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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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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최근연재일 :
2024.06.28 21:00
연재수 :
49 회
조회수 :
671,224
추천수 :
26,765
글자수 :
461,568

작성
24.05.14 18:00
조회
1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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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
글자
19쪽

용팔이 1

DUMMY

현재 박경식이 임시로 운용하고 있는 지폐법은 고정환율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정환율제 하에서 흔히 나타나는 부작용이 불법환전상이다.


지금은 지폐의 가격이 급등하는 상황. 암시장이 형성되어 지폐가 국가에서 정한 쌀과의 교환비보다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다. 왕의 외삼촌이라는 작자가 그 암시장의 대부고.


물론 경식도 이런걸 다 알고 있으니까 곧 자유변동환율제와 유사하게 바꿀 계획이 있긴한데(*1), 초장부터 너무 부작용이 심했다.


경식은 자기가 밀매상이라면 어떻게 이 상황에서 이득을 최대화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 아산에서 올라온 보고서나 윤은로에 대한 보고 덕에 대충 윤곽이 잡혔다.


'경창으로 쌀을 매각하러 온 상인들을 막고, 쌀 값을 후려쳐서 매입하고 경창의 쌀 매입이 재개되면 그 때 쌀을 팔아 지폐를 매입하겠지.'


아산의 상인들이 쓰던 전략 그대로이다.


하지만, 이렇달만한 시장이 없는 아산의 공진창과 달리 서울은 인구 십수만에 달하는 거대한 소비 도시이기도 했다.


쌀 값, 더 따져해봤자 조 값만 보면 되는 아산과 달리 이미 수 많은 물건들이 상호작용을 하며 물가가 요동치고 있었다.


'밀매상들은 더 다양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불법적인 수익을 얻고 있겠지.'


특히 조선은 상업에 대한 행정이 유난히 약한 나라. 동시대 서유럽은 14세기면 이미 관세나 소비세 등의 상업 관련 세금이 재정 수입의 20~30% 가량을 차지했지만 조선 등 동아시아는 3~4% 수준(*2)이었다.


이런 부실한 상업 관련 행정 상태로는, 지폐를 더 발행해봤자 모리배들 배만 불리고 지폐는 어디 마늘밭 같은 곳에 묻히는 일이 생기고 말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미래에서 어린 시절 읽은 조선시대 민담들을 모은 만화의 내용이 생각났다. 암행어사라던가 임금의 미복잠행이라던가 하는 이야기.



---



상선 김처선은 다 늙은 자신에게 대체 무슨 재앙이 일어나고 있는가 알 수가 없었다.


이번 왕은 매일 같이 백성이 굶주리는게 걱정이라며 매일 같이 경연에 나가거나 탐관오리만 보면 눈을 휘번뜩이며 (물리적으로) 때려잡는게 성군 같다가도, 이럴 땐 또 미친 놈인가 싶기도 했다.


"김 좌수, 아침부터 왜 그리 표정이 죽상이오?"


"저...나리, 백성을 돌보시려는 마음이 지극한건 알겠으나 이건 좀..."


"어허! 이 선달, 김 좌수 말하는거 보게! 이러다 사람들이 들으면 내가 왕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그러면서 껄껄 웃는데 주변 사람은 아무도 제대로 웃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음소리를 낼 뿐.


박경식은 부장님 혼자 웃는 개그가 왜 부장님에게는 그리 웃긴지를 알았고, 겸사복과 내금위 관원들은 왕의 개그 센스가 최악이라는 것을 알았다.


박경식이 겸사복과 내금위, 그 외 내시들을 대동해서 열댓명에 달하는 파티를 만들고서 온 곳은 경기 수원의 역참.


암행하는데 무슨 호위를 열댓명씩이나 대동하냐고 묻고 싶겠지만, 원래 조선에서는 호랑이라는 에픽 몬스터가 너무 흔하게 나오기 때문에 산길 다닐 때는 이 정도 몰려다니는게 기본이라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여간, 법대로라면 이 길을 통해서 전라도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공물을 낸다.


말 그대로, '법대로'라면 말이다.


하지만 조선은 세종대왕조차도 고려공사삼일(* 高麗公事三日, 고려의 법은 삼일을 가지 못한다)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탄식했을 정도로 법대로 안 돌아가는 나라.


공납은 조선 전기부터 방납의 폐단이 발생하여 백성들의 폐해가 컸다는 것은 박경식이 미래에 있을 때부터 배웠고, 조선에 와서도 대간들에게 몇번 들은 적이 있어서 방납이 성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방납의 거래가 진행되는 곳이, 지금 지폐가 몰려 있는 암시장일터. 지금부터 그 암시장에 잠입한다.


"다시 이르겠다. 내가 이렇게 나와 있는 동안, 나는 누구냐?"


겸사복과 내금위가 대답했다.


"전주에서 공을 바치기 위해 올라온 이 좌수입니다."


"그래. 경망되게 말해서 일을 그르치면 다들 경을 칠 것이야. 공물을 바치는 일에 대해 내가 짐짓 모른 척을 하더라도 끼어들지 말아라."


방납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경식도 미래에서도 배웠고 조선에서도 보고로 들었다.


미래 지식으로는 비교적 간단하게, 공납에는 그 지역에 나지 않는 물건이 분정되는 경우가 있어서 상인이 다른 지역에서 물건을 사서 대리로 납부하고, 그 지역 주민에게 값을 청구해서 받는데 그 값이 너무 높아서 백성들이 피해를 봤다...정도로만 알았다.


조선에서 배운 부정부패 실무(?)는 좀 더 복잡하다.


원래는 이 공납 납부를 하는 책임자로, 각 지방 아전 중 하나를 서울로 보내서 경주인이라는 직책으로 세웠다. 그런데 지방에서 나지 않는 공물이 배정되면, 이 경주인이 서울 시전에서 물건을 사서 공납하고 그 값을 지방에 청구하는 것이 대납의 시작이었다.


경주인이 지방 사람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일이 잦아 문제가 있긴 한데, 경주인은 어차피 그 지방 사람이라 바가지가 과했다간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뒤탈이 클 뿐더러, 조선이 사람 쓰는게 항상 그렇듯 무료로 징발된 몸인지라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는 입장이라 그렇게 해먹어도 큰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경주인도 서울 시전에서 쉽게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 지방에 공물로 배정되면? 여기서 또 개입이 생겨서 방납이 시작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상인들이 개입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전직)대간들이 꼬지른대로 권력자들이 뒷배를 봐주는 일이 있었다.


'신료들에게 보고 받은대로라면, 지방에서 올라온 공리(* 貢吏, 공물을 실제로 서울에 납부 하는 향리)들이 중간에 사주인들의 집에서 숙식하며 공물을 올리지 않고 존버한다는거지?'


그렇다면 한양 도성 근처에 물류가 모이는데, 경주인들의 손이 닿진 않는 곳에 그 사주인들의 집이 모여 있을 터.


바로 역참과 한강 포구다.



"그...그런데 나...나리?"


김처선이 또 어색하게 질문했다.


"왜 그러시오?"


"그런 암행이라면 굳이 나리께서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아랫사람들에게 시켜도 충분히 되는게..."


"허참! 우리 집안을 그리도 오래 봤으면서 주인의 마음을 여전히 모르는군!"


그야 오래봤어도 모를만 하다. 겉모습만 연산군이고 내용물은 바뀌지 않았는가. 그래도 경식은 뻔뻔하게 말했다.


"그 마음이 어떤건지 여줘도 되는지..."


"말해줘도 자넨 이해 못할걸세~"


그냥 조선에서 생활을 만끽하면서 돌아다녀보고 싶다고 하면 어차피 다들 거품 물며 말릴거 아닌가.


---



윤은로네 집 노비인 말동(末同)...그러니까 말똥이.(*3) 윤은로가 방납을 할 때 실무를 담당하는 앞잡이 중 하나였다.


권세가를 뒤에 두고 방납을 하는 놈들이 다 그렇듯 사주팔자관상에서부터 쌍놈의 기운이 흘러넘치는 놈이었다. 노비들이 다 그렇듯 성씨도 없었다.


말똥이는 자기가 사는 세상이 판타지 세계관이 아닌걸 감사해야 마땅하다.


판타지에 출현했으면 '크헤헤! 이 구역의 주인은 이 몸이시다! 죽기 싫으면 가진걸 다 내놔라!' 라는 대사를 치다가 1화 안에 주인공에게 컷 될만한 얼굴이니까.


하지만 이곳은 판타지 세계처럼 길만 다니면 도적이 나오는 야만적인 세계가 아니다. 조선은 문명국이라서 관아에 가야 도적이 나온다. 사실 관아 안에 있는건 죄다 도적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게 세계관의 문제로 도적은 못되고 도적의 끄나풀 쯤 되어 진짜 도적에게 돈을 상납해야하는 말똥이는, 문명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스킬을 개방해야했다.


"내 전주에서 올라온 이 좌수라고 하는데, 올해의 공을 바치러 왔네.


그런데 원래 부친께서 하던 공납을 부친이 편찮으시어 급하게 내가 하려하니, 배움이 모자라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겠네. 길 좀 물어도 되겠는가?"


말똥이의 미션 '조선에서 상놈으로 살아남기' 의 필수 스킬 '전투력 측정'이 활성화 되었다. 조선에서 상놈이 살아남으려면, 상대방의 지위고하를 파악하는게 첫 단계다.


그리고 자기보다 약한 자면 막 대해도 되고, 높은 자면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각을 잘 보고 들어가야 뒤탈이 없는 법이다.


이 이 좌수라고 하는 자칭 공리의 옷차림의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가 스캔되었다.


"전주에서 서울로 처음 올라오는 것입니까?"


"그래. 그래서 서울 물정을 잘 모른다네."


"처음 서울 오시는것 치고 퍽 서울말을 잘하십니다."


"서울 사람들은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고 하길래 촌놈 티 안 나게 하려고 열심히 배웠지."


"전주에서 여기까지 온 것 치곤 옷이 참 깨끗합니다."


"국상 중인데 상복을 더럽게 입을 수는 없지 않은가."


"공리 치고는 갓은 참 큰 것을 쓰고 계십니다. 서울에서도 그런 것은 귀한데."


"향리라고 큰 갓을 쓰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서울 다녀오신 부친께서 얻어오셔서 아껴 쓰고 있는 것이라네."


김처선이나 겸사복들은 '그...전하...지금 이미 들키신거 같은데...'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왕이 또 어떤 성질을 부릴지 몰라 차마 나서지 못했다.


"자자, 괜한걸 꼬치꼬치 묻지 말고! 내 여비로 좀 가져온게 있으니 길 안내 값은 좀 쳐 주겠네."


'좋은 것'을 받자 말똥이의 전투력 측정기 스킬이 비활성화 되었다. 그래 맞아, 좀 향리가 서울 말 잘 하고 양반스럽게 입었을 수도 있지.


"크흠. 잘 오셨습니다. 제가 마침 올라오는 공리 분들께 묵을 자리를 좀 알려드리고 있지요. 따라오시지요."


그러자 이 좌수가 뭔가 이상하다는듯 턱을 짚고서는 묻는다.


"서울에 올라가면 경저(京邸)에서 머물며 납공하라 들었는데?"


뭔가 수상할 정도로 서울 양반 같아 보였는데 역시 촌놈이 맞는거 같다. 말똥이는 받아먹은 뇌물 값이 아직 유효했기 때문에 이 좌수에게 비교적 친절하게 서울 물정을 알려줬다.


"경저를 들를 필요가 무엇 있겠습니까? 저희 집이 바로 조정에서 일하며 공물을 받는 일을 해먹고 있는데."




과연 말똥이가 안내해준대로 따라가니 용산포구가 나왔다. 좀 더 서쪽에 있는 마포, 서강과 함께 현재 조선의 최대 물류 집산지였다.


수원으로 몰래 빠져 나올 때도 봤던 수백척의 사선들이 들어선 커다란 포구가 보였다.


'조선 전기의 상업 수준을 내가 너무 몰랐던 모양이군...'


분명 조정에서는 불법으로 지정하고 있을 사주인들의 암시장이 하나의 커다란 마을을 이미 형성하여 항구 도시로 기능하고 있었다.(*4)


물론 일단은 정부가 장려하여 만든 시설은 아니다보니, 건물들이나 항구의 상태는 조악했다. 원래 용산포구에 있는 정부 시설은 경창 중 군자감과 풍저창 정도.

원래 상정한 유통량에 비해서 막대한 물자가 몰리다 보니 제대로 건설되지 않은 포구에 과도하게 많은 배가 모여 있었다.

건설된 포구라고 해도, 사실 대단한 시설은 아니고 돌을 조악하게 쌓거나 나무를 얼기설기 엮은 항만에 모래가 쌓여 있고 배는 그 모래사장에 대충 대놓은 모양새였다.


항구와 항만의 건설, 도로의 건설은 국가의 상업 활성화와 장려를 위해 제일 중요한 인프라 중 하나다. 그것이 이렇게까지 방치되어 그냥 암시장으로 굴러가는 상황은 조선에서 상업이 어떤 위치인지 알려주는 듯 했다.


경식은 다시 조선의 부실한 상업 관련 법률이나 행정 제도에 대해 생각했다. 이 포구를 공식적인 정부 관할의 항만으로 육성하려면 어떻게 개혁해야할까?


'일단 세관 제도를 만들고...항만 관리법을 만들고...이곳에 관리를 더 파견하고...성벽을 두르고...할게 많군.'


뭐가 어쨌건, 이번 암행에서 현장을 파악하고 나면 좀 더 윤곽이 뚜렷하게 될 것이다. 짧은 영감들을 머리 속 한 켠에 미뤄두고 다시 암행에 집중했다.




용산포의 마을에 도착하자 경식이 자기를 따라온 내금위 관원과 겸사복들에게 조용히 명했다.


"이제부터 2명, 아니 3명 씩 조를 짜서 움직인다. 각 창고들을 염탐하여 어느 각사의 이서, 노비가 관리하는지 알아보아라. 뒷배가 누구인지 알아내면 특히 포상하겠다.


또한 창고에 어떤 물건을 쌓아두고 있는지, 값이 얼마에 거래되는지, 특히 지폐는 어떻게 거래되는지 유심히 살펴라. 이곳에서 매매하는 이는 어떤 이들인지도 확인하여라."


"예."


겸사복들도 조용히 대답하며 흩어졌다. 경식을 시위하는 호위 관원은 넷만 남았다.




경식은 말똥이가 알려준 방으로 들어갔다. 불법 숙박업소의 일종인만큼, 시설이 신통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방 칸이 부족해서 '이 좌수' 와 마찬가지로 공납을 하러 온건지, 아니면 다른 상인인지 모를 사람들도 한 방에 닭장 마냥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런 곳에 다섯 사람이 갑자기 들어오니 영 반갑지는 않는 눈치였다.


"으흠! 잠시 실례 좀 하겠소."


하지만 다섯 사람 중 지금 말하는 한 사람 빼고, 그 일행인듯한 네 사람이 눈을 부릅뜨며 죽일듯한 기세를 뿜어내니 저도 모르게 쫄아서 다들 자리를 대충 만들어주고 말았다.


'이 좌수'가 방에 있던 사람 중 그나마 의관이 단정한 사람에게 짐짓 아는 척을 했다.


"혹시 그쪽도 공물을 납부하러 온 것인가?"


"음...그렇소만."


"이거 참 다행이군. 내 전주에서 공납을 하러 온 이 좌수라 하는데, 부친이 편찮으셔서 급하게 내가 대신 올라왔는데 서울 물정을 내가 알아야지. 혹시 도와줄 수 있다면 사례하겠소."


'이 좌수'가 말을 건 것은 공교롭게도 같은 전라도 사람이었다. 그는 경계심을 조금 풀고 "나주에서 온 진 모이외다. 진 별감이라 부르시오." 하고 소개했다.


"그런데 전주 사람 치고는 말씨가 퍽 서울 사람 같은데..."


"열심히 연습한 것인데 자주 그런 말을 듣소."


뻔뻔한 왕 말고, 왕을 지키는 겸사복들만 진땀을 흘렸다.


"내 말투 이야기는 됐고, 내가 공물을 올려야 할 절차를 잘 모르겠어서 말이오. 분명 경저에 가서 경주인을 만나 묵으라 들었는데, 여기 주인이라는 사람에게 물으니 여기서 묵으라는군.


자기가 조정에서 일하고 공물을 받는다나? 이게 대체 무슨 소리요?"


진 별감은 이 좌수의 질문에 차근차근 근래의 공납에 관한 실무를 알려주었다.


요약하면, 말똥이의 말대로였다. 경식이 계본에서 사주인이라고 칭하여 들은 계층, 즉 방납을 행하는 상인들은 상당수가 각사의 서리나 노비들(* 줄임말 : 각사이노各司吏奴)이 겸하였다.


'그 말똥도 각사 어딘가의 노비이겠군! 과연 어디가 뒷배이려나...방납을 행한다고 탄핵된 것은 윤은로 밖에 듣지 못했는데...'


그리고 그들은 지방의 공리들이 가져온 공물을 검사하여 점퇴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즉, 자기들이 퇴짜놓고서 자기들이 싸게 산 다음 자기들이 공납하고서 지방에 그 공납 비용을 청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리라면서 정말로 이런 것을 모른단 말이오? 분명 누군가가 방납을 하고 준납첩(* 准納帖, 공물을 관아에 납입했다는 영수증.)을 고을로 보내서 그 값을 청구하는 일이 한번 쯤은 있었을텐데."


진 별감이 설명하다가 의아하다는듯 질문했다.


뻔뻔한 왕 말고 겸사복들만 긴장했다.


'어쩌지? 베어서 멸구해야하나?'


'말도 안되는 소리 말게! 설마 저들도 지존이 눈 앞에 있는 줄은 상상 못하겠지!'


"일을 배운지 얼마 안되어 잘 모르겠소만, 우리 전주에서 공납하는 것이 비단인데, 그것이 워낙 질이 좋아서 모리배 각사이노들도 함부로 점퇴를 놓지 못해서 우리 고을 공리들이 직접 각사에 공납해온 것 아니겠소?"


"허어? 말도 안되는 소리. 각사이노들이 어떻게 맘 놓고 방납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는구만."


진 별감이 계속 설명했다. 지방의 공납이 늦어졌을 때 책임지는 것은 경주인이다.

이전에는 경주인이 대납하여 이득을 챙겼지만, 이제는 책임은 없고 권한만 있는 각사이노 출신의 사주인들이 경주인의 업무를 가로채고 경주인이 얻던 이득을 뺏는 것이 현행 방납이었다.


그러다보니 경주인은 지금은 모두가 기피하는 고역이고,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고 맞다가 죽기도 할 지경이었다.


"호오, 그렇다면 내가 가져온 이것도 그치들이 점퇴에서 퇴짜를 놓겠군. 이 정도 비단이면 조선 팔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데. 주상 전하께 올려도 될거라고 자신하오."


"전주에서 그 정도로 대단한 비단을 만들...헉?!"


이 좌수가 궤짝에서 비단을 꺼내보이자 진 별감이 바로 숨을 삼켰다. 이 좌수가 자신한 것처럼 그야말로 왕에게 진상해도 될만한 물건이었다.


당연하다.


왕실 창고에서 직접 꺼내온거니까.


엄청난 퀄리티의 비단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 - 아마 쌍놈 티가 줄줄 흘러 나오는 것으로 보아 상인들 - 도 갑자기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


<이하 미주>

*1 : 7화 <이세계 용사 박경식> 편에서 박경식이 신료들에게 보여준 절목 중에 미곡의 지폐 가격을 첫 해만 왕명으로 정하고 이후에는 시가로 한다는 서술이 있었습니다. 그걸 본문에선 자유변동환율과 유사하다고 서술한 것이지요.


*2 : 본문에서는 간략하게 서술하였으나 당시 서유럽의 조세 제도는 국가마다 다르고, 프랑스 같은 경우 한 국가에서도 지역마다 달랐기 때문에 일원화하여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상품세와 관세의 비중이 높았던 것은 14세기 이후 영국 조세 제도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입니다. 프랑스의 경우 어떤 지역은 상품세, 어떤 지역은 인두세, 어떤 지역은 소득세를 선호하는 등 일관적이지 않았지요. 다만 동아시아, 특히 일본과 한국의 경우 근대에 서구와 접촉할 때까지 관세의 개념을 몰라 이런저런 해프닝이 있었을 정도로 상업 관련 세제에 대한 개념이 미약한 것은 분명합니다.


*3 : 윤은로 집의 노비 말동(末同)...그러니까 말똥이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려 있는 실존 인물입니다. 원래 역사에서는 성종 시기 윤은로가 방납을 저질러서 탄핵되었을 때, 성종이 윤은로 네 집 노비들이 멋대로 저지른 일이라고 주장하며 처벌한 이들 중 하나입니다. 물론 방납은 뒷배와 밑천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고, 윤은로가 지방관들에게 방납을 자기가 하겠다고 편지를 돌린 것도 이미 들킨 상태인만큼 윤은로가 주도한 일임이 명백한데 성종이 '꼬리 자르기' 를 해준 것에 불과했고 대간도 그것을 알아 윤은로를 계속 탄핵했습니다. 원 역사에서는 성종 대에 최소 귀양 당했거나 사망했을테지만 본작에서는 전개 상 엑스트라성 캐릭터로 출현하고 있습니다.


*4 : 작 중에서 묘사되는 사주인들에 의해 주도되는 포구 상업은 조선 후기에 발전하여 대동법이 출현할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사주인들 역시 공인으로 발전합니다. 심지어 작 중 시대면 이미 사주인 행위가 하나의 영업권으로 관습적으로 자리잡고, 자손들에게 세습되기 까지 합니다. 특정 세공물에 대한 유통권을 독점 유통하는 형태였죠. 16세기 말이면 거의 모든 세공물의 사주인권이 설정되게 됩니다. 대동법은 사회경제적 맥락이나 구조를 바꾼 대개혁이 아니라 사주인들이 이미 대부분의 세공물의 유통권을 장악한 현실을 인정하고 제도화 한 것이었습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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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시위(侍衛) 시위(示威) +34 24.05.08 20,144 68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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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기가 어디요? 내가 누구요? +41 24.05.08 25,591 70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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