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머리가 아프다. 바닥의 한기는 두꺼운 외투를 우습게 뚫고 몸에 스며들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손은 머리를 노려왔다. 막을 수 없었나?
아니, 분명 막아냈다.
그러나 밀려 나간 몸이 벽에 부딪혔고,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
노아.
노아는 어떻게 된거지? 분명 휴대전화가...
휴대전화의 화면은 오전 두 시라는 현재 시각과 함께 부재중 착신 기록 3통을 알려주고 있었다. 모두 저장되지 않은, 심지어 본 적도 없는 번호였다.
재발신 아이콘 위에서 망설이던 손가락 아래로 다시 한 번 진동이 울려댔다. 방금 전에 본 것과 다르지 않은 번호이다.
“...여보세요?”
늦은 시간임에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발소리,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탄식과 신음, 무엇인가 바쁘게 외치는 목소리.
언젠가 노아가 말하길, ‘응급실 냄새’라는 것이었다.
.
.
‘환자분께서 보호자가 확인되지 않는 상태라서요. 구조 요원이 최근 발신 기록으로 전화해보라고 하셔서...’
두통이 심해지면서 체온이 상승했다. 굳이 체온계를 쓰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심야의 칼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올라가는 체온에 입술이 말라갔다.
고열과 함께 찾아온 울렁거림이 심했다. 결국 멈춰서서 빈 속을 개워내었다. 머리를 부딪히면서 어딘가 고장나버리기라도 한건가. 설령 고장났다하더라도,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마음 속에서 필사적으로 끓어오르는 뜨거움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텅 빈 하늘과 뼈저리게 느껴지는 무기력함에 온 몸이 짓눌렸다.
짓눌려진 몸은 머금고 있던 물기를 짜내었다.
여태껏 흘려본 눈물중 가장 뜨거운 것이었다.
누워있는 이치의 얼굴을 봤을 때는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이 치밀어올랐다면 모를까. 한여름의 공원에서 봤던 것만큼이나 편하게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미웠다. 눈물이 흐를만큼 미웠다.
“뭔데...뭔데 편안한 얼굴이냐고...”
모든 상황에 대한 미움을 한 톨도 남김없이 쓸어모았다. 그리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갈 곳 없는 분노들, 나의 그릇에 차고 넘치는 양의 분노.
왜 다들 이 좁은 곳에 머물러있는거야?
각자 다른 목소리의 분노가 대답했다.
[이젠 다 상관없는 일이야.]
[모르겠어.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어.]
누군가 입을 열었다.
아니, 단지 방향을 잃었을 뿐이야.
제대로 된 방향을 잡는다면 너희들은 이렇게 괴로워하지 않아도 돼.
무엇인가에 홀리듯 뛰쳐나왔다. 예고도 없이 전화를 걸기에는 턱없이 늦은 시간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내걸었던 필요한 정보를 모두 주겠다던 약속, 지금이야말로 그 약속을 지킬 때다.
연결음이 끊겼다. 상대방은 새벽 거리만큼이나 가라앉은 숨소리를 내었다.
“쿠니에 에코, 지금 어딨어요.”
‘...사가네 아츠시? 이 늦은 시간에...’
“빨리 말해!!!”
소년의 목소리가 밤하늘 아래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켜버렸다. 스피커 너머의 공간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주차장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던 무리가 일제히 소년을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나오는 입김은 자신들이 내뿜던 것보다 뜨거웠다.
‘그렇게 말한다면 알려줘야겠지만...어딨는지 모르겠어요.’
손이 떨려왔다. 센이치를 향한 분노는 아니었다. 그저 이 상황 자체가 고형물로 이루어져있다면, 그랬다면 철저히 박살내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미안해요.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끓어오르던 무형의 감정이 한계치에 도달했다. 조금씩 흘려보내면 언젠가는 안정권에 도달하리라던 믿음은 산산조각났다.
“아아아아악!!!!”
견디기 어려운 무거움에 소리를 질러버렸으나,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끝없는 혐오감에 부끄러움 한 가닥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있던 자리에 새로운 얼굴이 비쳐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다는 절실함이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번도 보인적 없던 얼굴은 마땅한 이유도 없이 잘도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쿠니에 에코는 다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번에도 나의 세계를 어지럽힌 채로, 손에는 전리품을 든 채로.
그 전에 내가 찾아낸다. 그리고 전리품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쿵.
또 벽에 부딪혀버렸다.
“아무나 좋으니까...”
녀석이 어딨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아무나 좋으니 알려달라고!!!”
“시끄러워!!”
가늠할 수 없이 요동치던 감정의 흐름이 멈췄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바람에 몸을 맡겨 펄럭이는 가운이 그녀의 정체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병원에서 큰 소리 내지마.”
가까운 사람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신세를 졌던 사람이다.
곧게 뻗은 그녀의 손가락이 먼 곳을 가리켰다.
“용무가 남았다면 빨리 움직이는게 나을거야.”
먼 곳,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곳.
그 녀석이다.
순간 불신이 피어났다. 과연 내가 찾고 있던게 누구인지, 더군다나 정보상이라는 작자도 모르는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쿠니에를...당신이 어떻게 알죠?”
과연 의사라는 신분만으로, 나는 어디까지 이 자를 믿을 수 있는건가.
“출처는 알려줄 수 없어. 공개되면 여러 사람이 위험해지거든.”
웃음이 나왔다.
마치, 이 모습은 정말이지.
세상이 내게 길을 알려주는 것만 같다. 모든 사람이 내게 길을 알려준다는 듣기 좋은 말 따위가 아니다.
정해진 길로 걷기를 유도하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해버렸다. 운명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기에는 턱없이 아름다운, 쓰레기 더미의 길이다.
자존심이 고개를 들었다. 능력 밖의 일을 자꾸만 강요하는 세상에 소리쳤다.
그래. 어디 한번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응급실에 쿠로야마 이치에라는 사람이 있어요. 키는 저보다 조금 작고...”
“알아. 카야랑 일하던 아이, 맞지?”
아마 사춘기의 자존심이 부릴 수 있는 최선이자 최후의 오기겠지.
“걱정하지마. 어떻게든 죽지 않게 해볼테니. 걔보다 네 상태가...”
그 뒤의 말은 듣지 못했다. 아마 문장을 끝냈을 때즈음에는 주차장까지 빠져나갔을 것이다.
체온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폭발적인 근력이 체내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기세로 달아올랐다. 피부는 선홍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신체의 비명소리가 희열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늦기 전에 도착할 수 있다.
이 짧은 문장이 만들어낸 오기이자 저력이다.
.
.
“방금 그 아이는...”
뒤늦게 건물에서 빠져나온 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위의 높낮이를 따진 조심스러움보다는 부탁하는 자의 도리에 가까웠다.
“어라? 당신 정도라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발 밑으로 또다른 그림자가 겹쳐졌다. 자신의 것보다 훨씬 키가 큰 그림자였다.
“사가네 아츠시, 알지 않아?”
키가 큰 여성은 앞서 사라져버린 소년의 이름을 조용히 곱씹었다. 떠오르는 것은 있었다만 확신이 없었다.
“...일단, 잘 부탁드릴게요.”
“아무렴, 높으신 분의 부탁인걸.”
고개를 꾸벅 숙여보인 그녀는 앞서 소년이 사라져버린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정문으로부터 아주 조금 우측으로 치우친 곳. 인이어 이어폰으로부터외쳐대는 목소리가 알려주는 목적지이며, 그녀 자신이 정한 방향이었다.
“타니입니다. 각 조장들은 보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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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요 선배, 우리 말이에요.”
웬 일로 조용하다 싶은 녀석이 운을 떼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려버렸다. 습관이란게 이다지도 무서운 것이었나.
“너무 추운데 말이에요...근처 편의점이라도 들어가서 기다리는건...”
아니다. 역시 뒤따라올 헛소리를 예측했던 것뿐이다.
“...누가 그렇게 얇게 입고 나오래?”
아무리 겨울용이라는 이름이 붙은 자켓을 입는다 한들, 두꺼운 코트보다 따뜻할 리는 만무했다.
“그야 저는 전투인원이잖아요. 선배는 뒤에서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만 하면 되는 입장이고...저는 언제든 활동이 편한 옷을 입어야한다고...생각해보니 그것도 잔소리네요.”
“시끄러워, 참아. 아니면 내꺼라도 입던가.”
이쪽을 내려보던 토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아동용 코트가 몸에 맞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직까지 그 정도의 상식은 잃어버리지 않은 바보라 이건가.
“하으으으음~...어디까지 왔나...”
턱이 찢어져라 하품을 해대던 녀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역시 뭔가 보일 리는 없었다.
“정말로 여기서 기다리랬어요? 보스가 뭔가 잘못 알려준게 아닐까요?”
정강이라도 걷어차주고 싶었지만 추위에 맞서고있던 몸이 귀찮다며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입에서 뿜어져나오는 한숨이 하얀 증기로 변해 노골적인 실망감을 표했다.
“그런데 정말 이 길을 지나간다면 소름돋기는 하겠네요. 미래를 내다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쉴 새 없이 움직여대던 토아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정면을 내다보던 눈을 한층 더 얇게 뜨며 침묵을 유지했다.
굳게 다물고 있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야...보스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네요.”
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서서히 풀기 시작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이 유난히 반갑게 흔들리고 있었다.
“선배한테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만남이죠?”
평소라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며 신경질냈겠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이다.
비교하자면, 크리스마스의 선물 앞에서 녹아내리는 형제의 짖궂은 장난 정도일까?
“어, 기대되네.”
너의 성장도를, 그리고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걸 증명시켜라.
사가네 아츠시.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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