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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게임 속 나혼자 플레이어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이찬솔
작품등록일 :
2022.09.15 01:46
최근연재일 :
2024.04.20 20:15
연재수 :
1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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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28,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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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9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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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핏빛기사단 혈맹

DUMMY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닉네임이야. 어디 한 구석 아저씨랑 맞는 구석이 없잖아.’


저 눈꼬리 쳐진 순박한 인상 어디에 핏빛이 있고 살육이 있나.


게다가 손목에 채워진 14알의 염주에는 천사도 보이지 않았다. 불자가 보이면 몰라.


동훈은 아주머니를 향해 손을 흔든 뒤 계단을 내려갔다.


“아휴, 총각, 잘 생각했어. 기도 드리고 정성 보이면 주께서 다 알아서 해주신다니까. 어여 타.”


동훈에게 뒷좌석 문까지 열어주며 태운 아주머니는 조수석으로 가며 아저씨를 타박하셨다.


“아휴, 담배 냄새. 아침 먹고 태웠으면서 또 태우셔? 의사가 당신 폐 안 좋다고 담배 그만 태우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고! 고새 두 대나 피우셨어! 못 참겠는 거 알겠으니 한 대만 태우라고,”


등짝을 두들기는 아주머니의 성화에 아저씨는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옥탑 청년도 탔으니 가자고. 예배 늦겠어.”


“으이그, 으이그, 가요, 가. 말이나 말지.”


차를 타고 가며 아주머니는 교회에 얼마나 좋은 사람이 많은지, 기도하면 일이 얼마나 잘 풀리는지, 쉼없이 떠드셨다.


동훈은 아주머니의 말에 아, 진짜요? 아, 하며 영혼 없는 대꾸를 했고 힐끔힐끔 아저씨를 엿봤다.


아저씨는 말 한마디 않고 교회까지 운전하여 도착했다.


어차피 아주머니까지 해서 셋만 있는 자리에서 더 벨룸 이야기를 꺼낼 생각은 없었다.


성순례교회.


동네에서 가장 큰 교회인 이곳은 신도가 얼마나 많은지 일요일에는 이 앞이 신도로 북적거려서 운전하기도 곤란해질 정도의 교회였다.


이곳 목사가 건물 두 채를 가졌다는 소문이 전혀 뜬소문 같지 않은 이유랄까.


그런 현실적인 이야기는 제쳐두고 이곳을 드나드는 신도들이 이 교회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


화기애애하고 즐거움에 찬 신도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오늘 예배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즐겨. 요새 다 사람들하고 친분 나누려고 오고 그러기도 한다니까? 총각도 부담 갖고 그러지 마.”


“그럼요.”


아주머니는 그렇게 마지막 당부를 하시고는 교회 내의 지인들을 향해 돌진하셨다.


“어머! 준이 엄마, 오늘 피부가 왜 이리 좋아. 미용 비결 있으면 나한테도 알려주고 그래!”


벌써 한 아주머니와 수다 보따리를 푸시는 아주머니.


차 타고 오며 내리 떠드셨는데 입이 아프진 않으신가 걱정될 정도.


아주머니의 주의가 다른 곳으로 돌려졌을 때가 기회였다.


동훈은 옆에서 멀뚱히 걸음을 옮기는 아저씨를 향해 붙었다.


우선은 친근감 형성과 거리 좁히기. 그러기 위해서는 칭찬과 감사만한 윤활제가 없었다.


“운전하느라 고생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으응? 고생은 뭘. 매일 하는걸.”


아저씨의 표정이 한결 풀리고 동훈을 향한 거리감이 조금 줄어들었다.


동훈은 그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쯤이면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거절하진 않을 것이다.


이제 더 벨룸에 관해 물어보려는 순간


“빨리 와요! 예배 시작하겠네!”


아주머니가 재촉하시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아저씨와 동훈은 약간 더 빨라진 걸음으로 아주머니의 뒤를 따랐다.

교회의 복도에서는 차가운 대리석의 냄새가 났고 사람들로 복작이며 몸 부대끼는 걸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누구도 불쾌해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을 뿐.


아주머니를 필두로 한 동훈 일행은 사람들 틈새로 나아가 오늘의 메인 예배실로 들어갔다.


띵! 띠디딩!


예배실은 꽤나 넓었다.


이 큰 교회에서 가장 큰 메인 예배실에는 근방에서 가장 커다란 파이프 오르간이 있었다.

천장까지 닿을 듯한 파이프 오르간에서는 오늘 예배를 위해 연주자가 연주하고 있는지 맑고 웅장한 소리가 예배실에 울려퍼졌다.


단상 앞으로 예배를 위한 나무 의자가 줄을 지어 도열해있고 의자에는 벌써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있었다.


아주머니는 열심히 걸어가서는 제일 앞에 좋은 자리로 엉덩이를 붙이셨다.


“여기, 여기! 아직 예배 시간 좀 남았으니까 앉아서 조금 기다리자구요.”


예배 의자에 앉아 아직 예배까지 시간이 남았다는 걸 확인한 동훈은 옆에 앉은 아저씨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주머니가 가장 안쪽, 아저씨가 가운데, 동훈이 가장자리에 앉았기에 아주머니를 거치지 않고 아저씨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아저씨, 스님 될 뻔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밑에 집 유씨 할아버지가 그러시던데.”


예배를 기다리시며 다른 아주머니랑 수다를 떨던 아주머니는 동훈의 말을 듣고 곧장 흥미가 생겼는지 깔깔 웃었다.


“이이가 스님 될 뻔했다고? 오호호호, 술 좋아하고 고기 좋아하는 이 양반이 어떻게 절간 들어가 살겠어. 총각, 총각이 무슨 오해를 했나 본데, 피씨방이 절간이면 절간 들어가 살겠어요.”


그러니까 절간 들어가서 스님 된다는 게 아니라 피씨방을 절간 드나드는 스님처럼 드나들었다는 소리인 거지?


하여튼 허풍선이 유씨 할아배 같으니라고. 믿은 내가 잘못이지. 동훈은 한탄하며 그의 말을 믿은 자신을 탓했다.


그 할아버지 말을 믿느니 동네 도둑고양이와 대화를 나누지.


아저씨는 아주머니의 말에 특별히 부정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리셨는데 그건 무언의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아주머니의 신세 한탄 비슷한 성토는 계속 이어졌다.


“이이가 한창 놈팡이짓 했을 땐 피씨방에서 일주일을 살았다니까요. 내가 그거 붙잡아다 뒷바라지하고 다시 목수일 하라고 앉혀놓아야 했으니. 어휴, 그 짓 또 하라면 난 못해.”


아저씨, 잡혀 사는 이유가 있었군요?


이정도면 숫제 아주머니가 아저씨를 먹여 살려다 사람 구실 하게 만든 수준인데. 아주머니,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신 거죠?


아저씨가 아주머니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다 그러자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역시나 아저씨는 웅얼거리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덧붙였다.


“으응. 난 절간 들어가서는 못 살어. 난 곡차 없이는 잠 못 자.”


변죽은 충분히 울렸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때.


“피씨방에서는, 무슨 게임하셨어요?”


더 벨룸을 하는 사람 혹은 했던 사람 특.


게임 했던 사실을 그리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는 점. 게임 하는 사람들이 뭘 자랑스럽게 여기겠냐마는 더 벨룸은 현금 게임이라는 오명도 있으니 더 그런 면이 있었다.


아저씨는 멋쩍은 헛웃음을 조금 짓고는 대답했다.


“더 벨룸이라고. 있어, 옛날 게임.”


이럴 때 더 벨룸 한다는 걸 부끄럽게 만들면 안 된다.


샤이 더 벨룸 플레이어는 그때부터 입을 닫아버릴 테니까.


바로 공감대 형성에 들어가야 했다.


“저도 알아요, 더 벨룸. 저도 그거 옛날부터 했거든요. 요즘도 가끔하고.”


더 벨룸 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무언가.


공통의 취미는 강력하지만 더 벨룸은 유별났다.


더 벨룸을 자랑스럽게 즐기지 못하는 만큼 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말은 더욱 긴밀해진다.


아저씨는 동지를 만났다는 동질감에 눈을 크게 뜨며 열띤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게 아직도 서비스해? 어디서 본 것 같기두 하고.”


“제가 그런 옛날 게임을 좋아하거든요. 아저씨 게임 하셨을 때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까요?”


슬쩍 찌르고 들어가는 인터뷰 질문.


게임 이야기로 흥미를 이어가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수작이었다.


“나 게임한 거? 남의 게임 얘기 들어서 뭐허려구. 재미도 없지.”


대답을 피하려는 아저씨를 한 번 더 붙잡는 동훈.


한 번 거절한다고 포기하면 사회생활 해본 사람이 아니지.


“아니에요. 제가 그런 얘기를 좋아해서요. 키웠던 캐릭터나 들어갔던 혈맹, 게임 했던 이야기요.”


“그래? 그럼 내 캐릭터는 별거 없고, 혈맹 얘기나 할까.”


그렇지. 더 벨룸 했던 사람치고 그때 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니까. 더 벨룸은 추억이고, 추억 싫어하는 아저씨는 없는 법이니까.


캐릭터 이야기는 개인적이니 조금 더 공적인 혈맹 얘기로 말문을 트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동훈은 어떻게 이야기를 끌어낼지 기민하게 머리를 굴렸다.


한편 아저씨는 슬슬 혈맹 이야기로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우리 혈맹은 피씨방에서 시작한 혈맹이야. 저 신촌 블러드 피씨방. 거기가 되게 컸거든. 사수인가, 오수한다고 내가 신촌에 하숙 구했다가 다니게 된 피씨방이었지.”


피씨방이라는 거점을 기반으로 모인 피씨방 공동체는 그 당시에는 흔한 공동체였다.


아저씨들의 특징이 한 번 가는 피씨방을 줄기차게 간다는 점과 그때 당시 퍼스널컴퓨터를 장만하는 것보다 공용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이 대세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한 피씨방에 모인 사람들이 계속 모이게 된다는 걸 연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군주 형님이 그 골목 피씨방 3개를 가진 사람이었어. 그때 신촌 상권 권리금이 200만원이었으니까는 당시에 돈 깨나 있던 형님이지.”


대개 군주는 자본력이 있는 사람이 맡기 마련.


혈맹에 들어가는 부대비용이나 유지비 같은 건 어쩔 수 없이 군주의 개인 사재에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중소기업에 사장의 개인 돈과 회사 돈이 혼재하는 것처럼 혈맹 역시 마찬가지였다.


군주란 어떻게든 자본금이 있는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무거운 자리였다.


당시 신촌 골목에서 피씨방 3개를 운영했다면 자본금만은 확실했겠지.


혈맹을 유지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다.


일단 그들이 피씨방 공동체라는 사실은 알아둘 만했다.


이제 조금 더 깊게 들어가 질문해도 좋을 것이다.


“캐릭터는요? 아저씨는 게임 하실 때 어떻게 키우셨는데요?”


아저씨는 동훈의 질문에 코끝을 찡그리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아저씨는 캐릭터 이야기를 피하는 듯했지만 동훈은 기어이 피하고자 하는 질문마저 짚어내고야 말았다.


이렇게 아저씨에게 집요하게 물어보는 이유.


단순히 아저씨의 캐릭터와 혈맹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반왕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변방 근처에 기반을 잡고 활동하는, 왕을 참칭하는 패권자.

붉은 왕이라고도 불리며, 그가 거느린 기사단의 상징적인 색이 붉은색. 거기에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주목을 받았던 강대한 혈맹.


그 후보는 동훈의 짐작 아래 몇이나 있었지만


아저씨가 속했던 혈맹은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하게 생각하는 후보였으니.


바로 [핏빛기사단] 혈맹.


잠시 말없이 입을 다물고 있던 아저씨는 이내 마음을 먹은 건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되돌아온 질문은 동훈이 기대하던 종류의 대답이 아니었다.


“자네는 사람 마음속에 마귀가 있다는 말을 아는가?”


아저씨의 표정이 자못 어두워졌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꺼려지는 듯한 표정은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역류해 올라온 듯했다.


선문답 같은 그의 물음에 어디 그의 캐릭터에 대한 말이 있단 말인가.


동훈이 되물었다.


“마귀요?”


“아무리 선한 사람이래도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마귀가 있어. 남이 잘되는 걸 질투하는 마음, 나만 잘되려는 이기적인 마음, 남의 고통을 무시하는 무정한 마음 같은 게 바로 마귀지.”


불자 아니랄까 봐 마귀라는 단어 사용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가 내리는 마귀에 대한 정의는 어딘지 섬뜩했다.


일견 평범하고 종교적인 의미의 마음속 마귀를 정의하는 듯했지만 그의 말투에서는 그것을 직접 본 듯한 거리낌이 느껴지고 있었으니.


“음.”


동훈은 공감한다는 듯, 아저씨에게 배운다는 듯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 반응에 아저씨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완전히 꺼내놓았다.


“난 말이야, 그 게임에서 마귀를 꺼내놨네.”


“더 벨룸에서요?”


“그래. 거기서는 그래도 되는 곳이니까. 남의 캐릭터를 죽이고 남의 세력을 깎아내는 게 미덕인 곳이니까. 현실에서 못한 못된 짓을 그곳에서 다 한 셈이지.”


마귀, 마귀라.


그 당시의 마음을 마귀라고 지칭할 정도로 악랄하게 게임을 했던 건가.


이 순박한 아저씨가 마귀라고 표현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악과 방종을 풀어놓았을까?


핏빛기사단 혈맹이 서버를 지배할 때 꽤나 폭정을 저질렀다고 듣기는 들었다.


어쩌면 앞으로 아저씨의 캐릭터와 만나게 될지 모르는데 그를 공략할 방법은 없을까?


동훈은 플레이어의 캐릭터들을 모아 혈맹을 불려나간다는 계획을 입안한 적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만난 플레이어의 캐릭터들은 너무나 적고, 적으로 만나거나 혈맹에 들어오기 적합하지 않은 등의 이유로 반포기 상태였다.


그런데 아저씨의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을까?


아저씨는 그래도 퍽 캐릭터를 열심히 키운 데다가 아저씨의 성정을 보면 같은 혈맹원으로서 부족할 게 없어 보였다.


출신 혈맹이 험한 곳이었다지만 그걸 묻어두고 보자면 동훈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인재였다.


“그럼요, 만약에 제가 아저씨랑 더 벨룸을 같이 했다 쳐요. 근데 하필 아저씨를 적혈로 만난 거예요. 근데 제가 아저씨랑 싸우고 싶지 않잖아요.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아저씨 캐릭터와 적혈로 만나면 어떨까요?”


동훈의 질문에 아저씨는 눈을 빛내며 손뼉을 쳤다.


“요즘 애들이 많이 한다는 발란스 게임인가 그건가?”


밸런스 게임? 이거 선택할래, 저거 선택할래의 양자택일 지옥으로 몰고 가는 장난식의 연속 질문인데, 이거랑은 좀 다르지.


그렇다고 ‘아뇨, 틀리셨는데요. 이건 밸런스 게임이라고 할 수 없는데요.’라며 분위기를 깨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아저씨 표정을 보라.


젊은이들의 트렌드도 놓치지 않고 따라가지 않았느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동훈은 기꺼이 그 뿌듯함을 지켰다.


“아, 뭐. 그런 거죠.”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아저씨는 이내 답을 내놓으셨다. 생각이 필요했지만 대답을 던진 이상 확언하는 확신이 담긴 답.


“흠,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죽거나 죽이거나요?”


생각보다 극단적인 대답.


어떻게 대화로 잘 푼다거나, 싸우다 정든다거나, 하는 식의 해결책이 있길 바랐는데 아저씨는 생각도 하지 않으신 듯했다.


“마귀는 말이야, 아주 지독해서 한 번 마음속에서 먹이를 주며 키우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네. 그건 종국에 내가 마귀를 통제하는 게 아니라 마귀에 통제당하는 지경에 이르러. 내가 더 벨룸을 할 적에 게임만 켜면 마귀에 몸을 맡겼어.”


“그러니까, 완전 악랄했다, 뭐 그런 건가요?”


게임은 그 사람의 또 다른 페르소나.


현실 세계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게임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다른 건 어떻게 보면 또 당연했다.


게임의 아바타와 내 모습이 다른 것부터 시작해서 그곳에서는 온전히 내가 아닌 캐릭터로 움직이는 사람도 많았으니.


아저씨 역시 그런 듯했다.


순박한 아저씨도 게임 안에서는 악질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승용 내과의 유승용 원장이 무작위 유저들을 상대로 썰자를 하고 다녔던 막피 플레이어였다는 사실은 이미 동훈이 알고 있지 않던가.

평생을 폭력과 거리를 두고 살았을 고학력의 의사도 그런 마당에 누군들 그런 페르소나를 가지지 않겠느냔 말이다.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더군다나 적혈이었다면 내가 먼저 자네 캐릭터를 죽이거나, 자네가 반격해서 내 캐릭터를 죽이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는 말이야.”


‘핏빛기사단’ 혈맹은 그 이름만큼이나 잔혹한 서버 지배로 유명했던 혈맹이었다.


하지만 잔혹한 만큼 또 영리해서 탁월한 정치력과 계략, 회유를 동원해 서버 하나를 통째로 휘어잡았다.


그 모든 것은 혈맹의 군주와 그의 측근들이 일궈낸 위업이었다.


최초로 서버 하나를 지배한 혈맹, 최초로 혈맹 단위로 막피단을 만든 혈맹, 최초로 중립과 전쟁을 한 혈맹 등등.


각종 최초 타이틀을 많이 가진 ‘핏빛기사단’ 혈맹은 더 벨룸 1 시절에 활약했던 혈맹이라 유독 ‘최초’의 수혜를 받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위업을 이룬 건 그들이 먼저 시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혈맹을 이룬 혈원들의 각기 다른 역량과 실력으로 서버의 세력을 구축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에 특출난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유능함과 동시에 악랄한.


핏빛기사단 혈맹은 그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건 불가능한 건가? 미련 가지지 말고 포기해야겠네.’


동훈은 깔끔하게 미련을 버리도록 했다.


순박한 아저씨마저도 포기한 캐릭터였다. 동훈이 더 설득한 데도 말을 들어먹을 리가 없다.


그와 만나게 된다면 무조건 적으로 마주하게 될 것이라 상정해야겠지.


동료로 만들고 싶다는 기대에 모든 것을 건 건 아니었으니 됐다.


동훈은 동요하지 않고 다음 질문을 꺼내들었다.


“군주는요? 어떤 사람이었어요?”


그러면 혈맹의 군주를 캐봐야지.


만약 정말로 ‘핏빛기사단’ 혈맹이 반왕의 세력이라면 반왕은 혈맹의 군주를 가리키고 있을 테니.


반왕이라는 별을 투영시킨 핏빛기사단 군주에 대한 정보를 묻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그가 어떤 괴물이었는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는 보기 전에 충분히 들어둬야 했다.


혈맹의 군주는 어땠냐는 동훈의 질문에 아저씨는 턱을 짚고 생각에 잠겼다.


“군주 형님? 그 형님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인간의 증오심을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 형님은 그걸 아주 잘 활용하셨지. 그 형님의 말을 듣다 보면 저절로 적혈에 대한 증오가 치솟곤 했으니까.”


증오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일은 굉장히 섬세한 일이었다. 노골적으로 그리하려 하면 사람은 거부감을 느끼기 마련이었으니.

특히 남을 미워하는 감정을 만드는 일은 다각도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적을 미워할 당위, 미운 감정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확신,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을 자책하지 않게 할 면죄 등 다양한 요소가 결합해야 자연스러운 증오를 빚을 수 있을 테지.


동훈이 이를 알고 있는 건 동훈 역시 그런 감정을 조성해야 하는 더 벨룸의 혈맹 중간 간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고 있는 거고.


아저씨가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니 깨달을 정도였다면 당시에는 그냥 내가 그런 감정을 가진 거구나, 하는 수준의 자연스러움이 있었단 건데.


군주의 교묘한 수단이 정치인 수준으로 고절하다는 뜻이려나.


아저씨는 마저 설명을 이어가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형님이야말로 사람들 마음속의 악귀를 키워내는 사람이었던 것 같구먼. 그 양반도 생각해보면 대단한 양반이었어.”


그때를 회상하는 듯 아련한 눈빛의 아저씨를 아주머니는 현실로 끌고 오셨다. 그 매운 손바닥으로.


짝짝!


자신의 손등을 내리치는 아주머니의 손길에 아저씨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아주머니를 쳐다봤다.


아주머니는 단상을 가리켰다.


“그놈의 게임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집중해요. 예배 시작하려나 보네. 저기 준혁 총각 올라오는 거 봐. 마이크 정리하나 보네. 준혁이가 참 성실해. 일요일마다 교회 봉사 나오고 말이야.”


단상 위에서 예배를 준비하는 봉사자 청년을 칭찬하던 아주머니는 예배가 시작하려는 막바지에 들어오는 아주머니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참으로 정신없는 화제 전환이었다.


“어머어머, 진영 엄마. 인사해. 우리 건물 옥탑에서 사는 옥탑 총각. 하나님 은혜받으러 왔지. 맞아. 내가 얼마나 지극정성을 들였어? 그죠? 몇 번이나 찾아갔는데 우리 총각이 드디어 오늘에야 이 아줌마의 정성을 안 거지.”


진영 엄마라고 불린 아주머니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동훈을 향해 농을 걸었다.


“월세 깎아줄 줄 알고 온 거 아니야?”


“총각, 안 온다고 월세 올리는 것도 없지만 온다고 월세 깎아주는 것도 없어. 알지? 공은 공이고 사는 사잖아. 호호호. 혹시 힘들면 말하고. 사정 봐줄 수는 있어요.”


집주인 아주머니는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넘겼다.


그렇게 수다를 시작하신 아주머니는 자식 얘기, 사는 얘기로 넘어가 이야기꽃을 피우셨다.


아주머니들의 수다에 귀가 아플 때쯤 봉사자 준혁 청년이 마이크를 잡고 안내했다.


“예배 시작하겠습니다. 신도 형제자매 여러분,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청년의 안내에 사람들은 부산스럽게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사람들의 움직임에는 일련의 규칙이 있었다.


누군가는 모였고 누군가는 흩어졌다.

사람들이 얽히고설키며 뭉쳤다가 풀어지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이 시간은 교회에서 가장 부산스러운 시간이었다.


세월이 앞으로만 흐르듯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이든 이들은 왼쪽으로 모이고 어린 청년들은 오른쪽으로 모였다.


그때 주인집 아주머니께서 이제 생각났다는 듯 이마를 탁! 치며 동훈을 향해 말했다.


“총각, 총각은 저기 자리야. 나이별로 앉는 자리가 구분되어 있거든. 우리 총각은 젊은 사람들이랑 어울려야지.”


아주머니가 가리키는 곳은 앉은 곳에서 두 칸쯤 떨어진 의자의 줄이었다.

한눈에 봐도 거기에 앉은 사람들의 나잇대는 확연히 어렸다. 지금 앉아있는 줄에는 대부분 아주머니, 아저씨 나잇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아저씨와의 단란한 게임 대화는 마무리가 지어졌다. 지금 생각나는 더 물어봐야 할 사항은 떠오르지 않았다.


동훈은 아주머니의 제안에 거부하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조금 잘 수 있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품고.


‘특이하게 자리를 나잇대로 구분해서 자리를 배정해놨네. 이래서 교회는 친목의 장이라고 하는 건가?’


동훈은 청년과 청소년부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나무로 된 교회 의자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손을 올려둘 수 있는 구석도 없고 딱딱하기만 한 의자의 재질은 사용자의 편의라고는 관심도 없는듯했다.


‘이런 의자는 대학 때 이후로 처음인데. 어우, 불편해. 잠은 개뿔. 앉아있기도 힘드네.’


동훈이 의자의 불편함을 궁시렁거리는 사이 목사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단정하게 생긴 40대의 목사는 마이크를 조정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렇게 예배가 시작되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큭큭대는 소리가 들렸다.


“야, 옥탑 인간 왔다, 옥탑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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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게임 속 나혼자 플레이어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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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검사 22.12.05 312 11 22쪽
61 옥탑 인간 22.12.03 324 10 20쪽
» 핏빛기사단 혈맹 22.11.29 332 7 22쪽
59 디렌의 탑 22.11.24 326 10 19쪽
58 정립 22.11.22 353 11 16쪽
57 첫 전설급 아이템 22.11.20 357 14 14쪽
56 다크엘프 비사(秘史) 22.11.18 337 10 18쪽
55 악령 22.11.15 346 13 13쪽
54 무너진 탑 22.11.13 357 11 13쪽
53 도발에는 도발로 22.11.12 356 12 13쪽
52 회장클럽 22.11.10 361 13 12쪽
51 얼음공주 22.11.09 349 8 19쪽
50 투자설명회(2) 22.11.07 357 12 14쪽
49 투자설명회 22.11.03 380 14 16쪽
48 저주와 10레벨 22.11.02 385 15 15쪽
47 영성 강림 22.11.01 373 13 17쪽
46 쌀과 정情 22.10.31 385 11 15쪽
45 건물주 22.10.30 393 11 14쪽
44 인버스 22.10.29 393 9 13쪽
43 폴트란으로 22.10.28 384 11 15쪽
42 독무대 22.10.27 382 12 15쪽
41 따이! 22.10.26 395 14 18쪽
40 훈련 22.10.26 404 12 14쪽
39 쟁에서 승리하는 법 22.10.25 421 9 20쪽
38 이벤트퀘스트, 가문의 비밀 22.10.24 419 12 15쪽
37 사랑하는 사람에게 베푸세요(2) 22.10.23 419 13 18쪽
36 사랑하는 사람에게 베푸세요 22.10.22 426 13 16쪽
35 폭력의 도시 22.10.21 468 12 18쪽
34 [zㅣ존영zㅐ] 22.10.20 491 11 21쪽
33 사기도박? 나도 할래 22.10.19 493 1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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