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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공모전참가작

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8 21: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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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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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4.05.2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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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
글자
20쪽

풍년인데 왜 농부는 가난할까

DUMMY

해가 뜰 무렵 용산방 포구에는 아침부터 긴장감이 돌았다.


해는 이미 지평선을 넘어 빛을 비추고, 닭들은 꽤 전부터 수산하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법이란 시간을 그런 자연의 리듬에 대충 맞출 수는 없는 것. 도성에서 정한 시간에 따라 용산방이 개시된다.


나라가 가난한 관계로, 도성과 달리 종도 설치 못하고 대충 군기감에서 꺼내 가죽을 새로 씌운 북을 쳐서 개장을 알린다.


둥- 둥- 둥- 둥-


"용산 경시(* 競市, 경매장을 뜻하는 작 중 창작용어)가 개장이오-!"




평안도에서 내려온 선상 고귀지는 개장 하자마자 저가 관고에 맡겨놓은 화물로 달려갔다.


밤새 도둑이 들거나 병사들이 졸진 않았는지 화물은 가져온 그대로 잘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하루 동안 아무 변화가 없었다.


"어...없어? 아무 것도 없어? 목간 쪼가리 하나 안 붙었어???"


"어이! 거기 너! 짐을 가져가려면 증첩을 내야한다!"


서리가 창고에서 알짱거리는 고귀지를 보고 소리쳤다.


"아이고, 나리! 증첩은 당연히 있지요! 그런데 제 짐에 목간이 하나도 안 붙어 있습니다!"


"그래? 근데 그게 뭐가 어쨌단 말이냐?"


"어쨌냐니...이 짐은 제가 그제 가져와서 팔려 한 조인데, 경매에 내놓는다고 어제부터 여기다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해서?"


"어제 경매가 폐한 바로 다음 낮부터 계속 하룻동안 여기에 두었는데도 아무도 제 짐에 이걸 사겠다고 목간에 가격을 써 붙이지 않았다는거 아닙니까?"


박경식이 이번에 경강삼방에 만든 경매장들은, 사주인의 집들을 뜯어서 급하게 만든 거라 대단한 시설은 없고 그냥 창고를 짓고 그 앞에서 진행하게 하는 것이다.


경매에 내놓을 예정인 물건들은 경매장 뒤의 창고에 보관하는데, 시간 소요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경매가 진행하기 전에 사람들이 그 창고의 물품들을 살피고 목간에 가격과 이름을 써서 자기가 사려 하는 물건에 달아 놓게 했다.


그래서 본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물건 주인 맘에 드는 가격을 부른 목간이 붙으면 경매 전에 거래를 성사 시키고, 붙지 않으면 본 경매에서 파는 것이다.


지금 고귀지가 가져온 조에 목간이 하나도 안 붙은건 고귀지의 조를 '찜하기'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그야 조를 경매에 팔겠다고 오니까 그렇지. 지금 나라가 모처럼 풍년이 되었는데 누가 굳이 조를 그렇게 급하게 사겠는가? 자네 말고도 조나 쌀을 가져온 사람들이 한 둘인줄 아는가?"


경식이 빙의한지 9개월째. 원 역사 연산 1년의 음력 9월. 조선은 작년의 기근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풍년이었다.


여유가 생긴 사람들은 곡식을 팔기 시작했고, 특히 평안도는 겨울 준비를 위해 목면이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 평안도는 목화 농사가 잘 안되어 목면은 대부분 남부에서 사오는 것이어서 값이 꽤나 비쌌다.


고귀지가 서울로 내려온 것은 평안도에서 거둔 조를 팔아 목면을 사서 평안도로 가져가 다시 팔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풍년이 나니 아무도 딱히 조를 원하지 않았다. 조는 평안도 아니어도 조선 팔도 어디서나 다 넘친다.

올해 초에 기근으로 경기와 충청 일대에서 조 값이 쌀의 3분의 2 까지 뛰었던 것은 다시 평소대로 3분의 1 수준으로 값이 내렸다.


이 지경이면 본경매에 물건을 내놔도 값을 제대로 못 받는다. 고귀지는 더 남쪽으로 가져가서 조를 팔아야 하나 순간 생각했지만 삼남은 서울보다 곡가가 헐하면 헐하지 결코 비싸지 않다.


"그럼 전 어찌합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나? 물건을 제 값 받고 파는건 장사치들 일이고 물건 주인 일이지 내 일인가? 정 안 팔리면 관아에 팔던지. 빨리 물건 빼게."


고귀지는 사촌 동생 돌동이에게 시켜서 경창 쪽에서 관아들이 조 값을 얼마나 쳐주고 있는지 보게 해왔다.


경창에서 관아들이 곡식을 매입하는 것 역시 경매로 곡식을 사고 지폐를 팔고 있었다.


"지폐 1천 전! 값은 조로 받겠소! 조 200석 부터 시작하겠소!"


"조 250석!"


"300석!"


순식간에 조의 값이 1천 전에 300석으로 추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귀지의 표정이 울상이 됐다.


"이래선 품삯을 빼면 평안도에서 파는 거랑 별 차이도 없지 않은가! 이게 무슨 헛수고란 말이냐!"




용산에서 고귀지가 울상으로 눈물 흘리고 있을 때, 서울에서 호조 관원들은 웃으면서 눈물 흘리고 있었다.


작년에 흉년이 들어 난리가 났음에도 올해 동안 국고가 되려 차오르고, 올해는 풍년이 들기까지 했다. 한해 내내의 과로에 대한 보상이 몰려오는듯 했다.


윤은로를 잡고 본격적으로 재개된 지폐 정책.


신료들은 물론 군인, 서리들에게도 지폐로 녹을 주고, 각사는 필요한 물자를 지폐로 경매에서 사게 했다. 전국 화매소 역시 쌀을 고정가로 사는게 아니라 경매로 곡식을 사게 했다.


한강 포구 3방은 물론이요, 각지 화매소에 지폐를 백성에게 빌려주는 정책도 훨씬 크게 재개했다.


폭등하던 돈의 가치는 급격히 하락하여 원래 목표가에 비슷하게 수렴되었다.


특히 왕이 사주인을 때려잡고 한강 포구에 경시들을 설치하고서 호조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지폐로 받는 세금'이 들어왔다는 것도 중요하다.


경매에서의 거래세를 5%(지폐 사용을 장려하려고 지폐로 거래하면 5%, 쌀이나 포목으로 거래하면 10% 로) 매겼더니 벌써 수 십 만전이 들어왔다.


공장세를 지폐로 받다가 왕에게 걸려서 얻어터진 뒤로 다들 눈치보느라 지폐로 세를 받은게 없는 상태였는데 가뭄의 단비 같은 세수였다.


전국 화매소에서도 조, 콩은 거래세를 면제했지만 쌀에 대한 거래는 거래세를 적용했으니, 곧 집계하면 상당한 세입이 있을 것이다.


기근 지역과 비기근 지역의 곡물 가격 차이도 왕이 내린 가격 공개 정책으로 비슷하게 맞춰졌다.


전국 화매소에서 경매에서 거래되는 곡물의 거래 가격을 전부 기록하게 하고, 그걸 서울에서 집계한 다음 인쇄하여 전국에 전국 화매소 별 곡가 추이를 공개하였다.


지금 조선에서 통신 기술이라고 해봤자 파발 정도가 제일 빠른 문제로 한달 정도 늦게 소식이 갔지만, 그것만으로도 상인들을 곡가가 조금이라도 비싼 곳으로 달려가게 만들긴 충분했다.


여전히 배가 닿지 않는 산골이나, 식량 소비가 워낙 많은 서울 등은 곡가가 타 지역보다 갑절은 비쌌으나 교통 수단이 마땅찮은 전근대에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리고 기존의 공납 역시 사주인 박살 사건 때 뜯어고쳐졌다. 이제 각사에 물품 조달 책임자는 사주인을 겸직하던 각사이노들이다.


각사에서 서리, 관노비들을 부려서 한강 포구 3방에서 물건을 사오게 시키는 것이다.

사실, 관헌이 해야할 거 같지만 아직 사대부들은 장사나 흥정 같은 체통 없는 짓을 못한다며 거부해서 이노들이 하게 됐다.

대신 품질 검사는 이제 체아직 관헌이 한다. 품질 미달이거나 시가보다 과하게 비싸게 사와 부정 의혹이 들면 이제 각사이노 책임이다.


이 '시가' 를 집계하기 위해, 기존에 공물로 받던 물품 200 여 종류의 가격 역시 매일 기록하게 하고, 그걸 인쇄해서 전국에 뿌린 것도 물론이다.


이전에는 상인들의 입소문에만 의지하느라, 큰 기근으로 곡식 가격이 10배 정도 등락해야 좀 전국에 알려져서 상인들이 그곳으로 가서 팔았는데, 그에 비하면 지금 조선의 상업 유통망은 폭발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왕이 한 이 개혁들을 실무 단계에서 시행하느라 과로로 다들 쓰러질 뻔했지만 일이 이렇게 성공적으로 돌아가니 웬만해서 눈물이 안 나는 사람들인데도 눈물이 났다.


권지들도 서리로 떨어진 것에 대해 궁시렁 거리면서도 기왕이면 수령으로 승진 가능성이 있는 녹사로 가려고 해서, 실무를 녹사와 체아직들이 많이 감당해내는 덕에 과로도 좀 줄어들었다.


호조에서는 그 기쁜 소식을 계본으로 정리해서 왕에게 올렸다. '돈이란게 이렇게 좋은 줄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재정 절반 손해봤습니다!' 라는 왕의 정책에 대한 찬사도 덤으로 끼어 있었다.


하지만 어째 계본을 받은 왕의 표정이 밝지 않다.


"그래...풍년이라...흠..."


전하, 그러지 마요 제발. 전하께서 그러신다면 불안해진다고요.


왕의 '저 버릇'을 아는 호조가 불안에 떨었다. 지금까지의 통계 상 '저 버릇' 뒤에 쏟아지는 일폭탄은 대체로 자기들 앞으로 특히 많이 떨어졌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흉년이면 재정을 줄이고 검소히 하며 백성들을 쓰지 않았지. 풍년이면 비로소 재정을 원래대로 돌렸고."


"예, 그렇습니다. 올해는 풍년에, 전하께서 만드신 인쇄기로 지폐가 충분히 찍혀 지폐의 값이 헐해지고 백성들이 널리 쓰게 되었습니다.


올해 전조에 대한 지폐세 1600만전이 들어온다면, 지금 곡가로 보아 삼남에서는 쌀을 200만 석 가량 살 수 있으니 경장 이전에 비해 세입이 열 배가 늘어난 것입니다.


백성들이 지폐를 구하고자 하면 구할 수 있으니 지폐세를 당초에 계획한대로 충분히 걷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지 않소. 승지, 이 상소를 읽어주게."


바로 평안도에서 서울로 내려온 상인 고귀지의 상소였다.


모처럼 배를 타고 조를 가져와서 서울에 팔려고 했는데 조 값이 너무 낮아 남는게 없는 지경이니 주상 전하께서 좀 비싸게 사달라는 내용이었다.


박경식은 자신의 워라벨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이런 잡상소는 삼정승 라인에서 컷 시키는게 맞지만 지금 박경식이 신경쓰는 문제와 관련이 있어서 특별히 가져온 것이다.


"이 상소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오?"


"경창에서 경매를 하여 각사에서 곡식을 사주고 있고, 평안도는 특별히 군자곡을 위해 비싸게 값을 치러 사주고 있는데 그 상소가 과연 들어줄만한 것인가 모르겠습니다.


상인이란 물건을 매매할 때 이익을 크게 보는 일이 있듯 때때로 어리석은 선택을 하면 큰 손해를 보기도 하기 마련입니다.


전하께서 시행하신 평준의 법(* 가격공개정책을 말함)으로 전국의 곡가를 나라에 널리 방으로 알리고 있는데도 구태여 서울로 내려 온 것은 구제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건 맞는데, 이 고귀지 말고 다른 백성들 말이오."


"다른 백성이라 함은?"


"지금 소에서도 이르지만, 근래 조의 가격이 어찌 되오?"


호조 관헌들은 이 일년 간 밥 먹고 거의 계산만 하고 살았다. 가장 마지막에 보고된 조 가격을 바탕으로 계산되었다.


"서울에서는 1전에 4두 5승 정도 됩니다."


"그리고 밭에 메기는 지폐세는 1결에 10전이지. 그럼 1결은 조를 팔아 세를 낸다면 얼마의 세를 내게 되는 셈인가?"


"...45두입니다."


"사실 지금 삼남에서는 조가 1전에 6두 정도 되니 60두 정도지. 이전 전조는 어떻게 걷었지?"


"1결에 쌀로는 4두, 조는 6두를 걷었습니다."


"이상하다는 생각 들지 않나?"


"..."


호조 관헌들도 바보가 아니다. 이 정도 산수는 금방 한다. 게다가 매일 같이 전국에서 올라오는 미곡가 가격도 본다. 이 정도 사항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등이 전하께서 내려주신 임무가 너무 막중하여 미처 살피지 못했나이다."


하지만 존나 힘들었단 말이다.


호조는 그간 1년 동안 진짜로 몸이 부서지도록 일했다.


어느 정도인지 벌써 온 조선 사람이 과로에 절어 있는 관헌을 보면 호조구나 하고 알아보는 지경이다.


그들에게 유일한 위안은 조선 개국 이래로 내내 가난했던 재정이 풍족하게 채워지는 모습 뿐이었다.


물론 그들도 마음 깊은데에서는 '흉년인데 국고가 차오르다니 이거 뭔가 이상한데...' 라는 의문이 있었으나 그 누구도 감히 그걸 직접 거론해서 분위기를 깰 수 없었다.


왕이 제시한 화폐 정책에서, 돈의 본질은 빚. 현대 신용화폐 정책과 유사하다.


이제 그렇게 빚을 내서 국용을 조달한 영수증을 지불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세입이 곡물로 환산하니 10배 가까이 뛴 것은 무슨 마법이나 편의적인 치트 같은게 아니다.


마트에 쌓인 소비자 희망 가격이 써 있는 가공 식품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신경 안 쓰고 살지만, 원래 농산물 가격은 풍흉에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하는게 기본이다.


당연하지만 풍년에는 공급이 늘어나니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고, 흉년에는 공급이 주니 농산물 가격이 오른다.


더군다나 이제 올해 초 나라에서 공표한대로 토지세를 지폐로 내야할 때가 다가왔다.


농부들은 지금까지 농산물의 가격 등락 같은거 신경 안 쓰고 살아와서, 그냥 '수확 했으니 이제 팔아서 세금 내야지' 하고 우르르 각지의 화매소에 곡물을 팔러 나와버렸다.


그 결과 급격한 곡물 공급이 발생하고 지폐의 양은 모자라게 되니 농산물의 가격은 폭락했다. 그 결과 농부들에 대한 실질 세율 자체가 폭증한, 그러니까 정말로 세금을 10배 걷게 되버린 것이다.(*1)


사실 박경식이 토지에 지폐로 고정된 액수의 세를 받는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현행 조선의 제도처럼, 돈으로 고정된 액수의 세를 받으면 정부는 농산물의 가격 등락에 따른 위험을 회피하고 안정적인 세입을 확보 가능하다.


반대로 말하면 농민은 그 가격 등락의 피해를 보는 것이지만, 그나마 형평성 있게 풍년에는 농부의 세부담이 커지고 흉년에는 농부의 세부담이 줄어든다.


원래 역사의 조선은 이걸 정확히 반대로 했다.

헌종과 철종 시기에는 도결(都結)이라고 해서 전세를 동전으로 받기 시작했는데, 박경식의 조선과 달리 세액 기준이 쌀이었다.

지방 관아가 동전으로 세금을 받고 그걸로 쌀을 사서 중앙에 납부하는거다.

때문에 1결에 20두의 쌀을 세로 매기면, 흉년에 쌀 값이 오르면 동전으로 받는 세금도 올라가는 식이었다.

저 시대에 백성들이 '이러다 나라 망한다!' 하고 들고 일어난 건 다 이유가 있다.


그에 비하면 박경식의 조선은 훨씬 공정한 세금 제도가 굴러가고 있다고 할 수 있기는 하나, 역시 걱정이었다.


박경식 본인도 몰랐다.

아무리 보릿고개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쫄쫄 굶주리던 조선이지만, 풍년이랑 흉년 때문에 실질 곡가가 한 해 만에 진짜로 10배나 오르락 내리락 할 줄은 몰랐다.

미래에서 배울 때는 대충 많이 오르내린다 정도로만 기억했다.


"특히 문제는 지금 상소문에 올라온 고귀지의 경우처럼 평안도 및 함경도,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5도요."

(* 작 중 시점의 조선에서 함경도는 영안도라는 이름이지만, 미래인의 편의를 위해 함경도로 표기합니다.)


이 중 평안도와 함경도의 양계는 조, 밀, 콩을 2년에 걸쳐 3작 하는 패턴의 농사를 짓는다. 쌀에 비해 잡곡 취급 받는 곡물들이라서 값이 다 낮다.

이걸 팔아서 세를 내야하는 양계 지방 백성들의 세부담은 상대적으로 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황해, 경기, 충청도는 작년에 기근이 들어 나라에서 지폐를 많이 빌려주어 기근을 극복하게 했던 지방.

올해의 곡가 하락으로, 풍년이 든 사람들도 곡물을 지폐로 환산하면 그 빚을 다 갚기가 힘들 것이다.


사실, 농부들에게 세부담이 커진다고 했지만 논이 많고 쌀 농사가 많이 진행 중인 삼남은 걱정이 없다.

쌀은 조보다 3배 이상 값이 비싸니까.


조로 계산하니 세금이 1결에 60두! 라고 꼽줬지만 쌀로 치면 20두 쯤 되려나. 그럼 생산량의 10% 쯤 되는 것이다. 작년에 실농한 것도 아니어서 빚도 없고 말이다.


이 문제도 화폐 조세와 관련이 있다.


최대한 값이 높은 뭔가를 팔아서 돈을 만들어서 세를 내야하니, 사람들은 자연스레 자신의 생산물의 가치를 높히기 위해 노력한다. 조 대신 쌀을 재배한다던가, 상품작물을 재배한다던가 하는 식이다.


그래서 화폐 본위 시장 경제가 자본주의적 발전을 촉진한다...고 하는데...


문제는 화폐로 토지세를 걷는게 조선에서는 완전히 처음이니 그런 걸 준비한 사람이 없다.


지폐를 보자마자 풀로 롱을 친 건 뒷일을 생각 안 하고 사는 상인들이고, 농부들은 상인에 비해 그런게 훨씬 느리다.


상인도 아닌데 해남에서 충청도까지 배 타고 쌀 팔러 온 윤효정과 그 동네 사람들은 엄청나게 행동이 빠른 것이다.


하여간, 지금 저 다섯 도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 자체는 여러가지다.


정신 나간 척 그냥 공짜로 돈을 주거나 빚을 탕감시켜주면 안되냐고? 실제로 신료 중 그런 제안을 한 사람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신용화폐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신용화폐 체제에서는 모든 돈의 본질은 빚이다.


신용화폐는 서로가 무언가를 제공하고 교환하는 매개로 돈을 사용한다는 것을 전재로 존재한다.


그래서 모든 돈의 존재의 근원을 따지면 민간이 지고 있는 빚이거나, 정부가 지고 있는 빚이다.


그래서 돈의 양이 같게 유지되고 있을 때, 정부의 빚이 늘어나게 되는 거래는 민간의 빚이 줄어들게 된다.


지금 조선에 지페가 3000만전 있다면, 정부가 1600만전 빚지고 민간이 1400만전 빚지던지, 정부가 2000만전 민간이 1000만전 빚지던지 해서, 합계하면 조선에 존재하는 돈인 3000만전만큼 반드시 빚이 있어야 한다.


합계가 그보다 낮으면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고, 인플레이션을 발생 시키고 있을 것이다.(*2)


이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화폐 제도에 그런 인플레가 터지면 조선의 화폐 제도는 또 실패로 끝난다.


즉, 화폐 제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5도의 백성들을 가난하지 않게 하려면, 그 5도의 백성들과 무언가 '거래'를 해서 그들에게 돈을 지불해줘야 한다는거다.


여기까지 설명한 왕이 신료들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신기하지 않소? 백성들을 가난하지 않게 하려면 백성들에게서 무언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백성들의 삶을 고달프게하고, 생산을 기피하게 만들던 기존의 조선의 세금 제도는 이제 끝이다.


백성들은 나라에게 무언가를 해줄 때마다 돈을 받을 것이고, 그것은 백성들의 생산 의욕을 올려줄 것이다.


나라는 이 종이 쪼가리 하나로, 백성들을 그렇게 만족스럽게 해주면서도 더욱 많은 것을 받을 수 있다.


화폐로 만들어지는 시장 교환 경제 체제는 모두의 후생을 증가 시키는 것이다.


---


<이하 미주>


*1 : '이건 시장경제 체제로 박경식이 갑작스레 바꿔버린 소설 속 조선에서의 이야기고 현실의 전근대 국가들은 다들 농업이 주 산업이라서 풍년 들면 잘 살고 흉년 들면 못 살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런 '풍년에 되려 가난해지는 농부' 에 대한 이야기는 고대부터 있었습니다. 전국시대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자>의 국축편에서 거의 똑같은 이야기를 다루지요. 이런 현상을 가르키는 숙황熟荒 이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자급자족적 농촌사회를 계속 이상으로 삼고 시장경제의 활용법을 끝까지 알지 못한 조선에서는 계속 낯선 개념이었습니다.


*2 : 해당 내용은 경제학에서는 '본원통화' 라고 부르는, 즉 중앙은행이 발행한 돈만 존재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실제로는 은행의 '신용 창조' 라는 개념 때문에, 중앙은행이 발행한 돈은 3천원인데 시중에 돌아다니는 돈(통화량)은 3만원인 상황이 가능합니다. 다만 작 중 조선은 아직 민간 은행이 없기 때문에 나중에 다룰 소재가 되겠습니다. 여기서 해당 개념을 설명했다간 소설의 흐름을 해치게 될 정도로 설명이 길어져서 단순화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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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아 장사하자 1 +26 24.05.11 17,951 598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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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고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34 24.05.08 22,994 677 13쪽
2 여기가 어디요? 내가 누구요? +41 24.05.08 25,567 70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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