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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휘 님의 서재입니다.

이산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조휘
작품등록일 :
2014.03.19 15:11
최근연재일 :
2014.04.25 10:01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87,680
추천수 :
1,675
글자수 :
34,866

작성
14.03.20 15:22
조회
10,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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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글자
10쪽

이산 3

DUMMY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야.’

황당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이산은 시간이 지나자 정신을 차렸다.

“아주머니를 뭐라 불러야하죠?”

“오상궁(吳尙宮)이라 부르시옵소서.”

“동궁에서 일하나요?”

“그렇사옵니다.”

이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문은 닫혀 있었다. 그리고 창문으로 엿듣는 사람도 없었다.

“이미 눈치 챘을지 모르지만 나는 기억이 전혀 나질 않아요.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 난 정말 기억이 나질 않아요.”

“어, 어의를 불러오리까?”

이산은 오상궁의 팔을 잡았다.

“안 돼요. 그러면 큰일 나요.”

잠시 생각한 오상궁도 고개를 끄덕였다.

“쇤네의 생각 역시 그렇사옵니다.”

“오늘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나요?”

“빈궁마마와 함께 상감마마께 문안인사를 여쭌 후 중전마마와 혜빈궁(惠嬪宮)마마께 문안인사를 여쭈어야하옵니다. 그 후에 서연(書筵)이 한차례 있으며 오후에 궁술을 연마할 계획이었사옵니다.”

이산은 머릿속의 정보가 얽히며 누가 누군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상감마마는 영조겠지. 중전마마는 영조의 부인일 테니 나에게는 할머니가 되겠군. 그렇다면 혜빈궁마마가 내 생모라는 말인가. 한중록(閑中錄)을 지은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아니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에게는 무리였다. 오상궁이 하는 말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데 영조와 중전, 생모를 어떻게 만나라는 말인가.

더구나 정조는 조선 후기 영조와 함께 조선의 중흥을 이끈 명군이었다. 이산은 그런 정조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이산은 오상궁에게 부탁했다.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 그런데 오늘 일정을 취소할 수 없을까요?”

부탁을 받은 오상궁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대전(大殿)에 가서 고뿔에 걸렸다고 하겠사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그럼 다녀오겠사옵니다.”

오상궁이 나가려 할 때 이산은 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

“믿어도……, 믿어도 되는 거죠?”

“무엇을 말이옵니까?”

“이번 일은 절대 비밀이에요.”

“여부가 있사옵니까. 쇤네가 무덤에 갖고 갈 터이니 염려하지 마소서.”

이산을 안심시킨 오상궁은 영조에게 이산이 감기에 걸려 문안인사를 드리지 못함을 알렸다. 노령인 영조에게 감기를 옮길게 두려워 궁녀에게 대신하게 한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었다. 이산을 걱정한 영조는 어의와 약재를 내려 치료를 도우라 지시했다.

오상궁이 가져다준 죽을 먹은 이산은 누워 어의의 진맥을 받았다. 그러나 고뿔에 걸린 적 없으니 어의는 몸을 보하는 약재 몇 가지를 탕으로 만들어 올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맥에 나타나 꾀병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외에도 그를 걱정한 혜빈궁, 빈궁이 찾아왔으나 감기를 옮길 게 걱정이라는 핑계를 대어 만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를 잘 아는 가족은 그가 이산이 아님을 금방 눈치 챌 것이다.

이산은 역사에 해박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름이 같은 정조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 정조가 세손시절부터 노론(老論)의 공격을 받아 위험한 지경에 처해있었다는 사실과 조그만 틈이라도 보이면 사방에서 적이 개떼처럼 몰려와 마구 물어뜯을 거란 사실을.

그날 밤, 이산은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문 앞에는 오상궁을 비롯한 상궁과 나인, 내관 10여명이 잠을 자지 않은 채 대기 중이었다.

‘여기는 안 되겠어.’

이산은 창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창문 밖에 경호하는 군사들이 있어 밖으로 나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

‘꼼짝없이 세손으로 살아야하는 운명인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느낀 이산은 절망했다. 그 순간, 집이 그리워지며 부모님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리움은 잠시였다.

내일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이 그리움을 싸워 이겼다.

“험험.”

이산은 헛기침을 했다.

헛기침은 오상궁과 만든 신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오상궁이 들어왔다.

“찾으셨사옵니까?”

“내가 내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잠시 고민한 오상궁은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우선 저에게 존대하면 안 되옵니다. 편하게 오상궁이라 부르소서.”

“오, 오상궁이요?”

고개를 든 오상궁은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쇤네를 오상궁이라 부르지 못하면 내일은 더 어렵사옵니다.”

“오상궁…….”

“잘 하셨사옵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복잡한 궁중예절을 전부 알기는 어려우니 꼭 필요한 예절을 먼저 가르쳐드리겠사옵니다.”

이산은 오상궁에게 밤을 새워가며 예절을 교육받았다. 피곤하며 지루한 교육이었으나 좋은 점이 있었다. 덕분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어제 일정을 취소한 게 꾀병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일어난 이산은 나인의 도움을 받아 먼저 세손이 입는 의복을 갖추었다.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 용포를 입은 이산은 머리에 익선관(翼善冠)을 착용했다.

이산은 용포의 가슴과 어깨에 수놓은 용 문양을 만져보았다. 오상궁에 따르면 왕이 입는 곤룡포(衮龍袍)는 용의 발가락이 다섯 개여서 오조룡보(五爪龍補)라 부르는데 세자는 발가락이 하나 적어 네 개인 사조룡보(四爪龍補)를 입었다. 그러나 이산은 세자가 아니라, 세손이어서 발가락이 세 개인 삼조룡보(三爪龍補)였다.

용포 위에 허리띠 역할을 하는 수정대(水晶帶)를 찬 이산은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오상궁에게 문을 열라는 신호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긴장한 표정이던 오상궁이 문을 열자 이산은 움츠러드는 마음을 다잡으며 복도를 나와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궁전 앞에는 이미 그의 부인이며 이 나라의 세손빈인 빈궁이 대기 중이었다. 이산은 빈궁을 보며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너무 어렸던 것이다. 마치 중학생이 교복 대신에 한복을 입은듯했다.

‘내가 지금 열여덟 살이니 빈궁은 열여섯이겠구나.’

오상궁이 빈궁의 나이가 그 보다 두 살 어린 사실을 미리 알려주어 당황하지 않았지만 놀란 건 사실이었다. 빈궁은 나이답지 않게 단아한 외모와 침착한 눈빛을 가지고 있어 왠지 의지가 되었다.

이산은 개유와(皆有窩)와 열고관(閱古觀)이 가까이 있는 동궁에 주로 머물렀고 빈궁은 빈궁전에 따로 거주했기 때문에 어른들에게 문안 인사하러 가는 지금에서야 만나게 되었다. 어제는 오겠다는 걸 감기가 옮길지 모른다는 핑계를 대어 면회를 거절했다.

“저하, 안녕히 주무셨사옵니까?”

빈궁이 먼저 인사하자 오상궁을 힐끔 본 이산이 입을 억지로 떼었다.

“빈궁도 잘 잤소?”

“신첩은 잘 잤습니다. 한데 고뿔은 다 나으셨습니까?”

“빈궁의 염려덕분인지 다 나았소.”

“다행입니다.”

빈궁은 눈치 채지 못한 듯 전혀 의심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쉰 이산은 빈궁과 나란히 선 채 서쪽으로 걸었다.

오상궁에게 대궐의 지리를 배웠기에 자신 있는 걸음으로 앞장서 걸어갔으나 이내 헷갈리기 시작했다. 궁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대궐은 반란과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일부러 복잡하게 짓는다. 그러나 말로 들은 설명과 직접 본 풍경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가 엉뚱한 곳에 발을 디뎠는지 빈궁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거기는 대조전(大造殿)에 가는 길이 아닙니까?”

“아, 잠시 착각했소.”

“희정당(熙政堂)은 왼쪽에 있습니다.”

이산은 빈궁이 눈치를 살피며 방향을 바꾸어 희정당으로 걸어갔다.

창덕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정전(正殿)에 해당하는 인정전(仁政殿), 그리고 편전(便殿)으로 사용하는 선정전(宣政殿), 또, 임금의 개인 집무실 희정당, 중전의 침전 대조전 이 네 개였다. 그리고 거기에 동궁전을 더해 이 다섯 개의 전각이 대궐의 중추였다.

인정전은 왕이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거나, 신하들의 조하를 받는 가장 중요하며 가장 큰 건물이었다. 그리고 선정전은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신하들과 국사를 논의하는 건물이었다. 나라의 주요일은 모두 이 선정전에서 결정되었다. 마지막으로 희정당은 왕의 침전 겸 개인집무실이었으며 대조전은 중전의 침전이었다.

어른들에게 하는 문안인사의 순서는 아주 엄격한 예법의 적용을 받아 임금, 다음이 중전이었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큰 혼란이 불러올 가능성이 있어 처음부터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었다.

빈궁의 도움을 받아 희정당 앞에 간신히 도착한 이산은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입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가 갖고 있는 영조의 이미지는 꼬장꼬장한 노인이었다.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였다는 사실만 봐도 충분했다. 형제를 죽이거나, 조카를 죽인 왕은 있었으나 아들을 죽인 왕은 들어보지 못했다. 항간에는 인조(仁祖)가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독살했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있기는 하나 왕이 지시를 내려 죽인 아들은 사도세자가 처음이었다.

이산을 발견한 대전 내관이 희정당의 문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세손저하와 빈궁마마듭시오!”

영조에게 아뢴 내관은 이내 한쪽으로 비켜섰다.

심호흡을 한차례 한 이산은 계단을 오르다가 눈앞이 깜깜해지는 바람에 살짝 비틀거렸다. 다행히 옆에 있는 빈궁이 잡아주어 넘어지는 불상사는 피했으나 호흡이 가빠오며 눈이 핑핑 돌았다.

지켜보는 사람이 없었다면 몸을 돌려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운명을 저주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또 도망친다고 바뀌는 일 역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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