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CruelWr. 님의 서재입니다.

멸망한 세계의 미친놈들 : The Melting Pot

웹소설 > 일반연재 > SF

CruelWr.
작품등록일 :
2023.03.25 21:01
최근연재일 :
2023.04.02 18:00
연재수 :
9 회
조회수 :
137
추천수 :
0
글자수 :
49,169

작성
23.03.30 18:00
조회
12
추천
0
글자
10쪽

첫 시련 - 1

DUMMY

도일은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밝은 빛에 거울이 비쳐 시침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손을 동그랗게 모아 손목시계를 감싸자, 그제야 시각을 알 수 있었다.


11시 55분.


긴장감이 스멀스멀 온몸을 타고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떨리나?”


크리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전혀······ 아니, 사실 조금.”

“솔직해서 좋군.”


그가 픽- 웃었다.


켄트와 보리스가 나무로 된 커다란 창고에서 나와서는, 그에게로 곧장 걸어왔다.


“대비는 완벽해. 사막이든 침식이든, 최대한 빨리 끝내버리자고.”


행정관은 꽤나 여유로운 자세로 팔짱을 꼈다.


도일은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발견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생존의 위기는, 몇 번을 겪어도 담담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11시 59분.


기술공들에 의해 미세하게 조정된 탓에, 아마 냄비 속의 모든 시계는 정확히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이 왠지 모르게 든든하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초침은 9시를 딛고도 조금의 속도도 느려지지 않은 채 12시를 향해 달려갔다.


도일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5, 4, 3, 2, 1


그리고, 12시에 초침이 닿았다.


기이잉- 하는 커다란 작동음과 더불어 땅바닥이 조금 흔들렸다.


그는 어제 있었던 회의에서 들은 사실들을 기억해냈다.


바닥에서부터 열기가 올라오면 사막.


공기 중에서 악취가 느껴지면 침식.


각 시련의 진행 상황들을 세세하게 들으며, 그는 침식이 그나마 낫겠다고 생각했었다. 조금 굶더라도, 타들어 갈 만큼 뜨거운 것보다는 아무래도 나으니까.


다행인지, 발끝에서 아무런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고, 코끝에서는,


······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도일은 어리둥절했다. 뭐가 잘못된 건가, 아니면 다들 시련의 날짜를 착각했나?


그때,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피부를 긁어낼 것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소년들을 휘감아 지나갔다.


대부분의 소년들은 어리둥절한 채로, 시련이 바뀌었다느니, 혹한의 시련이라느니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이곳에서 오래 살았던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씨발.”


켄트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이거, 삭풍이야.”


크리스가 중얼거렸다.


“삭풍?”


그는 되물으면서도 지드가 했던 이야기 속에서 그 존재를 찾아내었다.


사십 미터짜리의 건축물을 무너뜨린 이야기.


켄트가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리더, 모두에게 빨리 창고에서 식량과 가죽들을 전부······ 아니다. 내가 하지.”


그는 도일의 표정을 보고선 그대로 뒤돌아 소년들에게 달려갔다.


삐익- 켄트가 힘껏 휘슬을 불고서는 악을 썼다.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다들 창고로 들어가서 식량과 가죽들을 되는대로 챙겨서 나와! 빨리!”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서 있는 소년들에게, 크리스가 외쳤다.


“안 움직여, 이 개새끼들아!”


그 말에 홀린 듯, 우르르 몰려가는 소년을 따르는 도일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보안관 에드리치.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왜 창고로 기어들어 가려고 해? 정신 차려, 리더.”


바람은 그사이에도 차츰차츰 거세지고 있었다. 모래 속 숨겨진 작은 자갈이 날아와 피부를 긁고 지나갔으며, 저 멀리로부터 먼지가 크게 일어나 점점 시야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젠장. 이래서 신입은.”


보안관은 그를 홀로 내버려 두고 소년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소년들이 우르르 들어올 때마다 나무 창고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적당히 챙길 수 있을 만큼만 챙기라고!”

“오 분, 오 분 내로 다시 나와야 해!”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몇 명 들어갔어?”

“이제 마흔 명.”

“속도 높이라고 해. 너! 너! 너! 세 명은 들어가지 말고, 애들 나오는 데로 보급 구멍 쪽 굴방으로 오라고 하고. 알았어?”


켄트의 목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도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소년들의 일원처럼 창고로 들어가지도 못했고, 켄트나 크리스, 보안관처럼 지휘를 하지도 못했다. 그가 어제 꾸역꾸역 머릿속에 처박은 지식과 구상하던 계획들은, 찬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 그 즉시 쓰레기 더미가 되어 머릿속에서 데굴데굴 굴러가 버렸다.


삐걱- 삐걱-


시간이 지나 짐을 껴안은 채 나오는 소년들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바람은 점점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세기로 발전했다. 그들은 나오자마자 보안관의 인도를 따라 켄트가 사라진 방향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여전히 도일은 홀로 남겨진 채, 그 누구에게도 존재 가치를 드러내지 못하고 불안하게 여기저기를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에는 휘슬이 힘껏 쥐어져 있었다.


“아직 안 나온 놈들은?”

“한 스무 명쯤!”


크리스가 창고 안으로 크게 소리쳤다.


“이제 그냥 나와!”

“젠장, 네드가 넘어졌어!”

“거기 사토시, 네드 좀 부축해줘!”


동양계의 소년이 다른 소년들을 헤집고 창고 속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나온 소년들은 켄트가 남겨놓은 이들의 지시를 따라 한쪽으로 몰려갔다.


나무 창고의 비명 소리가 점점 더 심해졌다.


그 이후로도 세 명이 창고를 나왔고, 또 한 명이 나무 상자를 품에 안은 채 삭풍이 휘몰아치는 밖으로 탈출했다. 그들은 어렴풋이 보이는 소년들의 뒷모습을 따라 뛰어갔다.


작은 돌멩이의 힘을 빌려 팔 가죽을 찢어놓았던 바람은, 이젠 스스로의 힘만으로 그 일이 가능하게 될 정도로 강해졌다.


“이제 몇 명이야!”

“안에 두 명!”


사토시가 다리를 질질 끌고 있는 네드를 부축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문 너머로 뛰쳐나오려던 마지막 두 소년이 얼핏 보이던 바로 그때였다.


"어- 어어어-"


콰직- 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창고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건물이, 그 형체가 점점 해체당하며 기우는 모습을, 소년들은 멍하게 바라보았다.


벽이 나무 속살을 내비치며 터져나가고, 육중한 무게를 떠받치던 기둥들이 세로로 쪼개졌다. 이 층의 바닥은 발 디딜 곳을 잃어버리며 무력하게 떨어져 나갔고, 또한 그 탓에 이리저리 뒤틀리며 날카롭게 부서진 기둥 하나가 바닥으로 쏘아졌다.


거대한 화살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그 기둥.


그것은 환자를 끌고 가다시피 발을 옮기는 사토시의 등을 무참하게 관통했다.


그의 살갗을 찢으며, 그가 부축하고 있던 환자의 팔 또한 끊어내며 바닥에 박혔다.


환자는 옆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질렀다.


사토시, 그 한 사람에 담긴, 한 사람 분량의 핏물이 화산처럼 솟구쳤다. 그의 형체는 이미 오래된 걸레 조각처럼 너덜너덜해졌고, 솟아오른 핏물은 금세 거센 바람에 의해 핏빛 안개로 분화했다. 마치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이 미안하다는 듯, 그 위로 건물의 잔해가 우수수 쏟아져 덮어버렸다.


도일은 한때 그의 의사였던 사토시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경악도 잠시, 그런 그를 향해 아마 지붕의 일부였을 판자들이 낙하하기 시작했다.


리더에서 시신으로 역할이 변경될지도 모를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그를 밀쳐내며 등 너머로 나뒹굴었다.


그가 비척비척 일어났을 때, 굳센 손바닥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정신 안 차려? 뒤지고 싶어!”


크리스였다.


그제야 도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에 있던 녀석들은!”

“다 죽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지금 안 움직이면 바람 때문에라도 찢겨 죽거나 날아가 버릴 거야.”


도일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크리스를 따라 달렸다. 소년들이 사라진 방향이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바람은 그새 방향을 바꿔 이젠 정면에서 그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아 둘은 기는 듯한 자세를 취했으며, 어렵사리 걸음을 옮기려고 해도 자꾸만 뒷걸음질 쳐졌다.


“이런 씨발!”


크리스가 악을 썼다.


“못 뚫어. 다른 방향으로 가야 돼.”


도일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크리스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또렷한 그의 눈빛에 크리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방향을 바꿨다.


얼마 되지도 않는 그 거리가 이렇게나 길었던가.


도일은 혹여나 몸이 뜨지 않게 조심하며 바람을 가로질렀다. 따끔따끔하다 싶더니 그의 팔은 어느새 여기저기 패인 상처로 가득했다. 새어난 핏방울은 피부 위를 흐를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허공의 붉은 점으로 흩어졌다.


문득 그는 크리스의 걸음이 더더욱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리스는 오른쪽 발목을 바닥에 단단히 지지하고서, 왼쪽 발목은 힘없이 바닥에 올려놓고는 팔을 이용하여 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그는, 발목을 다친 것 같았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바람의 소음을 견디며, 도일은 크리스에게 다가가 소리 질렀다.


“부축해줄까?”

“닥쳐!”


도일은 물어본 것이 아니었고, 크리스 또한 거절한 게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도일은 크리스의 반대쪽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안간힘을 썼다.


또다시 얼마나 걸었을까. 이젠 정말로 몸이 날아가 어느 벽에 산산조각 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이제 보인다!”


자신의 커다란 몸뚱이에 시야가 가려진 도일 대신 크리스가 외쳤다. 현재의 가시거리는 말 그대로 한 뼘이었으며, 그 이후로는 흐릿하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일은 그것을 고려하면 십 미터 정도밖에 남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크리스의 시력이 생각보다 월등히 좋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입안에 모래가 가득 괴었다.


눈을 꽉 감고 온 힘을 다해 크리스를 끌고 가던 도일은, 어느 순간 몸을 들이밀던 바람이 사라짐과 동시에 풀썩 쓰러졌다. 마침내, 그들은 굴방에 도착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멸망한 세계의 미친놈들 : The Melting Pot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 첫 시련 - 4 23.04.02 10 0 18쪽
8 첫 시련 - 3 23.04.01 10 0 9쪽
7 첫 시련 - 2 23.03.31 12 0 12쪽
» 첫 시련 - 1 23.03.30 13 0 10쪽
5 시련의 시작, 그에 앞서. 23.03.29 14 0 9쪽
4 신고식 - 2 23.03.28 15 0 13쪽
3 신고식 - 1 23.03.27 15 0 10쪽
2 첫날 23.03.26 16 0 10쪽
1 프롤로그 + 늙지 않는 소년들 23.03.25 33 0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