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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elWr. 님의 서재입니다.

멸망한 세계의 미친놈들 : The Melting P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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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elWr.
작품등록일 :
2023.03.25 21:01
최근연재일 :
2023.04.02 18:00
연재수 :
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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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추천수 :
0
글자수 :
49,169

작성
23.03.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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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신고식 - 2

DUMMY

“뭐지, 크리스?”

“좋은 연설이야, 행정관. 아주 감명 깊었어. 박수받아 마땅해.”


다시 그가 몇 번 손뼉을 쳤고, 그 주변의 덩치 큰 소년들이 그를 따라 소음을 보탰다.


켄트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런, 왜 이리 날이 바짝 서 계실까?”

“지금 회의 중이야.”

“그 잘난 회의에 대해서 말하려는 거야. 내가 말해도 되나?”


그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벌떡 일어나 단상 위로 올라갔다. 켄트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로.


“새로운 리더? 좋아, 필요하지.”


그는 시선을 돌리며 소년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너희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 왕자님에게 목숨을 맡기고 싶나? 도대체 뭘 믿고?”

“맞아. 아직 나는 쟤 이름이 뭔지도 모른다고. 설마 이름이 왕자님은 아니겠지?”


크리스가 앉아있던 곳 주변에서 발언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난, 뱅가드로서 무수히 많은 사냥과 탐험을 했다. 가드들은 우리의 공간, 냄비라도 열심히 지켰어. 그래,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가 비교적 풍족하게 사는 건 행정관과 기술공들 덕분이야. 멀린은, 뭐, 더 말이 필요한가?”


그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로 나를 노려보았다.


“우리의 힘으로 살아남았다.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충분히 다했고, 그렇다는 것을 서로가 믿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어. 여전히 누군가는 죽어 나자빠지고, 새로운 소년이 들어와서 몇 번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마침내 제 몫을 다해낼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하지만 리더라는 자리도 그러한가? 아니. 아니지. 리더의 판단 실수 하나에 동료들이 배를 곯고 죽어 나갈 거야. 나는 내 목숨을 새로운 리더를 교육하는 데에 바칠 생각이 조금도 없어.”


관중들은 완전히 압도된 듯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 우리가 도대체 뭘 믿고, 당장 내일부터 너에게 목숨을 맡겨야 하는 거지, 신입?”


시선이 다시금 도일에게 모였다.


그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의문 섞인 눈초리, 못마땅한 시선, 적대적인 눈빛.


그중 어디에서도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소년은 없어 보였다.


철저한 외부인.


그래.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어제 처음 도착한, 말 그대로 신입이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켄트가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검증해야지. 리더로서 적합한지.”

“네가 뱅가드가 된 것은 검증 따위를 거쳤기 때문이 아니야. 단지 네 재능 덕분일 뿐. 신입도 마찬가지-”

“그만, 행정관.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런데도 검증 운운하는 건 무슨 의도지?”

“이봐, 나는 우리를 더 잘 이끌 수 있는 리더를 뽑고 싶은 것뿐이라고.”


켄트가 그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좋아. 그렇다 쳐. 그런데 만약, 통과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건지 모르겠군. 그땐 네가 리더라도 될 참인가?”

“아니.”


소년들이 초식동물처럼 숨을 죽였고,


크리스는 반대로 송곳니를 드러냈다.


“신입을 죽이고, 다시 보름을 기다릴 거야. 새로운 예비 리더가 도착할 때까지.”


그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 혹은 분노.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 그것은 그의 머릿속이 평소와는 비할 바도 없이 냉정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가 가진 재능이, 리더로서 타시련 직감이, 도일에게 속삭였다.


얕보이지 마.


어린 사자는 하이에나에게도 잡아 먹히는 법이야.


그는 무엇으로 목적을 이룰 수 있는지 생각했다.


싸움?


말도 안 된다. 그와 나의 힘 차이면 백 가지의 기술이 무용할뿐더러, 그 기술조차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계획을 생각해야 해.


인망?


나는 어제 처음 이곳에 도착했다. 크리스보다 나을 리가 없었다.


언변?


필요하다.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화려할 필요는 없다.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한 마디면 충분하다.


그가 육체적 힘으로 날 깔아뭉갠다면, 난 말로써 그를 찢어발긴다.


······ 그리고, 권총.


권총은 아마도 비대칭 전력이다. 드러내는 것 자체가 손해이며, 냅다 쏴버린다면 잃을 게 너무나도 많다. 권총을 지키려면 앞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정말로 어떻게 할 수 없다면 사용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이상의 이득을 반드시 취해야겠지.


“신입. 지금 네 얘기를 하는데, 뭐라 말할 용기도 없나?”


그는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어린 사자가 늑대와 맞서기 위해서는 엄마를 불러와 그 가랑이 밑에 숨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왕자님. 혹시 오줌 지린 건 아니지? 어이, 아무나 가서 일으켜 세워보라고.”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황량한 벌판을 휘돈다.


좋다.


몰래 접근할 수는 없으니 오기를 기다린다.


옆에선 지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힐끔거린다.


몇 번의 조롱 섞인 말들이 지나가고,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이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다행이다.


날렵해 보이지만 체구 자체는 나와 비슷하다.


분명 정찰대 비슷한 역할이겠지.


그가 점차 다가오자 주변의 소년들이 길을 터준다.


소년의 앞에 서서는, 이 상황을 진심으로 즐기는 듯한 미소를 띠었다.


“일어나.”


도일은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눈앞의 소년이 겁에 질렸다고 판단한 듯, 더욱더 짙게 비웃음을 흩뿌렸다.


발끝으로 가슴팍을 툭툭- 두드린다.


도일은 한 번 더 참는다.


대신, 바닥을 짚은 손을 가볍게 말아쥔다. 모래가 손 틈 사이에 가볍게 파고든다.


그는 잠자코 앉아있는 소년에게 더 큰 모욕과 위협을 주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겁쟁이 새끼.”


마침내 그가 허리를 가볍게 숙였을 때.


그리하여, 그의 얼굴이, 도일의 주먹이 넉넉하게 닿을 거리까지 내려왔을 때.


도일은 상대방의 얼굴에 가볍게 왼손을 날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지금까지의 생존이 헛되지 않은 듯, 그는 멋지게 날아오는 주먹을 잡아챘다.


주먹에 숨어있던 모래가 흩날렸다.


그 얇고 미세한 입자는 간신히 주먹을 붙잡은 소년의 눈을 감게 만들었으며, 도일은 꽉 잡힌 왼손을 지지대 삼아 있는 힘껏 그의 관자놀이를 팔꿈치로 까버렸다.


소년이 바닥으로 나뒹군다.


으레 그렇듯, 바닥으로부터 먼지가 풀썩 솟아오른다.


소년이 마침내 제 처지를 인식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도일은 그에게 달려들었다. 멱살을 잡고는, 재차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계속.


코피가 터져 나오고, 몸이 축 늘어질 때까지.


주변의 소년들이 뛰쳐나와 그의 몸을 붙잡았을 때, 가련한 소년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도일은 잠깐 사이에 지쳐버린 그의 몸 상태를 느낄 수 있었다.


온몸에 피가 세차게 흐르고, 심장이 거세게 뛴다.


안 된다.


흥분해서는 안 된다.


요행으로 그의 송곳니를 막았으니, 이제는 이성으로 그를 부숴야 한다.


“······너희들은, 온갖 탐험을 나가고, 때로는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이곳을 지킨다고 하던데.”


그는 숨을 최대한 고르게 쉬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고작 어제 들어온 신입 따위에게 이렇게 당한다면, 너희들을 어떻게 믿지?”


갑작스러운 전개에 모두가 침묵을 강요당하다가, 마침내 터져나간다.


“저 새끼, 잭의 눈에다가 모래를 뿌렸어!”

“제대로 싸우면 한주먹 거리도 안 될 놈이.”

“비겁한 새끼!”


그런들 어떤가.


지금 기절한 것은 도일이 아니라, 크리스가 이끄는 탐험대의 길잡이인데.


하지만 몇몇 집단들의 아우성은 크리스의 침묵에 차차 잦아든다.


그는 완전히 조용해질 때까지 잠시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다시 교육하도록 하지. 철저하게. 깨어나면-”

“아니,”


도일은 고개를 내저으며 천천히 단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게 아니야. 알잖아.”


그 아래에서 크리스를 올려다보며, 그는 쓰러진 소년의 방향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죽여.”

“혹시 미친 건가.”


그 상황을 단상 위에서 지켜보던 켄트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 건드렸다. 인상적인 소년이었다. 이마는 넓고, 콧대는 높다. 검 갈색의 머리카락은 뒤쪽으로 자연스럽게 넘겼고, 눈은 부리부리했다. 키는 켄트보다 반 뼘 정도 더 컸다.


“아니, 유능한 거지.”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있어?”

“네가 이런 종류의 대화를 즐긴다는 건 알고 있지만, 선문답은 그만 둬.”


켄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그는 믿을 만 할까?”

“······그는 리더의 재능을 제대로 이었어. 이것 봐. 몸싸움 하나로 상황을 완전히 뒤집었잖아.”

“내 질문은 그게 아닐 텐데.”

“다시 말하지. 그는 유능해. 그 외의 것을 판단할 시간은 없어.”

“맞는 말이군. 그렇다면, 그래. 우선은 수습부터 해야겠네.”


켄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계획을 망친 건 미안하게 생각해. 크리스는 정말로, 당장이라도 이곳을 탈출할 생각이었어. 브리오둠에서 뭔가를 봤나 봐.”

“자책은 넣어두지. 일단은 당장 닥친 것부터 해결하자고.”

“좋아. 부탁해.”

“신입.”


켄트와 대화를 나누던 소년이 도일에게 걸어왔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도일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의 말을 정정했다.


“내 이름은 도일이야.”

“그래, 도일. 예비 리더.”

“예비란 말은 빼면 좋을 텐데.”

“······동료의 목숨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만 둬. 충분했어.”


도일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크리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움직임이 뜻하는 바를 데니스는 모르지 않았다.


“크리스, 너도.”


크리스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입을 떼었다.


“그러지.”


그의 말은, 뜻과는 달리 언제고 네 놈을 죽여버리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저 엇나간 자식.


데니스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나는 누구랑 얘기하고 있길래, 그 말을 얌전히 듣고 있어야 하는 거지?”


도일의 물음이었다.


가시 돋친 말과는 달리 그는 새로 나타난 소년에게 전혀 사감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개입은 도일로서는 매우 반길만한 것이었다.


만약 크리스와 그가 끝까지 맞섰다면. 그리하여, 정말로 크리스가 저 기절한 소년을 죽이고, 그 일을 부추긴 자신까지 정리해버리려고 달려들었다면.


그때는 몹시 난감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허리춤에 낭창이고 있는 권총을 뽑아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별개의 문제.


그는 아직 얕보여서는 안 된다.


도일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니스는 주머니 속 손바닥만 한 수첩을 그에게 들어 보였다.


“나는 집행관이야. 그리고, 처형은 내 소관이거든.”


그 가죽 커버에는, ‘공동체 생활을 헤치는 개자식들.’이라는 문장이 조악한 글솜씨로 적혀있었다.


“그래. 집행관. 역시 난 아직 모르는 게 많군.”


도일은 간단히 중얼거리고는 나무계단 위로 올라갔다. 켄트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으쓱하며 단상을 내려왔다.


그는 찬찬히 소년들을 둘러본다.


그들의 눈에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여전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의 불빛이 담겨있었다.


마치 연설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당당하게, 누군가가 대본 속삭여 준 듯 막힘없이, 그는 앞으로 같이 생존해 나갈 모든 동료들에게 처음으로 말했다.


“다들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거야. 아직은 나를 믿을 수도 없겠지.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녀석들도 많을 거고.”


그는 이제 막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한 길잡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너희들이 어떤 사람인지, 이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나는 몰라. 그러니까,”


그는 팔짱을 낀 채 올려다보는 크리스를 잠시 응시했다.


“나는 각자가 행하는 역할만큼, 가진 재능만큼 너희들을 믿겠어. 유능한 행정관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용감한 뱅가드로 믿을 것이고, 뛰어난 기술공으로 대할 거야. 그러니, 너희들도 나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딱 스스로의 재능을 믿는 만큼만 나를 믿어. 아직 우리에겐 그걸로 충분할 것 같으니. 그래, 그래도, 행정관이 말했던 것처럼 날 ‘야, 너, 거기’라고 부르게 둘 순 없으니까. 내 소개를 간단히 할게.”


그는 다시금 시선을 모든 소년들에게 돌렸다.


“나는 도일이야. 잘 부탁해.”


담담한 목소리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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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첫 시련 - 4 23.04.02 9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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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첫 시련 - 1 23.03.30 12 0 10쪽
5 시련의 시작, 그에 앞서. 23.03.29 14 0 9쪽
» 신고식 - 2 23.03.28 15 0 13쪽
3 신고식 - 1 23.03.27 15 0 10쪽
2 첫날 23.03.26 16 0 10쪽
1 프롤로그 + 늙지 않는 소년들 23.03.25 32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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