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미사키, 그러지말고 나가보자니까.”
기어코 고개를 저어가며 극구 반대를 몸소 외치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화할 수 있게 된 이후로 자신의 의지를 표출하는 모습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환영이지만, 그 뜻이 계획의 정반대를 지향하고 있음은 환영할만한 일이 아니다.
첫 발돋움을 때지 못한다면 이후의 일이 진행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에 내 쪽에서도 강제력을 개입시킬 수 밖에 없었다.
팔을 잡고 줄다리기마냥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던 우리는 신체적 차이가 분명해 균형이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미사키는 말 그대로 밖으로 끌려나왔다. 신발장까지 왔을 때는 도어락의 잠금장치를 풀어 문을 활짝 열었고, 어제보다 뿌연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을 등지고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미사키를 끌어냈다.
튕겨져나오듯 몸이 공중에 떠버린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몸으로 받아내려는 순간이었다.
“..어..?”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발장 너머로 보이는 방의 내부 어디에도, 주택의 복도에서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굳이 찾아봤던 곳을 다시 뒤져가며 흔적이라도 발견하기를 바라던 행위에 대한 보상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뚜렷해지는 것 뿐.
미사키가 사라졌다.
------------------------------------------------
“미사키 씨가...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라졌데요.”
통화를 끝내자마자 보고한 내용은 어제의 상담에 가담한 사람들의 행동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만큼 결과가 충격적인 면도 있었지만, 우리는 한 치의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던 중에 최악의 결과를 마주해 사고가 정지해버린 것이다.
얼빠진 표정으로 주저앉을 시간이 없다. 이대로 카이토를 방치했다간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노트를 펼쳐 펜을 들었다.
다만, 아무 것도 적어내려가지 못했다.
소파의 가죽 시트가 움직이며 이상한 효과음을 내고, 앉아있던 사람이 테이블로 다가와 노트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겨 무엇인가 써내려갔다.
‘신어는 무한하지 않아. 범위, 시간, 대상 무엇이든지.’
‘그래서 힘의 척도를 측정할 때는 신어가 유지되는 시간이나 공간적인 한계를 재어보기도 해.’
미사키가 카이토의 앞에 나타난 것은 겨우 40일이 조금 넘는 기간 전, 그리고 유지되는 범위로는 그의 집이 전부.
‘카야의 힘은 이렇게 약하지 않아.’
머릿속에서 두 개의 키워드가 맞물렸다.
‘토라마 카이토의 감시’, ‘환영을 보게 된 이유’
“그러면..”
‘어. 아마도 맞을 거야.’
뒤의 내용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모두가 생각하는 바가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다.
‘이전에 네가 말했지. 신어를 사용하는데 특정 집단에 소속되지 못할 사람들을 노릴 거라고.’
‘이치, 카야를 불러와. 카야가 오는대로 카이토를 데리러 간다.’
“그럼 저는 뭘 해야 하죠?”
에다 씨는 앉아있던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태까지 수고했어. 뒷일은 어른들이 맡는다.’
나는 겨우 상처를 파해친 꼴이 되어버린걸까.
지금부터는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걸까.
이렇게 약한 존재였던가.
모두가 분주해진 사무소 안에는 홀로 시간이 멈춰버린 내가 있었다.
-----------------------------------------------
자신의 손으로 미사키의 환영을 없애버린 것도 모자라 영문도 모른 채 사무소로 옮겨진 어른, 그리고 무능함을 탓하며 테이블에 몸을 낮춰 앉아있는 아이. 양 쪽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방학의 첫 날을 되새기게 되는 ‘처음’의 풍경이 그때와 달랐던 다르게 다가온 것은 이전만큼 상황이 유연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선택지가 달리 없다는 점.
사무실에 속하게 되는 순간의 카이토에게는 두근거림을 안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상상할 여유가 없던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엎드려있는 소년이 생각했다.
“너무 실망하진 말고 들어줘.”
몇 가지 질문이 오가고 카야가 내린 결론은 ‘카이토의 힘이 측정되지 않는다.’
“눈에 띌 정도로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는 걸 알아줘. 시간을 두고 보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그의 신어가 미약하던 강하던, 지금의 그에겐 아무 상관도 없을 것이다. 여태껏 이뤄놓은 것을 되돌려 바닥부터 일을 진행할 생각인 카야가 몸소 실천하고 있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은, 힘은 어떻게 됬던 간에 좋으니 사랑하는 이를 만나게 해달라는 말을 삼키는 이의 속을 얼마나 타들어가게 할까.
“아츠시, 잠깐.”
반팔 티셔츠의 소매를 슬쩍 당겨 속삭이던 이는 정문을 통과해 아무도 간섭받지 않을 곳으로 묵묵히 걸어나갔다.
문 밖에 서있는 그녀의 한 발자국 앞으로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없던 것이 갑자기 생기는 경우는 없어. 무엇인가 방아쇠가 되어 힘에 눈을 뜨는 거야.”
새삼 진지한 모습의 이치를 마주한 것은 오랜만이다. 평소의 나라면 무거운 분위기를 피하려 역으로 장난을 건다거나 했겠지만 이번에 나눌 것으로 추정되는 주제에 대해서는 내심 궁금했던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덩달아 진지한 자세로 임했다.
“보통은 그 ‘방아쇠’가 어떤 일인지 기억하지 못해. 너무 충격적이라 무의식이 기억을 꺼내기를 꺼려하거나, 아니면 너무 사소해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난 후자에 속해.”
이치는 바로 앞에서 줄기차게 떨어지는 비를 향해 팔을 곧게 뻗어보았다.
“반동이 클 수록 나아가는 힘이 세. 그 뒤는 자기가 하기 나름이고.”
이치 본인은 사소한 일로 눈을 떴으니, 그 뒤는 자신의 힘으로 끌어올린 것을 말하려고 하는 건가.
“너라면, 자신의 약함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잃었을 때의 충격이 상상이 가?”
이치의 눈은 슬픔을 그리고 있었지만, 또한 공허했다. 마치 자신과 동떨어진 주제의 슬픈 영화를 보고 나온 것처럼, 공허함이 그려낸 가벼움이 슬픔과 섞여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는 감정을 그려냈다.
빗속으로 뻗어 주먹을 쥐어봐도 빗물을 잡지 못하는, 공감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손짓.
“어떻게 될지 몰라...”
팔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고 몸을 돌린 그녀는 문을 열기 직전, ‘조심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치가 사라진 정문에서 빗속으로 팔을 뻗어보았지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을 지, 그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교대로 감시하는 교도관마냥, 이번엔 다른 사람이 문을 열고 등장했다.
“미안한데, 담배 좀 필게.”
이전에 류노신이 입에 물던 금속 막대가 아닌, 종이로 감싼 것에 불을 붙였을 때는 숨이 막히는 냄새가 뿌옇게 빗속으로 퍼졌지만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를 두 번이나 잃어 속이 뒤집히는 쪽은 상대방이었고, 나는 겨우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는 약한 놈이었다.
흩날리는 재는 그의 속에 비하면 하얗게 보일 정도다.
“나한테 그 힘이 있다면,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미사키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거잖아. 환영이라도 괜찮으니..”
꽁초를 손가락으로 튕겨 하수도의 구멍에 명중시킨 그는 ‘아, 명중’이라며 속편한 소리를 해댔다.
“과정이 조금 그랬지만, 결과는 어떻게든 좋게 나온 것 같네. 고마워.”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슬프지 않았지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연기 때문이라며 변명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아 고개를 숙여버렸다.
“난 내가 다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네가 말한 것처럼.”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그는 멈칫하더니 손의 힘을 풀어 쥐었던 흰색 갑을 놓아버리고 가까운 쪽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러니까 언제나처럼 도와줬으면 해, 이 변변찮은 어른이라도 말이야. 그렇게 해줄 수 있니?”
빗줄기가 가림막을 강타하던 소리가 작아졌다. 아마도 소나기였던 모양이다.
“네. 행복이 이뤄지게 도와드릴게요.”
굳이 뒤의 내용을 덧붙여 말한 것은, 나의 간절함이다.
---------------------------------------------------------
집앞까지 에다 씨의 배웅을 받은 나는 엘리베이터의 앞에서 그녀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5분이고 10분이고 기다리던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머릿속이 그런 사소한 시간마저 세고 있을 만한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토가 보던 환영이 사라졌다면 하나 더 만들면 되지 않냐고, 머릿속에서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처럼 노트에 적어가면 알게 되지 않겠냐, 라는 성의 없는 답변이었다.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더 이상 종이로 된 노트가 필요없다는 점, 머릿속의 방대한 공백에 글씨를 상상하고 그 밑으로 적어나갈 단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생각은 이어졌다. 그럴 때면 주위의 것에 반응하지 못한다는 점은 아쉬웠지만, 실제로 노트에 적고 있을 때도 말소리가 잘 안들린다거나 반응이 늦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편리성을 갖춘 형태라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다리는 다른 사고회로가 작용하는 듯하여 생각하는 동시에 천천히 걸을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벽을 마주하고 생각하다 입주민이라도 마주친다면 무섭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천천히 길을 걸으며 고뇌에 빠지기 위해 정확히 17분이나 되는 시간을 에다 씨가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현관의 자동문이 열렸을 때 에다 씨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딱히 경로를 염두에 두고 걷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을 보낸 동네에서 길을 잃을 확률은 없기에 무차별적인 발돋움을 시작할 뿐이다.
머릿속의 목소리는 나의 것이 맞지만, 그 발상은 자신의 발언에 대한 위험성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무의식 씨가 던져 놓은 답안은 ‘나의 미사키 씨를 보여주는 것’. 처음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애초에 내가 미사키를 보게 된 것이 카이토의 기억이 신어와 합치면서 어떠한 시각적인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니 이번엔 내가 봤던 카이토의 기억과 뇌가 기억하고 있는 미사키의 형태를 신어로 구현해 카이토에게 보여주는 것.
속으로 그럴싸한 소리를 지껄이며 발을 멈추지 않고 걷던 내가 정신이 든 것은 누군가가 땅에 엎어지는 소리를 들었을 때다.
엎어져있던 사람과 부딪힌 기억은 없다만,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엎어져있던 모습을 보면 내 과실이 조금은 포함되지 않았을까 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고, 건성이지만 사과를 하려 손을 내밀었다.
“이야...피할 줄은 몰랐는데..”
몸이 반대쪽을 향해있던 사람은 단숨에 내 손을 낚아채갔고, 고개를 돌렸을 때의 표정에는 묘한 성취감이 묻어났다.
“오랜만이네요! 사가네 아츠시.”
아무리 봐도, 모르는 얼굴이다.
“저번에는 감사의 인사도 전하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마침 지나가시길래..”
지난번...감사를 받을 만한 일이 있던가, 라고 기억을 되짚어갔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있다.
“골목길! 그때 번화가 골목길에서!”
엎어져있던 그는 아직 넘어졌을 때 묻은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리를 살짝 저는 모습은 조금 전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탓일까.
“타니 센이치, 이름이에요.”
이치라, 어디 사는 감정기복이 심한 누군가가 떠오르는 이름이다.
사과의 악수가 지나가고 반가움의 악수가 이어졌을 때, 어딘가 기억하던 바와 현실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때는 분명히 교복이 남자애들의..”
엎어졌을 때 젖어버린 박스티가 몸에 달라붙어 라인이 드러났을 때, 전면의 굴곡은 애매하지만 남자의 평평한 그것과 달랐다.
“아, 그 때는..뭐랄까, 간접체험을 하려고 남동생의 교복을 빌리느라..하하”
“간접체험?”
반가움의 악수는 이미 의미를 잃어버린 채로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소설가가 꿈이에요, 마침 끄적이던 글의 주인공이 남고생이라 뭔가 떠오를까 싶어서 입어봤는데, 그런 꼴을 당해버렸네요.”
그러고보니 그녀는 목소리가 여자치고는 꽤나 굵었다, 잘하면 어린 소년뿐만 아니라 미성의 청소년기를 연기할 수도 있을 지도 모를 정도로.
“아하..그런데 번화가에서 여기까지는 꽤 멀텐데, 어쩐 일로 오신건가요?”
센이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그쳤지만 여전히 흐린 하늘은 언제 다시 비를 쏟아내도 이상하지 않을 듯이 낮고 무겁게 흘러갔다.
“어디 들어가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마침 근처에 적당한 카페가 떠오른 참에 커피를 권했을 때, 그녀는 커피를 엄청 좋아한다며 좋은 반응을 보여줬다.
“혹시 아까 넘어지..면서 다치신 건가요?”
카페로 이동하는 길에 계속 다리를 절던 그녀에게 물어보려 말을 꺼냈을 때는 조금 전의 추태를 들추는 것 같아서 말이 흐렸지만, 그녀는 손을 흔들며 웃어보였다.
“아뇨 아뇨. 이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발을 다쳐서 그런 거에요.”
상당히 적극적인 태도의 그녀는 부정마저 적극적이었다.
카페에 들어서 자리를 잡자마자 무섭게 쏟아지는 비를 얇은 창문이 막아주어 일종의 아늑함이 느껴졌다. 동시에,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우리는 잔잔하게 음악이 흘러나오는 커피향이 가득한 좁은 공간에 고립되기도 했다.
“오늘도 만나지 못하면 어쩌나 싶었거든요~물어볼 것들이 있어서요.”
센이치는 주머니에서 비닐 포장지로 감싼 얇은 것을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포장지까지 감싸놓은 것을 보면 상당히 중요한 물건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잠시.
포장지의 테이프를 뜯어 한 장씩 펼쳐놓았을 때는 뒷통수를 강하게 맞은 듯이 정신이 멍했다.
머리를 뒤로 묶은 차가운 인상의 여자아이, 정장을 입은 여성, 커다란 책장을 단신으로 들어올리는 동년배의 소녀, 반팔 차림의 둥근 얼굴형을 가진 여성.
“당신들, 초능력자 맞죠?”
- 작가의말
날이 많이 덥네요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