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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휘 님의 서재입니다.

이산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조휘
작품등록일 :
2014.03.19 15:11
최근연재일 :
2014.04.25 10:01
연재수 :
1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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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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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4,866

작성
14.03.2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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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이산 9

DUMMY

등잔의 불빛이 조명처럼 빈궁의 얼굴을 비췄다.

낮에 볼 때는 단아한 모습이었지만 어두운 불빛 속에 보는 빈궁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나이는 어려도 훨씬 더 성숙해보였다.

비녀를 풀어 풀어헤친 머리카락은 삼단처럼 윤기가 흘렀다. 또, 고운 턱선 밑으로 보이는 목덜미는 눈처럼 하얗게 빛을 발했다.

“앉으세요.”

“아, 고맙소.”

빈궁의 고운 자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이산은 얼른 자리에 앉았다. 이산이 멀뚱멀뚱 앉아있자 빈궁은 주전자에 든 술을 술잔에 따라주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춤을 추듯 우아하게 움직였다.

“한 잔 받으세요.”

“고, 고맙소. 그런데 술을 먹어도 되는 것이오?”

“많은 술은 안 되오나 전하께서도 한 병 정도는 허락하셨습니다.”

술을 빚을 때 쌀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영조는 재위기간 동안 여러 번에 걸쳐 금주령을 선포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벌을 피할 수 없어 여염집은 물론이거니와 대궐에서도 이를 지켜야했다.

이산은 빈궁이 따라준 술을 한 잔 마셔보았다. 처음에는 과일향이 나서 좋았지만 이내 속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열이 확 올라왔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담가놓았던 인삼주를 호기심에 몰래 먹어본 적은 있지만 그 후에는 그 흔한 맥주조차 먹어본 기억이 없었다.

그야말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술을 먹어보는 셈이었다.

현대의 술은 도수가 낮지만 궁중의 술은 도수가 높아 초보자인 이산에게 무리였다. 한 잔을 다 마시는 순간, 하늘이 빙글 돌았다.

“안주도 드시면서 드세요.”

빈궁이 건넨 안주를 받아먹은 이산은 빈궁 위로 기절하듯 쓰러졌다.

“어머!”

빈궁이 놀라는 소리를 들으며 이산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린 이산은 빈궁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았다.

“내가 정신을 잃었소?”

“한 시진 내내 정신없이 코를 고셨습니다.”

빈궁의 대답에 이산은 살짝 놀랐다.

‘한 시진이면 두 시간이라는 말인데 내가 그렇게 오래 잠을 잤구나.’

이산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미, 미안하오. 내가 술이 약해서…….”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빈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못하시는 술을 억지로 권한 신첩의 잘못이지요.”

“아, 아니오. 빈궁은 잘못한 게 없소. 다 내 탓이오.”

빈궁은 대담하게도 이산을 먼저 끌어안으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모두 잘 될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고, 고맙소.”

이산은 빈궁과 나란히 누워 모자란 잠을 채웠다. 어머니가 아닌 여자와 같이 누워 있는 게 처음이어서 처음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빈궁의 머리와 몸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에 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심장은 미친 듯 뛰었고 몸에서는 열기가 확 올라왔다.

그러나 요즘 고된 일과로 정신없는 날을 보내던 이산은 술기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낮게 골며 잠이 들었다.

이산이 잠이 든 모습을 머리맡에서 물끄러미 보던 빈궁은 고개를 돌리며 옷고름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러나 이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빈궁은 잠이 든 이산 옆에 파고들어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잠이 깬 이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칠기로 만든 장롱과 아기자기한 장식품이 보였다.

남자의 거처라기보다 여인의 규방(閨房)에 가까웠다.

‘아, 내 방이 아니었지?’

어젯밤의 일이 떠오른 이산은 급히 빈궁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빈궁은 아침 일찍 일어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빈궁을 찾기 위해 일어나려는데 머리가 띵하며 속에서 역한 냄새가 올라왔다.

‘윽, 이게 숙취라는 건가? 생각보다 더 지독하군.’

이산은 주저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빈궁이 쟁반에 김이 나는 그릇을 담아 들어왔다.

이산은 빈궁을 보자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다. 전에는 어떻게 해서든 빈궁과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세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와 오래 있다 보면 정체가 발각될 위험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젯밤의 일로 그녀와 있는 게 조금은 편해졌다.

“그게 무엇이오?”

“술국입니다. 속이 풀릴 테니 드셔보세요.”

술국은 해장국의 다른 말이어서 이산은 얼른 국물을 떠먹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원하거나, 얼큰한 국물을 먹고 싶어 죽겠던 차였다. 국물을 먹자 속이 풀리며 몽롱하던 정신이 제대로 돌아왔다.

이산은 술국의 재료를 살펴보았다. 배추 속에 송이버섯, 표고버섯이 들어 있었다. 또, 해장국에 빠질 수 없는 재료인 콩나물도 있었다. 심지어 전복과 해삼, 그리고 갈비마저 내용물 중 하나였다.

‘이 시대 사람들이 먹는 해장국이 오히려 더 호화로웠구나.’

영조는 긴 재위기간 내내 강력한 금주령을 내렸으나 근래에는 금주령이 별 실효가 없음을 깨닫고 거의 철회한 상태였다. 그리고 술과 같이 따라오는 술국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어 여러 가지 해장국이 민간에 전해졌는데 지금 먹은 해장국은 전라도방식이었다. 이 해장국은 이산이 궁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었다.

빈궁이 아이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듯 바라보며 물었다.

“사가에서 배운 술국인데 입에 맞으십니까?”

“아주 맛있소. 빈궁 덕분에 오늘 하루를 든든하게 시작할 것 같소.”

이미 채비를 마친 빈궁은 세안을 도와준 후 곤룡포와 익선관을 가져와 입혀주었다. 살뜰한 마음씨에 이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른들에게 문안인사를 올린 후 서연에 참석한 이산은 개유와에 가는 대신, 궁술을 연마하는 연무장을 찾았다. 정조는 역대 임금 중에서 문무에 고른 재능을 보였던 임금이었다. 특히, 궁술은 무장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수준이어서 세손시절에도 연무장에 자주 출입하며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데 매우 열성적이었다.

연무장은 활을 쏘는 사대(射臺)와 표적이 있는 사로(射路)로 구분되어 있었다. 사로 끝에는 표적지가 있었다. 또, 표적지 좌우에는 명중을 알려주는 내관이 자리했으며 사대 위에는 높은 단이 하나 있어 참관하거나, 차례를 기다리며 대기하는 용도로 쓰였다.

이산은 의자에 앉아 익위사(翊衛司)의 사열을 받았다.

익위사는 쉽게 말해 세자나, 세손의 호위무사였다. 임금보다는 못하지만 세자나, 세손 역시 자객의 공격을 받을 확률이 높았기에 익위사를 두어 24시간 호위했다. 그러나 세손을 호위해야할 익위사는 이미 오래 전 김귀주와 홍인한, 정후겸의 사주를 받은 자로 채워져 있어 오히려 익위사가 세손을 위협하는 실정이었다.

“오랜만에 활솜씨를 보고 싶다.”

“명을 따르겠나이다.”

익위사의 수장인 좌익위(左翊衛)를 시작으로 익위사에 속한 관원이 화살을 쏘았다. 모두 솜씨가 좋아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산은 명중에 신경 쓰기보다는 활을 어떻게 쏘는지 관찰했다.

‘아, 시위는 저렇게 잡는 거구나.’

아직 모르는 게 많았으나 세손으로 위장하기 위해서는 활을 잘 쏘는 척해야했다. 그리고 잘 쏘는 척하려면 아예 쏘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이산은 활을 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 눈을 부릅뜬 채 주시했다. 이윽고 궁술 시연을 마친 익위사가 다시 시립했다.

‘응?’

무심코 고개를 옆으로 돌리던 중 그를 호위하느라 아직 활을 쏘지 못한 익위사의 하급관원을 발견한 이산은 그를 불러 질문했다.

“그대는 왜 쏘지 않는가?”

그때, 좌익위가 나와 대답했다.

“저하, 그 자는 아직 익위사의 관원이 아니옵니다.”

“그대에게 묻지 않았다.”

좌익위가 얼굴이 벌게져 물러나자 하급관원이 나와 절을 올렸다.

“소생은 익위사의 정식 관원이 아니기에 활을 쏠 수 없사옵니다.”

목소리가 시원하여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궁금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어깨가 떡 벌어졌으며 가슴은 돌처럼 단단했다. 또, 허리는 잘록해 날렵해 보였으며 눈빛은 형형한 안광을 뿜어냈다.

그가 누군지 궁금해진 이산은 고개를 조금 돌려 오상궁을 보았다. 그러나 오상궁도 그가 누군지 모르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오상궁도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말이군.’

이산은 세손의 전용 활을 주며 물었다.

“이 활을 쏴보겠나?”

“소생이 쓰기에는 너무 좋은 활이옵니다.”

“지켜볼 터이니 마음껏 솜씨를 발휘해보아라.”

그는 두 손으로 활을 받아 시위에 화살을 먹인 후 과녁을 조준했다.

끼이익!

활대가 부러질 듯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순간.

쉬익!

화살이 세찬 파공음을 내며 과녁으로 쏘아져갔다.

화살은 총으로 쏘는 탄환과 달리 끊임없이 흔들린다. 또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그런데 그가 쏜 화살은 마치 그 포물선을 확인할 틈도 없이 세차게 날아가 과녁 중앙에 정확히 명중하였다.

‘놀라운 솜씨구나.’

이산이 감탄할 때 번개처럼 네 발을 더 쏜 그는 다시 활을 두 손으로 받쳐 건넸다. 화살을 다섯 번 쏘는 행위를 일순(一巡)이라 하여 궁술연마의 기본에 해당했다. 이산은 과녁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살 다섯 개가 한 개의 화살처럼 과녁 중앙에 박혀 있었다.

정내관이 활을 받아들자 이산은 그에게 물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소생은 백동수(白東脩)라하옵니다.”

놀라서 살짝 일어났던 이산은 다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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