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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휘 님의 서재입니다.

이산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조휘
작품등록일 :
2014.03.19 15:11
최근연재일 :
2014.04.25 10:01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87,689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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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4,866

작성
14.03.2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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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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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글자
9쪽

이산 4

DUMMY

으득!

이를 소리 나게 깨문 이산은 계단을 다 오르자 신발을 벗었다. 벗어둔 신발은 따라오는 내관이 재빨리 한쪽 구석에 정리해두었다.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은 이산은 문지방을 넘어 기역자 모양으로 생긴 복도를 지나 두 번째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문을 지키고 선 내관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어떻게 오셨사옵니까?”

“주상전하께 문안인사를 여쭈려고 왔네.”

이산의 대답에 몸을 돌린 내관이 문을 향해 다시 아뢰었다.

“주상전하, 세손저하와 빈궁마마가 문안인사를 여쭈려왔사옵니다.”

“들라하여라.”

나이든 노인의 컬컬한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인 두 명이 문을 양쪽으로 열었다. 이산은 오상궁에게 배운 예법을 계속 떠올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차마 영조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바닥만 보고 걸어가다가 빈궁이 멈추자 재빨리 같이 멈추었다. 이제 절을 할 차례였다. 절이라면 어제 신물이 나게 연습했다.

밤새 연습한 절을 올린 이산은 방석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었다.

“주상전하, 옥체 강녕하셨사옵니까?”

“바닥에 뭐가 떨어졌느냐?”

이산은 숨이 턱 막혔다. 오상궁을 상대로 몇 가지 예상답안을 연습하기는 했으나 아쉽게도 이번 질문은 예상범위에 들어있지 않았다.

오상궁은 이럴 때 이렇게 하라 미리 가르쳐주었다.

“하문(下問)하시는 뜻을 모르겠나이다.”

“고개를 들라는 말이다.”

그제야 고개를 든 이산은 영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하얀 수염을 신선처럼 길렀다. 또, 체구는 그렇게 크지 않은 반면, 눈빛은 사람을 쏘아보는 듯해 절로 주눅이 들었다.

‘아, 이분이 영조시구나.’

검소한 성품을 가진 영조는 백성을 사랑했다. 또, 정조와 함께 조선 후기의 중흥을 이끈 명군이라는 찬사와 더불어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라는 양면의 얼굴을 지닌 영조와의 첫 대면이었다.

“안색이 좋지 못하구나. 약은 잘 먹고 있느냐?”

발음이 달라 이해하는데 시간이 다소 걸렸다. 오상궁과의 대화를 통해 이 시대의 언어에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아직 멀었던 것이다.

“먹고 있사옵니다.”

“국본(國本)이 흔들리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보전키 어려우며 백성은 고통을 받는다. 세손은 글공부도 좋지만 건강에도 힘쓰라.”

“명심하겠사옵니다.”

영조가 몇 마디 더 분부했으나 윙윙 거릴 뿐,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굴은 식은땀에 흠뻑 젖었으며 눈은 어디에 둬야할지 몰랐다.

“쯧쯧, 그만 가서 쉬도록 해라.”

혀를 찬 영조가 손을 젓자 일어나 읍을 한 이산은 등을 보이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치며 희정당을 나왔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산을 바라보던 빈궁이 손수건을 꺼내 이산의 땀을 닦아주었다.

“괜찮으셔요?”

“아, 괜찮소.”

얼버무린 이산은 빈궁과 희정당 북쪽에 붙어 있는 대조전을 찾았다. 대조전에는 영조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살았다.

올해 일흔 여섯인 영조는 평생 두 명의 중전을 거느렸다.

한 명은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였는데 당시 나이로는 장수한 측에 속하는 예순여섯에 유명을 달리했으나 남편 영조가 워낙 장수하는 바람에 대비에 오르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국모의 자리는 비워둘 수 없어 영조는 정성왕후가 유명을 달리한 후 계비(繼妃)를 들였는데 그녀가 바로 정순왕후다. 당시 정순왕후는 열다섯이었으며 영조는 예순 여섯이었으니 두 사람의 나이차는 반백년에 가까웠다. 또, 아들에 해당하는 사도세자는 그녀보다 열 살 많았으며 손자 이산과는 일곱 살 차이에 불과했다.

정순왕후가 정조의 정적이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산은 영조를 뵐 때와는 다른 긴장감을 느꼈다. 정순왕후는 정조가 승하한 후 어린 순조(純祖)를 대신해 수렴청정(垂簾聽政)했는데 가장 먼저 정조를 따르는 실학자를 대거 숙청해 꽃을 피워가던 실학의 싹을 잘라버렸다. 그녀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폐단은 그녀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대조전에 들어간 이산은 정순왕후의 용모를 먼저 살펴보았다.

그 보다 일곱 살 많은 할머니는 고작 이십대 후반처럼 보이는 곱상한 외모의 당찬 여성이었다. 눈꼬리가 길어 살짝 매서운 인상이었으나 그 외에는 평범한 여염집 아낙으로 보였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이산은 그런 외양에 속지 않았다.

문안인사를 마친 이산은 대조전을 나와 혜빈궁을 찾았다. 혜빈궁에는 세손의 생모이며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홍씨가 거처했다.

이산이 알기로 혜빈궁, 훗날의 혜경궁 홍씨에게는 두 가지 평가가 존재했다. 하나는 고난과 역경에 굴하지 않은 채 정조를 훌륭한 임금으로 키운 여인이었다는 평가였으며 다른 하나는 가문과 아들을 지키기 위해 남편이 비명에 죽게 방치했다는 평가였다.

직접 본 혜빈궁은 따뜻한 어머니의 표상과 같은 여인이었다. 감기에 걸린 일을 자기 일처럼 걱정했으며 빈궁에게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또, 돌아갈 때는 귀한 악재 몇 개를 선물로 주었다.

‘아들에게는 좋은 어머니였나보구나.’

어쨌든 궁의 어른들에게 문안인사를 여쭌 이산은 동궁에 돌아오자마자 파김치가 되어 드러누웠다. 빈궁이 간호를 자처하고 나섰지만 감기가 옮으면 안 된다는 핑계를 대어 빈궁전에 돌려보냈다.

오상궁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잘 되었사옵니까?”

이산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실수투성이였어요.”

“말투부터 바꾸셔야 다른 일도 자연히 몸에 익게 될 것이옵니다.”

이산은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해요. 워낙 버릇이 되다보니…….”

“저하에게는 그런 버릇이 없었사옵니다.”

오상궁의 말에 이산은 흠칫했다. 그녀가 아는 이산과 지금의 이산은 얼굴만 같을 뿐, 다른 사람이었으나 솔직히 털어놓지는 못했다.

오상궁을 물린 이산은 방 안을 돌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궁중 예법이야 오상궁에게 배우면 되지만 다른 건 어떻게 하지? 한자도 모르고 누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이산은 꾀를 하나 내었다.

‘정조의 측근 중 하나를 몰래 불러 가르침을 받는 게 좋겠다. 그런데 지금 누가 있지? 정조의 측근이라면 우선 정약용(丁若鏞)이나, 채제공(蔡濟恭), 홍국영(洪國榮) 같은 사람을 찾아봐야하나?’

이산은 오상궁을 다시 불러 은밀히 지시했다.

“조정에도 인사부가 있죠?”

“인사부가 무엇이옵니까?”

“관원에게 벼슬을 주고 그러는 부서 말이에요?”

총명한 오상궁은 바로 알아들었다.

“아, 이조(吏曹)말이옵니까?”

“맞아요. 이조! 왜 이렇게 안 떠오르나 했네. 오상궁이 그 이조에 가서 내가 말한 사람이 조정에 근무하고 있는지 찾아봐 줄래요?”

“은밀히 해야 하는 일이옵니까?”

이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도 모르게요.”

잠시 고민한 오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사옵니다. 하오나 쇤네가 직접 가기에는 그렇사옵니다.”

“그럼 누가 좋을까요?”

“정내관(鄭內官)이 궐의 사정에 정통하니 그가 좋겠사옵니다.”

“정내관이요?”

오상궁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그와 오상궁만 있었지만 누가 듣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조심스러운 행동에 이산도 덩달아 긴장이 되었다.

오상궁은 한참만에야 입을 떼었다.

“동궁전에는 모두 세 부류의 사람이 있사옵니다.”

“세 부류요?”

“예, 저하. 그 중 가장 많은 부류는 중전마마의 동생인 김귀주(金龜柱)대감을 따르는 남당(南黨)이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많은 게 저하의 외조부인 홍봉한(洪鳳漢)을 따르는 북당(北黨)이옵니다.”

“설마 그럼 수가 가장 적은 게?”

오상궁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설마가 맞사옵니다. 가장 적은 게 저하를 따르는 부류이옵니다.”

이산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외조부인 홍봉한대감은 나를 지켜줘야 하는 게 아닌가요?”

“홍봉한대감이 저하의 든든한 지원군이기는 하오나 오롯이 저하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옵니다. 실제로 사도세자저하가 운명하실 때 홍봉한대감은 혜빈궁마마와 저하를 지키기 위해 그 일을 모른척한 전적이 있으니 속을 전부 내보이지는 마시옵소서.”

“나보다는 자기 가문이 먼저라는 말이군요.”

“그렇사옵니다.”

이산은 오상궁의 해박한 지식에 놀랐다. 상궁은 대궐 살림을 책임진 자리라 생각했는데 오상궁은 남자 못지않은 식견의 소유자였다.

아무튼 충격을 받은 이산은 오상궁마저 의심스러웠다. 입으로는 남당이니, 북당이니 하지만 정작 오상궁이 그 중 한 명일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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