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무릎을 끌어당겨 웅크리고 앉아봐도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정신을 차린지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저녁밥을 먹을 시간이 되었지만, 배도 고프지 않았다. 버릇처럼 손을 쥐었다 폈다, 이불 속의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기도 해봤다. 역시 달라진 점은 느껴지지 않는다.
‘드르륵-’
병실의 미닫이 문이 의사가운의 여성을 반겨주며 길을 비켜주었다. 차가워진 날씨를 증명이라도 하듯 따뜻해보이는 재질의 슬리퍼에 먼저 시선이 쏠렸다.
‘...전 역시 꺼려져요.’
냉장고의 문이라도 연듯 흘러들어오는 한기 너머,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이 침묵을 지키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상대방과 열띈 토론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엿듣는 것은 취미가 아니었지만, 대화의 중심에서 나의 이름이 빈번히 들릴 때만큼은 얘기가 달랐다.
한기 가득한 대화에 귀를 기울일 뿐이던 엿듣기는 미닫이 문이 굳게 닫힘과 동시에 끝을 맞이했다.
“신경쓰지마. 어른들의 대화는 해답을 제시하지 않아, 선택만 강요할 뿐이지.”
의사 가운의 여성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작 본인이 그 어른 중 하나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는지 문 너머로 눈을 흘기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스트레스 지수가 감소하긴 했어, 이전에 비하면 말이야. 하지만 여전히 주의를 요하는 수치이긴 하고...”
차트를 읊어대던 의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여전히 아이사카 유라이의 망령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 병원에 일종의 신어로 인한 규칙이 걸려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 막 스쳐지났다.
“쓰러졌다며?”
방금의 질문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닌, 현장에서 나를 지켜보던 노아에게 던져진 것이었다. 노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당시의 상황을 증명했다.
“얻어맞았지?”
이번의 것은 나를 향해, 정확히는 내 얼굴에 미세하게 남아있던 멍자국을 향한 것이었다. 조기 대처가 적절했던 건지, 멍자국은 어느새 희미한 피부 변색마저 거의 빠져있는 상태였다.
“뇌가 흔들렸다는 표현을 자주 쓰지? 턱을 맞게 되면 자연스레 의식이 흐려지는 경우가 있어. 그걸 어떻게든 오기를 부려서 버티다가, 긴장이 풀리면서 한꺼번에 데미지가 몰아친거지. 주말에 잠을 몰아서 자는 것처럼.”
의사, 통칭 ‘닥터’라고 불리는듯한 여성의 비유에 잠시 넋이 빠져나간 표정을 지어버렸다. 정신을 잃는 것과 잠을 몰아서 자는 것을 비유하다니, 상황에 대한 경각심이 지나치게 가볍지 않은가.
“뭐, 쉽게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말이야. 아직 적응이 부족한 힘을 남발해서일 수도 있고, 마음의 준비가 부족했을 수도 있고.”
신어가 발현되기 위한 스트레스의 폭발, 보통의 발현자들은 그러한 현실 속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치게 된다. 그 몸부림으로부터 만들어낸 기적을 입으로 구현시키는 행위 혹은 현상, 그것을 통틀어 ‘신어’라는 말 속에 압축시키고는 한다.
보통의 범주 내에서 특별함을 뽐내고 싶은 사춘기의 이상향이 발휘된 것일까? 문득 나도 너무 가볍지는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힘을 구현하면서 발생되는 신체적-정신적 피로를 감당할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 것은 결국 익숙함의 문제일 수도 있다. 즉 미숙함이 묻어나는 사람이라면 예외없이 해당된다는 뜻이다.
차이점은 피로를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가짐.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각오가 결여된 이 마음은 너무 가볍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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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란 덧없어서, 방어 기술을 외우는 것만으로도 아주 쉽게 무너지고는 한다. 애초에 그것을 배우는 것 자체로 ‘일상’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꼴이나 다름없으니.
난 저 아이의 일상을, 그 안정감을 빼앗고 싶지 않다.
‘아츠시가 일상의 안정감에 안주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넌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야.’
휴대전화 화면 위로 스파크가 튈 듯한 속도로 채팅을 치던 에다 씨는 시종일관 불이 붙은 손가락과는 다르게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 나름대로도 마음을 굳혔다는 의미겠지.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따금씩 넘쳐오는 것들이 있다면, 우리가 나서면 되잖아요.”
문 너머의 소년에 대한 대화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서로의 결심이 마찰을 빚는 경우가 결코 드물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서로가 욕심을 부렸던 경우만큼은 분명 드물었다.
‘쟤는 매번 혼자 있거나 노아와 같이 있을 때만 이런 일에 휩쌓여, 물론 너도 아는 사실이고. 그렇지만 그 이유를 단순히 혼자 있었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어.’
아츠시의 주위에 전투인원이 없었기 때문에 당했다? 단편적인 면만 봐서는 충분히 수긍할이었지만, 이유가 그 뿐만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사가네 아츠시라는, 겨우 고등학교에 진입한 나이의 소년에게는 이 험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만한 능력이 자리잡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우리의 세계 속에서 살아나가기 부적합한 약자, 그것이 소년의 위치였다.
일상을 갉아먹는 존재는 빠른 속도의 진화를 거듭해왔다. 이제는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안정감 따위는 먼 나라의, 혹은 도달하지 못할 세계의 말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소년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손을 놓고 빼앗겨버리길 기다릴텐가, 스스로 놓아버리길 부추겨야 할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아주 조금만...”
장고 끝에 악수 둔다만, 지금은 어떠한 판단도 섵부르게 느껴질 것만 같다. 무형의 의무감이 어깨를 지긋이 눌러왔다.
‘몰아붙여서 미안해, 카야.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판단이 들었어.’
옥상의 난간은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는 주제에,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가로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띄우고 있다.
겨우 허리 높이정도밖에 오지 않는 주제에, 말이다.
깊게 들이마신 숨이 몸 속 구석구석을 청소해주는 느낌을 느끼러 왔것만, 어쩐지 아까부터 풍겨오는 담배냄새에 인상이 구겨졌다.
뒤통수로부터 약 10미터 떨어진 곳에서 터벅이는 발소리와 더불어 실리콘 덩어리로 끝을 감싼 목발 따위가 땅바닥을 짚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담배냄새가 풍겨오는 곳도 그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았을 것이다.
소리의 울림이 멈췄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환자의 몰골은 아닌데, 무슨 일?”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는 느낌이 영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말을 건네올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닐 것이란 안일함이 깨져버린 충격으로 어깨가 들썩일만큼 놀라버렸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타투이스트...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해당 질문에 대한 답은 스스로 찾아내었다. 두 개나 풀려있던 병원복의 단추 밑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잉어 한 마리에게 조용히 감사함을 표하고 싶어졌다.
“그러는 그쪽은 무슨 일이시길래?”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다니, 나쁜 취미네.”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물려하던 그는 자신의 신분을 그제야 깨달았는지 잠시 멈칫거리고는 그것을 다시 갑 안에 꼽아넣었다. 다시 불을 붙이지 않은 것은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 가뜩이나 상쾌하지 않은 기분에 담배연기라도 불어넣었으면 쓴 소리를 할 뻔 했으니까.
“...도움을 주고 싶어 데려온 아이가 있는데, 이번에 크게 다쳤어요. 어린 나이에 어른 노릇을 하려다가.”
목발을 조용히 난간에 걸쳐놓은 코이는 다리 한 쪽을 들고 있는 불안한 자세로 난간에 기대려 해봤지만, 난간은 그의 신장에 비해 턱없이 낮다는 한계를 보였다.
“안타까운 일이네.”
어른이 감당하기에도 버거운 일을 ‘어른의 일’이라며, 마치 이것을 이뤄내야만 성장한다는 듯한 달콤한 이름으로 아이들을 자극시키는 꼴은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것에 ‘어른의’ 라는 잘못된 수식어를 붙인 녀석의 낮짝이 궁금해졌다.
“손바닥에 적힌 레터링 문신, 떠오르는 사람 있어요?”
몇 번의 시도 끝에 기대기 불가능하단 판단을 내린 코이는 어정쩡한 자세로 목발을 주워들었다. 키가 큰 것도 마냥 편하기만 한 일은 아닌 모양이다.
코로 깊은 숨을 들이마신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도 속이 매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 그녀석을 막으러 갔다가 이런 꼴이 됐거든. 오랜만에 어른 노릇을 하려다가 말이야.”
어른마저 제대로 해내지 못할 어른의 일이라,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전혀 비웃으려던 의도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코이도 따라 웃었다.
언제부턴가 전혀 기쁘지 않은 상태에서도 웃음이 나오고는 했다. 진정한 어른의 일은 아마 이것을 의미하지 않았을까.
“그만큼 강한 아이인가요?”
“몰라. 만나기는 커녕, 꼬리에 붙은 미행을 잘라내려다 이 꼴을 당해버렸으니까.”
곧 석고붕대를 감아놓은 발을 훈장마냥 자랑이라도 하듯 들이밀어댄 그는 그것을 난간 너머로 흔들어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괴물이 쫓는 아이라면, 머지 않아 붙잡히겠지.”
코이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 속 자신의 얼굴은 엇나가버리기 시작한 어느 청소년기 소년의 얼굴로 대체되었고, 마치 3인칭 시점의 잔혹 동화의 한 장면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먼저 떠나간 코이는 절뚝대는 발소리보다도 작게,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치고는 크게 중얼거렸다.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다면, 오히려 다행이겠네.
라고.
- 작가의말
12월이 다가옵니다. 올해의 마지막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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