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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공모전참가작

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8 21:00
연재수 :
4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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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61,568

작성
24.05.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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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
글자
20쪽

아 장사하자 2

DUMMY

윤효정의 무식한 질문에 관원의 뱃속에서 '아아, 너희 무식한 시골 선비는 모르는 것인가? 그것은 전량지리(* 錢量之理,인플레이션 내지 화폐수량설을 부르는 작 중 창작용어.)라는 이치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라는 말이 올라오려다 말았다.


'아니, 이 말투는 대체 어디서 시작되어서 호조 관원들이 다 쓰고 있는거지? 나한테까지 옮았잖아.'


관원은 올라오려던 말을 다시 삼키고 제대로 된 설명을 했다.


"나라에서 지폐가 시중에 너무 급하게 풀리면 지폐의 값이 헐해지는 것을 우려해 3달 마다 한번씩으로 나눠 지폐를 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을 보셨다면 각 조창과 부, 목의 주창에 얼마나 지폐가 분급되어서 쌀을 사고 지폐를 파는지 나와있었을 것입니다."


그 정도야 윤효정 네 처가도 보면 안다. 그래서 한 것이 해남에서 제일 가까운데 분급된 돈도 많고 값도 비싸게 쳐주는 공진창으로 온 것이고.


그리고, 그 생각은 윤효정 일가 말고도 전국의 모두가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양호부터 영남까지의 수많은 사선과 선상들이 이 공진창으로 모인 것이지요. 덕분에 공진창은 벌써부터 평년의 세곡보다도 더 많이 미곡을 모았으나 지폐는 이미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장사치들은 이곳 아산에 모여 있군."


관원이 이어 설명했다. 나라에서 이곳 인근 충청도 주민들에게 지폐를 빌려주어, 이렇게 모인 상인들에게 쌀을 살 수 있게 허락했다는 것이다.


"장사치 모리배들은 이미 미곡의 값을 화매소에서 부르는 값보다 비싸게 인근 주민들에게 팔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쌀보다는 주로 조와 콩의 값이 올랐다. 조와 콩은 평시에는 쌀 값의 3분의 1 정도. 그러나 기근 때는 가난한 사람들은 그걸로라도 먹고 사는게 급하다.


또한 돈이 있다한들 3배나 비싼 쌀을 사서 먹기엔 가성비가 부족하니, 조를 집중적으로 사서 조의 가격이 배나 뛰어 쌀의 3분지 2의 가격에 달했다.(콩은 굶주린 사람도 거르는 것이라서 그닥 안 올랐다)(*1)


또한 쌀은 조선 기준으로는 환금성이 높은 일종의 상품작물이요, 지폐법 제정 직전까지만 해도 오승포, 저화와 함께 법정본위화폐 중 하나였다.


지폐법이 제정 된지 몇 달 되지 않아 아직 화폐로써 매력을 잃지 않기도 했다. 화매소에서도 똑같이 한정된 돈이면 기왕이면 가치 있는 쌀을 받고 쟁여두지, 창고 건물도 없는 상태인 공진창(*2)에서 조 따위를 쌓아봤자 관리도 힘들다.


그 말을 듣고서야 윤효정은 처음 본 상인이 왜 자기들에게 쌀을 팔라고 흥정했는지 알았다. 그리고 파는걸 거절하자 '넌 좆됐어' 하는 미소를 보인 이유도.


'이미 인근의 목들도 전부 지폐가 떨어진게로군! 저들은 이 근방 말고 다른 곳에 지폐가 충분한 곳을 파악하고 있고!'


그뿐만이 아니다. 인근의 굶주린 주민들은 쌀을 사기에는 가난하다. 이 근처에서는 이미 장사치들처럼 발품을 판다해도 쌀을 제값을 받고 팔기란 불가할 것이다.


어느 한 편으로는 놀라운 일이다. 일찍이 성종조 시절, 호남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무안과 나주 같은 물산이 풍부한 군현에서 백성들이 스스로 장문(* 장시라고도 부른다)을 만든 일이 있다.

특히 나주의 경우 조를 납부하기 위해 윤효정도 갈 일이 있었고 그 때 나주 장문을 보기도 했다.


윤효정이 서울은 가본 일이 없지만 나주의 그 번화함은 서울에도 지지 않아보였다.(서울 사람들이 와서 본다면 어이가 없어할 생각이지만)그 장문으로 인해, 양계의 상인들이 남도까지 내려와 미곡을 팔았기에 남도의 주민들은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3)


조정도 본디 장문을 금지하려고 했으나 구휼에 도움이 된다며 시책을 바꿔 무안과 나주의 장문은 지금도 이어져 온다.


지금 이 아산의 장사꾼들이 모인 광경은, 비록 나주 장문의 번화함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 이치는 같았다.

아산은 나주처럼 번화한 군현도 아닌 깡촌인데 이리도 장사꾼들이 모이고, 백성들이 미곡을 사서 생계를 잇는 것이다.


'곧 우리 도의 장문에 못지 않은 장시가 이곳에도 열릴지 모르는 일이다.'


하여간, 박경식이 봤다면 윤효정을 바로 스카우트 해갔을지도 모르는 나름대로 날카로운 통찰은 윤효정의 머릿 속에서 다시 뒷전으로 물러가야 했다.


"그래서 나리, 이 쌀들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하고 막쇠가 딴지를 걸었기 때문이다.


"막쇠야, 내가 방금 말했지만 선비는 이익를 좇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의리를 좇는 것이다."


윤효정은 자신이 선비임을 강조하며 맹자의 구절을 인용했다.


"그래서요? 이 쌀을 다 처분 못하면 어디 집안에서 식충이 사위라고 쫒겨나기 밖에 더 하겠습니까?"


하지만 정씨네 집안에서 짬바는 막쇠가 더 길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노비가...말대꾸?!' 라고 생각할법한 소리를 막쇠가 윤효정에게 막 던질 수 있는 이유다.


"주인(아니다. 사실 막쇠의 진짜 주인은 윤효정의 장인인 정귀영이다.)한테 못하는 말이 없구나. 내가 이 쌀을 크게 쓸 것이다. 백성들을 구하는건 장사치 모리배가 아니라 사대부라는걸 보여줘야지."


그러고는 노비들에게 모이라 하고 한가지 명령을 내렸다.


"너희는 지금부터 이렇게 소문 내거라..."


---


현대적인 관점으로 말하자면, 조선의 본위화폐는 쌀, 포목, 법화(전기에는 저화, 후기에는 상평통보) 세 종류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쌀과 포목이 거래수단이라고 해서 그냥 물물교환 경제 아닌가 생각하기 쉽지만, 쌀과 포목은 단순히 현물로써 가치만이 아니라 법적으로 인정되는 가치가 존재했으며 세금으로도 받았으며 부의 축적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고 광범위하게 유통수단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현물로 보면 곤란하다.(*4)


물론 이게 잘 돌아갔다는건 아니고, 정부기관에서부터 민간까지 모두 다 함께 저 세 종류의 화폐의 시세차를 이용한 이익을 남기려고 환치기를 마구 해대는 환장할 사태가 상시적으로 일어났다.


그 제로섬 게임의 결과, 다 같이 거지가 되고 재정은 개판이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고, 개항기에는 안 그래도 당백전으로 재정이 개판이었는데, 영국산 면포가 들어와 면포의 가격이 폭락해서 면포로 받던 세금들의 가치가 증발하여 재정이 또 박살나기도 했다.

화폐정책이란 무릇 이렇게 중요하다.


하여간, 지금 박경식이 바꾼 조선에서는 지폐 하나만을 두고 본다면 심각한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는 중이다.

세금으로 내는 것이 정해져 있는 지폐의 액수만 해도 1600만전인데, 그만큼의 공급은 없기 때문에 치열한 지폐 확보 경쟁이 이미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또한 지금 관에서 지폐로 바꿔주는 물건은 거의 쌀 뿐이다.

박경식이 쌀값은 절목에 정해서 써놨지만 조랑 콩은 대충 관에서 시가에 따라 교환하라고 해버린게 원인이다.

경식이 미래에서 '만주에서도 쌀 농사 짓는 쌀에 미친 민족 ㅎㄷㄷ' 같은 인터넷 밈으로 역사를 배우는 바람에 생긴 고정관념 덕에 대충 질러버린 것이다.


그러니 현장의 화매소들은 다들 가치가 높은 쌀을 받으려하지 조나 콩은 안 받았다.


하지만 조선은 전기, 후기는 물론이고 일제시대까지도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은 조다. 더군다나 지금은 논과 이모작도 그닥 보급이 안된 전기. 사실상 전국민 과반이 조가 주식이다.


게다가 수라상에는 원래 쌀밥만 올라오고, 호조 관원들이 걱정하며 주로 보고하는 것도 쌀값이지 조 값은 얘기 잘 안 한다.

기껏해야 양계는 쌀이 흔치 않으니 조로 받고 있다 정도의 보고를 할 뿐이다. 현지 사정을 모르고 구중궁궐에 갇혀 있는 이세계 용사의 정책이란게 이 모양이다.


관료들이 경식의 그런 빵꾸가 뚫린 절목을 지적하지 않고 넘어간 것은 지폐법을 삼남에서 쌀 뜯어서 국고 채우기용 정책으로 인식한게 크다. 태종 시절 못 이룬 유훈이라고 이방원 이름을 자꾸 팔아서 신료들을 설득한 경식이 나쁘다.




그런 이유로, 지금 조선 전역에서는 지폐의 가치만이 아닌 쌀값도 폭등 중이다. 유일하게 지폐로 바꿀 수 있으니까.


아산 공진창에서 쌀값이 내리고 조의 값이 오른건, 화매소의 매입이 일시정지 되었기 때문일뿐, 쌀은 여전히 잠재적으로 지금 제일 공급이 부족한 재화인 지폐로 태환 가능한 고가치 상품이다.


지금 아산에는 공진창에서의 쌀 매입이 재개되기를 존버하는 쌀트코인 보유자 상인들과, 그냥 경창 등 다른 조창으로 이동해서 쌀을 팔아야하는지 고민하는 상인들, 그리고 이미 공진창을 손절하고 탈출하는 상인들이 교차 중이었다.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과 기대를 접는 사람들이 교차하는 가운데에 두 종류의 소문이 함께 퍼졌다.


"지금 나라에 지폐가 너무 부족해서, 전세 대신 지폐세를 받는다는건 무르고 그냥 쌀로도 받는다고 하는군!"


"아니, 나는 나라에서 지폐가 지금 충분히 찍혀서 아산으로 오고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 조선의 전례를 되짚어본다면 전자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는게 합리적이다.

지금 서울에서 왕이 미래지식 치트 용사로써 힘을 대거 각성하여 지폐를 마구 찍어내 신료들이 '우리 주상 전하 쩔어엇!!!' 하고 찬송 중인 상황이라는 것을 모르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사람들은 각자 기대하는 것에 따라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편이다.


그리고 누가 어떤 소문을 믿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전자와 후자 중 어느 소문을 믿건, 쌀을 사야할 동인이 커졌다. 전자라면 지폐의 가치 떡락 회피를 위해, 후자를 믿는다면 지폐로 바꾸기 위해.


사실 이제 다시 생각해보니, 화폐 정책을 할 때마다 말아먹던 나라인 조선에서 뭘 믿고 갑자기 귀신에 홀린 듯 지폐를 막 사들이려고 했는지 의문이 드는거 같다.

전자를 믿는 상인들은 지폐에 숏 배팅을 풀로 치기로 했다.




마침 쌀을 가지고 있는 윤효정에게 상인들이 다가왔다.


"헤헤, 나리. 어차피 쌀을 팔아서 지폐를 사러 오신 것이 아닙니까? 저희가 1두에 지폐 1전 5문에 사드릴테니..."


"조 4두."


"예?"


"조 4두. 쌀 1두에 조 4두로 합시다."


"평시에도 쌀 1두에 조 3두 정도인데 흉년에 어떻게 4두 씩이나 드린단 말입니까? 지폐 1전 5문으로 합시다."


"조 4두."


"...조 2두 5승 어떻습니까?"


"조 4두."


"말도 안돼...조 3두."


"4두."


"미치겠군. 알겠습니다. 4두로 드리지요."


"좋아, 고맙네! 4두!"




곧 윤효정의 배에 쌀이 싹 사라지고 조가 가득 실렸다. 부피가 4배로 느는 바람에 배에 다 싣지도 못해서 포구 근처 모래사장에 조를 하역해놔야 했다.


"아이고, 나리! 배에 싣지도 못하는데 조를 그렇게 많이 사서 뭘 합니까! 우리가 굶주리는 집도 아니고! 우린 이제 주인 마님한테 죽었습니다!"


"호들갑 떨지 마라 막쇠야. 내가 다 계획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방법이 뭔가 듣자하니, 인근 마을을 돌며 조를 굶주린 백성들에게 지폐를 받고 팔아오라는 것.


빨리 이 산더미 같은 조를 내다팔고 집으로 가고 싶었던 노비들이 조를 열심히 짊어지고 팔고 다니자 막상 인근 주민들의 반응은 쎄하다.


"이미 입에 풀칠할 정도의 조는 샀는데, 평시보다 갑절이나 비싸게 또 조를 사란 말이오? 이미 나라에 빚을 많이 져서 내년이 걱정이오."


아산 인근의 마을과 현들은 이미 조 정도는 최소한의 공급이 되었고, 주민들의 구매력은 떨어진 상태. 더 조를 팔아봤자 가격이 폭락해 손해를 볼 뿐이다.


더군다나 소문대로라면(윤효정이 퍼트린 헛소문이지만) 지폐의 가격이 떡락할 가능성이 커진 상태인데, 이 인근 주민들이 지불할 수 있는건 이제 지폐 뿐이다.

상인들이 조 가격을 후려쳐 사는 윤효정에게 조를 급하게라도 판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겠습니까? 나리?" 막쇠가 물었다.


"내가 계속 말하지 않았느냐? 선비는 이익이 아니라 의를 말한다고."


"아는 구절이 그뿐인거 아닙니까? 생원시도 못 붙으셔서 사실 선비라기에도 영..."


"어허, 곧 붙을 것이다!"


윤효정의 선택은 정말 가난하여 조도 못 구한 이들에게도 조를 절반 가격으로 팔고, 내년에 뿌릴 씨앗도 먹어버려서 미래가 없는 백성들에게도 싸게 파는 것이었다.


특급할인으로 조를 파는 윤효정 일가에게 곳곳마다 백성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했다. 아산 인근의 조의 가격은 평년처럼 쌀의 3분의 1 가격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윤효정의 일가에게는 지폐가 남았다. 원래 가지고 있던 쌀을 그대로 관아에 팔았을 때보다 더 많을 액수가.


사실 풍흉으로 곡가가 열배씩 오르내리는 전근대 기준으로는 그 고생을 한 것에 비해 큰 마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 이득이었다.


"오오, 나리! 나리가 장사에도 수완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게 무엇이 대단하다고 그러느냐. 원래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익도 따르는 법이다."


사실 이런 수완은 윤효정이 혼자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윤효정의 처가에서는 이전부터 풍년에 쌀 값이 내리면 포목으로 쌀을 사서 쟁여두고, 춘궁기나 흉년에 쌀을 팔았다.

곡가를 비교적 안정 시키면서도 이득은 챙기는 수완을 대대로 반복한 결과 해남의 대부호가 된 집안이 바로 해남 정씨 댁이었다.


이 정도 장사는 사대부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일. 윤효정은 사대부로써도 자신에게 당당할 일을 했고, 처가와 이웃들에게도 당당하게 내세울 일을 해낸 것이다.




"이토록 의로운 선비가 해남 시골에 은거해 있다니! 흉년으로 굶주린 충청도의 주민들을 먹이니 애민이요, 주상 전하가 백성들을 보살피려 핀 정책인 지폐의 법을 따르셨으니 충국이외다!"


화매소 관원도 윤효정의 손을 맞잡아가며 찬사했다.


"또한 나라가 시골에 은거한 선비들을 널리 찾아 쓰기 위해 과거의 법을 경장하여 추거의 법을 준비하고 있는데, 윤 생원이라면 분명 나라에서 크게 쓸 것이오!


윤 생원 같이 의로운 선비라면 나아가시려만 한다면 분명 해남 유향소에서도 추거하겠지. 꼭 출사하시어 청사에 이름을 남기시오!"


라고 곧 바뀔 법에 대해서도 귀띔을 해주기 까지 했다. 이건 원래 군국의 기무라 말하면 안되는데 라는 너스레도 덧붙여서 말이다.




윤효정은 정말 기분 좋게 아산에서 철수하여 해남을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막쇠가 또 딴지를 걸기 직전까지는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나리, 아까 관원이 말한 추거법 말입니다. 듣자하니 생원이랑 진사를 유향소에서 뽑아 벼슬살이로 보낸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 그런데?"


"하지만 나리, 생원시도 못 붙은 글공부 허접이지 않습니까. 그 추거라는 걸로도 벼슬 못 나가시는게..."


딱!


"아악! 왜 때립니까!'


"곧 붙을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네가 아산에 온 뒤로 참 말이 많구나."


막쇠에게 참교육을 실천해줘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윤효정의 기분은 여전히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나저나 추거의 법이라!'


선왕이 승하하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부터 조선 팔도를 뒤집어 놓은 지폐의 법이며, 듣도보도 못한 추거의 법까지.


비록 시골이라고 하나, 해남도 나름 간간이 서울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있다.


처음 새 주상에 대해 내려온 소식은 간언을 싫어하시어 대간들을 쫓아낸 난폭한 걸주 같은 왕이라는 것.


'그러나 그게 다인가? 정말로 간언을 미워하시기만 한다면 왜 추거의 법 같은걸 만드신다는 말인가?'


그리고 지폐의 법 역시, 화매소 관원이 말하기를 경기, 황해, 충청의 실농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함이라고 하지 않는가.


사실 자기네 집안도, 이 화폐의 법이 없었으면 굳이 이 먼 충청도까지 와서 쌀을 팔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것저것 모략을 해낸 결과 충청의 백성들을 구휼 할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정말로 걸주라면 백성의 삶을 이렇게 보살피려 하겠는가?'


윤효정은 서울의 일이 궁금해졌다.


"돌아가면 글공부를 정말 제대로 해서 생원시에 붙을 것이다. 사내 대장부로 태어났으면 그 정도는 해야하지 않겠느냐."


막쇠는 이번에도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방금 처맞기도 했고 이번엔 진지하게 말하는거 같아서 입다물기로 했다.


---

<이하 미주>

*1 : 이러한 것을 경제학에서는 기펜재(Giffen's goods)라고 부릅니다. 가격이 오르는데도 수요도 상승하는 특이한 현상을 보이는 재화지요. 일반적인 재화는 사람들의 소득이 상승할 때 수요도 증가하고 가격이 늘어납니다. 이것을 정상재라고 합니다. 일부 재화는 사람들이 소득이 증가하면 수요가 감소하여 가격이 더 내려가는데, 이것은 열등재라고 부릅니다. 쌀과 조가 함께 있으면, 사람들은 돈이 충분하면 쌀을 먹으려 하기 때문에 조는 열등재가 되죠. 사치재의 경우도 가격이 오를 때 소비가 늘어나기는 하는데, 기펜재는 사치재가 아니라 열등재임에도 가격이 상승하는데 수요가 늘어나기 때문에 특이합니다. 기펜재가 그런 현상을 보이는 것은 본문에서 묘사한대로 사람들이 '가성비'를 더 챙기기 때문으로, 개도국처럼 극히 빈곤한 상태에서 사람들의 실질소득이 기근 등으로 또 감소했을 때 식량 같은 필수적인 재화의 경우 나타납니다. 전근대에는 기근 시에 자주 발생한 현상으로 추정되며, 현대에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중국 극빈층에서 밀, 조 등이 기펜재가 된 것이 관찰된 사례가 있습니다.


*2 : 조운 체계는 조선 전기 내내 계속해서 정비를 시도했으나, 성종 시대에도 각 지역의 조창이 창고 건물도 안 지어진 상태로 포구 가에 세곡을 노적하여 쌓아둘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습니다. 작 중 묘사된 공진창의 경우 1523년(중종 18년)에야 80칸의 창고 건물이 지어집니다. 성종 시대면 이미 조운선들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상태였다는걸 생각하면 조선의 조운 제도는 단 한번도 FM 대로 돌아간 적이 없던 셈이지요.


*3 : 조선왕조실록에서 처음으로 장시에 대해 언급되는 것은 성종 3년 7월의 일입니다. 당시에는 조선 사대부들의 흔한 인식대로 모리배들이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봤죠. 하지만 성종 4년에 본문에 설명한대로 일부 사대부들이 장시가 구휼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특히 신숙주는 이것을 지방에 시장을 만들어 화폐를 유통시킬 천년의 기회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연산군 시대를 지나 중종 시대가 되면 전국에 장시가 없는 곳이 없다고 할 정도가 됩니다. 본작이 연산군 시대로 설정된 것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의 분기점 같은 곳이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4 : 흔히 저화나 동전의 유통 실패가 조선 전기의 상업이 발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말하지만, 근래에 나온 학설 중 몇몇은 그러한 견해를 반대합니다. 오승포 등의 포화(布貨)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물물교환'이 아니라 그 자체로 화폐로써 기능하고 있었으며, 조선 전기에 나름대로 발전한 상업 상태에 조응하여 나타난 민간화폐라는 것이지요. 본작에서 제시되는 화폐 정책의 이야기는, 이러한 견해들의 연장에서 '만약 조선의 화폐 정책이 상업 미발달 때문이 아니라, 부적절한 정책 때문이라면, 반대로 적절한 정책 하에서는 화폐를 초기에 성공적으로 도입하고 상업을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대체역사적 상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박평식. (2012). 조선초기(朝鮮初期)의 화폐정책(貨幣政策)과 포화유통(布貨流通). 동방학지, 158(0), 81-141.><유현재. (2009). 조선 초기 화폐 유통의 과정과 그 성격 -저화 유통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49(0), 6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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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위(侍衛) 시위(示威) +34 24.05.08 20,143 689 13쪽
4 대간이 대듦 +28 24.05.08 21,381 671 13쪽
3 사고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34 24.05.08 23,015 678 13쪽
2 여기가 어디요? 내가 누구요? +41 24.05.08 25,589 701 15쪽
1 프롤로그 : 수상할 정도로 까다로운 교수님 +73 24.05.08 28,659 75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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