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CruelWr. 님의 서재입니다.

멸망한 세계의 미친놈들 : The Melting Pot

웹소설 > 일반연재 > SF

CruelWr.
작품등록일 :
2023.03.25 21:01
최근연재일 :
2023.04.02 18:00
연재수 :
9 회
조회수 :
130
추천수 :
0
글자수 :
49,169

작성
23.03.26 18:00
조회
15
추천
0
글자
10쪽

첫날

DUMMY

“이런, 정말 거하게 얻어터졌구만.”


조금은 통통한 소년이 굴방으로 들어왔다.


“반가워. 지드야. 알록달록한 게 아주 멋진데?”


지드가 비식비식 웃었다. 넉넉한 볼살이 그 틈을 타서 약간 출렁였다.


“놀리러 왔나.”

“뭐라고?”


지드가 못 들은 척 되물었지만, 소년은 답하지 않았다.


“아무튼 궁금한 게 많을 테지. 하지만 결국 말해줄 수 있는 건 하나야, 왕자님. 첫 번째, 네 역할에 맞는 일을 하고, 두 번째, 이곳에서 살아남아. 너는 리더니까, 리더에 어울리는 일을 하면 돼. 그렇게만 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걸?”


"그 애매한 대답은 뭐야?"


선생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양심. 무조건 살아남는다고 말하는 게 좋지만, 아닌 걸 아는 입장에서의 망설임이랄까.”


재밌는 녀석이네, 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좋아. 그럼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말해줘.”

“음, 처음부터 미안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아주 요만큼도.”

“그럼 어떻게 해?”

“그래서 내가 있잖아. 가르쳐 줄 테니까 열심히 배우라고. 물론 네 기분이 어떤지는 알아. 당황스럽고 절망스럽고. 뭐, 나도 이해해. 처음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이니까. 그래도 내가 장담할게. 한 달만 지나면 자기 분야에서는 누구만큼이나 익숙해질 거야. 여긴 그런 곳이거든.”


소년은 스스로에게 조금의 선택권도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드는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를 띠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 오늘은 첫날이니까 다른 것들은 집어치우고 이곳 구경부터 시켜 줄게, 냉큼 따라와. 아, 부축 필요해?”

“됐어.”


소년은 배를 왼손으로 부여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고통에 적응이 된 건지, 아니면 정말로 ‘멍청이’들의 몸이 튼튼한 것인지, 혼자서 걸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빨리빨리 나와. 곧 있으면 어두워질 거야.”


밖의 풍경은 말 그대로 냄비(pot)를 닮았다. 백 미터는 넘을 만한 높다란 회색 벽이 원형으로 둘러쳐져 있고, 그 벽에는 그의 굴방과 같은 구멍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뻥뻥 뚫려있었다. 그의 방에서 정확하게 대칭되는 곳에는 좁고 높은 출구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너머로 숲처럼 보이는 초록빛이 아른거렸다.


소년은 눈에 담은 광경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이 거대한 벽은 도대체 얼마만큼의 무게로 바닥을 짓누르고 있으며,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든 벽을 지탱하고 있는 바닥은 또 얼마나 거대한 구조물의 일부일까.


그렇다면, 그 거대한 구조물은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지은 것일까.


지드는 그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소년이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리다 말을 걸었다.


“이곳은 ‘멜팅팟’이라고 불려. 무슨 뜻인지 알겠어?”

“들끓는 냄비?”

“뭐, 비슷하지. 처음에는 다들 그 의미를 궁금해했다고 해. 무엇을 녹이고, 무엇을 섞어서, 결국 뭘 만들기 위해 이곳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 저것이 나타내는 것을 알게 되면 이곳을 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소년들도 점점 없어지고, 이제 와서는 몇몇을 빼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아. 이젠 그냥 저기-”


지드가 뒤쪽을 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한 자 한 자가 굴 방의 입구만큼 커다란 글씨로


The Melting Pot


이라고 쓰여있었다.


“저렇게 이름표가 붙어있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지.”


지드는 소년을 끌고 중심부로 걸어갔다. 높지 않은 석재 건물과 나무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고, 많은 소년들이 짐을 든 채로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소년마다 호기심이 담긴 곁눈질로 흘끔흘끔 쳐다보거나, 혹은 분노나 체념 같은 다양한 감정을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그 시선들이 몹시 불편했다. 호기심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무엇을 했다고 분노하며, 무엇을 못 했기에 체념하는 거란 말인가.


하지만 지드는 소년의 감정에, 혹은 다른 소년들의 행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듯, 열심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여기는 창고고, 저기는 회의실이고······ 창고에는 보급품을 분류해서 쌓아두거나, 잡은 고기들을 훈제해서 보관해 둬. 우리 생명줄이지. 회의실은 뭐, 당연히 회의하는 곳이고. 별건 없어.”

“사냥을 하는 거야?”

“응. 여긴 식량 사정이 좋지 않으니까. 보름에 한 번 보급품이 나오긴 하지만, 백 명이라는 사람이 먹기에는 부족하지. 아마 네 얼굴을 알록달록하게 색칠한 녀석도 지금 열심히 사냥 중일걸.”


소년은 눈살을 찌푸리며 눈두덩이 주변을 매만졌다. 쿡쿡 찌르는 것이 여전히 아팠다.


“왜 농사를 짓지 않고?”

“그게,”


통통한 소년이 머리를 긁적였다.


“보급품이 오는 날 근처로는 이렇게 평화롭지만, 사실 여긴······ 꽤 지옥에 가까운 곳이라서 먹을만한 식물은 못 자라. 그건 며칠 뒤면 체험할 테니 벌써 궁금해할 필요는 없어. 때가 되면 가르쳐 줄게. 더 궁금한 거 있어?”

“당연하지. 너희들은 왜-”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나가지 않냐고?”


"귀신 같은데?"


“십 년을 선생 일을 했고, 삼백 명을 가르쳤어. 이 정도는 당연한 거야.”


지드의 모습은 많아도 스무 살을 넘어 보이진 않았다.


말 그대로 늙지 않는 소년들이다.


“······잠깐. 여기 몇 명이 있다고 했지?”

“언제나, 줄곧, 백 명. 죽는 사람이 생기면 그 역할을 가진 사람이 또 들어오니까.”

“세상에, 십 년 동안 삼백 명이 죽었다고?”

“틀렸어. 육백 명이야.”


그가 검지와 중지를 펴서 내밀었다.


“선생은 두 명이거든.”


십 년에 육백 명이면, 한 해에 육십 명.


다시 말해, 오 일마다 분주하게 오가는 소년들 중 한 명은 죽는다.


소년은 자신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그의 선생에게 물었다.


“그럼, 왜 이 거지 같은 곳에서 나가지 않는 건데?”

“글쎄?”


선생은 희멀겋게 웃었다.


“혹시 여기가 마음에 들어서 머무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외부로 통하는 길, 다시 말해 ‘균열’에 대해서는 다음에 마저 이야기하기로 했다.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이 추워진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천장이 거대한 회색 돔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라면, ‘밤이 온다’라기 보다는 ‘불을 끈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몰랐다.


“후원자는 간단하게 말하면, 너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외부인이라고 생각하면 돼. 가끔 면도기나 질 좋은 옷을 내려주기도 하고, 네가 심각하게 다치면 귀하디 귀한 의료 키트를 후원품으로 보내주지. 물론 그러지 않을 수도 있고. 좀, 까탈스러운 녀석들이라서 말이야.”


굴방 입구 옆에서 그들은 벽에 몸을 기대었다. 저 멀리 중심부에는 여전히 기름 등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참고로, 조엘이라는 친구는 자신의 부모님을 후원자로 뒀어. 그 덕에 보급품이 내려올 때마다 쿠키나 초콜릿, 편지, 혹은 어릴 적 사진들을 전해 받기도 해. 부러운 녀석이란 말야.”


부모.


그를 낳은 사람이 이런 지옥 근처에 자식을 던져놓는다는 게 말이 될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자식조차 던져 넣어 끓이고 녹여야 하는 이 냄비의 목적은 뭘까.


······나에게도 부모님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뒤로하고, 소년은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럼 지원품은 뭐야?”

“아, 지원품. 난 그게 제일 특별한 보급품이라고 생각해.”


지드는 멋진 질문이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말로 타고난 스승 같았다.


“정확하게는 ‘역할’에 관계된 보급품이야. 사냥꾼에게는 활과 정글도. 길잡이에게는 나침반과 망원경. 나 같은 선생에게는,”

“회초리?”

“그게 있었다면 넌 이미 다섯 대는 맞았어, 멍청아.”


그가 큭큭 웃었다.


“사실 우리가 가장 많은 물품을 받아. 하지만 성능은 조잡하지. 날이 서지 않은 정글도. 간신히 나무에 박히는 활, 저 배율 망원경, 그런 거. 뭐, 선생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 많은 걸 알고 있지만, 어느 정도의 수준만을 알고 있는. 대신 쉽고 빠르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인 거지.”

“멋진데.”

“그렇게 생각해주니 다행이네. 아무튼, 지원품에도 후원자들의 입김이 들어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지. 뱅가드(vanguard, 선봉장) 크리스와 지금은 없는 전 리더, 멀린만이 가끔 반항아적인 행동을 많이 했지. 그들을 욕하려는 건 아니지만, 후원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오래 살아남으려면 따르는 척은 해두는 게 좋아. 그들은 분명 도움 되니까.”


소년은 슬며시 미소짓는 지드의 표정을 보며, 그의 철제 상자에 들어있던 쪽지를 떠올렸다.


그곳에는 유려한 필기체로 이렇게 쓰여있었다.



도일.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두 가지란다.

너 자신을 다스릴 거울, 네 사람을 매혹할 힘.


유용하게 쓰길 바라며,

CN. Santa Clause



소년은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에게 물었다.


“전 리더는 어떤 사람이었지?”

“따뜻했고, 열정적이었지. 늘 가장 먼저 싸우러 나가면서, 제일 늦게 돌아오던 사람.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권한을 내세우지 않던 사람.”


평소에 생각이라도 해둔 듯, 대답은 곧바로 튀어나왔다.


“아무튼, 이제 잘 시간이야. 순찰하는 가드들에게 괜히 걸리지 말고, 오늘은 얌전히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고, 멍청이.”


지드가 비척비척 일어나 그를 일으켜 줄 때, 앉아있던 소년은 그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앞으론 도일이라고 불러, 지드.”


그는 소년을 마저 일으켜 주고는, 씩- 웃어 보였다.


“그러지. 멜팅팟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해, 도일.”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멸망한 세계의 미친놈들 : The Melting Pot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 첫 시련 - 4 23.04.02 9 0 18쪽
8 첫 시련 - 3 23.04.01 9 0 9쪽
7 첫 시련 - 2 23.03.31 11 0 12쪽
6 첫 시련 - 1 23.03.30 12 0 10쪽
5 시련의 시작, 그에 앞서. 23.03.29 14 0 9쪽
4 신고식 - 2 23.03.28 14 0 13쪽
3 신고식 - 1 23.03.27 14 0 10쪽
» 첫날 23.03.26 16 0 10쪽
1 프롤로그 + 늙지 않는 소년들 23.03.25 32 0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