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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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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8 21:00
연재수 :
49 회
조회수 :
670,628
추천수 :
26,747
글자수 :
461,568

작성
24.05.20 18:00
조회
14,293
추천
581
글자
22쪽

호조야 지금 너만 힘든줄 아냐 다들 힘들어

DUMMY

호조 관헌들은 지금 조선 팔도에서 자기들이 제일 격무에 시달린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주 틀린건 아니다. 벌써 서울에서는 일에 찌들어서 피로해보이는 관헌이 있으면 호조라고 할 정도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다른 육조도 딱히 편한 건 아니었다.




이조는 왕이 대간을 내치고 대신 만든다는 추거의 법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왕이 내린 추거법과 그 절목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선거인 명부, 선거구 등 부터 만들어야 했다.


사실 아예 기반이 없는건 아니다. 선거인명부는 재지사족들의 명부인 향안(鄕案)이 있고 지방의회는 향회(鄕會)가 있다.


애초에 의회제 비슷한걸 만들 수 있겠다고 박경식이 판단한 것 자체가 저것들을 변형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절목에도 그걸 고려한 조항이 잘 쓰여 있다.


그러나 그걸 중앙에서 죄다 취합해서 재정리하는건 이야기가 다르다.


더군다나 향안과 향회가 잘 정비된 것은 삼남 지방 내륙에 있는 대읍(大邑)들의 이야기다.


해양과는 담쌓고 살아온 조선은 해안의 읍들에는 이렇달만한 사족이 없고, 북부의 양계 지방은 반 쯤 우가우가 여진족들의 동네라 재지사족 같은 것도 없다.


그걸 지적하자 임금이 노발대발이다.


"지금 '태조께서 나신 땅'을 '야인들의 땅' 이라고 한 것인가????"


'양계에는 사족이 없다'는 건 조선 내내 언급되는 팩트지만, 지금 왕 앞에서는 '솔직히 이성계가 선비는 아니었죠' 라고 말했다간 참신한 자살법이었다고 실록에 남을거 같아서 도저히 대답할 수 없었다.


'사족이 없으면 백성들을 모아서 권점을 하면 될 것을' 이라는 막무가내식으로 향회를 없으면 만들라는 요구에 이조에는 또 일이 추가로 발생했다.


꼭 막무가내까지는 아니고, 향회가 없는 곳에 향회를 만드는 절목도 왕은 또 뚝딱 꺼내들었다.


기존에 쓰였던 오가작통이나, 아직 정비가 진행 중인 면리제(面里制) 조직을 활용해서 선거단위로 삼아서 향원을 뽑는 것이다.(*1)


'아니 전하! 이론은 좋은데 이거 직접 해야하는건 다 백관들입니다!'


'그래서? 꼬우면 니가 왕하던가.'


결국 올해 초에 왕이 던진 '지금이 농한기니까 지금 빨리 만들면 되겠네' 라는 막무가내 요구는 실현하지 못했다.


그래서 왕이 쫓아냈던 대간들 중 일부 소신은 약하고 눈치는 빠른 인원들이 좀 복귀했다. 왕이 윤은로를 죽일 때 방패로 활용한 이들이 이 전직 대간들이었다.


이조 판서 이극돈은 머리를 싸매면서 왕이 내린 절목의 요체를 살펴봤다.


'향회에서 권점하여 추거인을 선택한다. 추거인은 부에서는 4인, 목에서는 3인, 군에서는 2인, 현에서는 1인을 뽑는다. 추거인들은 추거일에 각 도의 감영에 모여...'


처음 절목을 봤을 때부터 생각한건데, 이상할 정도로 상세하다. 꼭 어디서 이런 법을 배우고 그대로 적용하는듯 했다.


대체 이 젊은 왕이 이런걸 어디서 알았단 말인가? 말하기로는 한나라의 현량방정과의 제도를 따왔다고 하는데, 비슷한 점이 있는거 같긴 한데, 추거인들을 뽑아 권점을 또 하게 한다니 현량과와 또 달랐다.


더군다나 지금 왕이 야심차게 밀어붙이고 있는 지폐의 법도, 그 어떤 과거의 법을 상고해서 만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관헌들은 무슨 원리인지도 대부분 이해를 못할 정도였는데, 잘 굴러가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했다.

(사실 신용화폐는 현대인들도 본원통화네 공개시장 조작이네 하는거 들어도 잘 이해 못한다.)


왕한테 이런걸 어떻게 생각했냐고 물어도 '경세(* 經世 : 세상을 다스림)의 이치에 트이면 다 알게 되어 있네' 라는 개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당신 경세한지 1년도 안됐잖아.


이극돈은 윤은로가 잡혀 갈 때 대신들끼리 모여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지금 주상은 태종대왕을 닮았네!'


태종이란 묘호는 무엇인가. 나라를 세운 태조에 버금가며 새로 세워진 나라의 기틀을 다진 임금들에게 붙는 묘호다.


지금 임금의 경장은 마치 나라를 기틀부터 새로 새우려는듯 했다.




예조는 관리들과 각사이노들의 교육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내 살피건데, 관리들이 사대부인데 수를 알지 못하고(* 사대부의 교양인 육예(六藝)에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가 있는데 이 중 수를 못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각사이노들은 서산을 알지 못하니 호조의 일이 극히 무겁다. 예조는 이에 대한 대책을 논하라."


'그거 그냥 전하가 너무 경장을 빨리 밀어붙여서...' 라고 할 뻔 했다.


그러니까 호조의 일이 폭증했는데 실무진이 부족하다는 소리다.


아예 손 놓고 있던 건 아니다. 조선은 원래 과거 합격자에 비해 관리 자리가 부족해서 인사 적체가 심했다.


그래서 체아직(遞兒職)이라고 해서, 관직 가능자들에게 체면 채워주려고 로테이션 돌리는 임시직까지 있다.


일손 부족에 대한 1차적 대책이 바로 이 체아직 로테이션 하던 관리들을 풀로 땡겨서 호조에서 일 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로테이션을 안 하고 계속 일하니 정규직이 된 기분이라 체아직들은 의외로 좋아했다.


2차 대책은 관직 등용 대기자들을 땡겨오는 것이었다. 과거 합격자 중 상당 수는 권지(權知)라고 해서 예비 관원으로 책 정리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게 보통이었다.


문제는 실무능력이다. 잘 알려져 있지만, 조선 사대부들은 실무 기술과 지식은 잡학이라고 천시했다.

그리고 딱 지금이 그런 천시가 제일 심할 때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연산군에게 부관참시 당하는 김종직도, 생전에 세조에게 왜 사대부한테 잡학이나 배우게 하냐고 대들었다가 짤렸다.


그래서, 이 권지들은 실무 능력이 거의 없다.

열 받은 경식은 권지들을 그냥 호조 서리로 처넣고 알아서 배우게 했다.


임시적인 땜빵은 이걸로 대충 가능했다.

하지만 체아직이 아무리 임시직 관헌이라고 하나, 이들이 겨우 서리가 하는 일에 동원되는 건 인재 낭비다.


문제는 실무 능력이 있는 하급 서리들의 수급이다.


원래 교육은 예조의 담당. 특히 법률에 대해 아는 서리를 뽑은 율학(律學)과 회계에 대해 아는 산학(算學)의 취재(取才)가 예조의 담당이다.


경식은 조선 전기 역사를 잘 몰라서 하급 서리들도 시험으로 뽑는줄 몰랐는데 와보니까 취재라는 시험이 있었다.


문제는 이 취재를 향한 교육과 양성 과정이 따로 없이 해당 관서에서 직접 교육하는 방식, 혹은 그냥 개인이 알아서 하는 것(보통 세습적 교육)이라는 점이다.


서리 후보생을 뽑는 기준도 능력이 아니라, 지방 향교에서 나이가 많은데도 제대로 성과를 못낸 교생을 강제로 차출해서 시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실무 능력은 커녕 글도 못쓰는 인간만 올라온다. 진짜로 글을 모른다.


원래 의도는 '서울로 끌려가서 강제노동하기 싫으면 알지? 처신 잘하라고' 겠지만 성공적이지도 않았고 서울에 짐덩이만 늘어나는 정책이었다.


그래서 각사에서는 다들 서리를 안 쓰고, 그냥 서리로 징발된 사람들에게는 포를 받고 돌려보낸 후, 그 포로 서원(書員)을 고용해서 일을 시킨다.

문제는 이들이 바로 사주인 계층 출신이라는 것이랑, 근래는 취재도 안 보고 뽑는게 보통이란 것이다.


윤은로네 노비 말똥이의 예시 같이, 권세가들은 자기 네 집 노비에게 글을 가르쳐서 서원으로 부리기도 했다.

그게 '부업'이 되기도 하고.


서원 급여가 짜거나 없고(각사는 서리에게 포를 받고서 삥땅 친 후 서원에게 준다), 딱히 승진하거나 양반으로 편입될 가망도 없고, 시험도 안보니 서원들이 일에 전념할리가 없다.


각사이노가 사주인으로 투잡을 뛰며 해처먹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런 사정이라 취재 제도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실무진인 서리는 시험 안 보고 그냥 세습으로 때웠음' 이라고 알려져 있는건, 실상이랑 아주 다르지는 않다.


왕명에 예조에서 내놓은 해결책은 원래 역사에서 이 무렵에 내놓은 해결책이랑 똑같았다.


"각사에서 서원을 쓰지 말고 지방에서 올리는 서리를 쓰게 하는 것이..."


왕의 눈이 분노로 휘번뜩이는 것 같았다.

사실 원래 역사에서 저 개혁안을 들은 중종도 '그게 효과가 있겠냐?' 라고 대답할 정도로 한심한 안이기도 했다.(*2)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모른다고 말하고 하면 왕이 새 경장을 하겠다고 뭐라도 내놓는 편이기 때문에 그냥 모른다고 하고 왕이 시키는대로 하기로 했다.


"흠...취재에서 시험하는 내용이 어떠한가?"


그래서 취재에 쓰이는 책들을 싹 다 가져왔더니 왕이 좀 뒤적거리더니


"내가 대책을 생각해볼테니 물러가라."


라고 한다.


얻어터지는걸 피하고 일폭탄이 터지는걸 기다리게 됐지만 어쩔 수 있는가.




'이게 바로 조선의 실무 지식인가!'


대명률과 경국대전 같은 법전, 보고서 양식, 관아 간의 협조문 양식, 영수증 양식, 계산술, 한자 정자체, 한글, 사서삼경 등등...


조선을 공자 왈 맹자 왈만 배우던 나라로 생각했던 편견이 좀 깨지는 것 같았다. 꽤나 흥미로웠다.


'하지만 21세기랑 비교하면...상급 서리인 녹사들이 배우는 것도 대충 고등학교 1학년 까지 수준인가?'


녹사들은 말이 서리지 실권은 2품급 관헌들이랑 비슷한 상당히 높은 직급이다.


잘하면 취재를 보고 수령으로 보내질 정도니, 현대적으로 비유하면 3~4급 공무원 정도 되는 라인이다.


이 정도 품계도 현대에서 배우는 교육 과정이랑 비교하면 고등학교 수준 교육에서 마치는 셈이다.


대충 가늠해보니, 16살 정도에 졸업 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4년 정도 잡고 12살부터 교육 시키면 녹사 정도는 가능한 인재가 양산 가능할 거 같다.


현대와 교육 수준 차이가 이 정도로 차이 나는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중세~근세 서유럽에서도 16~17살 쯤이면 법대 졸업해서 변호사 하고 그랬다.

더 가까이는 한국도 50년대에는 고등학생이면 지식인 취급이어서 학생 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이기도 했다.


그 실행을 위해, 현행 조선 교육 제도를 검토해봤다.


조선은 학문을 숭상하는 성리학 국가이면서 정작 제도적인 국민 교육은 부실한 나라다.

조선이 전쟁광 독일 제국을 봤다면 오랑캐라고 까겠지만 정작 국민 교육은 독일 제국이 더 잘한 것이야말로 세상의 모순이라 할만하다.

사실 독일 제국도 전쟁을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자기가 전쟁 내고 지는 걸 반복했으니 조선과 비슷하게 모순적인 나라이긴 하다.


현재 조선의 국립교육기관인 향교의 경우, 16살 이하는 동몽이라고 해서 정원을 따로 안 정하고 입학을 받는다.


하지만 16살이 넘고 40살 미만의 교생에 대해서는 군현별로 차등을 두어서 인원수를 제한한다.


저 16살 이상 40살 미만인데 향교의 교생이면 군역이 면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향교에 밥벌레들이 가득차게 된 이유가 나온다.


과거 합격자들이 다들 중앙에서 관리나 최소한 수령을 하려하지 향교 훈도로는 안 가려고 하니 향교의 교육능력은 마구 쇠락 중이고, 그냥 상민들의 병역회피용으로 채워지는 중이었다.


병역기피자를 위해 남겨두기에는 쌀이 아깝다.


현행 제도가 향교에 입학해놓고 소과도 붙을 기미가 없는 놈을 차출해서 서리로 쓰는거니, 그걸 약간 변형하면 신료들도 납득하겠지.




왕이 웬일로 향교에 대한 경장안을 내놓는다길래 예조는 '드디어 주상께서 학문에 관심을 가지시는구나!' 하고 설레였다.


그런데 웬걸.


"향교를 혁파한다."


라는거 아닌가.


순간 예조 관원들은 자기 귀가 이상한건가, 아니면 왕이 혁파라는 단어 뜻을 모르는건가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왕이 혁파란 말을 너무 시도 때도 없이 하긴 했다.

'혁명' 이나 '투쟁'이라는 말도 너무 자주 쓰면 '아, 쟤들은 저 단어를 저런 의미로 쓰는구나'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왕의 말이 이어져서, 둘 다 아닌게 확실해졌다.


"근래 향교는 그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훈도는 1경도 모르는자가 군역을 피하기 위해 머물고 있으며, 교생은 글을 모르는자가 역을 피하기 위해 교적에 이름만 올리고 있다.

이에 군,현의 향교를 혁파한다."


예조는 말리고는 싶었는데 다 팩트라서 반박할 말이 안 떠올랐다.

저 문제는 근래도 아니고 세종 시절부터 반복된 문제고, 유교적 성군이라는 성종 시절에도 딱히 시정되지 않았다.


박경식의 해결안은 선택과 집중이었다.


군, 현은 말이 좋아 군현이지 사실 인구가 1천도 안되는 개깡촌이 한둘이 아니다.


중세 서유럽의 도시라면 1천 정도면 꽤 발전한거지만, 조선은 도시 사회가 발전한 나라도 아니다.

저런 군현은 읍성 내에도 백 수 십 명 정도가 살고, 그 근처에 백 수 십 명 규모의 작은 취락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풍경이 대부분이다.


이런 곳에 교육하겠다고 다른 곳이랑 똑같은 학제의 향교 세워서 훈도 달랑 하나 보내도 효과가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군현급의 향교에 대해서는 목표치를 낮춘다.

12살 이하의 애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서당 수준으로 내린다. 글은 소학까지, 덤으로 기초적인 산술 정도만 가르친다.

느그들 이름은 이제 학당이다.


원래 역사에서는 이런 걸 하는 건 서당인데, 사림의 성장이 본격화 되어서 서당 생기려면 수십년은 남아서 서당도 제대로 없다.


담당자는 문과 급제자 보낼 필요 없다. 어차피 다들 안 가려고 하니까. 현행 제도도 마침 그냥 그 동네에서 생원이나 진사 뽑아서 향교 훈도 시키는 것이니 그대로 냅둔다.


그리고 부목 급 군현에 '집중'한다.


군현의 학당에서 좀 똘똘한 놈들을 올리는 중등학교다.


여기서는 교육 과정을 경학에만 치중하지 않고, 제술(* 製述 : 위에서 말한 보고서, 공문 양식 작성 요령)과 서산(* 書算 : 위에서 말한 계산과 한문 한글의 정자체.), 율학, 무학, 악학(* 음악.), 농학을 넣는다.


이 정도 수준의 교육 시절을 전국에 올리려면, 지금 조선은 돈도 없고 남을 교육 시킬 수 있는 고급 인력도 부족하고 시간도 없다.

그러니까 부, 목 수준의 도시에만 세운다.


그리고 각 과목에서 점수를 따져서, 2년 정도 경과를 보고, 경학에 싹수 있으면 성균관에 넣고, 무학에 싹수 있으면 훈련원에 넣고, 둘 다 싹수 없으면 제술, 서산, 율학을 가르쳐서 녹사나 서리로 넣는다.


전부 안되면 고향 돌아가서 농사라도 잘 지어야지. 조선에선 원래 천하지대본이 농사다.


음악은 왜 있냐고? 신료들한테 장단 좀 맞추려고 사대부의 교양 육예를 따온 거다.

그리고 안 그래도 심심한 시대인데 뭐라도 컨텐츠 있으면 좋잖아.


현행 제도랑 달리 잘 하는게 없는 수준, 글도 못 읽는 수준이면 그냥 짜른다.


징발 따윈 안한다. 서리는 앞으로는 월급제다. 조선은 몸 비틀며 돈 안 쓰겠다고 다 징발로 때우지만, 인력 양성 커리큘럼 있어봤자 돈 안 준다고 하면 사람 안 모인다.


돈은...뭐, 애초에 돈 때문에 호조 확 늘이려고 이러는건데 어떻게 되겠지.


예조 판서 성현이 딴지를 걸었다.


"전하! 이렇게 되면 향교가 한낱 서리바치들을 키우는 곳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역시 조선 사대부라서 그런지 음악이랑 농학에 대해서는 딴지를 안 거는군.(*3)


"지금도 선상서리(* 위에서 말한 지방의 교생을 서리로 징발하는 것.)들을 향교에서 구하고 있지 않은가. 뭐가 문제인가."


내가 미래에서 보고 왔는데 향교는 어차피 망해서 서원에 밀려. 어차피 망할거 이런거에라도 써야지.




물론 이래도, 지금 당장 급한 실무진을 채우기에는 시간이 한창 걸린다.


그래서, 오직 대한민국 국군 출신 미래 용사만 쓸 수 있는 지식 치트를 활용하기로 했다.


군대에서 자격증 따면 휴가 주잖아.


16개월 마다 2개월 씩 번상해야하는 의무를, 2개월 동안 글을 배워서 시험에 통과하면 다음 번상까지 채운걸로 쳐주기로 했다.(*4)


최대 3번까지 가능하며, 2개월로 3번 분할된 총 6개월의 글공부를 마치면 서리 취재인 서산 정도는 할 수 있게 초 속성 과정을 짰다.


조금이라도 효율화를 위해 행정 서식도 뜯어고쳤다. 서리들이 쓰던 이두는 다 폐지하고 언문으로 쓰게 했다.


가르치는 한자? 서식에 쓰이는 거랑 이름에 자주 쓰이는 것 정도만 알면 된다.


이래도 상관 없다. 하급 서리는 사실 인력 복사기나 프린터기에 가깝다.


유교에서 주장하는 교화를 위한 교육과 백만광년 떨어진, 오직 일을 위한 교육 과정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과연, 군대를 조금이라도 빠지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 조선땅에서는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였다.


무수한 정병, 보인들이 글을 배우려 몰려왔다. 싸지방은 없으니 예조가 가르쳐야 했다.


머리 좋다는 놈들은 벌써 서리 취재를 노리기 시작했다. 서리는 원래 그 자체가 신역이라서 서리가 되면 군역에서는 해방이다. 심지어 이제 월급도 준다.


예조는 일단 사부학당(四部學堂)에 병사들을 몰아넣었다.

정원을 맞춘 적이 한번도 없이 텅텅 비어있던 도성 사학이 처음으로 정원을 초과했다.


당황한 학당의 훈도와 교수들이 왕에게 따졌다.


"전하,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고 하나 어찌 이런 하민들을 갑자기 가르치라고..."


"뭐? 한번만 더 그따위 망발을 하면 널 호조 서리로 넣겠다."


호조는 왜 자기들이 유배지 취급 받는 지경이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예조도, 임금이 이런 해괴한 제도는 자꾸 어디서 떠올려내는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병조도 못 쉬었다.


지금 조선에서 보병이라고 하는 존재는 사실 다 그냥 노동자다.


그리고 병적의 관리는 병조의 일. 뭔가 창고 건설이라던가 항구 건설이라던가 같은 일이 엄청 늘어서 동원할 일도 많기도 했는데,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왕이 '굶주린 백성을 군대에 임시로 배속시켜서 일도 시키고 밥도 먹여서 진휼시키라' 면서 유랑민은 다 병영에 넣는 것 아닌가.


조선의 군적이 원래 실제와 전혀 안 맞는 개판이긴 한데, 이젠 그냥 필요가 없는 지경으로 전락했다.

(박경식은 어차피 나중에 군적을 처음부터 다시 작성시킬 생각이라서 이렇게 질러버린 것이다.)


관헌들은 비명을 지르고 병사들은 쉴새없이 삽질을 해야했지만 병사들 사이에서 왕의 인기는 수직 상승했다.


왜냐하면 왕이 명령한 두번째 건설 명령이 바로 도성 근처에 병사들이 머물 숙영지를 건설 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첫번째는 당연히 성종의 능이다)


서울로 입번하러 오는 병사들은 기본적으로 서울의 민가에 세를 내고 머물렀다.


서울에서 복무하는 동안은 지방에서 보인들이 준 군포로 먹고 살지만, 서울은 워낙 물가가 높으니 그대로 서울의 고물가에 노출되어 도저히 군포로는 생계가 불가했다.


숙영지가 있는 병영(에 2년 동안 갇혀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대한 육군 용사 박경식에겐 전혀 이해가 안 가는 일이라서, 서울 근처 내수사 소유 땅을 오위에 줘가며 숙영지를 만들어줬다.


미래의 대한 육군 용사들도 잘 알다시피, 군인 월급이 오르면 위수 지역 물가가 오른다.

전세지원금 같은 것도 전셋방 방세가 오르는 현상이 일어난다.

때문에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준다 한들 별 소용이 없으니, 숙영지를 만들어주는게 최선이다.


병사들의 일용품 중 식사랑 옷가지, 삽이나 망치 등 공구 등도 각 위(부대)에서 책임지고 경매에서 구매해서 병사들 주게 시켰다.


무슨 대단한 복지를 의도한게 아니라 헐벗고 다니게 시킬 순 없고, 공사를 시키려해도 최소한 삽이랑 망치는 있어야 시킬 것 아닌가.


물론 조선의 요역이라는건 원래 오고 갈 때 여비는 물론이고 요역하는 동안 필요한 장구류도 다 본인 부담이다.

군역은 그나마 밥이라도 주지 일반적인 요역은 일하는 동안 밥도 자기가 챙겨야 한다.


그래서 박경식이 지금 바꾼 군대 복지는 조선 개국 이래로 최고 수준을 갱신한 것이었다.


미래 군대에서나 가능했던 '군대 가면 집도 주고 밥도 주고 옷도 주고 얼마나 좋아' 가 실현되었다.


미래 군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미래 군대는 그래도 가기 싫지만 조선의 군대는 그 정도면 천국이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였는지, 왕이 후원에서 쉬다가 궁궐 밖에서 갑자기 곡소리가 들려서 '국상의 졸곡(* 성종의 상을 말함. 졸곡은 곡을 그친다는 뜻.)도 지났는데 왜 도성에서 곡소리가 나는가?' 하고 물었다가 병사들이 옷을 받고 주상께 감사하는 거라는 답을 듣기까지 했다.


관료들이 갈려나가면 백성들이 편안하다. 이것은 세종대왕도 동의하는 명제다. 실로 태평성대였다.


---


<이하 미주>


*1 : 이러한 면리제에 기반한 지방자치제는 원래 역사에서 갑오경장 당시 「향회조규(鄕會條規)」와 「향약판무규정(鄕約辦務規程)」에 따라 면별로 대표자를 뽑고 향회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실현될 뻔 했습니다. 작 중 박경식은 그 사실을 모르지만, 성종 시기가 한창 면리제가 정비되던 시기라서 알게 되고 그걸 기반으로 활용하려 하는 것입니다.


*2 : 해당 기사는 중종실록 33년 8월에 나옵니다. 영의정 윤은보가 주장한 것인데 다들 서리는 일을 잘 못해서 인수인계가 되겠냐고 의문을 표하고, 중종은 서리들도 똑같이 해먹는 거 아니냐고 못 미더워하죠.


*3 : 주인공인 박경식이 지금 몰라서 그렇지, 지금 예조 판서인 성현은 국악에서 제일 중요한 음악 이론가로 지금도 조선 시대 국악 연구에서 많이 사용되는 <악학궤범樂學軌範>의 주요 저자 중 하나입니다.


*4 : 본문의 끝물에서 말하지만 조선에서 군역은 그 자체로 세금이라서, 무기와 갑옷 등 장비는 물론이고 지방에서 서울까지 올라오는 여비까지 전부 본인 부담이었습니다. 그래서 복무 하러 다니는 과정 자체가 극히 힘든 일이었고, 의무 근무일수를 인정해주는 것 자체를 포상으로 한 절목이 여럿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국대전에 규정된 착호 갑사의 포상을 살피면 표범을 한방에 잡으면 20일의 근무일수 인정, 큰 호랑이를 한방에 잡으면 50일의 근무일수 인정하는 식이었죠. 군인에게 돈 안들이는 포상을 생색내며 해주는 꼼수는 현대에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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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뉴딜 1 +50 24.05.22 14,090 559 21쪽
16 풍년인데 왜 농부는 가난할까 +46 24.05.21 14,023 568 20쪽
» 호조야 지금 너만 힘든줄 아냐 다들 힘들어 +46 24.05.20 14,294 581 22쪽
14 호조는 오늘도 갈려나간다 +35 24.05.17 14,822 553 20쪽
13 용산 락 페스티벌 +41 24.05.16 14,716 545 19쪽
12 용팔이 2 +47 24.05.15 14,653 572 20쪽
11 용팔이 1 +26 24.05.14 15,808 583 19쪽
10 돈이 복사가 된다고 +37 24.05.13 16,778 569 19쪽
9 아 장사하자 2 +37 24.05.12 17,156 577 20쪽
8 아 장사하자 1 +26 24.05.11 17,951 598 18쪽
7 이세계 용사 박경식 +38 24.05.10 19,286 649 14쪽
6 고심 끝에 "대간 해체" +38 24.05.09 19,931 669 14쪽
5 시위(侍衛) 시위(示威) +34 24.05.08 20,129 688 13쪽
4 대간이 대듦 +28 24.05.08 21,363 670 13쪽
3 사고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34 24.05.08 22,994 677 13쪽
2 여기가 어디요? 내가 누구요? +41 24.05.08 25,567 701 15쪽
1 프롤로그 : 수상할 정도로 까다로운 교수님 +72 24.05.08 28,628 75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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