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로즈아라 님의 서재입니다.

애프터

웹소설 > 자유연재 > 로맨스, SF

로즈아라
작품등록일 :
2020.02.29 00:30
최근연재일 :
2020.04.29 15:10
연재수 :
17 회
조회수 :
249
추천수 :
0
글자수 :
142,865

작성
20.03.04 01:43
조회
16
추천
0
글자
20쪽

이상 기후

DUMMY

“박사님 죄송해요. 망가진 AI는 박스로 잘 포장해서 회사로 반송해드릴게요. 죄송합니다.”


노인이 남자의 뒤에 있던 여자의 진심 어린 사과에 조금은 완화가 되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안도의 미소를 짓고 양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박사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면 남자는 예상치 못한 여자의 반응에 뒤를 홱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럼 제 회사 편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만 전 가보도록 하죠. 아무쪼록 좋은 하루 보내시길. 감사합니다.”


노인은 허리를 굽혀 90°로 숙이며 정중히 인사를 한 뒤 사라졌다.


노인이 사라진 걸 확인한 남자는 뒤를 돌아 여자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가 눈빛에 가득 실려 있었지만 애써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눈을 질끈 감은 뒤 숨을 한번 몰아쉬고 입을 열었다.


“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남동생이라면 한방 갈겨 주었을 거야.”


이에 질세라 여자는 거칠게 자신의 팔을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오빠야말로 그럴수록 더 형편없어지겠지. 지금 이게 최선이 아니야. 그리고 오빠가 한 짓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어. 알아?”


“내가 도대체 뭘 잘못 했는데?”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투로 남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때 보라색 공이 다시 나타났다. 여자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그의 시선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다.


때마침 그들에게 큰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적절한 쉼표가 필요한 때이기도 했다.


“‘AI 반대 협회’로부터 온 연락입니다. 받으시겠습니까?”


“OK”


남자의 눈앞에 족히 서른 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나타났다.


처음에 나타났던 박사와는 다르게 매우 선명하게 나타난 그들은 마치 사람들이 직접 방문하여 이 집을 가득 메운 것처럼 느껴졌다. 모두 성인이었고 다양한 국적과 연령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눈엔 하나같이 어떤 의지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사람, 차렷 자세로 있는 사람, 팔짱을 낀 사람, 짝다리를 짚은 사람 등등 서 있는 자세나 행동들이 다름에도 어쩐지 내뿜고 있는 어떤 의지가 비슷해 보였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시다시피.”


남자는 보란 듯이 두 손으로 부서진 잔해들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그 처참한 몰골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고 어떤 사람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치켜세우며 ‘예쓰’를 외쳤고 여자 두 명은 제각각 하이파이브를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얼싸안고 기뻐했다.


마치 세상을 구한 히어로가 된 마냥 남자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가슴을 당당히 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그 행동이 역겨운지 뒤에서 시선을 다른 곳에 고정시킨 여자는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오늘 밤 찰리 박사 본인이 졌다는 방송을 할거에요. 그리고 AI도 한정적으로 만들겠답니다.”


사람들은 마치 식민지에서 해방이라도 된 듯 방방 뜨며 기뻐했다.


“희망이 다가오고 있어요.”


백인 여자가 마치 하느님을 직접 뵙기라도 한 듯 황홀한 얼굴로 남자의 두 손을 잡으려 했으나 남자의 손을 잡지 못하고 손끼리 통과될 뿐이었다.


“자네가 대표가 되니 일이 술술 풀리 구만.”


“진작 그대가 대표가 되어야 했어요!”


“우리의 이 내기는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지겠죠.”


노인과 여자, 남자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백인 노인은 남자가 마치 독립투사라도 된 듯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물론 백인 여자와 마찬가지로 노인의 손이 남자의 어깨를 통과했다.


모두 이 흑인 남자가 신이라도 된 듯 홀려있는 느낌이었으나 한 사람, 남자의 여동생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우리 AI 반대 협회는 언제라도 불의에 맞서 싸우겠소.”


“옳소.”


“다음 주 정기모임에 직접 만나 자세한 얘기를 해드릴게요.”


“알겠네. 다음 주까지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겠네.”


노인의 말을 끝으로 사람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못마땅한 모습들이 드디어 사라지자 여동생이 입을 열었다.


“마스, 얘기 좀 해.”


‘마스’라고 불리는 덩치가 불곰처럼 큰 흑인 남자가 여동생 앞에 섰다. 상대적으로 여동생은 오빠에 비해 덩치가 작고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녔고 오빠에 비해 인상이 유순했다.


그러나 이들을 모르는 사람이 한눈에 남매라고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닮아 있었다.


“얘기해.”


사람들의 격려를 한가득 받아서인지 분노가 싹 사라진 마스는 순한 불곰으로 변해 있었다. 그 때문에 여동생의 앙칼진 눈빛이 부담스러웠고 무섭게 느껴졌다.


“이게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생각할 때 난폭한 방법이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이길 밖에 없어.”


“아니, 그저 오빠는 화풀이를 하고 있는 거야. 화풀이를 애먼 인간 모습을 하고 있는 AI에게 하고 있는 거라고.”


“뭐? 화풀이?”


“그래. 화풀이!”


“제시카, 잊은 것은 아니겠지? 우리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AI가 오작동하는 바람에 스카이카가 떨어져서 돌아가셨어. 그런데도 우리는 어떤 위로를 받지 못했어! 오히려 그 빌어먹을 회사가 우리보고 사기꾼 가족이라고 했지. 목숨을 걸고 어떻게든 배상금을 받아먹으려는 쓰레기로 몰아갔어. 이런데도 화풀이?”


마스는 배신감과 서운함에 기가 막히겠다는 얼굴로 계속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니? 우린 둘 다 어렸고 내가 너의 부모님 역할까지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부모님 대신 널 돌봐야 하는 책임감을 아냐고?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런 비극을 겪어야 하는데?”


남매의 불꽃 튀는 싸움이 예상된 동양 남자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갈게. 저 나중에 놀러 올게.”


누가 봐도 급한 일이 생겨서 가는 모습이 아니었다. 남매의 싸움에서 새우 등 터지기 싫어 도망가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제시카가 차분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오빠 마음 이해해. 저들도 이해해. 다들 사정이 있고 상처가 있으니 이런 모임으로 모였겠지. 하지만 도리어 오빠가 다치고 오빠의 영혼이 갉아 먹혀 질까 나는 그게 걱정돼.”


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동생의 말을 계속 들었다. 마스 또한 동생의 마음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날, 스카이카에 장착된 AI가 오작동을 했던게 맞는 사실이지만, 또한 명백한 사실은 그 날 먼지 폭풍이 굉장히 심한 날이었어.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갑작스럽게 생긴 모래폭풍은 그만큼···우리 지구가 많이 망가졌다는 거야. 물론 AI에 너무 기대게끔 만들어진 사회도 잘못되었고.”


이어서 동생은 말을 계속했다.


“오빠···나도 오빠처럼 AI를 저주하고 사람들 몰래 AI들을 고장 내고 다녔어. 이 세상을 저주하고 욕하고···매일 난 그렇게 살았어. 오빠 앞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이가 아닌 척, 밝은 척 그렇게 살았어. 그런데 그 모습은 내가 아니야. 난 이 세상이 끔찍이 싫고 저주스러웠어. 죽지 못해서 내 인생이 너무 괴롭고 슬펐을 뿐이야. 그러던 어느 날 그 슬픔에서 해방하기 위해 난 아파트 타워 난간에 매달렸어.”


여자는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울먹거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발을 조금만 헛디디면 바로 끝장나는 건데. 그렇게 바보같이 난간을 붙잡고 서 있었는데 어느새 내 앞에 다가온 AI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지금 그 감정을 100% 이해 못 할 수도 있지만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안 할 거라고 했어. 분명히 죽어선 영원히 후회할 것이라고 했어. 삶을 스스로 놓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이라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재즈 음악을 영영 들을 수 없다고 했어. 이 세상은 내 죽음을 거들떠도 안 보겠지만 정작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유일한 가족인 오빠가 내 죽음으로 인해 다치고 괴로워 할거라고 했어.”


말을 마친 여자는 눈물을 닦고 좀 더 진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더는 말 안 하겠다며 내 목숨이니 알아서 선택하라고 단호하게 말하더군. 난 그 말을 듣고 AI에게 부탁했지. 날 좀 안전하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제시카의 말이 다 끝나자 마스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두 가지 이유에서 놀랐다.


여동생의 극단전인 선택시도와 그런 여동생을 구해낸 AI···.


마스의 정신은 아득히 높은 곳에서 떨어지듯이 어지럽게 느껴졌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무언가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그 후 난, 내 삶을 치유해 나가고 있는중이야. 지금 난 정말 괜찮은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여러 친구를 사귀게 되었어. 내 자신을 존중하니까 좋은 일들이 생겨. 항상 내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게 노력 중이야.”


“······.”


말을 끝마친 제시카는 험악하게 부서진 AI를 박스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마스는 그런 제시카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제시카는 다 부서진 부품을 담은 상자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홀로 남은 마스는 양손으로 머리를 쥔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그저 알 수 있는 사실은 조금은 더 밝아진 느낌이었다.


이 느낌으로 보아 낮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배가 심하게 고프다 못해 등에 척 붙은 느낌이라면 생명에 위협이 가해질 정도로 굶었다는 뜻이다.


눈 뜰 힘조차 없는 어린 꼬마 숙녀는 입술이 말라 부르텄고 목이 몹시 말라 침을 삼켜 보았으나 워낙 수분을 흡수하지 못한 탓에 침도 바짝 말라 있었다.


상자가 잔뜩 쌓여 진 이곳은 꼬마 숙녀의 부모님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버리지도 쓰지도 못하는 물건들을 놓은 장소였다.


꼬마도 이 물건들처럼 자신의 신세도 버리지도 쓰지도 못하고 쌓아놓은 쓸모도 없는 존재인 것 같아 어쩌면 이 상자들의 일부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9살 꼬맹이인 이 꼬마 숙녀는 이 정도를 버틴 것에 대견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더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자신의 앞에 잔뜩 쌓아 올린 박스가 빙빙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즈음 희미하지만 분명 요란한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쾅 쾅 쾅!


이건 현관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캐서린 언니가···설마 우리 집을 찾은 건가······.난 이제 산 것인가······.’


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서 이런 생각마저도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안 계십니까? 계시지 않는다면 문을 부수고 자택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인 남자의 굵직한 목소리였다. 점점 더 크게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쓰러졌다. 흙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두 명의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키가 무척 큰 남자는 190cm는 족히 넘게 보였고 경찰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고급스러운 블랙정장에 안엔 깔끔한 흰 와이셔츠를 입은 중단발의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와 경찰은 일단 집안을 뒤지려다가 거실에서 시체나 다름없을 정도로 앙상한 남녀를 보게 되었다.


아무렇게나 누워서 커다란 선글라스 같은 고글을 쓰고 있는 모습은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여자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거실에 누워있는 여자의 고글을 낚아채듯 벗겨버렸다. 그리고 옆에 누워있는 남자의 고글 또한 뽑듯이 벗겨버렸다.


눈에 초점을 잃고 삶에 대한 긍지를 죄다 잃어버린 듯 퀭한 그 두 얼굴은 사람 꼴이 아니었다.


만약 이 집에 도둑이 들었다면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 집에 들어왔는지 훔치는 것도 잊어버리고 도망칠 판이었다.


“현이 어디 있니?”


블랙정장을 입은 여자는 초점을 잃은 여자를 반쯤 일으키더니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물었다. 하지만 여자는 답변 대신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연 벽만 쳐다보았다.


“야! 현이 어디 있냐고? 이 미친 것들아.”


초점을 잃은 두 사람은 그저 눈만 뜨고 있을 뿐, 좀비나 다름없었다.


이쯤에서 아이의 행방을 이들에게 묻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제쳐두고 아이를 찾기 위해서 여기저기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제길 완전 맛탱이가 갔군.”


경찰이 한번 손뼉을 치자 허공에 카메라가 나타났고 거실의 두 사람을 찍어댔다. 카메라는 진짜 딱딱한 물체가 아니라 손에 잡히지 않은 홀로그램이었다. 경찰이 손으로 휙 젓자 카메라는 사라졌다.


아무리 방문을 열어젖혀도 그 안엔 아이가 없었다. 더 불안해진 여자는 입술에 손을 대며 생각하다가 문득 현관을 지나쳐 바로 옆에 보았던 창고를 떠올렸다.


재빠르게 달려가 창고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데 어찌나 단단하게 잠가 놓았던지 문은 열릴 생각이 없었다. 여자는 있는 힘을 다해 발로 차보고 몸통으로 힘껏 부딪혔으나 소용이 없었다.


“잠시 나와보세요.”


경찰이 허리에 차고 있던 기계를 손잡이에 댔다. 스파크가 일어나더니 드디어 문이 열렸다.


“세상에!”


“하느님 맙소사!”


세상의 온갖 두려움과 배고픔과 목마름에 지친 듯 쓰러져 있는 아이는 심하게 말라 있었다. 여자는 아이를 껴안으며 상태를 확인했다.


경찰이 안타까운지 ‘에휴’ 하며 한숨을 쉬었고 시선을 애써 다른 곳에 두려고 노력했다.


힘이 없어 가늘게 뜬 꼬마의 눈에 엄마와 닮은 얼굴, 하지만 외할아버지의 얼굴이 더 섞인 그 얼굴, 지성미와 세련미가 풍기는 얼굴이 비쳤다. 현의 단 하나뿐인 이모였다.


“이제 괜찮아. 다 괜찮아.”


“······.”


거듭 괜찮다는 말에 꼬마는 눈을 감았다. 갇혔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눈만 감고 있을 때와는 다른 안도감이었다.


설마 죽은 것인가 하고 경찰이 섬찟할 정도로 현의 몰골이 안 좋았으나 꼬마 자신은 이모의 온기를 느끼며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자동주행 모드로 도로를 달리는 차는 끝도 없이 계속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 근방에 병원이 있을 텐데.”


앞 좌석에 타고 있는 이모가 AI 네비게이션을 켰다. 그러자 달리는 자동차 앞 도로에 어느 방향으로 가라는 큼지막한 화살표가 띄워졌다.


“아직도 한참을 가야 하다니···. 현아 조금만 참아.”


굉장히 지쳐있던 어린 꼬마는 조금도 참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긴장이 풀려 블랙홀에 빨려든 듯 강렬한 잠에 빠져들었다.


한참을 달리는 차는 고요함을 유지하다가 새소리가 들렸다.


‘로날드’라는 이름과 로날드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증명사진만한 크기로 이모의 정면 왼쪽 허공에 나타났다. 새소리는 이모의 알림음 취향인 듯 싶었다.


현의 이모는 허공에 나타난 남자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터치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남자의 상체 모습이 불투명한 모습으로 불쑥 나타났다.


「동생네는 찾았니?」


얼추 상황을 알고 있는지 남자가 궁금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다행히 가까스로 찾았어. 네가 알다시피 연락 안 된지 오래되었고 일방적으로 인연을 끊은 것도 걔이지만 그래도 내가 찾아야지. 가족이니까. 또 어린애도 있고.”


「대기업과 소송 준비하고 있는 와중에 가족까지 찾아다닌 네가 정말 대단하게 느껴져. 꽤 규모가 큰 소송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겠다. 가상세계 서비스 피해자와 대기업간의 소송이라고 했지?」


“가상세계에 빠져 있다 보니까 실제 세상에서 제 몸을 케어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로 인해 심각한 경우 사망에까지 이른 경우가 많다고. 개인은 힘이 약해. 건강악화라든지 생명이 위험한 상황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잖아. 개인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야.”


「하지만 새희야, 네 생각도 해야 돼. 국가의 재정은 바닥이 났고 더 이상 전통으로 변호사를 국가에서 쓸 수 없을 지경에 까지 이르렀어. 심지어 앞으로 국가가 적극적으로 AI 변호사를 전면적으로 도입시키기로 했다는 결정을 기사로 봤어. 네가 대형로펌이 제안한 자리를 거절하면서까지 국선을 도맡기엔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아.」


“로날드, 나마저 대형로펌으로 가버리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에게 의지해?”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은 네 사명감은 알겠는데···끝까지 남아 대기업에서 내민 손을 잡지 않고 국선에서 해고당하면 더 이상 변호사일은 못 하는 거야.」


“그렇게 되겠지. 아마 내가 해결하게 될 마지막 소송은 현의 양육권을 나에게 위임하는 소송일 것 같아.”


「그거야 어렵지 않지. 법원은 쉽게 너의 손을 들어 줄 거야.」


“마음이 아픈 것은 현의 엄마아빠가 국가가 지정한 치료센터로 보내지게 된다는 거야. 지금 상태로는 빠르게 완치되기 힘들어 보여.”


「그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건 그렇고 새희야, 너 같은 똑똑한 인재가 사명감으로 묶여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좀 더 신중히 생각해봐. 그리고 앞으로의 일에 행운을 빌게. cross one's fingers. 굿럭.」


남자는 행운의 표시를 손가락으로 표시하며 연락을 끝냈고 새희는 앞에 어떤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곧 경쾌한 음악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진 유쾌하고 친절한 여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오늘의 날씨입니다.”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은 잿빛이었고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씨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은 매우 맑음으로 되어있었다.


매우 맑음이 매우 맑음이 아닌데도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이모는 개의치 않았다.


이 시대의 매우 맑음은 잿빛 하늘이었고 우중충했으며 매우 흐림은 밖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불가였다.


한참을 달리던 차의 뒷좌석에서 잠에 빠져 있던 현은 굉장히 포근하고 처음 느껴보는 따스함에 눈이 저절로 서서히 떠졌다.


현의 얼굴에 맑고 따뜻한 온도가 내리쬐었다.


얼굴이며 팔이며 다리며 맑고 따뜻한 햇볕이 그동안 현을 감쌌던 칠흑을 거두어주려는 듯 마치 다정하게 안아주는 것 같았다.

“속보입니다!! 모두 창밖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상 기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잿빛 구름이 걷히고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시대가 볼 수 없었던 파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이 곳곳에서 보이는 데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 지고 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잔뜩 흥분한 여자 앵커의 목소리는 경이로움과 북받치는 감동의 감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이모는 넋을 잃고 투명한 앞 유리와 투명한 천장을 통해 살아생전 처음 보는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을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가장 신비로운 것을 보고 완전히 홀려버린 사람처럼.


현이 역시 희미하게 뜬 눈으로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푸른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


이건 꿈일 거라고. 혹은 동화 속에 잠깐 와 있다고.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실은 내가 죽어서 천국에 와 있는 걸까······.


가상현실에서만 보았던 현상이 꿈에서 나타난 것이라 굳게 믿었다. 꿈 치고는 제법 생생하고 선명했다고 착각한 현은 나중에 그것이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그 이상 기후 현상은 보지 못했다.


작가의말

이렇게 2화를 또 올리게 되었네요ㅎㅎ

성실히 써서 꼭 완결을 쓰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애프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7 미워할 거예요! 엄청 많이! 20.04.29 8 0 15쪽
16 버림받은 톱스타 20.04.27 8 0 17쪽
15 갈색 코트를 입은 남자 20.04.26 15 0 18쪽
14 행운이 찾아올 거야 20.04.24 12 0 17쪽
13 시간여행자 20.04.20 15 0 19쪽
12 운명의 메시지 20.04.18 15 0 17쪽
11 블루 게이트 20.04.03 9 0 20쪽
10 도망자 20.04.03 9 0 20쪽
9 덫에 걸려들다.......! 20.03.28 14 0 22쪽
8 위험한 초대 20.03.25 11 0 19쪽
7 꿈에서 본 의문의 여자 20.03.20 15 0 18쪽
6 초대장 20.03.19 13 0 18쪽
5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다 20.03.13 13 0 18쪽
4 에밀리를 만나다 20.03.11 15 0 18쪽
3 꿈에서 본 의문의 남자 20.03.06 23 0 19쪽
» 이상 기후 20.03.04 17 0 20쪽
1 스타트 20.02.29 38 0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