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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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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8 21:00
연재수 :
4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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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61,568

작성
24.05.11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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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아 장사하자 1

DUMMY

태종 시절의 저화 정책은, 국가에서 포와 쌀에 대한 저화의 가격을 정해서 서울과 개경의 화매소에서 교환해주고, 저화를 세금으로 내게하는 것이었다.


이 저화 정책은 현대에 알려진 것보다는 백성들의 호응이 좋았다. 불과 몇개월만에 '이미 백성들이 저화를 편하게 여깁니다' 라는 신료들의 증언이 나올 정도였다.


백성들이 뒤통수를 맞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렇게 풀린 수백만장의 저화를, 그대로 세금으로 받는 정책을 폐지하고, 저화를 받고 쌀로 교환해주는 것도 정말정말 드물게 했다. 그렇게 태종은 빈 국고에 군량을 가득 채워냈다. 동시에 저화는 종이쪼가리가 됐다.(* 1)


그걸 이제와서 다시 한다고 하면, 누굴 빙다리 핫바지로 보냐고 백성들이 개무시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다행히 태종 시절의 정책을 그렇게까지 잘 기억하는 사람이 조선 팔도에 전혀 안 남아 있어서 대단한 반발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냥 추가 세금이나 다름 없던 태종조의 정책과 달리, 전세를 없앤다고 하지 않는가. 세금 없어진다고 하면 안 좋아할 사람이 없다.


'전조를 없애고, 지폐세를 대신 걷는다' 라는 발표에 백성들은 뒷쪽은 끝까지 안 듣고 (사실 들었어도 지폐 같은 신조어는 뭔지 모르니 별 차이는 없다) 성군이 나셨노라 하고 좋아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관아에게 받은건 없고 뜯긴건 많은 민족이다. 미래에도 그렇다.


그래서 정부가 뭐 잘해준다고 하면 의심부터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뭔진 몰라도 일단 좋아해보는 순박한 백성들의 한편에는 관아가 갑자기 잘해준다니까 의심부터 가는 백성들도 있었다.


'근데 대신 걷는다는 지폐세가 뭐임?'


그렇게 의심 많은 백성들은 여느 의심병 환자들이 그렇듯 자신이 꽤 똑똑하다고 생각했고, 그 자부심에 맞게 글을 아는 사람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방을 뒤쪽까지 잘 읽었다.


물론 읽지 않아도 세금을 걷는 날이 다가오면 아전들이 육모방망이를 휘두르는 병사들을 데리고 나타나 '방을 붙여 알렸건만 아직도 모른다는 말이냐?' 라는 말을 하면서 상당히 불친절하게 육모방망이로 지식을 주입하여 알려주긴 하겠지만, 얻어터지기 전에 하루라도 일찍 알아두면 뭔가 조금이라도 대비할 수 있지 않겠는가.


'모든 백성은 보유한 토지 1결 마다 지폐세를 10전 낸다. 각 조창, 부, 목에 화매소를 설치하여, 원하는 백성은 화매소에 미곡을 팔아 지폐를 살 수 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에이, 뭐야? 그럼 그냥 이전에 전세 걷던거랑 똑같은거 아냐? 왜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이전 저화 제도가 실패한 이유 중 하나다. 지방관들은 저화로 받아야 하는 세금들을 그냥 현물로 받고 현물을 서울에서 저화로 교환해서 '아무튼 저화로 받음' 하고 퉁쳤다.


하지만 이 다음에 저화 제도와 전혀 다른 것이 있었다.


'전라, 경상에서는 미곡 2두로 1전을 살 수 있다. 강원에서는 미곡 1두로 1전을 산다. 충청, 경기, 황해도에서는 미곡 5승으로 1전을 산다. 양계에서는 미곡 7승으로 1전을 산다.'


그 구간에서, 자기가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글을 읽을 줄 아는 백성들은 생각했다.


"충청, 경기, 황해에 미곡을 팔면 이득이 아닌가!"


물론 백성이 자진해서 중부 3도로 쌀을 나르게 만드는 것이 나라의 의도였으나, 원래 이렇게 이득이 눈앞에 아른거리면 그 뒤의 '누군가의 의도' 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



해남의 지주 정씨네 집안의 노비 막쇠는 조선에 배가 이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나리! 저것 보십시오! 여기가 그 나리가 말하신...곶창? 인가 하는 나루인가 봅니다요."


"곶창이 아니라 공진창(* 현 충남 아산시에 있던 조창)이라고 하는 것이다."


막쇠가 부르는 '나리'는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1476~1543](* 2). 전조(*고려 시대를 말함) 때에 무관으로 좀 활약한거 말고는 별 신통한 것 없는 한미한 집이었으나, 해남의 지주 정귀영의 딸과 결혼해서 팔자가 피고, 노비들에게 나리 소리도 듣고 있다.


사실 나리 소리 듣는 몸이 (벼슬 안한지 좀 되어서 양반은 아니다) 이렇게 쌀 팔러 배 타는 것은 꽤 이상한 일이다. 조선은 항해술이 워낙 딸려서 배 타면 죽는줄 아는게 '상식'이다. 윤효정이 배를 타게 된 건 처갓집의 사정 때문이다.


처가집에서 얼마 전에 근처에 개간한 땅을 외거노비들에게 맡겼더니 주인 몰래 땅을 팔아버리고 튀어버리는 것이 아니던가.


관아에 고소해도 '이런 사례 이미 쎄고 쎘고, 잡는데 성공한 적도 없는데 그냥 고소 취하하시죠?' 라는 환장할 답변을 하는건 덤이었다.(* 3)


분통 터지는 일이지만 도망친 사람을 잡는걸 드럽게 못하는게 조선 관아의 행정력이었다. 그런 이유로 해남 정씨 가문이 한창 예민해진 와중에 내려온게 이번 지폐세의 방이었다.


정귀영은 쌀을 공진창에 팔기로 했다. 그래서 어디서 꽤 큰 배-관에서 쓰는 조운선보다 좋았다-(* 4)를 사서는 사위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배에 타게, 사위.'


'네? 예? 제가요?'


'그래. 자네가 솔거노비들과 여기에 타서 쌀을 공진창에 파는 걸세.'


'갑자기 말씀하셔도 가능할리가 없잖습니까! 게다가 사대부에게 배를 타라니...'


'탈거면 빨리 타고 안 탈거면 (네 본가로) 돌아가!'



날백수 데릴사위에게 장인어른에 대항할 힘이 있을리가 없었다.


에바라고 생각하면서도 윤효정은 결국 배에 탔다. 풍랑이라도 잘못 불면 쌀이 죄 가라앉는 것은 물론이요 딸도 청상과부가 될텐데 사위한테 너무한것 아닌가 싶었다.




"나주에 조를 바치러 간 적이 몇 번 있는데 그 때도 배가 이렇게 많지는 않았던거 같은데 참 신기합니다. 나주보다 번화한 곳도 아닌 것 같은데."


막쇠가 계속 수다스럽게 떠들었다. 평소에도 말이 많은 녀석이지만 배를 타고서는 더 흥분한 모양이다.


"나라의 제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곳 아산은 본디 현으로 작은 고을(* 조선의 군현 서열은 부-목-군-현.)이 맞다.

그런데 나라가 지폐로 세를 바치라고 하고, 충청도에서 쌀 값을 후하게 치러준다고 하니 전라도의 사선(私船)들이 죄다 나주가 아니라 이곳으로 와서 쌀을 팔려 온 게지."


"쇤네는 무식해서 말씀하셔도 잘 모르겠습니다요."


"네놈은 그러면서 항상 뭔가 궁금하다는 듯이 또 묻고, 설명을 해주면 또 모르겠다고 하니 나보고 어쩌라는 말이냐?"


"헤헤, 군자란 모름지기 소인을 교화해야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리가 말씀하시는게 뭔지는 몰라도 듣고는 싶습니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어서 잘 외는지 참 모르겠구나."


그렇게 윤효정의 일가붙이들이 배를 나루에 대고 쌀을 내리려는데, 아무리 봐도 관가 사람은 아닌, 딱봐도 쌍놈 티가 짙게 나는 - 사실 관가에서 일하는 병사들도 쌍놈 티가 세게 나기는 한다 - 이들이 다가오더니 씨익 웃는 것 아닌가.


"쌀을 관에 팔러 오셨습니까? 헤헤. 관에서는 더 이상 쌀을 사주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조창의 화매소에서 지폐가 다 떨어졌다고 그럽디다. 의심하실 것도 없이, 종을 부려서 묻고 오게 해보시지요. 쇤네가 설마 확인하는데 일각도 걸리지 않는 일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사실이었다. 잘 보니, 저 화매소로 보이는 곳에 쌀을 가득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데 사람들은 관리에게 뭐라뭐라 따지고 관리는 고개나 손을 젓거나 심지어 호통을 치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윤효정과 마찬가지로 쌀을 공진창 화매소에 팔러 먼저 온 사람들이, 더는 쌀을 사지 않겠다고 거절 당하는 모습이리라.


"자네는 누구인데 그것을 내게 이리 알려주는가?"


"저희는 그냥 보부상입니다. 말리나 좇는 놈들이지요. 상업이 비록 말리라고 하나, 물건이 풍부한 곳에서 물건이 없는 곳으로 옮기는 것이 우리의 본분 아니겠습니까."


잘 보니 지금 말하는 사내 말고도 비슷한 옷차림의 사내들이 한무리 있고, 각자 지게를 옆에 두고 있기도 하고, 나귀나 소 따위도 한무리가 있으며 근처에 짐을 잠시 내려두기도 한 것이 보였다.


그제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충 짐작이 갔다.


'상업은 자기들 영역이니, 사대부인 나는 침범하지 말라는 것이군.'


"허면? 우리가 싣고 온 쌀은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해남에서부터 여기까지 올라왔다. 이 쌀들을 가지고 해남까지 돌아가기라도 해야겠는가?"


"어찌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나리께서는 결국 지폐를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까?"


보부상이 지폐를 꺼냈다. 지폐가 발행된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부, 목급 군현마다 화매소에서 쌀을 받고 지폐를 주거나, 호적을 확인하고 빌려주고는 해서 윤효정 일가 수준의 부호라면 지폐를 구경할 일은 이미 여럿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진짜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1두에 1전으로 쌀을 사겠습니다. 해남에서 오셨다고 하셨지요? 전라도의 주창보다는 갑절로 값을 치러드리는 것이지요."


"흠..."


윤효정은 생각에 잠겼다.


대단히 계산할 것도 없이, 확실히 이득이기는 했다.

이대로 배를 되돌려봤자, 나라가 갑자기 정책을 또 뒤집어 그냥 쌀로 세금 받겠다고 하는 뒤통수를 치는 것이 아니면, 정직미련하게 전라도에서 지폐를 사서 세를 낸다면 1결에 10전, 1전에 2두니 1결에 20두의 세금폭탄(사실 그래봤자 수확량의 10% 남짓이지만, 지금까지 4~6두를 낸 것에 비하면 '폭탄' 이다.)을 맞게 된다.


그러나 상인들이란 절대 손해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 간교한 이들 아닌가. 이들은 필경 쌀을 다시 어딘가에 팔아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상인들에게 이문 남겨주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정말로 '선비스러운' 이유의 한편에, 윤효정이 이 배에 쌀을 싣고 아산까지 온 이유가 겹쳐지니, 이들에게 쌀을 파는 것 말고 다른 행동을 모색할 이유가 생겼다.


"내 이곳에 쌀을 팔러 온 것은 이문을 좇아서가 아닐세. 이 쌀은 내가 알아서 처결할테니 그만 가보시게."


보부상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가 다시 씩 웃는 것으로 돌아왔다. 조선인들이 이렇게 웃는 것은 '너 좆됐어' 라는 제스쳐. 윤효정에게 한가락 불안을 남기면서도,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나리.' 하면서 가버렸다.


"에엥? 이 쌀을 처결하실 뾰족한 수라도 있습니까, 나리?"


"아직은 없다."


"그럼 왜!?"


"선비가 의리를 좆지 이문을 좆느냐? 정성을 다하면 길은 열리는 법이다. 따라와라."


그러고서는 당당하게 딱봐도 화매소인 곳으로 걸어갔다. 막쇠는 도령이 눈이 없는건지 눈치가 없는건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더는 쌀을 안 사는 눈치인걸 봐도 모른단 말인가?


"여기가 공진창 화매소요?"


"맞소. 쌀을 팔러 온 선상(船商)이라면 돌아가시오. 지폐는 다 팔렸소."


"내 해남에서 부호인 집안 정 씨의 사위인 윤 모라고 하는 사람인데, 우리 처가가 주위에 베풀기를 좋아하며 나라에 충성할 방도를 항상 찾고 있소.


나라에서 새로이 만든 지폐세의 법을 보고, 나라에 충성하고자 우리의 전결에서 난 쌀은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전라도 나주의 영산창에 팔아서 세를 내기로 했소. 그런데 가난한 이웃들이 많아 도저히 영산창의 값으로는 지폐세를 낼 수가 없어, 우리가 대신하여 배를 사서 부려 이웃들의 미곡을 실어 지폐를 후하게 쳐주는 이곳으로 온 것이오.


또한 듣자하니 작년은 충청, 경기, 황해 삼도가 실농하여 백성들이 곤궁에 처한 것으로 알고 있소. 나라에서 쌀 값을 이 세 도에서 비싸게 쳐주는 것도 삼도의 백성들에게 쌀을 풀기 위함이겠지. 사사로이는 이웃들을 위하여, 크게는 나라 백성을 위하여 이리 왕림한 것인데 어떻게 안되겠소?"


윤효정의 지금 이 사연은 사실이었다.


조선 전기라고 하면 막연히 농본주의적 경제라고 주로 알려져 있고, 교과서 수준에서는 과전법을 중심으로한 토지 소유 관계와 경영 형태를 말한다.


하지만 15세기를 거쳐 인구가 증가하고, 사적 토지 소유권이 강화되면서 지주와 소농의 빈부격차가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이런 경향은 지금 박경식이 빙의한 연산군 전의 왕인 세조와 성종 시기에 이미 나타났고, 이 둘의 시대에 조세 제도와 군역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 중 성종 시대에 진행된 개혁이 8결작공제라는 것이 있는데, 백성들의 대부분이 1결 남짓한 토지를 가진 상황이라는 것을 고려하여 가구 여럿을 묶어 8결 단위로 만들고 공물을 내는 의무를 공동으로 지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8결제는 관습적으로 다른 조세나 요역에 대해서도 관습적으로 퍼졌다. 아무래도 공물이 아니라 전세도 현물 곡식을 내는 것이다보니, 각 집안이 낑낑대며 조창까지 나르기보다는 여러 가구가 뭉쳐서 공동 납부하는게 더 낫지 않겠는가.


윤효정이 데릴사위로 들어간 해남 정씨 일가는 마을에서 그런 세납의 책임을 자진해서 맡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수료를 떼먹긴 하는데, 좋게 말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도 할 수 있다.(* 5)


그리고 지금 박경식이 도입한 제도는 노골적으로 삼남 사람들에게 쌀을 경기나 충청도나 황해도로 나르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가난한 소농들이 배를 사서 경기나 충청도까지 나르는 것은 언감생심인 일. 이에 원래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납 실무를 담당하던 해남 정씨가 내친 김에 배를 사서 마을 공동으로 쌀을 비싸게 사주는 곳에 팔려고 한 것이다.




윤효정의 사연을 들은 화매소 관원이 벌떡 일어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현대인들은 조선 선비들에 대해서 보수적인 꼰대라거나, 말만 백성을 위하지 백성을 착취만 한 특권 계층으로 악평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윤리와 통치관이 현대와 그 목적의식이 달라서 그렇지 어쨌건 의리를 추구한 계층이기도 하다.


충국애민의 명분을 내세운 윤효정의 호소에, 아직 젊어 성리학의 의리명분과 이상을 가슴에 품고 있는 관원의 마음이 움직였다.


"세상에 이리도 의로운 선비가 있었나! 내 여기로 부임하여 본 사람이라곤 전부 장사치 모리배 뿐이라 당신 같이 의로운 선비가 여기 올 것이라곤 생각 못했소. 비록 화매소의 지폐는 다 떨어졌으나, 내가 도울 것이 있다면 말하시오."


'...지폐가 없는건 맞나보군.'


말은 멋지게 했지만, 역시 실망스럽기는 했다.


"화매소인데 어쩐 연유로 지폐가 부족하게 된 것이오? 지폐는 그저 파란 종이에 글자랑 인을 찍어낸 것인데 백성들이 조를 지폐로 바꿔 세로 내려면 그만큼 지폐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오?"


---

<이하 미주>


* 1 : 흔히 저화 정책의 실패를 조선 내 상업의 미발달이나, 실용성이 없는 저화를 백성들이 외면한 것이라는 설명으로 끝마치지만, 근래에는 저화 정책 자체의 모순점이나 문제점, 혹은 저화 정책 이면의 정책 의도 등을 검토하는 연구가 몇 건 진행되어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인용한 태종조의 정책은, 저화 정책을 화폐 정책이 아닌 재정 정책의 맥락에서 접근하여 살핀 연구를 소재로 활용한 것입니다. 저화는 '화폐 정책'으로써 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명과의 외교적 긴장감이 높던 태종 시대에 군량미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추가 세금'을 걷기 위해 활용한 것이었다는 주장이지요. <소순규. (2019). 조선 태종대 저화 발행 배경에 대한 재검토 - ‘화폐정책’이 아닌 ‘재정정책’의 맥락에서. 역사와 담론, 92, 111-159.>


* 2 : 윤효정은 실존 인물로, 해남윤씨 어초은공파의 파조입니다. 해남 정씨네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분가하게 되는데, 1501년(연산군 7)에야 생원시에 합격합니다. 원래 역사에서는 벼슬로 나가지 않고 자식들을 키우는데에 집중하여 아들 셋을 모두 문과에 급제 시키지요. 조선 중기의 문신 윤선도는 그의 현손이 됩니다.


* 3 : 해당 에피소드는 해남 정씨네 집안의 일은 아니고, 해남 정씨네 집안의 유산을 물려 받은 윤효정 일가가 16세기 말, 즉 100년 후 쯤에 실제로 겪는 일입니다. 조선의 제도는 전답의 소유자가 경작을 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경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15~16세기에는 지주의 권한이 약하고 경작인의 권리가 강했습니다. 이 때문에 실제 경작을 하는 작인들이나 노비들이 지주의 의사와 무관하게 땅을 팔 수 있던 것이지요. <조선시대사 2>(푸른역사, 2015)


* 4 : 조선은 전세의 수납을 위해 조운제도를 최대한 정비하려 했으나, 불과 성종 시대에 이미 조창의 관영조운선은 쇠락하여 사선이 더 좋다는 증언이 최부의 <표해록>에 나옵니다. 이후 중종 시대에는 지방의 창고에 넣어둔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는 사선을 빌리거나 징발해서 써야 했죠. 여기서는 박경식의 전세 개혁으로 전혀 다르게 역사가 흘러 가기 시작했습니다.


* 5 : 이러한 8결작공제는 대동법이 도입되는 조선 후기 영조 시대에는 8결 작부제로 발전하게 됩니다. 작 중에서 묘사된 해남 정씨네 마을의 관습이 법제화 된 것이지요. 이런 8결제는 19세기에 각 군현에서 전세를 동전으로 내게하는 도결 관습이 퍼져서 사실 상 사문화되는데, 본작에서는 전세를 돈으로 내게 하는 개혁으로 전혀 다른 형태로 발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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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기가 어디요? 내가 누구요? +41 24.05.08 25,576 70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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