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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elWr. 님의 서재입니다.

멸망한 세계의 미친놈들 : The Melting Pot

웹소설 > 일반연재 > SF

CruelWr.
작품등록일 :
2023.03.25 21:01
최근연재일 :
2023.04.02 18:00
연재수 :
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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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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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5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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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프롤로그 + 늙지 않는 소년들

DUMMY

처음 그가 눈을 떴을 때, 온 세상은 단지 암흑이었다.


불가항력적으로 몰려오는 졸음에 다시금 눈을 감아도, 그 차이를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진한 어둠 속.


두 번째로 눈을 떴을 때 그는 비로소 그 간극을 인지할 수 있었다. 힘없는 백색광이 이곳의 형태를 어렴풋이 드러내고 있었다..


광원을 향해 손을 뻗어보려 했으나, 그제야 그는 자신의 온몸이 묶여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봐도 사슬은 그의 자유를 꼼꼼히 속박하고 있었다.


그기긱- 하는 파찰음과 함께 중심이 한쪽으로 쏠린다. 머리가 어깨를 넘어갈 정도로 몸이 기울자 콘크리트 같은 단단한 벽이 머리를 막아 세웠다. 오른쪽 얼굴이 거칠고 울퉁불퉁한 표면에 짓눌렸다.


여전히 흐릿한 등이 머리 위를 빠르지 않게 지나고 있었고, 따라서 그는 이곳이 ‘터널’ 비슷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 정도의 위치라는 것도.


그리고 어느 순간, 빛이 사라졌다.


어떤 백색 등이 사실은 마지막 광원이라는 것을 깨닫지도 못한 채, 그는 또다시 어둠 속에 버려졌다.


그는 비명을 질렀다.


목이 쓰라려 왔다. 입은 메말랐다.


성대가 불에 타는 것 같았지만,


그는 비명을 질렀다.


더는 그러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의 의식은 다시금 차분히 떨어져 갔다.


아래로, 아래로.


1. 늙지 않는 소년들



의식이 되돌아온 것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였다. 그것도 심각한 물리력에 기반한.

왼뺨이 몹시 뜨끈뜨끈했다.


“일어나, 이 새끼야.”


이번엔 얼굴이 왼쪽으로 휙 돌아가며, 별안간 오른뺨이 불타올랐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으나 마치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꽉 감고는 머리를 수 차례 털었다가 다시 눈을 떴다. 그제서야 초점이 제대로 잡히며 눈 앞에 일렁이는 형상이 뚜렷해졌다. 그의 앞에는 일그러진 표정의 소년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몹시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그 소년의 키는 그가 현재 반쯤 앉은 상태라는 것을 감안한다 치더라도 매우 컸다. 나이는 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짧게 깎은 갈색 머리에 커다란 덩치가 그의 실제 나이를 정확히 가늠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소년이 주변을 살피기 위해 몸을 돌리려 했으나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그의 살을 파고들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다. 그는 결국 움직임을 포기하고 목만 돌려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수많은 소년들이 그를 둘러싸여 있었으며, 그들은 호기심 반, 분노 반의 시선을 그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그만해 크리스. 일단 구속부터 풀고 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비교적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그를 폭행한 소년보다 몹시 작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친절함은 여전히 묶여있는 소년을 감동시킬 정도로 차분했다.


잠시 그가 볼 수 없는 뒤쪽이 웅성거렸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

“내 걱정마. 한두 번 하는 줄 알아?”

“멍청아. 얘 안 다치게 조심하라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대화가 오가고, 소년이 그 진위 여부와 관계 없이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무언가 딱딱하고 차가운 것이 쇠사슬과 피부의 틈사이를 파고들었다.


땅-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칭칭 묶고 있는 쇠사슬 하나가 잘려 나가며 바닥에서 먼지가 솟아올랐다.


커다란 볼트 커터였다.


그것은 다시 새 부리 같은 입을 한껏 열어젖히더니 다른 쇠사슬들을 우악스럽게 끊어내기 시작했다. 개중 하나가 떨어지며 무릎을 힘껏 두드렸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는 모든 쇠사슬이 끊어질 때까지 잠자코 참아냈다.


해방은 생각만큼 유쾌하지 않았다. 그의 육체는 마치 뭉쳐놓은 종이 다발처럼 꼬깃꼬깃한 상태 그대로 굳어있는 듯했다. 천천히 몸을 풀어보려 했건만, 눈 앞에 팔짱을 끼고 있던 소년은 그런 기다림을 경멸이라도 하듯 강제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온 몸이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버티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되다만 비명이 짓씹은 이빨 사이를 비집고 흘러내렸다.


그의 멱살을 크리스라고 불린 소년이 우악스럽게 틀어쥐었다.


“너, 역할이 뭐야.”


옆에 있던 차분한 목소리의 소년이 고개를 흔들었다.


“멀린 대신이면 당연한 거야, 뱅가드. 무의미한 질문은 내버려 두고, 이만 선생들에게 넘겨-”

“넌 제발 닥쳐! 여기서 멀린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아, 멀린이 죽길 바라는 것도 너밖에 없었지. 안 그래?”

“적당히 해. 그건 사고였어.”

“그게 사고인지 누군들 알겠어?”


그가 이죽거렸다.


“적당히 하라고 했어.”


크리스가 목소리만큼이나 차분한 갈색 머리 소년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은 소유자가 반쯤 분노에 정신을 맡겨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다시 묻지. 너, 역할이 뭐야?”


이제는 쇠사슬 대신 사람의 팔에 의해 자유가 구속된 소년. 그는 어딘가 멍해 보였다.


죽음?


멀린?


복부를 향해 발길질이 날아왔다.


“대답, 안 해?”


나뒹굴며 충격을 해소할 새도 없이, 그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발길질을 버텨냈다. 가슴 부근을 맞은 탓인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 허억허억- 대었다.


몇 번의 발길질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이곳······.


이곳은 멜팅팟(melting pot).


늙지 않는 소년들의 도시.


인류의 거대한 냄비.


그 속에서 역할이란,


재능으로 말미암은.


재능이라 함은, 유전자적 수준의 재능.


크리스가 분노에 찬 숨을 고르는 그 순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로 더럽혀진 소년이 답을 도출해내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역할.


그러니


내 재능의 역할은,


“리더.”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금세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를 것 같던 소년들의 웅성거림이 물에 잠긴 불꽃처럼 한순간에 픽- 사그라들었다.


잠깐의 정적.


“똑바로 말해!”


크리스가 있는 힘껏 날린 주먹이 소년의 얼굴에 적중했고, 소년은 그를 붙잡고 있던 두 명과 함께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두 명은 먼지를 일으키며 옷을 털고 일어났지만, 소년은 그러지 못했다. 단지, 어떻게든 움직이려는 듯 바둥거리다가, 있지도 않은 하늘을 바라보는 자세로 축 늘어졌다.


붉은 핏방울이 코에서 흘러나와 바닥을 툭 적셨다.


“일어나, 새끼야!”


또다시 달려들려던 크리스를, 갈색 머리 소년이 제지했다.


“그만하면 됐어. 얘는 이미 기절했다고!”

“한 번만 더 막아서면, 그때는 정말로 가만 안 둬, 켄트.”

“글쎄, 후원자들이 참 좋아라 하겠군.”


둘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메마른 바람이 모래 먼지를 가득 담은 채 둘 사이를 휘돌았다.


크리스가 먼저 발길을 돌릴 때까지 둘은 언제까지나 그럴 것처럼 보였다.


“내가 무서워 할 줄 알았나? 언젠가 그 개자식들도 죽여버릴 거니까 기대해.”


그가 떠나자 몇몇 소년들이 뒤따라 빠져나갔다.


“클라크는 일단 보급품 목록부터 만들고 도움 받아서 창고로 옮겨. 일손 부족하면, 돌아갔던 애들 다시 불러와. 조단, 후원품 챙겨서 각자 전달해 줘. 그리고 사토시? 신입이자 우리의 새로운 리······”


켄트가 여전히 널브러진 소년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얘 좀 치료 좀 해 줘야겠다.”


소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그는 유난히 작고, 유일하게 철제로 된 상자를 집어 들었다.


“켄트?”

“응, 왜?”


조단이었다.


“너에게 온 후원품이 있어. 어라, 별로 안 놀라네, 몇 년 만에 받은 거 아냐?”


켄트가 픽- 웃었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러시겠지. 아무튼, 지금 줄까, 아니면 네 방에다가 둘까?”

“지금 줘.”

“여기. 전달했다고 표시해 둘게.”


켄트는 사토시의 옆에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소년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 나서, 두 개의 자그마한 상자를 옆구리에 낀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멀린은 정말 죽었구나.”


켄트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가 천천히 풀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그들의 대표였던, 불과 오 일 전의 시련에서 실종된 리더를 떠올렸다.


...


눈을 뜬 그가 처음으로 본 것은 천장의 발갛게 타오르는 기름 등불이었다.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그는 손과 발을 움직이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제약은 없었지만 대가는 있었다. 끔찍한 고통이 바로 그것이었다.


척추를 통해 내달리는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앉은 자세로 고쳐앉자, 입구 쪽에서 졸고 있던 소년이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검은 머리의 검은 눈동자. 동양계의 소년이었다.


“아, 깼구나. 조금만 기다려. 켄트 불러올게.”


그는 침이라도 흘린 것처럼 입 주변을 옷 소매로 훔치며 멀지 않은 곳의 출구로 빠져나갔다.


그게 누군지도 안 가르쳐 주는군.


그는 멍하니 그렇게 생각했다.


무게중심을 이동하려 할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엉덩이 밑에서 들려왔다. 두툼한 천을 살짝 걷어내자, 얼기설기 엮인 짚 묶음들이 보였다. 등불에 의지하여 주변을 돌아보니, 벽들은 전부 회색이었고, 간신히 한 명이 앉을 만한 나무 의자와 책상, 수납장 정도가 전부였다. 출구에는 어떠한 잠금장치도, 문 같은 경계도 없는 것이 마치 굴을 연상케 했다. 그럼에도,


좁군, 좁아.


좁다.


좁···다.


그 터널처럼 좁다.


순간 숨이 옥죄어 온다.


마치 죽음이 목덜미를 핥는 듯, 문득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각인된 생존 본능에 머리가 핑핑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지.


다시금 기억을 떠올린다.


늙지 않는 소년들의 도시.


인류의 거대한 냄비.


그리고,


“살아남아라.”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마치 그 말이 머릿속에 박혀버린 것처럼, 회백질의 두뇌 어딘가를 손톱으로 긁어낸 것처럼, 어떤 짓을 벌이더라도 피할 수 없이 자꾸만 그 문장이 떠올랐다.


어떻게?


의문이 떠오른다.


왜?


내가 이곳에 버려진 거지. 혹시 죄를 저지를 걸까. 이곳은 감옥? 누군가를 끔찍하게 살해했던가. 그렇다면 저 소년들도 모두 많은 사람들을 죽인 범죄자인 걸까.


아니, 적어도 나는 그런 적 없다. 그럴 만한 기억조차 없다.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감옥에 보내고, 형벌을 내린다 한들, 그 누가 통쾌하다고 여길까. 혹시 모르지. 내가 이곳에 떨어진 이유를, 이곳의 목적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한 단서를 놓쳤을지도.


그는 팔로 무릎을 안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자신을 실어나르던 터널, 그를 마구잡이로 구타하던 어떤 소년, 이곳의 모습. 머릿속의 외침.


“살아남아라.”


더 이상의 정보는,


없다.


어떻게 여길 나갈 수 있지?


모른다.


모른다.


그는 잠시 숨을 참았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금세 눈물이 솟아오르고 혼란스러운 그의 머리통으로 참을 수 없는 공포감이 스멀스멀 기어들어 온다. 심장이 펌프질을 잠시 쉬어버린 것처럼 덜컥- 몸이 굳는다. 목젖에 누군가가 칼을 들이미는 것 같이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다시 한번.


그는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었다.


인간의 뇌는 멍청하게도, 호흡의 변화만으로 생존의 위기가 아니라는 것이 간단히 주입된다. 그는 아직은 잘게 떨리는 손을 무릎 사이에 넣고 주먹을 꽉 쥐었다.


떨림이 차차 멎어간다.


좋아. 그렇다면 다시.


나는 누구지?


나는,


······리더.


단지 그것뿐?


존재론적인 고민의 산물이 고작 역할이라니.


‘나’라는 것이 다만 역할로 규정될 뿐인가? 그럼 쓸모를 다하면?


편집증적 불안감이 다시금 차올랐지만, 급작스레 닥친 통증에 손쉽게 녹아내렸다. 그 끔찍한 고통은 입술을 깨물며 침대와 맞닿은 동굴 벽에 기대서야 견딜만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금세 흘러내린 식은땀을 소매로 훔치는 동안에, 호리호리한 갈색 머리 소년이 굴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마, 켄트라는 소년이겠지.


“거기, 몸은 좀 어때? 이런, 얼굴 상태가 말이 아닌데.”

“······당장 죽지는 않을 것 같아.”

“생각보다 침착한데.”


그가 잠시 놀란 표정을 숨김없이 내보였다.


조금만 일찍 들어왔다면 그 평가는 완전히 달라졌을 테지만.


“뭐, 하루 이틀 더 지나면 몸은 완전히 괜찮아질 거야. 여기 사는 멍청이들은 전부 몸이 튼튼하니까.”

“멍청이?”

“죽지도 못하고 이 냄비(pot) 속에 사는 사람들이지. 그러고 보니 인사가 좀 늦었다. 켄트라고 해.”


그가 내민 오른손을 잡자, 차분한 인상과는 달리 손바닥에서 거칠고 울퉁불퉁한 굳은살들이 느껴졌다.


“나는······ 기억나지 않아.”

“괜찮아. 원래 그래.”


그 태연약자한 모습에 소년은 잠시 분노가 솟구칠 뻔했으나, 간신히 잠재우고 말을 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눈앞의 소년은 자신의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지도 모를 상대방이었다.


“난 왜 이곳에 왔지? 여긴 어디야? 아니, 난, 난, 누구지?”

“워어, 궁금한 게 많을 테지만 우선은 기다리라고. 좋아. 우선, 네가 누군지는 나도 몰라.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면 멜팅팟(melting pot)이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지. 그리고, 왜 이곳에 왔냐 묻는다면, 그래, 네가 백 명쯤 살해한 다음, 그 시신을 가지고 봉제 인형을 만들었거나,”


소년은 그 대답에 심장이 철렁 내려 앉는 듯 했다.


“아니면 그냥 재수 없게 끌려왔거나. 어느 게 마음에 들어?”

“날 놀리는 거였군.”

“아니, 나도 모른다는 얘기지. 하지만 중요한 건 ‘왜’ 이곳에 왔냐는 것 따위가 아니야. ‘어떻게’ 이곳에서 살아남냐는 거지. 우선은 우리의 말을 따라. 이곳의 규칙과 생활 방식을 배우고 익히면, 그 후에 그런 고민을 하도록 해. 아무도 말리지 않을 테니. 그런 의미에서 언제까지고 야, 너, 거기, 이렇게 부를 순 없으니 이름 정도는 빨리 짓는 게 좋겠다. 시간 날 때 생각해 봐.”


약간은 냉소적이고, 또 약간은 그를 위하는 마음이 느껴진 듯하여, 소년은 잠자코 그의 말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보통은 어떻게 하는데?”


그가 수염도 나지 않은 반질반질한 턱을 매만졌다.


“대부분은 떠오르는 단어로 혼자 짓거나, 아니면 여기 있는 멍청이들이 지어줘. 앞으로 같이 생활하게 된 신입의 신고식 겸, 먼저 떠난 사람을 위한 장례식에서 말이야.”


신고식, 장례식?


그 이질적인 두 예식을 같이한다는 것이 소년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 드물지만 후원자가 지어주기도 해. 그런 경우 지원품에 이름을 남겨두지. 웃기지 않아? 요람에 싼 아기를 다른 집 대문 앞에 내버리는 것도 아니고 말야.”


후원자, 지원품.


그가 말을 해나갈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점점 쌓여갔다.


소년의 표정을 본 켄트가 큭큭 거리며 웃었다.


“아, 역시. 난 가르치는 것에는 재능이 없어. 끔찍한 수준이지.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곧 네 궁금증을 풀어줄 친구가 올 테니까. 그전에-”


그는 등 뒤로 들고 있던 철제 상자와 조그만 통을 소년의 무릎 위에 올려뒀다.


“이게 뭐지?”

“네 지원품. 앞으로 이 냄비 똥통 속에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물건. 그리고 이건,”


소년이 플라스틱으로 된 통을 흔들어 보였다. 달그락달그락, 내용물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땅콩.”

“땅콩?”

“비슷하게 생겼거든. 이걸 보름마다 한 알씩 반드시 먹어야 해. 기억하기 어려우면 그냥 보급이 올 때마다 먹는다고 생각해도 되고. 참고로, 코딱지 맛이야.”


그는 소년이 웃길 기대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쳇-하는 소리를 냈다.


“왜 먹는 건데?”

“큼, 호기심이 많군. 좋은 자세야. 기본적으로 우리 육체는 튼튼하지만, 여긴 그 이상으로 가혹하고 위험해. 한 순간에 머리가 잘려나갈 수도 있고, 반대로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죽어나가기도 하지. 이 땅콩들이 네 몸이 가혹한 환경에 적응하도록 도와줘. 추운 곳에서는 피부가 더 두툼해진다거나, 사막에서는 수분 없이도 더 잘 버티게 된다거나. 물론 잘린 머리를 다시 붙여주진 않지만 말야.”

“안 먹으면 안 되는 거야?”

“물론 그건 네 자유. 하지만 장담컨대 일주일 안에 넌 변사체로 발견될걸.”


소년은 켄트의 표정을 보며 주머니에 알약 통을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철제상자를 들어 올렸다. 서늘한 쇠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돌았다. 꽤 묵직했다.


“이 안에는 뭐가 있지?”


켄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원품이나 후원품은 드러내기 전엔 남이 봐서도, 궁금해해서도 안 돼.”


소년은 조금 전의 대화에서 ‘후원자가 지원품에 이름을 남겨둔다.’라는 말을 기억해냈다.


“······여기 이름이 있을까?”

“글쎄, 있을 수도, 없을 수도.”


그는 그 말과 함께 소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내 볼일은 끝. 이제 가봐야겠어. 다짜고짜 날 내보내 달라고 어리광부리지 않았다는 점을 칭찬하는 겸 해서 한 가지 질문을 받아줄게. 혹시 자잘한 거라면 선생 지드에게 물어보라고.”


그는 잠시 이것을 물어보는 것이 맞는지, 이것이 자잘한 것인지 아닌지를 고민했다. 그러다 그냥, 켄트가 그에게 가진 남모를 호의를 믿어보기로 했다.


“네 역할은 뭐야?”


켄트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현명하네. 나는 행정관이야, 예비 리더.”


바쁘게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본 후, 소년은 철제 상자를 집었다.


크기는 가로 한 뼘에 세로 두 뼘 정도 되었고, 가운데에는 자물쇠 없이 경첩만 달려있었다.


안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선물을 받은 어린이의 호기심인지 선고를 기다리는 범죄자의 심정인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그는 쇠 마디를 밀어 올렸다.


턱- 하고 위아래가 분리되며 내용물이 드러났다.


거울, 쪽지 한 장, 그리고,


권총.


철제 상자와는 다른, 묵직하고도 서늘한 감촉이었다.


거울 속 푸르게 멍든 소년의 눈동자가 잠시나마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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