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co****** 님의 서재입니다.

디어 헌터 Dear, Hunter

웹소설 > 자유연재 > 현대판타지, 로맨스

colorbye
작품등록일 :
2018.10.12 23:45
최근연재일 :
2019.08.19 19:03
연재수 :
53 회
조회수 :
1,962
추천수 :
0
글자수 :
459,476

작성
19.04.05 14:53
조회
27
추천
0
글자
25쪽

디어 헌터 Dear Hunter 35. 조이가 망쳐놓은 것

DUMMY

로게스와 두 번째 암시를 하는 날이 밝았다.

조이의 방 창문에 드리운 암막커튼은 밤처럼 깜깜해서, 커튼을 내리면 작은 스탠드라도 켜지 않고서는 걷기도 힘들었다. 보통 암시치료를 할 때면 언제나 쳐두던 암막커튼이 오늘은 창문 옆에 단정히 묶여있었다.



조이는 오늘 치료는 커튼을 치지 않고 해보겠다고 했다.

동반자도 하빌라 한 명으로 충분하다며 스트라제나는 내보냈다.



이마를 맞대며 앉아있는 조이와 로게스를 문틈으로 들여다보던 스트라제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문을 닫았다. 그 등 뒤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많아 견딜 수 없어하는 목소리가 말을 잇고 있었다.




“암시가 뭘 하는 건지는 저도 대충 알아요. 예전 센터에서는 부모도 치료실에 같이 들여보내줬는데.”




팔짱을 끼고 오목한 턱을 사방으로 저으며 볼멘소리를 내는 이 사람은 로게스의 어머니였다. 로게스와 똑같이 생긴 두 눈은 커다랬고, 통통한 볼살과 칼로 자른 자몽처럼 도톰한 입술도 딸과 똑같았지만, 표정만은 로게스와 전혀 다른 표정들을 지었다. 로게스가 남을 헐뜯고 언제나 불안해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면 훗날 그녀의 어머니 얼굴이 될 것 같았다.



처음부터 암시치료를 원하지 않았던 로게스의 부모들이니 눈에 닿는 사소한 것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인정했다. 그러나 스트라제나가 로게스의 어머니로부터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같은 것을 자꾸 설명해도 결국에는 또 같은 것을 불평하고야 만다는 점이었다.


아이에게 힘든 일이 있었고 그 일에 용의가 있다고 지목된 선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그걸 지켜본 가족에게 상식을 원하는 것이 잔인한 일이라는 걸 스트라제나도 잘 알았다.


그러나....




“왜 이 센터에서는 안 된다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암시 센터마다 서로 다른 규정을 따르고 있어서요. 이해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이미 첫날부터 수도없이 그녀에게 설명한 것들이었으나, 스트라제나는 침착하게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로게스의 어머니는 자기 앞에 선 스트라제나를 보자 자신의 좋지 않은 기분을 해소할 새로운 희망을 얻은 표정을 했다. 그녀는 스트라제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다가 물었다.




“선셰이드 사람들은 다 그쪽처럼 키가 큰가요?”


“밥을 얼마나 많이 먹었느냐에 따라 다르죠, 어머니. 피리간 사람들처럼요?”




스트라제나가 차분히 대답했다.




“그쪽도 암시자예요?”


“저는.....”




견습 암시자라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슨 마음이었는지, 스트라제나는 서둘러 전원을 끄듯 말을 바꾸었다.




“일반 직원이에요.”


“피리간에 온지는 얼마나 됐어요? 아예 여기서 살아요? 아니면 다시 갈 거예요?”


“아직 여기서 산 지 일 년도 안 됐지만, 앞으로 살아갈 생각이 있으니 여기서 일하고 있겠죠?”


“오.”





까칠하게 날이 선 스트라제나의 목소리에 살짝 놀란 부인이 녹색 퍼코트 안으로 팔짱을 끼고 도사리며 경계하는 눈빛으로 제나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스트라제나는 곧장 사과했다. 허리 옆에 늘어뜨린 손은 가만히 주먹을 쥐고 있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선셰이드 사람하고 얘기할 때는 그 사람 주머니를 꿰매놓으래요.”


“왜 그렇죠?”


“언제 화가 나서 후추를 뿌릴지 모르니까.”




긴 목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꼿꼿이 굳어있는 스트라제나를 올려다보며, ‘농담이에요, 농담!’이라 덧붙인 부인은 목주름이 들썩이도록 깔깔 웃었지만 제나는 그녀를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선셰이드는 특산물로 통후추가 유명했는데, 감정표현이 적은 대신 한번 화가 나면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뜻에서 ‘후추를 뿌린다’는 건 그런 선셰이드 사람들의 성질을 빗대는 말이었다.


스트라제나는 부인에게 후추를 뿌리는 대신 희뿌옇게 성에가 낀 얼굴로 말을 돌렸다.




“밑에 내려가서 케이크라도 드시며 기다리시죠.”


“안 그래도 내려갈 생각이었어요.”



부인은 몸을 홱 돌렸다. 그녀의 어깨에 걸려있던 쇠사슬같은 핸드백 스트립이 크게 출렁이며 부인의 웃음소리보다 더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이 아빠한테 전화도 해야 하고.”




부인은 스트라제나보다도 먼저 앞서서 계단으로 걸어갔지만, 그녀를 따라가려던 제나는 난간 뒤에서 멈춰 섰다. 계단을 내려간 후 이미 스트라제나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채 부인이 센터 문을 밀고 나가는 모습을 내려다보던 제나는, 쾅 하고 문이 닫히자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암시가 벌어지고 있는 조이의 방문 앞으로 돌아가서, 지난밤 야영 사냥에서 불편한 잠자리로 뻐근한 어깨를 문지르며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암시 속으로 들어온 조이는 그림책이 가득 꽂힌 책장과 키가 작은 아이들 전용 의자를 지나쳐, 곧바로 창문 아래 낮은 벽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는 로게스에게로 다가갔다. 로게스와 좀 더 떨어진 거리에 앉아있는 모스 선생은 가위로 은박지를 자르고 있었다. 교실 창문 안으로 흘러든 햇살이 조각난 은박지에 비칠 때마다 눈이 아프도록 눈부신 빛줄기를 뿌렸다.



로게스가 읽는 책을 들여다보려던 조이는 문득 고개를 돌려 모스 선생을 보았다. 깨끗하고 평평한 이마가 가지런하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 아래 숨어있었고, 연한 제라늄꽃빛으로 칠한 입술은 조금 웃는 인상으로 야무지게 닫혀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능숙하게 은박지를 별모양으로 잘라내고 또 새로운 은박지를 집는 경쾌한 손짓은 그녀가 자신의 일을 즐긴다고 느끼게 했다.




-로기!




모스 선생이 목을 휙 들며 크게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은박지에서 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든 로게스가 선생을 돌아보았다. ‘로기’는 로게스의 애칭으로 보였다.




-빨리 이쪽으로 와봐, 로기.




얼굴 가득 웃으며 모스 선생이 손바닥을 휘저어 여기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조이의 눈에, 투버튼 재킷 안쪽의 크림색 셔츠 위로 시계추처럼 걸려있는 호루라기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암시 속에서 모스 선생이 불었던 그 호루라기다.



그림책을 사뿐히 바닥에 내려놓은 로게스는 쭉 기지개를 펴는 것처럼 두 팔을 뻗으며 일어나더니 곧장 모스 선생에게로 뛰어갔다. 그래, 여기서부터 중요한 부분이야. 가만히 두 손을 마주쥐며 아이와 선생의 모습을 지켜보던 조이가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교실 바깥에서 웅성웅성 울려드는 소리, 교실 문을 당장이라도 열어젖힐 것처럼 덜컹덜컹 두드리는 손짓들, ‘뿅뿅’하는 알 수 없는 전자음과 같은 불길한 신호들이 조이의 귓속으로 밀려들고, 자기 위로 살그머니 기어오르는 불안감에 조이는 고개를 휘저었다


설마, 아닐 거야.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누군가 교실 문을 세차게 걷어차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건 아이들이었다. 장난감 총을 들고, 콧물을 훌쩍거리고, 작은 어깨가 좁게 느껴지는 큼지막하고 동글동글한 머리통들, 그리고 두리번거리며 그들이 찾는 사냥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번뜩이는 조그마한 눈빛들.




-저기 있다, 잡아라!




아이들 무리 중에서 하나가 외치자 그 직후 조이를 둘러쌌던 교실 풍경이 일렁거리더니 순식간에 숲으로 바뀌었다. 조이가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이미 로게스는 통통한 종아리를 바쁘게 움직여 아이들에게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모스 선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혀를 차고 입 안에서 낮게 욕설을 굴리며, 뒤늦게 조이가 로게스를 뒤쫓기 시작했다.



어린 환자의 암시는 이래서 어렵다. 어른의 암시보다도 훨씬 더 예측을 벗어나고, 어디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어린 암시자가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뛰어가버리기 때문에 한번 놓치면 암시의 흐름을 잡기도 힘들다.



숲길을 뛰어가는데 오른쪽에서 돌연 작은 전동음이 들렸다. 뜬금없이 로게스의 어머니가 숲 한복판에 서서 머리에는 컬링 롤들을 주렁주렁단 채로 입에는 전동칫솔을 넣어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로게스의 어머니가 진짜로 숲에서 양치질을 한 것은 아닐 테고, 어린 로게스의 기억이 자신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배열하다보니 느닷없이 어머니의 모습이 등장했을 가능성이 컸다. 로게스는 매일 아침 자신과 함께 학교에 가기 전 몸단장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봐왔을 테니까.



양치질하는 부인을 무시하고 어느새 훌쩍 멀어진 로게스를 따라 뛰는 조이의 등 뒤로 뿅, 뿅 하는 장난감 총 소리가 가까워져왔다. ‘잡아라’ ‘뭐해, 야, 빨리 잡아!’ 자신들조차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집요한 악의와 의욕을 갖고 그들을 쫓아 따라오는 목소리들. 조이는 그들이 죽일듯이 쫓아오는 대상이 로게스가 아닌 자신이라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갑자기 그가 언제 잊어버렸는지도 몰랐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땅콩버터를 발라 찹쌀가루를 둥그렇게 뭉친 빵, 그걸 건네주며 킬킬거리는 손길들, 웃으며 빵을 받아드는 형, 잠깐, 안돼, 그걸 그대로 먹을 생각이지? 안돼, 그건.....



딴생각에 빠진 조이는 돌부리에 발이 걸려 엎어졌다. 아파할 새도 없이 손바닥으로 땅을 짚으면서, 눈으로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로게스의 등을 바라보고, 그때까지 그들을 쫓아오던 아이들의 그림자가 바닥에 주저앉은 조이의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뿅, 뿅, 장난감 총소리. 로게스 어머니의 전동칫솔 소리, 휘이익, 어디선가 모스 선생의 호루라기 소리, 깔깔 터지는 웃음들, 땅콩버터를 바른 빵, 호프 형.....




-꺼져!




눈앞에서 불타오르며 몸속까지 보이지 않는 팔들을 뻗쳐오는 기억들을 쫓으려, 조이는 이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마구 팔을 휘저으며 몸을 뒹굴었다.



-제발 꺼져버려!



조이의 발이 그림자들을 마구 걷어찼지만,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릴!!”




몸부림치던 조이는 여전히 두 발로 허공을 걷어차다가 문득 자기를 보는 하빌라와 눈이 마주쳤다. 무릎 위로 조이를 감싸 안은 하빌라가 절박한 얼굴로 그의 뺨을 붙들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이는 천천히 고개를 틀어 자신의 방을, 하빌라의 어깨 위로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과 걱정에 젖은 눈빛을 보고,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하빌라의 손길에서 상황을 읽었다.



하빌라가 암시를 도중에 중단시킨 것 같았다.


의식이 돌아왔지만 여전히 암시중에 겪은 공황의 여운이 남은 조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무심코 ‘다 꺼져....’라고 중얼거렸다. 겨드랑이와 팔꿈치 사이에 조이를 단단히 붙들어 안은 하빌라가 다른 쪽 손으로 조이의 손을 꽉 움켜쥐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세요, 천천히, 네, 그렇게 내쉬어요, 릴.”



하빌라의 지시를 따라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두리번거리던 조이의 눈이 침대 위에 가 멎었다. 스트라제나는 침대 위에 올라앉아있었다. 그녀의 옆으로 조그마한 발바닥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잠든 로게스의 발이었다. 조이와 눈이 마주치자, 들리지 않는 그의 마음속 질문을 읽은 것처럼 스트라제나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아이는 괜찮아.’




조이는 하빌라의 팔뚝 안으로 머리를 떨어뜨렸다. 하빌라가 아침 명상을 할 때마다 손에 바르는 향유 냄새, 텃밭에서 주었다가 묻혔는지 옷깃에서 풍겨오는 비료냄새가 코를 간질이고, 저만치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든 아이를 어루만지는 스트라제나는 잠시 조이의 몽롱한 눈과 시선을 교환했다.


천천히, 하빌라의 손길을 받으며 조이가 잠에 빠져들었다.








귓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리가 들렸다. 뿅뿅거리는 전자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로게스를 쫓는 아이들의 손에 들린 장난감 총을 떠올리며 조이가 번쩍 눈을 떴다. 창밖에서는 황백색 햇살이 모힘사 산의 나뭇잎을 거치며 떠올라 암막커튼을 활짝 걷은 조이의 방을 가득 물들이고 있었다.


조이는 계속 옆에서 들려오던 ‘뿅뿅’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안경까지 머리 위로 걷어올린 엘피가 눈앞에 휴대폰을 바짝 들이댄 채, 전략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까지 꽉 깨물었는지 엘피의 도톰한 입술을 짓누른 앞니가 토끼 이빨처럼 빛났다.



조이가 앞머리카락을 풀썩이며 화들짝 일어나는 것을 흘끔 본 엘피는 놀라지도 않았다. 부릅뜬 눈을 휴대전화 액정 속의 전장에 고정한 채로 엘피가 말했다.




“이제 깼어요, 릴? 밥 먹어요.”


“그거 내 휴대폰이잖아.”


“땅콩버터는 니나가 바르고, 딸기는 제나가 자르고, 스프는 하빌라가 끓이고, 달걀프라이는 내가 만들었어요.” 엘피가 딴소리를 했다.




까치집 머리를 한 채로 조이가 옆을 돌아보니, 침대보다 키가 작은 협탁 위에 김 서린 유리덮개로 덮인 아침식사가 보였다.. 덮개 아래로는 땅콩버터 토스트와 걸쭉한 감자스프가 담긴 그릇 속에 스푼이 꽂힌 채 놓여 있었다. 시선을 돌려 협탁 뒤편의 전자시계를 확인한 조이는 눈썹을 찌푸리며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도대체 얼마나 잔 거야?”


“하루 정도?”




조이가 하루종일 잠들어있었다는 사실보다도 게임 속 밀리는 수세가 더 심각한 엘피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로게스가 올 시간이 지났는데....”




주섬주섬 풀려있던 셔츠 단추를 잠그고 이불 밖으로 발을 빼며 일어나려는 조이의 앞을 엘피의 손이 다급하게 막아섰다.




“아니에요, 릴(조이)! 안 가도 돼요.”


“안 가도 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보는 조이와 엘피 사이에서 문득 '당신을 패배했습니다‘라는 안내음성이 나왔다. 패배를 뼛속까지 슬퍼하도록 어두운 멜로디로 깔리는 배경음악까지. 그걸 들은 엘피가 입속으로 안타깝게 앓는 소리를 내며 휴대전화를 들어 화면을 꺼버렸다.




“아, 이번엔 이길 수 있었는데....”


“야, 그거, 내 폰 아니냐고?.”


“아무것도 기억 안나요, 릴? 로게스랑 암시를 하다가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도중에 끝냈잖아요, 하빌라랑 제나가 완전 난리났었어요. 로게스 엄마가 모르게 감추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요.”


“그래, 그것까지는 알겠어.”




제대로 기억나는 장면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조이는 우선 알았다고만 했다.




“그런데, 내가 안 가도 된다는 건 무슨 말이야? 로게스가 오늘 못 온대?”


“그게....이거 말해도 되나?”




안경다리를 손가락으로 밀어올려 콧대 위로 추켜올린 엘피는 뜸을 들였다. 이글거리며 자기 입에서 떨어질 대답만 기다리고 쳐다보는 조이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엘피는 곧장 대답하는 대신 멋쩍은 손길로 조이의 무릎에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제나가요....”









조이가 신은 밀색 단화 바닥이 격자무늬 카펫으로 깔린 나무바닥을 무자비하게 짓누르며 쿵쿵, 도 아닌 쾅쾅 소리를 냈다. 열 걸음도 걷지 않아 순식간에 스트라제나의 방문 앞에 도착한 조이는 이미 복도를 가로질러오면서 뻗고 있던 손으로 곧장 문을 벌컥 열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기 손이 문고리를 잡아쥐기 전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붙들었고, 그러나 끓어오르는 마음을 눌러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눈을 지그시 감으며 조이는 숨을 두 번 고르고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문 너머에서 스트라제나의 목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문고리를 뽑아놓을 기세로 조이의 손이 문을 열어젖혔다. 잠시,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본 조이의 얼굴에 주춤하는 빛이 떠올랐다. 민소매 셔츠에 무릎 아래에서 끝나는 러닝용 반바지를 입은 스트라제나는 바닥에 매트를 깔고 엎드려 두 손발로만 체중을 받치고 플랭크 동작을 하고 있었다.





“아, 잘 잤어, 릴?”





힐끗 고개를 들어 조이를 확인한 스트라제나는 밝게 인사했다. 이마 위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올챙이 꼬리처럼 뭉쳐 달라붙어있었다. 플랭크 자세를 유지하느라 목으로 들어올리는 머리 무게조차 버거웠던 스트라제나는 다시 바닥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구는 태도가 조이의 마음에 더 불을 질렀다. 문에 손바닥을 짚어 벽으로 쾅 밀어붙여버린 조이가 침을 삼켜 씩씩거리는 숨을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뭐하는 짓이야? 네가 왜 마음대로 남의 진료를 취소시켜?”


“취소는 아냐. 로게스는 계속 센터에 오기로 했어.”


“내가 말하는 게 그 뜻이 아니라는 걸 잘 알 텐데, 스트라제나.”





이미 어떤 말로도 ‘이 센터에서 가장 제정신이 아닌’ 조이의 분노를 가라앉힐 방법이 없음을 잘 아는 스트라제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한숨을 쉬었다. 땀과 열기로 달뜬 입김이 매트에 맺혀 잠깐 동그랗고 하얀 얼룩을 그렸다.


마지못해 팔다리에 주었던 힘을 빼고 플랭크 자세를 풀어 매트 위에 납작하게 엎드린 스트라제나는, 천천히 등을 펴고 매트 위에 앉아서 말했다.





“로게스 부모한테는 잘 둘러댔어. 아직 아이에게 암시 치료가 적합하지 않아보여서, 아이의 긴장이 풀리면 치료를 다시 시작할 거고, 그동안 진료시간이 비지 않게 센터에서 엘피랑 놀게 하겠다고. 로게스의 어머니도 동의했어....그 모든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너.....”


“계속 그러는 게 아니야, 이번주까지만.”


“네가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목에 핏발까지 서서 당장이라도 칼이나 주먹을 내지를 듯 아슬아슬한 조이와는 반대로, 온몸이 촉촉하게 땀으로 젖은 스트라제나는 지쳐서였는지 용감해서였는지 담담하기만 했다. 매트에서 멀찍이 떨어진 바닥에 놓아두었던 물병을 집어들며 스트라제나가 말했다.





“릴(조이), 알리스타나 선생님이 내게 거듭 부탁한 게 있어. 선생님이 자릴 비운 동안 네 옆을 지켜달래.”




뚜껑을 열어 물을 가득히 머금은 스트라제나는 그걸 한 번에 꿀꺽 마셔버렸다. 말라붙었던 입안에 물기를 적시자 훨씬 또렷해진 발음으로, 제나가 말을 이었다.




“네가 잘못되면 로게스의 치료를 망칠 수도 있잖아.”





스트라제나는 몰랐을 것이다. 그녀의 말은 이번 선택이 철저히 로게스를 위한 결정임을 뜻했지만, 그 말을 구성하는 어떤 조각이 조이의 마음을 유리파편처럼 할퀴어놓았음을 말이다.


정지된 화면에 갇힌 것처럼 얼굴을 굳혔던 조이는, 이윽고 자기가 들은 말을 믿기 힘드다는 표정으로 스트라제나의 말을 입에 옮겼다.




“내가.... 뭘 망쳐?”




넌 항상 모든 걸 망쳐놓지!


누군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때 보았던 만화영화 속 대사나 질리도록 들은 광고의 캐치프레이즈를 기억하기도 하는 것처럼, 조이가 어릴 때를 떠올리면 저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그 목소리야말로 조이의 유년시절이었다.


그의 머리통 안에서 어떤 지옥이 그물을 펼치고 있는지 볼 수는 없었지만, 조이의 울렁거리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스트라제나는 그가 상처받았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이 조이의 지금까지 팔을 뻗치고 있는 끈질긴 과거와 손을 잡고 있다는 것까지 모르는 스트라제나는 입술 위로 얇은 한숨을 떨어뜨리고 말했다.




“릴, 반대로, 내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넌 어떻게 했겠어?”



잠시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꾹 닫고 있던 조이는 그의 머릿속을 휘젓던 모래먼지가 가라앉자 다시 도전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오히려 이쪽에서 묻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너라면 어땠겠어? 네가 나랑 같은 ‘상황’이었다면-. 지금처럼 호수같이 담담할 수 있겠냐고, 스트라제나 멜록스위드에게 묻고 싶었다.




“다시는, 멋대로 결정하지 마.”




그 말을 끝으로 조이는, 하빌라가 임시방편으로 갈아입혀서 여기저기 구겨진 셔츠자락을 휘날리며 방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스트라제나의 눈에는 그가 더 이상 말을 주고받았다가는 돌이킬 수 없이 큰 싸움을 하게 될까 이쯤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 조이는 더 버티고 서 있다간 쓰러질 것 같아 견디지 못해 달아난 것이었다.



조이가 방을 떠나고 나서도 멍하니 매트 위를 지키고 있던 스트라제나는, 꾸물거리며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가서 앉았다. 유난히 둘째 마디가 길쭉한 스트라제나의 손가락이 책상 위에 빙하처럼 떠 있는 종이봉투 위에 얹혀, 겉봉에 적힌 글귀를 스르륵 문질러 훑었다.



겉봉에는, 사냥꾼에게(Dear Hunter)라고 적혀있었다.


센터를 떠나 한동안 동떨어진 산에서 우드랙과 지냈고, 센터로 돌아온 뒤로도 기별이 없어, 스트라제나 스스로도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의문이 들만큼 까맣게 잊고 있던, 익명의 편지였다. 편지 내용은 언제나 그랬듯 별다를 것이 없었다. 스트라제나의 센터 적응과 사슴 사냥에 대한 진척도를 묻는 내용이었으나, 그 ‘별다를 것 없음’이 스트라제나를 소름끼치게 했다.


그 편지는 폭풍우를 뚫고 나타나 잔뜩 지쳤지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헤어졌던 친구처럼 스트라제나의 문을 육중하게 두드렸다. 그게 원한인지, 안타까움인지, 어떤 종류의 구조요청인지는 알 수 없어도, 스트라제나는 편지봉투 아래 깔린 정체모를 감정의 냄새를 맡으며 가슴 밑자락이 서늘해졌다.









“잘 하셨어요, 제나."


"....."


"릴도 놀랐을 뿐이지, 진정이 되면 이해할 겁니다.”




목소리로 스트라제나를 달래며, 도마 앞에 선 하빌라는 청옥무화과가 굴러떨어지지 않게 한 손으로 잡은 다음 조심스럽게 반으로 갈랐다. 하빌라의 어깨 너머 식탁 건너편 자리에 앉은 스트라제나는, 가만히 하빌라가 무화과 써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문득 식탁 위를 보았다.


조이의 방에 가져다놓았던 아침식사 접시가 유리덮개를 그대로 뒤집어 쓴 채 식탁 위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말라붙은 감자스프는 그릇 주위에 딱딱한 그물 벽을 만들었고, 윤기를 잃은 달걀프라이와 딸기는 찰흙으로 만든 모형처럼 보였다. 마침 허기가 졌던 스트라제나는 무심코 유리덮개를 열어 원래는 조이의 것이었던 땅콩버터 토스트에 손을 뻗었다.




“배가 고플 때도 됐죠.”




가지런히 썬 청옥무화과를 접시에 담아 가져오며 하빌라가 이해한다는 듯 웃음을 실어 말했다. 토스트를 베어문 스트라제나는 실없는 웃음소리로 민망함을 채웠다. 무화과 접시를 내려놓은 하빌라는 ‘데워드릴게요.’ 하는 말과 함께 뻣뻣하게 말라붙은 감자스프 그릇을 가져갔다.


하빌라는 꼭 사람을 돌보고 보살피는 방법에 대해 특별교육을 받은 사람처럼, 정확히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정성을 기울였고 배려는 습관처럼 몸에 배어있었다.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은 남편 바슬란디우스가 마지막일 줄 알았다. 그 생각에 이르자 바슬란디우스와 함께 마주앉은 점심식사가 그리워진 스트라제나는 일부러 생각을 전환하려고 식탁 위의 무화과를 쳐다보았다.



청옥무화과는 기르기 대단히 까다로운 과일이다. 값도 그만큼 비싸다. 로게스의 어머니는 방문 첫날부터 매번 빠뜨리지 않고 센터에 값비싼 과일들을 가져왔다.



‘남편이 경찰청장이어서, 감사의 선물로 받는 과일이 다 먹지도 못할 정도로 들어와 집에 쌓여가고 있다’는 참고인지 압박인지 모를 설명을 반드시 꼬리표처럼 붙여가며.



스트라제나에게는 청옥무화과도, 그녀가 내미는 모든 과일들이 감사의 표시라기보다는 우리가 이만큼의 사람이니 당신들도 그만큼의 예의를 갖춰달라는, 소리없는 요청으로 들렸다.




소리없는 요청이라....


창밖에서는 로게스와 엘피가 정신없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아이들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가까워진다.


무화과는 가격에 비해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맛이었다.

스프를 데우는 하빌라가 보지 않게 몰래 휴지를 펼쳐 무화과를 뱉어낸 스트라제나가 물었다.





“하빌라, 조이는 어디 있어요?”


“나이와나랑 같이 쉼터에 내려갔습니다.”


“나이와나랑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는 스트라제나에게, 덮개 씌운 감자스프 그릇을 전자레인지에서 꺼내며 하빌라가 말했다.




“조이에게 기분전환을 시켜주고 싶었겠죠. 연구소 일도 제쳐두고 조이를 데리고 나갔답니다.”


“그래요....”




그 뒤로 감자스프와 땅콩버터 토스트를 조금씩 해치우는 동안, 스트라제나는 부엌 창 너머로 들썩거리는 엘피와 로게스의 신이 난 머리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내다보았다. 어딘가 열망까지 느껴지는 제나의 시선을 알아챈 하빌라가 감자껍질을 깎으면서 말했다.





“뒤뜰로 나가서 함께 놀지 그래요, 제나.”


“아니요.”





스트라제나는 고개를 젓고 그릇 바닥에 남은 스프를 숟가락으로 긁어모으며 말을 이었다.





“싫어요.”





아주 잠깐, 감자를 깎던 하빌라의 손가락이 멈칫거렸다.

됐어요, 괜찮아요, 도 아닌 싫어요, 라니. 스트라제나의 단어 선택은 그의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하빌라는 스프그릇을 싹싹 비운 제나가 설거지를 하러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디어 헌터 Dear, Hunter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3 디어 헌터 Dear Hunter 52. 진실과 허상 (2) 19.08.19 10 0 15쪽
52 디어 헌터 Dear Hunter 51. 진실과 허상 (1) 19.08.18 33 0 22쪽
51 디어 헌터 Dear Hunter 50. 무슨 짓을 하려고? 19.08.17 11 0 15쪽
50 디어 헌터 Dear Hunter 49. 나이와나 19.08.16 16 0 19쪽
49 디어 헌터 Dear Hunter 48. 집에 가지마 19.08.15 27 0 15쪽
48 디어 헌터 Dear Hunter 47. 술래잡기 19.08.14 12 0 15쪽
47 디어 헌터 Dear Hunter 46. 우드랙 19.08.13 37 0 12쪽
46 디어 헌터 Dear Hunter 45. 사슴 몰이 19.08.12 16 0 15쪽
45 디어 헌터 Dear Hunter 44. 작은 소원과 작은 고백 19.08.11 15 0 16쪽
44 디어 헌터 Dear Hunter 43. 제나는 아이가 무서워 19.08.10 22 0 14쪽
43 디어 헌터 Dear Hunter 42. 뒤를 부탁한다, 조이 19.08.09 14 0 16쪽
42 디어 헌터 Dear Hunter 41.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19.08.08 28 0 17쪽
41 디어 헌터 Dear Hunter 40. 기억 수정 19.05.07 25 0 19쪽
40 디어 헌터 Dear Hunter 39. 너라면 이해할 수 있어 19.05.02 29 0 15쪽
39 디어 헌터 Dear Hunter 38. 당신이 뭘 어쩔 건데요 19.04.26 16 0 17쪽
38 디어 헌터 Dear Hunter 37. 미라구나에서의 재회 19.04.20 25 0 16쪽
37 디어 헌터 Dear Hunter 36. 그들이 망쳐놓은 것 19.04.10 16 0 29쪽
» 디어 헌터 Dear Hunter 35. 조이가 망쳐놓은 것 19.04.05 28 0 25쪽
35 디어 헌터 Dear Hunter 34. 실망스러운 시작 19.04.01 18 0 19쪽
34 디어 헌터 Dear Hunter 33. 거절당한 아이 19.03.25 21 0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