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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ii 님의 서재입니다.

리겔의 불꽃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Ceii
작품등록일 :
2015.03.16 21:19
최근연재일 :
2015.04.02 04:26
연재수 :
7 회
조회수 :
5,074
추천수 :
609
글자수 :
55,072

작성
15.03.19 06:23
조회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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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글자
19쪽

제3화 링핑거(3)

DUMMY

퍼억!

땅에서 세차게 튀어 오른 흙과 자그마한 돌멩이가 에드의 얼굴을 따갑게 때렸다. 펠의 폴액스는 땅 바닥에 박혔다.

‘설마 펠 녀석이 살려준 건가.’

감은 눈을 떠서 펠의 얼굴을 올려다봤을 때, 펠은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 시선을 돌리자 필사적으로 땅을 기어 왔을 바트가 다시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펠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바트와 펠의 눈이 마주쳤을 때 바트는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 했지만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한 채 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나 펠은 바트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폴액스를 들어올렸다. 이젠 정말 끝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에드는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 때, 타다닥 하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작은 사람의 그림자가 펠의 다리를 안아왔다. 그 꼬마 녀석이었다. 아이는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더....더 이상은, 제발. 흑.”

펠의 표정이 잠시 흔들리는가 싶었다.

“하아.”’

한숨을 쉰 펠은 아이를 부드럽게 밀쳐냈다. 그리고 지체 없이 단검을 꺼내 갑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에드의 다리근육에 찔러 넣었다.

“으아악!”

에드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아이는 입을 가리고 터져 나오는 절규를 삼키고 있었다. 심한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 옴을 느꼈다.

“자네를 조급하게 하려고 거짓말을 했어. 바트의 상처는... 살아나기는 힘들 걸세.”

펠은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에드는 펠이 돌아서서 매수된 사내들에게 동전을 던지며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런 관심도 들지 않았다. 눈길을 돌려 쓰러져 있는 바트를 보았다. 벌써 죽은 것일까? 바트가 힘겹게 기어서 온 거리만큼 땅바닥에 핏자국의 길이 길게 이어져 있는 것도 어렴풋이 보였다.

잃어가는 정신의 끈을 잡으며 아직 자기를 보고 울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쳐다봤다. 고통과 슬픔, 분노, 그리고 살아남을 것 같다는 비겁한 희망... 여러 가지 감정이 겹쳐지며 응시한 아이의 얼굴에서 깨닫지 못하던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에드는 입술 달싹이며 말을 건넸다.


“고마워요, 예쁜 꼬마 아가씨.”


에드는 이 말을 마치고 잠들듯 정신을 잃었다. 아이가 그의 말을 들었을지는 모를 일이나, 펠이 듣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만약 그가 들었다면 곧바로 에드의 떨어진 목이 바닥을 구르고 있으리라.


펠은 에드를 쓰러뜨린 후 매수한 사내들에게 동전을 건네며 이야기했다.

“옷은 가져왔는가?”

“네, 나으리.”

초로의 사내가 건네는 두 벌의 옷가지를 받아들은 펠은 서둘러 래더아머를 벗어던졌다. 자신과 동료였던 이들의 피가 엉겨 붙은 옷 역시 벗어던지고 옷가지를 찢어서 에드의 칼에 상처 난 옆구리를 지혈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진 않아 피가 많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네들은 어서 여기를 떠나게. 알다시피 오늘 일을 누구에게라도 발설하게 된다면 다음날 자네 가족들이 성문 앞에 걸린 자네들의 머리에 아침인사를 해야 할걸세.”

“예, 나으리.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내들을 보내고 펠은 아이의 손을 잡아 끌어 다리 옆의 커다란 느티나무의 그림자로 숨어들었다.

“아가씨, 저를 보세요.”

아이는 떨리는 눈으로 펠을 바라봤다.

“사람이 죽는 것을 처음 보셨나요?”

펠의 질문에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누가 죽는 것을 본 것은 언제였나요? 대답하세요.”

아이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올랐으나 펠은 멈추지 않고 다그쳤다.

“대답하세요.”

“어렸을 때, 어...엄마가요...”

아이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당신의 어머니를 죽인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 아가씨 손으로 복수를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할 시간은 드리겠습니다. 그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죽는 것보다도 슬픈 일을 겪게 되실 겁니다. 이것도 아시겠습니까?”

아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펠은 남은 옷가지를 아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갈아 입으세요.”

“지... 지금요?”

펠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돌아섰다. 아이는 평민에 대한 복장 법률에 맞추어 수수한 회색 리넨 상의와 양모 바지를 입고 있었다. 펠이 아이에게 준 옷은 상당한 상류층에서나 입을 수 있는 것으로 이스턴스케일에서만 생산되던 부드럽고 무게가 가벼우며 은은한 광택이나는 소재의 셔츠에 황금색 자수가 놓여진 고급스러운 검은색 튜닉과 바지였다.

아이의 칠흑 같은 머리색은 분명 이스턴스케일 출신으로 보였다. 서부의 11개 왕국과 1공화국에서는 진한 갈색의 머리를 가진 사람은 종종 찾아볼 수 있어도 흑발인 사람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반면, 아이는 이스턴 스케일 출신으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흰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10세의 어린 아이지만 뚜렷하고 감성적인 얼굴선과 귀족 자제나 입을 수 있는 고급스러운 옷이 어우러져 이국적인 스타일의 귀공자로 변모했다. 아이는 어린 마음에도 도망자 입장에서 굳이 타인의 눈에 잘 띄는 옷을 입는 이유가 이상하게 생각됐지만 종일 계속되는 두려운 상황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펠은 미리 준비한 마차에 자신의 말을 걸었다. 마차 뒤에는 커다란 술통 세 개와 도색된 상자들이 있었다. 다리를 지나 관문에 이르는 통로는 비교적 좁은 산악길이었지만 제2도시에 걸맞게 상당히 정리가 잘되어 마차가 통행하기에 적절한 편이었다. 동시에 도시로 진입하는 적의 병력을 방어하기도 용이한 구조였다. 이윽고 관문에 다다르자 병사가 펠의 마차를 멈춰세웠다.

횃불을 들어 펠의 얼굴을 확인하자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기사님. 무슨 용무이신지?”

“수고하네, 다름 아니라 늪지의 영주이시자 스타폴왕국의 내무대신인 퀼 사드 후작의 방문에 대한 답례로 대공께서 베푸신 선물을 전달하러 가려는 중이네.”

“대장님께 보고하겠습니다.”

잠시 후 당직을 서는 수문장 마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문장은 기사나 하급기사가 번갈아 가며 근무를 섰는데, 보통 야간근무는 하급기사들의 몫이었다. 마크는 정식 작위를 받지 않은 하급기사였지만 군대에서 상당히 잔뼈가 굵은 자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헌데, 후작께선...?”

“후작께선 붉은 거리에 볼일이 있으신 모양이더군.”

펠은 대답을 하며 마크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붉은 거리는 미티어타워 내의 사창가로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창가이도 했다. 해마다 수많은 귀족과 타국의 왕자들이 붉은 거리의 고급창녀를 찾아오곤 했다.

“하하하. 저라면 함께 머물러 좀 즐기겠습니다만... 먼저 출발하시기는 좀 아깝지 않습니까?”

마크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질문을 던져왔지만 펠은 약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펠은 마크가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내와 함께 두 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으며, 아내를 매우 사랑하여 결코 사창가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경험이 풍부한 이 전사는 펠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 궁금한 것을 캐어묻고 있는 것이었다.

“하, 이사람 참. 그게, 실은 난 아침에 들렀거든. 붉은 거리의 캐서린에게 아주 녹아나서 말일세. 게다가 웬일인지 요즘 근무가 늘어났지 않나. 서둘러 다녀오지 않으면 동료 놈들이 대련 때마다 내 낭심부터 노리게 될 거야.”

“하하. 그러시군요. 에드 경과 다니시더니 입담이 점점 좋아지시는군요. 그런데, 저기 앉아계신 귀공자는 어떤 분이신지요? 어느 댁의 자제이신지... 뵌 기억이 없군요.”

“아까 이야기 하지 않았나?”

“네?”

“후작께 드릴 선물을 전달하러 간다고 말일세.”

마크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딱딱한 목소리로 마크가 질문을 해왔다.

“후작께서 그런 취미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금시초문입니다만?”

“앞으로도 모르고 있는 것으로 하게나. 이 아이를 배달하는 심정도 더럽지만, 메리라고 했던가? 자네 아내에게 자네 머리를 배달하는 것 역시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닐 거야.”

마크는 아이에게 측은한 눈빛을 건넸다. 아이는 마크에게 불안한 표정 속에서 살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후우...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시지요.”

마크가 몸을 돌려 부하들에게 호령했다.

“관문을 열어라!”

철문이 열리고 마차는 천천히 관문을 통과했다. 펠은 마크의 곁을 지나치며 그가 나직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망할 귀족 새끼들!”


바람에 흔들리는 횃불의 불빛이 느껴졌다. 에드는 무엇인지 모를 다급한 심정에 감은 눈을 번쩍 떴다.

“허억! 헉. 헉..”

찰나의 시간과 함께 정신을 차린 그는 꺼져 있던 횃불이 다시 타오르고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발견되기 쉽도록 불을 켜 놓은 것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펠, 이제와 자비를 베푸는 거냐. 바트, 바트는?’

고개를 돌려 바트를 쓰러져 있는 바트를 발견한 에드는 그를 향해 몸을 일으키려했으나 끊어질 듯한 다리의 통증을 느끼며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바트를 향해 기어가는 동안 상처입은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듯 했지만 온힘을 다해 땅을 짚어댔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걸까?’

바트는 자신 쪽을 향해 머리를 두고 쓰러져 있었다. 그의 육중한 몸은 움직임이 전혀 없어보였다. 점차 바트에게로 가까워질수록 에드는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서로 얼굴이 겹쳐 마주볼 수 있는 위치까지 다다랐을 때, 놀랍게도 바트는 눈을 뜨고 있었다. 가느다랗게 숨이 붙어있는 느낌이 느껴졌다. 에드는 어렴풋이 자신이 정신을 잃었던 시간의 길이가 예상이 되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리라. 아마도 절실한 마음에 눈이 금방 떠진 것 같았다. 그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으며 바트를 불렀다.

“바트, 바트! 정신 차려.”

바트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시선은 에드의 얼굴을 향했지만 눈이 안보이나 싶을 정도로 초점이 맞지 않아보였다. 조금 뒤, 가까스로 바트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러나 목소리는 전혀 나오지 못했고. 계속 토해내던 핏물만 조금씩 흘러내렸다. 그러나 에드는 그의 입술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지... 지나. 지나.’

에드의 마음에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방금 전 죽음을 예감한 순간에 떠올린 지나의 피곤한 미소가 다시 눈에 아른거렸다.

“그래, 조금만 버텨. 지나에게 데려다 줄께. 해낼 수 있을 거야. 넌 그리즐리잖아 바트!”

에드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바트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번지는 것이 보이는 듯 했다.

“그래, 금방 누군가 올 거야. 조금만 참아!”

에드는 계속 바트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가면 ‘숨 가쁜 염소 술집’에서 지나에게 맥주를 시키자! 술은 내가 사지만, 닭고기와 소시지는 네가 내는 거다.”

바트의 입가에 웃음이 더 번지는 것 같았다. 에드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잠시 뿐이었다. 바트의 얼굴은 그대로 굳으며 천천히 눈 안의 동공이 커져갔다. 타오르는 횃불의 아른거림이 바트의 눈 안에서 반짝였지만, 생명의 빛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에드는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며 어린아이와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외쳤다.

“사람 살려요! 좀 도와주세요!”

관문이 봉쇄되지 않은 것은 곧 알려져 머지않아 누군가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러나 에드에게는 그 시간이 천년의 길이로 느껴졌다. 바트의 죽음을 인정하기까지 그는 한참을 더 외쳐댈 수밖에 없었다.



미티어타워를 빠져나간 펠은 마차를 버리고 아이를 말에 태운 뒤 서둘러 말을 몰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기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차가운 새벽공기가 몸에 스며들 듯 체온을 떨어뜨리자 아이는 가느다랗게 몸을 떨었다.

“춥습니까?”

아이는 대답없이 몸을 움츠렸다. 펠은 고삐를 놓고 재빠르게 망토를 풀러 아이를 감쌌다.

튼튼한 천이 몸을 감싸 바람을 막아주자 아이는 펠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봤다. 표정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무감각한 것과는 좀 다른 분위기의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 느낌 탓일까? 열 살의 어린 아이는 이 사내가 잘 생겼다는 막연한 느낌을 가졌다. 이렇게 차분해 보이는 사람이 오늘 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았다니...

“어디로 가는 거지요?”

아이는 어렵사리 말을 걸어보았다.

“페어리우드(Fairy wood)로 갑니다.”

“그곳이 아저씨 고향인가요?”

“서부왕국에 대해 잘 모르시는 군요. 그곳은 누군가의 고향이 될 만한 곳은 아닙니다. 그리도 저도 아가씨처럼 앞으로 제 고향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아이는 의아한 눈빛으로 펠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잠시 생각하더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페어리우드는 어떤 곳인가요?”

아이가 이야기를 돌리는 것을 보고 펠은 내심 뜻밖의 면을 보게 된 놀라움이 느껴졌다.

‘조숙하다.’

이제 겨우 열 살. 그러나 펠 자신이 일찍이 그렇게 자라왔던 것처럼, 슬픈 일이지만 이 아이에게 역시 더 이상의 유년기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페어리우드는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말을 쉬지 않고 달려도 꼬박 하루는 걸리는 거리입니다. 천 년쯤 전에는 요정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숲이지요.”

“그럼 지금은 요정이 살지 않나요?”

“글쎄요, 페어리우드는 위대한 군주 레스터가 왕자였던 시절에 여행을 떠났던 곳으로 알려져 있지요. 보름 동안 숲을 탐험하다 숲의 가장 깊숙한 곳의 신비로운 정원에서 요정의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아내로 맞아 ‘잊혀진 이름의 성’으로 데리고 왔답니다.”

“잊혀진 이름의 성이요?”

“지금은 ‘미티어타워’라고 부르지요. 당시만 해도 크레이터 월이 도시의 전 영역이였던 시기였지요. 하늘에서 내려온 별의 군주가 칠백년에 걸친 레스터 왕가의 치세를 멸망시킬 때, 그 수도였던 ‘타워’의 본래 이름을 모든 문헌과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렸습니다. 타워의 주민들은 간혹 자신들의 옛 영광을 생각하며 미티어타워를 ‘잊혀진 이름의 성’으로 부른답니다.”

“요정의 공주는 어떻게 되었나요?”

“숲속의 요정은 산악의 도시에서 살아갈 수 없었답니다. 왕비가 된 후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 병이 들어버렸지요. 요정왕이 그 소식을 듣고 공주를 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공주는 돌아가기를 거부했답니다. 요정왕은 공주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벌였지만 숲을 벗어나서는 힘을 쓸 수가 없었지요. 전쟁에서 왕이 전사하고, 공주 역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답니다. 요정들은 숲으로 돌아가 다시는 인간들이 숲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자신들의 육체를 버려 숲속의 맹수들에게 깃들었고, 인간의 힘으로 어찌하기 힘든 무서운 짐승들이 배회하는 숲이 되었다고 합니다.”

“참 슬픈 이야기예요.”

“그렇습니다만, 대개 많은 옛날이야기들이 그렇듯, 이 이야기도 진실의 양면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건 차차 알아 가셔도 좋을 겁니다. 숲속의 은신처에서 당분간 하실 일은 책 읽는 것밖에 없으실 거예요.”

“짐승들 때문에 누구의 고향도 될 수 없는 땅인가 보군요.”

“물론 그것 때문에 사람이 살지 않는 땅입니다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요. 일반인들은 짐승들이 무서워 페어리우드에 터를 잡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크게 보면 그곳은 스타폴 왕국과 북서부 해안에 자리 잡은 브라운워터왕국(Kingdom of Brown water)과의 완충지입니다. 외교적인 문제도 있고, 굳이 많은 인명피해를 입으면서까지 무리해서 숲을 차지할 필요는 지금까지 없었을 겁니다. 오가는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오랜 동안 숲을 출입한 경험 많은 나무꾼들이 그 숲에서만 나오는 과실을 따는 정도입니다.”

“지금은 그 숲이 위험하지 않나요? 무서운 짐승들이 있는데.”

“위험한 놈들인 건 사실이지만, 오래도록 짐승을 만나보면 어떻게 다뤄야 할지 파악할 수 있답니다. 짐승의 변화는 자연과 함께 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꼭 명심해두세요. 역사를 가진, 두 발 달린 짐승이 사는 곳이 몇 배는 더 위험하다는 것을요.”

말을 마친 뒤 펠은 그냥 단순히 사람을 조심하라고 할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아이가 나이에 비해 성숙해서 자기도 모르게 어른과 대화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무엇인가 말을 덧붙이려 했지만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지요?”

‘아까는 분위기를 살펴 이야기를 피하더니. 생각보다 빠르게 상황을 살피는 군.’

갑작스럽게 화제를 돌려 핵심을 찔러오는 소녀의 말에 펠은 조금 놀라면서도 반가운 기분을 느꼈다.

“이제 추위는 좀 가셨나보군요.”

“대답해주세요.”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이지요?”

“아가씨의 이름을 가르쳐 주세요.”

“나단... 이에요.”

소녀는 소년의 이름을 대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알고 싶군요.”

“...”

소녀는 잠시 망설이다 짧게 답하였다.

“테슈.”


펠은 얼굴에 웃음이 살짝 스쳐지나갔다. 여자아이 이름치고는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테슈는 잠깐이지만 펠이 처음으로 웃는 것을 보았다.

“아가씨.”

“네, 말씀하세요.”

아까 링핑거에서 저와 마지막으로 결투한 두 사람을 기억하시나요?

“네.”

“망설임은 목숨을 앗아갑니다. 앞으로 아가씨께서 제게 명령하실 날이 오겠지만 당분간은 절대 저를 말리지 마세요.”

“네...”

테슈는 풀이 살짝 죽으면서도, 펠이 왜 자신을 돕는지 대답을 못들은 것이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물어볼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둘은... 제 친구들이었습니다.”

테슈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지금쯤 죽었을 겁니다.”

펠의 담담한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테슈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아파 옴을 느꼈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당황스러운 심경이 들 때, 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에... 저를 막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테슈는 왈칵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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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1

  • 작성자
    Lv.1 일단은달려
    작성일
    15.03.26 09:15
    No. 1

    와, 긴장된 흐름이 흔들림 없이 잘 이어지네요..
    곳곳에 넣어둔 이야기들, 연재 끝까지 잘 펼쳐주세요 ^^)/


    망설임은 목숨을 앗아갑니다,
    당분간은 절대 말리지 말아주세요,
    .. 저를 막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Ceii
    작성일
    15.03.27 07:38
    No. 2

    감사합니다, 자기 작품 보고 이런 이야기는 우습지만 지금 느낌대로 완결까지 갈 수 있다면 '처녀작'으로서는 스스로 대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시간이 절박하기도 하네요^^ 많이 응원해주시고 도와주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0 택일
    작성일
    15.03.26 23:00
    No. 3

    와우 흥미진진해지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Ceii
    작성일
    15.03.27 06:47
    No. 4

    아직 10편도 못넘긴지라 얼마나 해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댓글 달아주시는 것이 정말 힘이 되네요~ 고맙습니다. 근데, 알드니의 방주 넘 멋지네요. 다독하는 편은 아닌지라 조예가 깊다고 할 수는 없지만 높은 완성도가 기대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5 김종성
    작성일
    15.04.08 17:27
    No. 5

    끝까지 달려가 보세요. 위에 일단은 달려 분께서 흔들림없이 잘 이어졌다고 하신 것처럼 흔들림이 있을지라도 자신의 원칙을 지켜나가시다 보면 무엇이건 이루리라 생각합니다.
    긴장감을 잘 느끼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Ceii
    작성일
    15.04.10 00:39
    No. 6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ㅠㅠ 9화를 올리기까지 좀 힘든 주간이어서 더욱 힘이 되네요. 종일 말씀에 답글을 빨리 달고 싶었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역전승
    작성일
    15.04.08 23:17
    No. 7

    좋습니다. 건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Ceii
    작성일
    15.04.10 00:39
    No. 8

    아.. 벌써 3화까지 읽어주시다니!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8 검고양이
    작성일
    15.04.11 10:45
    No. 9

    내용이 좋고 다음편 궁금하옵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Ceii
    작성일
    15.04.15 19:09
    No. 10

    감사합니다. 검고양이님도 건필 되세요~! 그리고, 지난 번에 위키만 검색해보고 다시 천천히 바스타드 소드, 롱 소드, 아밍소드 더 찾아보고 있었는데요, 글과 설정을 뜯어고치고 싶은 마음이 막 올라오네요. 한 번 쓴 글은 문법 같은 것 이외에는 왠만하면 안 고치려 하는데...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1 반자개
    작성일
    15.04.28 09:33
    No. 11

    고민과 숙성된 필력의 흔적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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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겔의 불꽃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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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가정사로 1년 정도 연재를 못할 것 같습니다 15.05.09 160 0 -
공지 죄송합니다. 연재 날짜를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2 15.04.15 146 0 -
7 제7화 추격자들(4) +7 15.04.02 444 53 15쪽
6 제6화 추격자들(3) +3 15.03.30 423 54 19쪽
5 제5화 추격자들(2) +9 15.03.26 531 54 17쪽
4 제4화 추격자들(1) +5 15.03.23 347 52 18쪽
» 제3화 링핑거(3) +11 15.03.19 455 67 19쪽
2 제2화 링핑거(2) +10 15.03.16 540 58 18쪽
1 제1화 링핑거(1) +17 15.03.16 1,497 6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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