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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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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최근연재일 :
2018.03.26 19:27
연재수 :
360 회
조회수 :
189,517
추천수 :
4,145
글자수 :
2,037,868

작성
17.03.31 20:48
조회
368
추천
11
글자
8쪽

엽인들 [사명..세례 24]절망

DUMMY

‘어차피..’


어떤 선택을 하던 파멸로 귀결되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게 명징해졌다. 자신은 이 미칠 것만 같은 상황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리라는 것을.. 끝끝내 선택하지 못한 채 가족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보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그는 모종의 결심을 하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래, 어차피.. 끝이야.”


억눌려 알아들을 수 없는 절망을 뱉어내며 천천히 일어서서 부서진 다리로 바닥을 디뎠다. 그리곤 눈앞의 죽음에게로 한 발 나아가려고 할 때, 그를 만류하는 과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같은 놈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느냐?’

‘저.. 같은 놈이요?’

‘패배자들 말이다.’

‘아, 스승님. 이제 그런 말씀은 좀 안 하실 때도..’

‘세상은 패배자를 향한 관심을 끊어 숨통이라도 트이게 해준다. 그 무관심이 재기의 발판이 되어주기도 하지. 하나 너와 네가 선 곳에서는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죽..어요?’

‘그러니 헛소리하지 말고 들어라.’


솔직히 그때는 와 닿지 않았다. 스승의 매서운 눈초리가 무서워서 귀를 열었을 뿐.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너 같은 놈들은 항상 충동적으로 선택하고 어떻게든 합리화를 하다가, 마땅히 따르는 대가를 감당치 못하고 무너진다. 스스로도 잘 아는 뻔한 결말에 이르고 나서야 지난 세월이 아쉬워 땅을 치지만, 곧 다시 반복하고 또 반복하다가 종국에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언제나 그렇듯 직선적이고 냉담한 지적이 폐부를 찔러대자 명진은 어눌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스승님..”


어이없게도 현실의 그가 과거의 목소리에 답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달라요. 그런..게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걸 할 수 없는 걸요? 그렇잖아요?”

‘우둔한 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는 어찌하라 했느냐?

“예? 그게 그러니까..”

“우둔한 놈, 따르는 대가를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면 된다고 내 몇 번을 더 말해야 하느냐? 한숨 돌리며 자문을 던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모래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어떤 상황에 부닥치든 너는 행동할 것이고 그 또한 선택인 것을.. 그러니 지금 당장 한숨 돌리면서 물어라, 나는 그 일에 따르는 대가까지 생각한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요? 이건..이 미친 짓은 선택 같은 게 아니란 말이에요. 이건 그냥.. 좆 같은..어차피, 어차피 다 끝난 거예요. 대가고 뭐고 간에 저는 이렇게밖에..”


변명이라도 하듯 홀로 뭔가를 중얼대던 명진은 그의 광증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이스가리옷이 “호부견자라, 그분께서 실망하시겠구나.”라고 중얼대는 순간, 과거와의 대화를 멈춘 채 시선을 옮겼다.


“그..분?”


그는 행커치프를 멍하니 바라보며, “그..분, 그분?”하고 뇌까리다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라고 하였던 이름이 불현듯 떠오르자 한 자 한 자 천천히 씹어 뱉었다.


“사..탄."


그저 전해 들은 단어 하나에 불과했건만, 이루 말할 수 없는 증오심이 치밀어 손에 쥔 단검을 부서지라 움켜쥐게 하였다.


“사..탄. 사탄!”


죽어 원혼이 되어서도 잊지 못할 적대자의 이름이 뇌리와 심장과 영혼에 꽂혀 결코 지워지지 않을 낙인으로 새겨지는 순간, 가슴 속 저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울분이 발작적으로 고개 쳐들며 소리쳤다.


‘분노하라, 너는 분노하여라!’


으스러지라 어금니를 악물고 거칠게 숨을 내뱉던 그는 이스가리옷에게 한 걸음 나아가며 저주받을 이름을 뱉어냈다.


“사..탄.”


그러자 외침이 다시 들려온다.


‘분노하라!’

“사탄.”

‘분 노 하 라.’

“이 좆 같은 개새끼들아!”


그는 목이 터지라 고함치며 분노의 손을 향해 돌진해갔다. 내 오늘 여기에서 가족과 함께 죽으리라 다짐하며 그렇게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비명을 삼킨 자의 신음이 귓전을 때려 그를 얼어붙게 하였으니..


‘..아버지?’


이렇게 한숨 소리만 들어도 당신이라는 걸 느꼈기에 반사적으로 고개 돌리려 할 때, 붉게 물든 팔 하나가 눈앞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멍하니 그를 보던 명진은 흐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야. 안..돼, 안돼, 안돼!”


계속해서 귓가를 맴도는 저 고통 어린 신음은 때때로 술 한 잔을 받아주시며 믿는다고, 나는 괜찮으니까 한 번 부딪혀보라며 넉넉하게 웃어 주시던 당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래, 그럴 리..없어.”


눈 앞에서 덧없이 식어가는 저 팔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주고 등을 두드려주던 내 아비의 것이 절대로 아니었기에 그는 다시 부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치 이명처럼 들려오는 어머니의 일그러진 절규가 진실을 알려주고 말았으니.. 이스가리옷의 경고가 새삼스레 귓가를 맴돈다.


“그분께서 내게 명하시기를, 영세자가 의식을 거부하려 들 때마다 합당한 대가를 받으라고 하셨다. 대가는 네 핏줄의 사지 중 하나이다."

“대..가? 아니 나는.. 내가, 내가 또 무슨 미친 짓을 한 거야?”


그는 또다시 후회하고 절망하며 그대로 무너졌다. 최악의 상황이라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다는 게 그 광기 어린 충동의 변명이 될 수 없으리.


‘그..때, 스승님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손에 든 단검과 비커를 내려놓은 그는 어깻죽지부터 잘린 팔을 붙잡아 가슴에 꼭 안았다. 그리곤 서럽게도 울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저 하늘이, 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 속에서, 빌어먹게도 언제나 옳았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둔한 놈, 내 말은 이면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언제나 최악의 결과와 맞닥뜨리게 되니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게 어떤 일이든 결국에는 다 나의 잘못으로 수렴되고 돌이킬 수도 없다. 그러니 너는..’

“저는..이 우둔한 놈은 또 이런 병신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스승님, 저는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당연히 어떤 답도 들려오지 않자 그는 정신없이 뇌까렸다.


“스승님? 저는요, 저는 이러려고 한 게.. 하지만, 이건 있잖아요, 이거는 진짜 아니잖아요? 제가 다 잘못한 건 알겠는데.. 내가 씨 팔, 좆 같은 병신 새끼라는 건 잘 알겠는데요, 그래도 이거는 아니잖아요. 예? 스승님.”


그만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는지 그는 품 안의 팔을 보며 사과하고 허공을 향해 변명하며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런 행태를 비릿한 미소로서 내려다보던 이스가리옷은 상체를 살짝 숙여 그가 자신을 보게 한 뒤에,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남명진.”


명진이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그가 환히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너는 방금 네 아비의 팔을 잘랐다.”

“아니..아니야!”


절망한 자의 절규가 고즈넉한 주택가의 단잠을 깨운다.


작가의말

이번 편은 짧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끊어야 남명진의 절망을 충분히 음미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 잘랐습니다. 

그럼 한 번 달려볼까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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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엽인들 [사명..세례 26]현 17.03.31 375 9 12쪽
152 엽인들 [사명..세례 25]움직임 17.03.31 346 13 13쪽
» 엽인들 [사명..세례 24]절망 17.03.31 369 11 8쪽
150 글쟁이의 변. +3 17.03.29 407 8 1쪽
149 엽인들 [사명..세례 23]천붕(天崩) +5 17.03.23 469 12 15쪽
148 엽인들 [사명..세례 22] +5 17.03.21 387 13 13쪽
147 엽인들 [사명..세례 21]마지막 일상. +2 17.03.20 420 8 16쪽
146 엽인들 [사명..세례 20] +2 17.03.17 394 11 11쪽
145 엽인들 [사명..세례 19] 현 & 이혜리 17.03.17 376 8 13쪽
144 엽인들 [사명..세례 18] 현 vs 이혜리 +1 17.03.15 383 14 15쪽
143 엽인들 [사명..세례 17] 현 vs 이혜리 +1 17.03.14 465 13 15쪽
142 엽인들 [사명..세례 16] 현 vs 이혜리 +2 17.03.08 612 10 10쪽
141 엽인들 [사명..세례 15] 드잡이질 17.03.08 429 8 14쪽
140 엽인들 [사명..세례 14] 현 vs 희나리 +2 17.03.06 433 12 14쪽
139 엽인들 [사명..세례 13] 우물 안 개구리 17.03.03 357 9 14쪽
138 엽인들 [사명..세례 12] 희나리 17.03.03 509 12 13쪽
137 엽인들 [사명..세례 11] 이혜리 & 송광극 17.03.02 454 10 14쪽
136 엽인들 [사명..세례 10] 이혜리 +2 17.02.28 464 10 15쪽
135 엽인들 [사명..세례 9] 세례자 17.02.27 532 13 15쪽
134 엽인들 [사명..세례 8] 전조 +1 17.02.24 489 10 14쪽
133 엽인들 [사명..세례 7] 일상 17.02.24 441 9 12쪽
132 엽인들 [사명..세례 6] 일상 17.02.24 421 12 12쪽
131 엽인들 [사명..세례 5] 일상 17.02.24 409 9 13쪽
130 엽인들 [사명..세례 4] 제물, 극악무도2 +2 17.02.22 539 13 14쪽
129 엽인들 [사명..세례 3] 제물, 극악무도1 +1 17.02.22 422 6 11쪽
128 엽인들 [사명..세례 2] 제물, 먹는 자. +2 17.02.21 419 11 14쪽
127 엽인들 [사명..세례 1] 제물, 먹히는 자. 17.02.20 395 10 14쪽
126 엽인들 [사명..세례 prologue] 송씨 형제.2 +3 17.02.17 441 14 17쪽
125 엽인들 [사명..세례 prologue] 송씨 형제.1 +1 17.02.16 510 10 14쪽
124 엽인들 [사명..사제 16]선택 +1 17.02.15 460 1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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