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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리피트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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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스트맨
작품등록일 :
2019.03.09 00:54
최근연재일 :
2019.06.03 17:00
연재수 :
6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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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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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0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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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62화

DUMMY

다음날, 리피트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일행들에게 아르칸 성국으로 가자는 뜻을 전했다. 모두들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리피트가 평소처럼 미르네에게 알약을 건넸을 때, 미르네의 표정이 갑작스레 굳어버렸다.


"이걸 언니가 줬다구?"


"응. 그게 마지막이라고 하시더라. 왜그래?"


"어? 아,아무것도 아냐."


미르네가 굳은 표정으로 알약을 아공간에 넣는걸 의아하게 생각한 리피트였지만, 곧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저기 리피트 님."


"응? 아르보레 왜?"


"저...저기 저희 아르칸 성국까지 어떻게 가요?"


아르보레의 질문이 이해가 안된 리피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차타고.. 아."


순식간에 아르보레의 질문이 이해가 된 리피트.


"마차를 빌려야겠...지?"


ㅡㅡ


리피트는 식사를 마치고 쥘렌을 찾아갔다. 쥘렌의 방에서 대기하는 집사가 선객이 있다는 말에 리피트는 근처에서 이야기가 끝날때까지 기다렸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쥘렌의 방에서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 리피트의 옆을 지나가는 그 누군가. 리피트는 슬쩍 그를 쳐다봤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드워프잖아?'


드워프는 아르카디윰의 연맹도시 밖으로 나오면 만나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연맹도시를 아예 등졌거나, 범죄를 일으킨 드워프만이 도시를 완전히 떠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뜻밖의 광경을 본 리피트가 집사의 안내를 받아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쥘렌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잘 왔군. 자네에게 의논할 일이 생겼네."


"그.. 일단 제 얘기부터 드려도 될까요?"


"아, 그렇구만. 내가 마음이 성급했네. 미안하네."


리피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는 쥘렌. 리피트는 그에게 손을 내저어보였다.


"고개 숙이실 일은 아니에요. 그, 제가 부탁이 있거든요. 저희가 타고 다니던 마차가 부서져서 새로운 마차가 필요한데 알아볼 수 있을 까요?"


"마차? 마차는 우리 저택의 보관소에 많지. 거기서 아무거나 하나 골라가게. 그건 귀족용 보호마법진이 설치되어있으니 조심하고."


"넵."


탈 것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 리피트. 걱정거리가 처리되고 나서야 쥘렌에게 아까 본 드워프를 물어볼 수 있었다.


"나도 그것 때문에 자네를 부르려 한걸세."


이걸 보게나, 라고 말하며 무언가를 펼치는 쥘렌. 그건 마치 종이같기도 했고, 금속을 얇게 다린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 위에 그려진 내용들은,


"설계도인가요?"


쥘렌이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저 드워프가 공국의 왕궁을 짓는 일을 맡고 싶다며 이렇게 설계도까지 들고왔어. 그들 말로는 마음만 먹으면 3개월 안에 지어줄 수 있다고 하더군."


"으음..."


드워프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무엇이든 간에 제작에 관해선 말도 안되는 능력을 보여주니까. 하지만 리피트의 마음에 걸리는 점은 앞서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쥘렌 님. 혹시 드워프들에 대해 자세히 아시나요?"


"드워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마 드워프들 밖에 없을 걸세. 그만큼 폐쇄적인 종족이니까."


"제가 사실 그들에 대해서 어느정도 아는데..."


리피트는 지상에서 연맹도시 바깥을 돌아다니는 이들은 고향을 완전히 포기했던가 혹은 범죄자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 말에 쥘렌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고향울 버린 이라면 상관이 없어요. 오히려 저희쪽에 머물러 주는게 좋겠죠. 하지만 만약에 범죄자라면... 저라면 믿고 맡기기가 조금 힘들거 같아요."


"흐음... 하지만 제안도 나쁘지 않았고, 딱히 나를 속이는 것 같지도 않았네. 범죄자였단 이유만으로 거절하기엔 힘들구만. 일단 조심하곤 있겠네."


"네. 일단 경계는 하고 계셔야 할 것 같아요. 혹시 이름이 뭔지 들으셨나요? 제가 드워프들과는 인연이 있으니 한번 물어볼게요."


"아마 내 기억이 맞으면 자신의 이름을 버마갈이라고 했네."


"버마갈이요. 알겠습니다. 제가 나중에 한번 알아볼게요."


"고맙네."


리피트는 쥘렌과의 대화를 마치고는 곧장 테르덴 가 전용 마차보관소로 향했다. 남는 마차 하나를 받은 리피트는 잠깐의 시간을 들여 이전 마차와 작동방법이 비슷하게끔 개조할 수 있었다. 귀족용이라 그런지 간이 화장실도 마련되어 있어서 사실상 크기 말고는 이전 자동차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뒤가 잘 안 보이네.'


뒤쪽에 영상기를 달고 앞쪽과 연결하는 작업까지 마친 리피트. 그리고 일행 대부분이 점심을 먹은 뒤, 자동차 2호에 탑승했다. 모인 인원들이 다 탑승하자 생각보다 안쪽이 여유로웠다. 리피트는 확인하지도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목적지는 아르칸 성국의 대신전이야. 출발하자."


"삐이!"


실컷 기분을 낸 뒤 미르네가 자동차의 속도를 올렸다. 차 한대가 빠르게 공작가를 빠져나갔다.


ㅡㅡ


차가 도로를 올라타고 얼마 안되서 리피트는 말도 안되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르네. 아르보레는?"


"어? 누구랑 점심약속있다고 어디가던데?"


"뭐? 그..그러면 워크는... 맞다, 일한다고 못갈거 같다고 했지."


이제보니 생각보다 마차 안이 넓은 게 아니라, 생각보다 사람이 적은 거 였다.


"아르보레는... 지팡이를 통해 올 수 있을거니까. 일단은 그냥 가자."


리피트는 지팡이를 통해 시간이 나면 이곳으로 오라는 말을 건네고서는 신경을 껐다. 그리고 도로를 따라 달리길 며칠, 리피트는 아르칸 성국의 수도 아르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검문을 통과한 리피트는 차를 몰고 대신전 근처까지 다가갔다. 차를 아공간에 집어넣은 리피트는 일행들과 함께 신전안으로 들어갔다.


"삐이이"


리피트의 품안에서 잠들어있던 루아가 깨어났다. 리피트는 꼬물대는 루아를 껴안은 채 신전의 지하로 가는 길을 찾았다.


"리피트, 근데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야? 대신전이라더니 왜 수녀나 사제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여긴 대신전이라는 이름만 붙은 신전 유적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래서 관리인들 빼곤 신과 관련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가 어렸을 때 견학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안쪽에는 신 님들의 조각상이 있었는데, 아직도 있으려나?"


리피트의 말에 대신전의 안쪽으로 향하는 미르네. 리피트 와 디위티 그리고 루아는 미르네의 뒤를 따라갔다.


안쪽에는 리피트의 기억대로 여러개의 조각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신들의 모습을 본떴다는 조각상들.


오랜만에 찾아온 곳이라 그런지 어렸을 적 추억에 잠겨 조각상들을 살펴보는 리피트. 그때는 하나도 알아볼 수 없었는데 지금은 알아 볼 수 있는 조각상이 있었다.


"어? 이거 테네스 여신 님인거 같은데?"


리피트의 말에 미르네가 옆에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진짜네? 테네스랑 똑 닮았어. 그러고 보니까 여기 있는 애들 다 아는 애들이야. 실제 모습이랑 똑같이 잘 만들었어."


"정말요? 여기 있는 조각상들이 신 님들의 모습과 똑같나요?"


"응. 여기 얘 눈썹이랑 눈사이에 점 보이지? 이런 거까지 세세하게 만들었어. 표정도 봐봐. 성격이 괴팍한 녀석인데 얼굴에 다 드러나잖아. 진짜 정성들여 만든거야."


조각상 하나를 가리키며 설명하는 미르네와 옆에서 눈을 반짝이며 설명을 드는 디위티. 리피트는 그런 그들을 루아를 안은채 지나쳐 갔다.


조각상들을 구경하던 리피트는 중간에 공간이 비어있는 걸 발견했다. 밑에 받침대가 있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조각상이 있었던 듯 했다. 궁금증을 못이긴 리피트가 근처에 있던 관리인을 불러 물었다.


"저기 혹시 이 위치에도 조각상이 있었나요?"


관리인은 빈공간을 슬쩍 쳐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원래는 있었는데, 몇달 전에 조각상이 갑자기 부서져 버렸어요."


"조각상이요?"


"네. 저기 받침대도 치워야 하는데, 조각상이 갑자기 부서지는 일을 봐버렸으니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근처의 조각상에도 피해가 갈까봐 청소만 해놓은 상태에요."


"이런... 아쉽네요. 조각상이 진짜같아서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는데."


"그런거라면 저쪽에서 보실수 있어요. 부서지기 전 모습들을 찍어서 전시해놓았거든요."


"바로 그쪽으로 가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리피트는 궁금증에 곧장 전시실로 향했다. 그곳엔 아직 멀쩡한 다른 조각상들의 사진도 있었다. 다른 것들이 부서지기 전에 미리 대비를 한 모양이었다. 리피트는 전시실 안을 돌아다닌 끝에 이곳에서 보지 못했던 조각상의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우와. 이분도 계셨었네."


리피트의 눈앞에 사진으로만 남은, 깨져버렸다는 조각상의 주인공은, 바로 돌봄의 여신 알리모 였다.


ㅡㅡ


구경을 마친 리피트 일행은 다시 지하로 향하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관리 직원들은 이곳엔 지하가 없다고 말하는 걸로 봐선 그들은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모두들 한마음으로 숨기고 있거나. 뭐가 어떻든 리피트는 아르칸 신술을 이용하면 찾을 수 있을거란 맹목적인 믿음으로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나를 뿌려대고 있었다.


"저기.. 평소에도 이렇게 찾으시나요? 이렇게 하기보단 정보를 모아보시는게..."


리피트의 모습이 너무 비효율적으로 보인 디위티가 리피트에게 조언을 하려 했지만 리피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이게 제일 빨라. 조금만 기다려봐."


잠시뒤,


쿠르릉.


"찾았지?"


리피트는 지하로 열린 문을 보며 활짝 웃으며 아래로 내려갔고, 디위티는 떨떠름하게 웃어보이며 그 뒤를 따라갔다.


"저건가?"


앞쪽에는 떡하니, 왠 짧은 막대기 하나가 꽂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과는 달리 막대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은 엄청났다. 리피트는 그 성물을 잡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강렬하게 밀려오는 신성력의 파도. 리피트는 그 힘을 버티며 간신히 막대기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짧은 막대기를 뽑으려는 그 순간, 누군가가 먼저 그 성물을 뽑아냈다.


리피트는 당황한 표정으로 뽑은 사람을 쳐다봤다. 막대기를 뽑은 건 다름아닌 미르네였다.


"일단 이건 내가 가지고 있을게. 꺼림칙한 부분이 있어서 말야."


"어? 어.."


'말이라도 해주지...'


왠지 맛있는 부분만 쏙 빼앗긴 느낌이 드는 리피트였다. 어쨌든 성물은 미르네가 가져가고, 또다시 할 일이 없어진 리피트 일행.


"나가자."


더이상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한 리피트는 뒤로 돌 수 밖에 없었다.


맨뒤에서 일행을 따라가는 리피트. 한명 한명 지하에서 빠져나가고, 루아를 디위티에게 내민 리피트. 루아가 폴짝 디위티에게 안기고 리피트가 빠져나가려던 그 순간.


쾅!


"뭐야?"


갑자기 지하실 문이 닫혔다. 지하실 속엔 새까만 어듬이 내려앉았다.


그리곤 무언가가 리피트를 빨아들였다.


리피트는 빨려가는 그 사이에 열심히 고함을 질렀지만, 그 소리마저 어둠에 빨려간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리피트는 그렇게 어디론가, 강제로 이동되었다.


ㅡㅡ


"삐이이잇! 삐이이이잇!"


"뭐야! 이게 무슨?!"


"안 열려요!"


갑자기 닫혀버린 문. 바깥에 남게된 두 명과 한 마리, 미르네, 디위티 그리고 루아는 완전히 패닉에 빠져있었다. 그중에서 누구보다 제일 당황한 건 미르네였다.


'말도 안돼... 지금 내 힘으론 어림도 없어. 대체 어떤 신이? 아니지, 어떤 신들이?'


루아와 디위티는 어떻게든 문을 열기위해 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미르네는 알고 있었다. 저 문은 단순한 물리력으로 여는 문이 아니라는 것을, 예전만큼의 힘이 돌아온 본인보다 더 많은 신격이 모여 막고 있다는 것을.


'심지어 '악'의 기운까지... 이게 어떻게 된거야...'


미르네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빨리 아르칸 언니를 찾아야 해.'


미르네는 남은 일행들을 데리고 재빨리 신전에서 나왔다. 그리고, 빠르게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려 했다.


"맞다, 차!"


자동차는 리피트의 아공간에 들어가 있었다.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 인적이 드문 곳으로 뛰어간 미르네가 따라온 두사람에게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보게 될 건, 환상이 아니라 진짜야. 언니 믿지?"


무슨 말인지도 모른채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는 루아와 디위티. 미르네는 그들을 보곤 곧바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의 온몸에서 신격이 뿜어져 나왔고,


하늘에서, 마치 신이 내려오는 듯한 엄청난 빛무리가 한참동안 뿜어지더니


미르네와 일행들 모두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ㅡㅡ


어느 가문의 손님 맞이용 방. 그곳에 앉아있는 아르보레는 오늘 있었던 일을 상기하고 있었다. 기사단장이라는 펠튼과 점심을 먹고, 같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저녁을 먹곤 헤어졌다. 별 의미가 없는 일들이었지만, 펠튼이라는 남자가 웃으며 좋아했기 때문에 아르보레의 기분도 딱히 나쁘지 않았다. 방에 돌아와서야 빈 시간이 생긴 아르보레는 문득 점심에 리피트가 남겼던 말이 생각났다.


"할 일도 없구... 좀 늦긴 했지만 가봐도 괜찮겠죠?"


최근에 자동차를 부숴먹은 일 때문에 리피트 보기가 껄끄러운 아르보레였지만, 막상 리피트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대해준다는 걸 알고있었기 때문에 아르보레는 평소처럼 지팡이로 이동하려 했다.


"...어?"


아르보레는 위화감을 느끼며 다시 한번 시도했다.


'왜... 왜 이러죠?'


계속해서 시도하는 아르보레. 30분 동안이나 계속해서 시도한 끝에 아르보레는 사색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지팡이로 이동되지 않는다는 것 그건 역으로,


지금껏 있었던 일들과는 비교도 안될 사고가 터졌다는 거 였으니까.


ㅡㅡ


"여긴 어디야?"


리피트가 빨려들어온 곳은 사방이 어두운 방이었다. 그런 어두운 상황속에서도 홀로 빛을 내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무언가에 꽁꽁 묶여있는듯 보이는 그것은 거대한 비석이었다.


리피트는 무언가에 홀린듯 비석을 향해 다가갔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에선 환하게 빛이 나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검은 기운또한 비석에서 뿜어지고 있었다. 이 곳을 어둡게 만든것 또한 이 검은색의 기운이라는 것을 리피트는 알 수 있었다.


리피트에게서 내뻗어져진 손이 비석과 닿았다. 그리고 환하게 빛나는 글자에 리피트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 검은 기운이 폭발할듯 흘러넘치더니 리피트를 감싸안았다.


시야를 가득 메운 검은색. 그 안에 갇힌 리피트에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인간이여. 우리는 수많은 걸 잊고있다. ]


'뭐지?'


그저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무언가 신성한듯한 목소리.


[ 기억의 신 아니무가 모두가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에 모든 기억을 남기고 사라질 터이니 ]


[ 자네들은 꼭... 이것을 기억해주게나 ]


어둠으로 가득하던 리피트의 시야가 돌아왔다. 그런데 무언가가 달랐다.


'여긴 어디야?'


황금빛으로 빛나는 대지, 여전히 푸른 하늘. 리피트는 상식 밖의 세계에 주변을 둘러보려 했다. 하지만,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다 강제적으로 그의 몸이 움직였다.


"펠렛! 그게 무슨 소리야! 파카토가 타락했다니?"


'뭐야, 이거?'


방금 전의 말은 분명 리피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마치 남의 몸에 들어가 있는 느낌.


"아니무, 너도 알다시피... 그 이상한 검은 거에 먹혀서, 파카토의 상태가 많이 이상해졌어. 원래라면 하지도 않을 폭력적인 일들에, 악랄한 짓까지, 점점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것 같아. 이대로 가다간 아마..."


"아마?"


"아르칸 주신님께서 격을 떨어뜨리셔서 지상으로 보내실거야. 그거말곤 방법이 없으니까..."


"말도 안돼! 파카토는 평화의 신이야! 그 녀석을 없애면 어떻게..."


"그만큼 이번 일이 심각하다는 거겠지."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벌써 30명이야! 얼마 되지도 않는 이 신들 중에서, 벌써 30명의 격이 떨어졌어! 대체 왜 이런거냐고!"


"아니무, 진정해. 아르칸 주신께서 방법을 찾아주실거야."


"크윽..."


입술을 짓씹는 느낌이 드는 리피트.


'쓸데없이 감각을 공유하네.'


그리고 또다시 갑작스럽게, 시야가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아니무'라는 존재의 몸에 있는거 같은데...'


무언가 더 생각을 하려던 리피트는 다시금 환해진 시야에 생각을 잠시 멈췄다.


"주신님!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저희 신들을 다른 생명체로 만드시겠다뇨!"


리피트의 시야엔 아르칸이 존재하고 있었고, 본인은 목이 터져라 고함치고 있었다.


"밑으로 내려간 이들은 이곳에서 열심히 봉사만하다 검은 질병에 걸려 어쩔수 없이 내려간 이들입니다! 격을 하락시켜 지상으로 내려보낸 것도 부당한 것인데, 거기서 격을 더 내리시겠다뇨!"


"아니무! 목소리를 낮춰! 주신님 앞이야!"


"이걸 어떻게 진정해! 가우드! 어제는 펠렛이! 그 며칠전에는 하린이 지상으로 가야했어! 넌 그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미안해요. 아니무."


입을 여는 아르칸. 그리고 그녀보다 먼저 말을 잇는 아니무.


"아르칸 님. 그들에 대한 처사는 부당합니다. 그들은 신이었고, 그들의 임무에 평생을 최선을 다하던 이들입니다. 평범한 생명으로 격을 떨어뜨리시겠다니요."


"하지만, 그 검은 질병은... 제가 막을 방법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낫게 할 방법도 모르구요. 그들이 계속해서 신으로 지낸다면, 아마 여기있는 신들 모두가 그들처럼 변할지도 몰라요. 그리고 지상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차라리 그들에게 주어진 영생을 없애는게..."


"그게 말이 안 되는 거라고 제가 말하고 있는 거잖습니까!!!"


"아니무!"


눈에 핏발이 선채로 말하는 아니무와 그런 그에게 소리치는...


"돌아가! 아르칸 주신님께서도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가 이런다고 나아질 문제가 아니야!"


"알리모...크윽..."


이를 악물며 뒤로 도는 아니무는 빨개진 눈으로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또 다시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는 리피트의 시야. 리피트는 이젠 아니무의 생각까지 느낄수 있었다.


어느 방안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는 아니무.


"인간? 인간이라고? 태초의 생명체들도 갖는 영생을 갖지 못하는 존재들이! 내 친구들의 격이 강제로 떨어진 존재가! 아무런 능력도 힘도 제대로 가지지 못한 인간이라고!"


주먹을 책상에 미친듯이 내려치는 아니무. 리피트는 손이 아팠지만, 그걸 느낄수가 없었다. 찢어질 것처럼 아픈 그의 마음이 리피트에겐 더 큰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미안해. 펠렛, 하린... 미안해 파카토... 미안해..."


태어날때부터 같이 태어나 여태껏 함께했던 소중한 친구들. 그러나 인간이 되어버린 건 아니무의 친구들 뿐이 아니었다.


수많은 신들이 검은 색에 물들었고, 그들 대부분이 이상해진 뒤 아르칸에 의해 신격을 빼앗기고 지상으로 추방되었다. 영생을 누리던 이들이 언제 죽을 지 모르는 필멸의 삶을 살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아르칸의 결정에서 친구들을 지키지 못한 자신이, 소중한 친구들을 위해 좋은 방법하나 생각하지 못한 자신이, 아니무는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아니무는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 보았다. 손날에 가까운 손바닥 쪽, 그곳에 아주 작은 검은 점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무는 그게 바로 다른 신들이 말하던 검은 질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도 너희들 곁으로 내려가마."


이야기를 듣자니, 격이 떨어질땐 모든 기억을 잃는다고 한다. 어쩌면 지금쯤 자신의 친구들은 서로를 새하얗게 잊었을 지 몰랐다.


"밑에서도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


아니무는 아르칸에게 자신도 질병에 걸렸다는 걸 알리고 지상으로 내려보내질 생각이었다. 결심을 마친 아니무가 아르칸이 머무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뒤, 아니무는 아르칸의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객이 있었던 모양. 아니무는 침착하게 문 밖에서 기다리며 서 있었다. 이곳엔 방음 같은 게 없어서 아니무는 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미르네, 네 몸안에 있는 그것... 일단 '악'이라고 이름을 붙이긴 했는데, 해결책을 찾기엔 좀 힘들 거 같아. 도저히 모르겠어."


"차라리 내가 봉인되는게.."


"아니야. 애초에 넌 '악'의 영향을 받지도 않잖아. 처음부터 너가 지니고 있어서 그런걸까? 왜 너는 영향이 없는데, 다른 애들은 그렇게 변하는 거지?"


"언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봉인되는게 맞아. 그리고 밑으로 내려간 친구들 다시 올려줘. 괜히 나 때문에..."


"아직 너 때문인지 아닌지도 정확하지가 않아."


"그치만, 퍼지잖아. 나랑 똑같은 힘을 가진게 계속 퍼지고 있잖아!"


"애초에 이 일의 원인이 너일수도 있다는 건, 테네스나 알리모, 가우드 같은 몇몇 애들밖에 몰라. 다른 애들은 신경쓰지마. 그리고 밑으로 간 걔네들은 이미 늦었어. 죽게되면 아마, '악'이 사라지는 것 같긴 하던데. 좀 더 경과를 두고 봐야할 것 같아."


" '악'이 사라진다고? 어떻게?"


"그건 나도 모르겠어. 저번에 내려간 펠렛, 그녀석 몬스터에게 물려서 죽었더라구. 근데 걔가 죽고나선 '악'이 사라지는 것 같았어."


아르칸의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아르칸의 방을 막고있던 문은 분노한 한 명의 신이 신격을 해방해 부숴버렸다.


"뭐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아니무!"


"그게 무슨 소립니까."


"뭐? 너 왜 이래? 설마 '악'에.."


"펠렛이 죽었다는 게 무슨 소립니까!"


리피트의 시야는 차오른 눈물로 뿌옇게 흐려지더니 다시금 어둡게 변했다.


ㅡㅡ


어느 어두운 방 안, 그곳에서 아니무는 손발이 벽에 묶인채 갇혀있었다.


그를 감시하는 자가 슬쩍 다가왔다.


"아니무... 걱정하지마, 아르칸 님께서 반드시.."


"반드시? 존재가 사라졌다는데 반드시? 에퀴드 니 존재가 사라지고도 그딴 식으로 입을 나부릴 수 있는지 볼까?!"


"아니무, 그게 아니라, 난 그냥..."


그때 저 멀리서 문이 열리더니 아르칸과 미르네, 그리고 수많은 신들이 줄지어 다가왔다.


"아르칸 주신님."


황급히 무릎을 꿇는 에퀴드라고 불린 신. 아르칸은 그를 놔둔채 아니무에게 다가왔다.


"아니무. 펠렛의 일은 정말 안타까워요. 하지만, 그래도 당신의 태도는 문제가 있어요. 물론 당신이 무얼 걱정하는지는 알지만.."


"꺼져라! 이 추악한 년아! 지 여동생 하나 감싸안겠다고 수많은 신들을 소멸의 길로 내민 년이 어따대고 그 더러운 입을 열어 나를 기만하려 해!"


그 말을 들은 아르칸의 표정이 찌푸려졌고, 미르네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였다. 그리고 주변에 존재하던 신들은 그저 웅성거렸다.


"어떻게 저런말을."


"아니무 맞아? 저런 말을 할 녀석이 아닌데..."


"아니무! 아르칸 님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곧 괜찮아질겁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무 앞을 막아서며 더욱 고개를 숙이는 에퀴드. 그러나 그의 그런 행동에도 아니무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아르칸, 미르네!! 저주할거다! 니 년들이 다시는 고개를 쳐들지 못하게 죽여버릴 거다. 테네스,알리모,가우드! 아르칸 너가 제일 아끼는 이들부터 없애버릴것이다! 죽지 않는 몸? 그렇다면 영원히 갇혀있게 해주마! 목 닦고 기다리고 있어라!"


"역시 안되겠네요."


고개를 한 번 내젓는 아르칸.


"당신 또한 인간이 될 겁니다. 모든 기억을 잃고, 필멸자가 되겠죠.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아니무."


아르칸이 손을 내뻗는 순간, 아니무는 모두의 앞에서 있는 힘껏 미소지었다. 어딘가에 묶여있어도 그는 신이었고, 그는 자신이 소멸당했을 때를 전제로 모든 걸 준비해놨다.


그동안 힘겹게 숨겨왔던 검은 질병들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아니무는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었고, 뿜어진 검은 것들은 그 곳에 있던 모든 신들을 덮쳤다.


"이,이런!"


당황한 듯한 아르칸의 표정을 보며 웃는 아니무, 그리고 아직 그의 계획은 끝나지 않았다.


격이라는 건, 신이 정하는 것. 아르칸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으로써 두번째 세대로 태어난 아니무는, 인간들에게 필멸자의 운명을 지워낼 순 없었지만, 예전의 힘을 되찾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자신의 존재를 바치는것.


아니무의 힘은 지상에 생겨났던, 얼마 안되는 인간들에게 들어갔다. 기억의 신 아니무는 그들에게 잊고 있었던 신으로써의 기억들과 아니무가 그들에게 전달하려던 내용들을 모두 일깨웠다.


어느새 흐릿해지는 아니무의 의식.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이를 악물었다. 복수는 밑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이자 신이었던 자들이 해줄것이다. 그리고 기억의 신인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건, 이 상황을 영원히 새겨놓는것. 그래서 아르칸을 믿는 모든 이들이 자신이 가진 기억을 보게되는것. 그래서 아르칸을 더이상 믿을 수 없도록 하는 것.


아니무의 몸은 거하게 폭발하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바램은 아르칸 주신의 신전에 놓아두었던, 하나의 비석에 물들었다.


아니무의 존재가 사라지며 보이는 잔뜩 일그러진 아르칸의 표정.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리피트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


리피트는 멍하니 비석을 쳐다봤다. 울음을 토하듯 꿀렁거리는 검은 기운이 유난히 슬퍼보였다.


그리고 잠시 뒤, 검은 비석은 스스로의 힘으로 리피트를 방 안에서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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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39화 19.04.29 204 1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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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37화 19.04.17 197 1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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