 먹던 너의 모습 말이야. 그때는 참 귀여웠-“


기어코 크리스가 지드의 멱살을 잡아 올렸고, 그의 접시는 모래 먼지 가득한 바닥에 나뒹굴었다.


“입 조심해, 선생.”

“그만해.”


도일이 멱살을 잡은 크리스의 팔뚝을 잡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어이, 신입.”

“왜, 뱅가드?”

“아직 선생 지드가 공손하게 말하는 법을 가르치진 않았나 본데. ”

“그러는 너도.”


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놔.”

“너부터.”


주변에 있던 소년들이 슬그머니 다가오자, 크리스는 다른 한쪽 팔을 내밀어 그들을 제지했다.


그가 눈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동공에는 광기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맹수의 눈. 그중에서도, 늑대.


도일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가 도일의 손을 잡아들자, 놀라울 정도로 쉽게 크리스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늑대가 으르렁거렸다.


“이 좋은 음식들을 마음껏 즐기라고, 신입. 곧 멋진 신고식을 치르게 해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크리스가 지드를 밀듯이 놓았고, 몇몇 소년들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우르르 몰려왔던 소년들은 상황이 끝나자, 각자 가려던 곳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드는 목 부위가 구겨진 옷을 탁탁 털었다.


도일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괜찮아?”

“응. 아, 이런 개새끼, 완전히 먼지 범벅이 됐네.”


무수한 모래 알갱이가 달라붙은 음식들을 보며 그가 대수롭지 않게 입맛을 다셨다.


“어떡하지?”

“괜찮아. 평소 같으면 속절없이 굶어야겠지만, 오늘은 그래도 넉넉하게 준비해 뒀을 거야. 보급 날이니까.”


다행히 요리는 꽤 남았으므로 지드는 새로 줄을 서서 다시 요리를 받아올 수 있었다. 그중에는 이미 한 접시를 처리하고, 또다시 줄을 서는, 키가 커다란 소년들도 보였다. 지드는 그들이 가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근데 정말이야?”

“뭐가?”

“아까 네가 크리스에게 말한 거.”

“음, 울먹거렸다고 했던 거 말이지?”


그가 입안에 가득 담았던 음식을 간신히 삼키고서는 대답했다.


“당연히 거짓말이지. 저놈이 괜히 미친 뱅가드가 아니거든.”

“그런 놈에게 한 방 먹인 너는 뭐야?”

“나야 당연히 멋진 선생이지. 감히 학생이 선생 멱살을 잡는 이 똥통 속에서도 말야.”


지드가 구운 감자를 반으로 가르며 말했다.


“그보다 난 네 신고식이 더 걱정인데. 정확하게는, 대회의라고 부르지만.”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고, 그의 굴방과 중심부의 가운데쯤 되는 곳에는 커다란 모닥불이 피워졌다. 켄트가 목소리를 높이며 소년들을 통제하려 했으나 소년들은 좀처럼 조용해지지 않았다. 몇몇 무리를 이룬 곳에서 유달리 그런 경향이 짙었다.


그때, 크리스가 나와서 몇 번 소리를 지르자, 그 소년들은 마치 순한 양처럼 제 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빙 둘러앉은 소년들을, 켄트는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우선, 이번에는 특별히 행정관인 내가 이번 회의를 진행할 거야.”


높이가 일 미터쯤 되어 보이는 목조 단상에 켄트가 올라섰다. 그는 그리 크지 않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전 리더, 멀린이 습격의 시련 도중 실종된 지 벌써 육 일이 지났어.”


그는 단상 위를 천천히 걸었다.


“첫날은 언제나처럼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지. 둘째 날엔 조금 걱정했지만, 여전히 그를 믿었어. 알다시피 멀린은 늘 그래왔으니까. 삼 일째가 되던 날엔 뱅가드를 포함한 모험대를 탐험 구역으로 재투입했고, 그들은 사 일째 되던 날 저녁에 돌아왔지. 마침내 어제는 새로운 인원이 우리 멜팅팟에 도착했어. 그리고 그의 역할은 리더야. 맞지?”


무수한 시선이 도일에게 날아와 꽂혔다. 그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켄트는 말을 이어나갔다.


“대책을 세우든, 누군가를 비난하든. 우린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어. 지금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단 하나. 멀린이, 리더가 죽었다는 거야.”


켄트가 소년들을 돌아보며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그래도,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오랫동안 우리를 이끌어왔던 멀린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 그는, 정말로 멋진 리더였으니까.”


두 명의 소년들이 갖고 있던 옷가지와 여러 가지 물건들을 모닥불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타다닥-


불꽃이 일렁이며, 불티가 허공에 흩어지며.


전 리더의 흔적이 바스러져 갔다.


많은 소년들이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


옷가지가 완전히 타들어 가고, 그의 목걸이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마침내 불길에 휩싸여 사라졌을 때, 켄트는 말을 다시 이어나갔다.


“모레면 다시 시련이 시작돼.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우리에게 새로운 리더를 차분히 교육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이젠 아니지. 알다시피 시간이 흐를수록 시련은 점점 가혹해지고 있으니까. 나는 행정관으로서 당장 내일부터 신입이 리더가 되어 빨리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부족한 부분은 당분간 우리들이 보완하더라도 말이야.”


짝짝짝-


외로운 박수 소리가 소년들의 가운데에서 울려 퍼졌다.


소년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소리의 주인공으로 시선을 모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멸망한 세계의 미친놈들 : The Melting Pot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 첫 시련 - 4 23.04.02 9 0 18쪽
8 첫 시련 - 3 23.04.01 9 0 9쪽
7 첫 시련 - 2 23.03.31 11 0 12쪽
6 첫 시련 - 1 23.03.30 12 0 10쪽
5 시련의 시작, 그에 앞서. 23.03.29 14 0 9쪽
4 신고식 - 2 23.03.28 14 0 13쪽
» 신고식 - 1 23.03.27 15 0 10쪽
2 첫날 23.03.26 16 0 10쪽
1 프롤로그 + 늙지 않는 소년들 23.03.25 32 0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