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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휘 님의 서재입니다.

이산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조휘
작품등록일 :
2014.03.19 15:11
최근연재일 :
2014.04.2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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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2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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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이산 8

DUMMY

다음 날, 이산은 서연에 나가 공부했다.

전과 다른 점이라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던 전과 달리 김종수와 서명응이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산은 어려운 경전의 내용을 알지 못했다. 전날, 서연에서 배울 책에 대해 들은 채제공이 중요한 구절을 선정해 그 대답을 미리 알려준 덕분이었다. 사도세자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체재공이 김종수와 서명응이 무엇을 물어볼지 미리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채제공의 도움으로 영조의 의심을 피한 이산은 시간이 날 때마다 한자와 경전을 죽어라 들이팠다. 또, 남은 시간에는 궁 안의 예절과 이 시대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따로 공부를 하였다.

18세기 후반이기는 하지만 이산이 쓰는 말과 지금 사용하는 말에 차이가 있어 언어를 따로 배우지 않으면 들통 날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궁에 적응하는 사이, 1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다.

여전히 극도의 긴장상태에 있었지만 어느 정도 돌아가는 사정을 알았기에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는 점차 여유를 띠기 시작했다.

여느 날처럼, 영조와 정순왕후에게 문안인사를 드린 이산은 빈궁과 혜빈궁을 찾아갔다. 일상적인 대화가 오간 후 이산은 한 발 먼저 동궁에 돌아온 반면, 빈궁은 남아 혜빈궁의 말벗을 자처했다.

혜빈궁은 홍봉한이 벽파의 탄핵으로 실각한 후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은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세손을 모함하려는 자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삼촌인 홍인한은 벽파의 우두머리로 형인 홍봉한과 세손을 공격하는데 앞장섰다. 그런 상황에서 세손빈은 혜빈궁이 대궐에서 마음을 터놓은 채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과를 내놓은 혜빈궁이 권했다.

“어서 드시오.”

“어마마마 먼저 드시는 거 보고 먹겠습니다.”

“이 어미는 빈궁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다오.”

“그럼 감사히 먹겠사옵니다.”

빈궁이 과일 한 조각을 베어 물자 혜빈궁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요즘 세손에게 이상한 점은 없소?”

허를 찔렸는지 잠시 흠칫한 빈궁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함께 사는 빈궁이 나보다 잘 알 테니 빈궁의 말을 믿겠소.”

“세손저하는 요즘 채제공대감을 스승으로 맞아 공부에 일로매진하고 있사오니 어마마마께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줄 압니다.”

“나도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오. 채제공대감이야말로 세손을 제대로 보필할 수 있는 유일한 충신이라 할 수 있소.”

잠시 말을 멈춘 혜빈궁은 다시 목소리를 낮춰 당부했다.

“세손이 고뿔에 걸린 후 조금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궁에 파다하오. 안타깝지만 이 어미 역시 그 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오. 고뿔에 걸리기 전 세손과 지금의 세손은 너무 다르오. 그러니 세손에게 더 의심이 가기 전에 몸가짐을 발리 하라 전해주오.”

“어마마마께서 직접 하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혜빈궁은 쓸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자식의 일이기는 하나 세손은 엄연히 조선의 국본이오. 일개 아녀자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문제라오. 또, 자식은 어미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사실보다 거짓을 고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 나보다는 한 이불 덮는 사이인 빈궁이 하는 게 더 좋을 듯하오.”

“알겠습니다.”

빈궁이 고개를 끄덕이자 혜빈궁은 웃으며 물었다.

“한데 원손은 아직이오?”

빈궁이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아직 점지를 받지 못했나보옵니다.”

혜빈궁은 빈궁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당부했다.

“둘 다 아직 어리니 서둘 건 없소만 자식은 빨리 낳는 게 좋소. 빈궁에게는 사도세자저하가 돌아가시며 끊어진 왕실의 적통을 원손을 낳아 이어야 하는 책임이 있소. 빈궁은 이 어미처럼 박복한 여인이 되어서는 안 되오. 어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소?”

“예, 어마마마.”

혜빈궁은 은근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세손은 책을 너무 좋아하여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으니 빈궁이 부끄럽더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야할 줄 아오.”

조언 아닌, 조언을 받으며 돌아가는 빈궁의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한편, 동궁에서는 이산과 채제공의 비밀수업이 한창이었다.

서연하는 시간과 문안인사 올리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비밀수업에 할애했다. 정조는 조선 역사에서 세종대왕과 함께 학문적으로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룬 임금이었다. 그런 임금의 학문을 불과 열여덟 살에 시작해 따라잡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지 못하면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산에게 채제공의 수업은 단순한 수업이 아니라, 목숨을 연장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그러니 열심히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날 밤, 오후 서연을 마친 이산은 채제공과 마주 앉아 밤늦도록 공부에 열중했다. 한창 속도가 올랐을 무렵. 빈궁의 방문을 받았다. 그런 빈궁의 손에는 과자와 식혜 등 요깃거리가 들려 있었다.

급히 일어난 채제공이 빈궁에게 인사를 올렸다.

“신 채제공이 빈궁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예를 거두세요.”

“황공하옵니다.”

빈궁이 가져온 과자와 식혜를 상에 차리며 말했다.

“신첩이 사가의 어머님께 배운 걸 재현해본 것입니다. 밤이 늦어 출출하실 터이니 요기하며 공부하시라고 조금 가져와봤습니다.”

“오, 빈궁이 직접 만들었다는 말이오?”

“내놓기 부끄러운 실력입니다. 흉이나 보지 마옵소서.”

채제공에게 먼저 권한 이산은 자신도 먹었다. 생각보다 달거니와 쫀득쫀득해 입맛에 맞았다. 식혜 역시 시원해 갈증을 풀어주었다.

채제공도 마음에 들었는지 칭찬에 나섰다.

“빈궁마마의 솜씨가 아주 뛰어나시옵니다.”

“오, 대감도 그리 생각하였소?”

“신 뿐 아니라, 맛을 본 사람이라면 그리 말했을 것이옵니다.”

빈궁은 싫지 않은 듯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빈궁이 돌아간 후 채제공은 허리를 잡고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자리를 파하는 게 어떻사옵니까?”

“어디 아프오?”

“요 며칠 무리했더니 허리 병이 도진 모양입니다.”

“그럼 얼른 쉬도록 하시오. 내가 경을 너무 오래 붙잡은 모양이오.”

채제공이 돌아간 후 이산은 공부방인 개유와를 둘러보았다.

개유와는 세손의 개인독서실이었다. 세손은 특히 서양 문물을 소개한 청나라의 서적에 관심이 많았는데 사신을 통해 입수한 중국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게 열고관이었다. 그러나 책의 숫자가 워낙 많았던지라, 열고관 옆에 개유와를 증축해 개인도서관으로 삼았다. 또, 조선본은 따로 정색당(貞賾堂)을 지어 보관했다.

‘이 개유와가 나중에 세워지는 규장각(奎章閣)의 시초라고 했었지.’

채제공이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할 일이 없던 이산은 개유와 서적을 몇 권 들쳐보았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자를 몇 개 읽을 줄 안다고 해서 한문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한문의 문장구조는 한글보다 영어와 더 닮은 면이 많았다.

또한, 영어의 숙어처럼 몇 개의 글자가 모여 다른 의미를 만드는 경우가 많아 어려운 경전을 읽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지금 나에게는 무리인 모양이구나.’

책을 덮은 이산은 동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빈궁 처소가 환했다. 빈궁은 저녁에 잠이 들어 새벽에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이었다.

문안인사 드리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테지만 그보다는 세손의 아침을 직접 차리는 걸 유독 좋아했다. 물론, 직접 차린다는 게 수라간 나인처럼 요리하는 건 아니고 상에 올릴 음식을 결정하거나, 궁인이 독을 풀지 못하게 감시하는 면이 강했다.

이산은 빈궁 처소를 지나 침전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침전은 불을 때지 않았는지 냉방이었다. 이런 적이 없었기에 정내관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오늘은 빈궁마마 처소에 드시는 게 어떠하올지요?”

“빈궁의 처소로 말인가?”

“혜빈궁마마의 심려가 크시옵니다.”

고민하던 이산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 순간 살짝 움찔했다.

‘헉, 나보고 빈궁이란 자란 말인가?’

이산은 머리를 쥐어뜯기 일보직전이었다.

‘말도 안 돼. 숫총각인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니 세손과 빈궁은 부부였다.

나이가 어리기는 해도 부부가 동침하는 게 이상할 게 없었다. 오히려 동침을 거부하는 일이야말로 사람들의 의심을 사는 길이었다.

이산은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정내관을 따라 빈궁의 처소로 들어갔는데 빈궁은 이미 주안상 앞에서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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