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어 50화
‘너무 일찍 나왔나..’
휴대전화의 시계와 내부 인테리어로 걸어놓은 벽시계를 번갈아봐도 초침의 회전속도는 빨라지지 않았다.
5agi092
줄여서 ‘5agi’라는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 혹은 ‘그녀’가 2년 전부터 내 글을 읽어왔다는 것과
그리고...또...
없었다.
그렇기에 메일을 받았을 때 다짜고짜 만나서 인사를 하고 싶다며 약속을 잡아버린 과거의 이성적이지 못했던 행동을 반성중인 것이다.
허나 동시에 기대가 되기도 했다.
첫 만남부터 화장에 너무 힘을 주면 강렬한 인상이 남아버리기에 최대한 ‘평범’한 옷차림과 메이크업을 택했지만, 전날에 잠을 설친 흔적을 가리려면 조금 진한 방법도 괜찮지 않았을까,하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을 때였다.
“미츠에다...씨?”
첫 만남은, 한참 거울을 보며 눈밑의 다크서클을 감상하는 사이에 벌어졌다.
어머니와 동년배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 그녀는 자신을 ‘아츠자와 리이’라고 소개했다.
“초면에 실례지만, 처음에는 남성 분인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글에서 뵈었던 필체나, 메일에서의 쓰시던 말투가 집사람의 것과 어딘가 닮았다고 생각해서..”
“아하...그렇군요..하하”
아직 20대 초반인데, 벌써 정체성을 상실해버린걸까.
업무상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하는 것이 너무 오랜만인 탓에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던 나였지만 상대방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붙임성에 서서히 말문을 트일 수 있었다.
글에 관한 얘기나 형식적이지 않은 축하와 감사의 인사로부터 시작된 ‘독자와 작가’의 구도가 거의 무너져가면서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뭘 기대한걸까, 나는’
솔직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와 동년배의 사람이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얼굴을 마주하기 전까진 도대체 어딜 보고 상대방이 동년배라고 생각하고 있던건지.
나는 그 정도로 사람에 목말라있던건가.
할 말이 떨어진 우리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고, 그때는 이미 주문했던 음료가 바닥에 말라붙어있었다.
한 잔을 더 시켜 대화를 이어나갈지, 아니면 이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갈지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던 내게 아츠자와 리이는 갑자기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미츠에다 씨. 저는 사실 5agi092라는 사람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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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길인만큼 역삼각형의 정지표시판이 덕지덕지 붙은 길을 따라 들어선 연립 주택의 행렬, 우리는 은은한 푸름을 간직한 잿빛이 돋보이는 페인트로 칠한 건물의 앞에 멈춰섰다.
“선생님,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부탁드릴게요.”
‘그저 평범한 독자를 만나는 것처럼 대해주세요.’
평범이라, 속으로는 감사의 인사를 퍼부어주고 싶지만 굳이 평범을 요구하는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긴 싫었다.
“엄마 왔어~”
역시 엄마였나, 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뒤에..누구야?”
신발을 벗으려던 발이 멈춰버렸다.
“응. 서프라이즈로 해주려고 했는데, ‘선생님’을 모셔왔어.”
방에서 나온 소녀는, 정확히는 나와 나이가 비슷해보이지만, 입을 틀어막았다.
놀라움의 표시 치고는 격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반응이다.
“에다기...선생님?”
참고로 나뭇가지라는 뜻의 ‘에다기’는 출판 이후 본명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아직 무명시절일 때 쓰던 필명이다.
“미츠에다 쇼 입니다. 그쪽은...아츠..”
“아츠자와 아야기 입니다!! 그러니까...”
평범을 간곡히 부탁한 이유는 이런 거였군.
소녀는 내 목소리가 들리는 현관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벽을 짚으며.
“반가워요, 아츠자와 씨”
소녀가 이 쪽으로 거의 다 온 것을 확인하고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을 때, 이전에는 없던 거친 손길이 나의 팔을 붙잡아 멈춰세웠다.
팔의 주인은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가로로 저으며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자, 여기 선생님이 악수 하자고 하셔.”
모친은 나의 팔을 놓지 않은 채로 다가온 소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올렸다. 팔을 붙잡고 있던 손도 이전의 거칠었던 감각이 아닌 부드러움으로 당겨져 단전의 높이 즈음에서 두 손이 맞닿았을 때,
소녀는 움츠러들었다.
“그게...죄송해요, 조금 놀라는 바람에..”
“괜찮단다. 일단 선생님을 안으로 모시자. 과자를 준비해줄래? 엄마는 차를 내어올게.”
목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입모양은 분명히 나를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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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선생님은 올해로 몇 살이세요?”
앞은 보이지 않는다해도
“제가 아마..아, 올해로 20살이네요.”
시선은 똑바로 이쪽을 향해 있었다.
“동갑이시네요! 설마 동갑일 줄은 몰랐어요.”
아츠자와 아야기.
그녀의 성격은 유난히 밝았다.
사실 평범한 범주에 속하는 밝음이지만 어두운 현실에 대조되어 ‘유난히’라는 부사가 덧붙여진 것일 수도 있다. 허나 밝은 성격이라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미츠에다 양은 이 근처에 살아?”
“응. 여기서 전철로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에 살아.”
그 거짓말은 어쩌면 친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이 단 1g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끔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네!”
그런가.
멋대로 거짓말이 나오고, 유난히 그녀를 분석하려들었던 태도의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응. 나 당분간은 한가하니까.”
조금 과격한 표현이지만 ‘끼리끼리 논다’고 했던가.
“그러면 엄마는 미츠에다 양을 역까지 데려다주고 올게.”
아야기도, 나도.
외로웠구나.
“딸은, 어릴때 사고로 눈을 잃었어요.”
어딘가 거슬리는 표현이지만 굳이 물고 늘어지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따님의 성격이 밝으셔서 친구가..”
“학교라도 어떻게든 다녀보게하려 했는데, 그게 잘...”
요즘 시대에 ‘동네 친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학교나 학원에서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이상, 동네에 돌아다니는 같은 동년배의 소년소녀들은 그저 ‘남’일 뿐이다.
“아츠자와 씨. 무례할 수도 있지만..”
“제가 아야기의 친구가 되어도...괜찮을까요?”
‘어머니’라는 존재가 가슴에 안고 살아온 무게를 나의 어깨에 짊어졌을 때, 20년이라는 세월이 버거울 정도로 무거웠지만, 견뎌내보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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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료식이 있겠습니다. 혼조 켄신, 타카...”
홀로 남은 방에서 눈물을 태우던 6개월이 지났다.
“...것을 임명한다.”
손에 전해받은 수료증은 그동안 희생시켜온 것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가벼워, 단상에 올라선 채로 헛웃음을 흘리는 비상식적인 꼴을 보일 뻔 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둔탁한 구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혼조 군, 축하해.”
뒤에서 불러세운 이는 올백 머리의 항상 찡그린 표정을 짓던 어느 부서의 부장..이라는 사람이었다.
“감사합니다.”
“자네 만큼은 우리 부서에 넣고 싶었는데...쯧, 위쪽에 건의했을 때는 욕심이 과했다고 혼났지 뭐야?”
권력욕이 강한 것은 아니지만 유능한 인재가 보인다면 항상 먼저 다가가 부서에 편입시키려는 고약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안 그래도 이번에 엄청 대단한 분을 스카웃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타니 말인가.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났나?”
딘트로 과목의 성적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스테르노의 성적은 역대급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인재.
심지어 그녀는 이쪽 제단과는 관련이 없는 일반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고 한다.
“현장 조사반이 질리면 언제든 찾아와. 실무부가 아무리 자리가 없다 해도 자네가 온다면 내 책상도 빌려줄 수 있으니까.”
내 눈에는 이 사람이나, 수료증을 나눠주던 노인네나, 현장 조사반의 인간들이나 똑같이 보인다.
권력에 살찐 돼지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마음대로 꿀꿀대라.
마지막에 당신들의 멱따는 소리가 하늘을 울리게 될 때, 누구보다 기쁜 마음으로 웃어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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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a가 5개라서 5a구나.”
아야기의 이름을 영문 표기로 바꾸면
‘Atsujawa Ayagi’
총 a라는 알파벳이 5개가 들어가기 때문에 5agi라는 아이디를 썼다고 한다.
“응. 너는 미츠에다의 가지 지(枝)자를 써서 ‘에다기’가 된 거지?”
사실 필명을 지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미츠’와 ‘에다’ 중에 후자가 어감이 더 좋았기 때문에 골랐을 뿐.
“덕분에 ‘나뭇가지 씨’가 됐지만, 말이야.”
아야기는 밝은 만큼 말을 잘 붙이기도, 잘 웃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동성끼리라도 손이 맞닿거나 하면 움츠리는 모습이 있다.
“왜~ 버팀목이라는 뜻도 되고 좋잖아?”
“버팀목이라, 그건 괜찮네.”
아야기는 외출시에 들고 나가는 지팡이에 애칭을 붙이는 기이한 행동까지 하고 있었다. 아마 ‘케인’ 혹은 ‘케인 씨’라고 부르는 것 같았는데, 지팡이라는 단어가 영어로 ‘Cane’인 것을 생각하면 영영 이상한 이름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야기, 이상하게 들릴수도 있는데 말이야.”
“말해도 돼. 나는 관용적이니까.”
할 말을 정리하느라 숨죽이며 걷는 동안, 지팡이가 보도블럭에 닿아 타닥거리는 소리만이 보도를 맴돌았다.
“나, 예전에 서점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거든. 대형 서점은 아니고 대형 서점 옆에 있는 작은 서점인데 말이야, 거기서 일하다가..너를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아.”
선글라스를 끼고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소녀와 어머니로 보이는 동행자.
외출 준비를 마친 아야기의 옆모습을 보았을 때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 예전이라면 내가 여기에 이사오기 전이겠네. 아마 내가 맞을 거야, 난 엄마랑 손잡고 대형 서점에 들르곤 했거든.”
추후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내용이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대형 서점이라해도 점자 책을 팔진 않았다.
그 날도 그저 글자가 인쇄된 책을 사러 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아야기의 어머니는 아직 점자에 서툴던 그녀를 위해 직접 책을 읽어주곤 했다. 장르를 불문하고 희망적인 내용을 담은 책이라면 가리지 않았다고 하신다.
“사실 네가 쓴 책 있잖아, 그거 결말이 꽤 어둡고 심오했지?”
“으응...아무래도 어두운 편이지.”
“초중반까지는 희망적이고 교훈적인 얘기가 많아서 내가 특별히 좋아했던 책이야. 사실 그것도 엄마가 찾아낸 거지만.”
“그 때, 내 글이 마음에 드셔서 다행이네. 만약 응원하는 메일이 없었다면 난 여기까지 오지도 못 했을 거야.”
아야기의 어머니도 어릴 때부터 독서를 즐기셨다. 그러나 인터넷의 보급 이후로 정보가 조금씩 뒤쳐지기 시작한 그녀는 점차 종이책의 입지가 줄어들고 ‘e북’이라는 것이 보급됨에 따라 어디서 전자책을 살 수 있을지 알아보던 중, 소설가 지망생들이 마음대로 글을 업로드할 수 있는 사이트를 찾아냈다고 한다.
5agi092라는 아이디를 만든 것은, 아야기의 어머니셨다.
아이디는 모친인 ‘아츠자와 리이’의 손으로부터 탄생했지만, 그 아이디가 투영하는 인물은 분명 ‘아츠자와 아야기’였다.
“사실은 말이야, 엄마가 네 글을 계속 읽어줘야하나~ 그만 해야하나 고민하셨데.”
내가 썼던 글은, 최종적으로 주인공이 죽음으로써 대다수가 행복해지는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해피 엔딩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고집을 좀 부렸지. 살면서 답답함에 짜증을 낸 적은 있지만 고집을 부린 적은 처음이었을거야. 나도 할 땐 하는 성격이거든!”
“그래서 막 여러가지 재밌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 예를 들면”
“네가 ‘신어’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던가, 말이야.”
- 작가의말
와! 50화에요!
와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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