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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라구.B.P 님의 서재입니다.

경제왕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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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B.P
작품등록일 :
2024.05.08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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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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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호조는 오늘도 갈려나간다

DUMMY

호조 관헌들에게 불가해한 일이 일어났다.


윤은로가 죽었는데 자기들에게 일폭탄이 떨어진 것이다.


"지금부터 평시서를 혁파한다."


그러니까, 호조 관헌들은 대체 왜, 어째서, 왕이 윤은로를 때려잡고서 평시서를 혁파하겠다고 하는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그냥 바람만 불어도 자기들 앞으로 일폭탄이 떨어지는거 아닌가 싶었다.




평시서(平市署)는 한양 도성의 시전을 관리하는 호조에 속한 아문이다. 이론상으로 하는 일은 많다.


일종의 상인 등록부인 시안(市案)에 따라 시전에서 파는 물품의 종류를 단속하고, 시준법(市准法)이라고 해서 정부 물품 표준가격을 시전 상인 대표들과 논의해서 정하기도 한다.


시전의 자릿세를 걷기도 하는데, 원래는 저화로 걷던 것을 지폐 제도로 바꾸면서 그냥 폐지했다.

공장들에게서 저화 1장 당 지폐 1전 씩 걷었다가 얻어터진 누구랑 달리 평시서에는 딱히 처 맞은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중요한건, 시안에 등록되지 않은 난전(亂廛)도 단속한다는 점이다.


금란에 대해서는 교과서에도 조선 후기 파트에서 금난전권이나 신해통공 같은 이야기가 나오니 학력에 비해 조선사를 모르는 편인 경식도 아는 내용이었다.

금난전권이 시전 상인들에게 있는게 아니라는게 경식이 알던 것과 차이이긴 하다.(*1)


하지만 평시서는 이미 난전 단속의 기능을 잃었다. 대응을 제대로 못하니 다들 한성부에 신고하지 평시서에는 기대도 안 한다.


애초에 평시서가 그걸 제대로 하고 있었으면 왕이 직접 용산까지 가서 직접 토벌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경식이 파악하기로는, 지금 조선은 국가가 관리하는 상업 체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상인층이 성장하기 시작하는 시대다. 그걸 직접 보고 왔는데 누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특히 중요한 것은 이번에 보고 온 포구에서 성장 중인 강상(江商)들의 물류 네트워크에 정부가 아무 행정적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예 아무 것도 없는 수준은 아니다. 선박에 대해서는 대전속록(* 경국대전 이후 추가된 법을 보완하여 편찬한 법제서)에도 규정이 조금 있다. 다만 아예 없지는 않다 수준이지 그다지 의미 있는 수준은 아니다.


상업 활동을 하는 선박에 매기는 세가 있긴 하다. 선박의 크기에 따라 매기는 세금이라는게 문제다. 배에 싣는 물건이 비싼건지, 싼건지, 그 적재량이 얼마인지를 따지지 않는다.


지금 조선에서 상업에 대한 세금이란게 대체로 이렇다.

시전 상인에게 매기는 자릿세나, 선상에 매기는 선세나, 전부 인두세 내지 자본재에 매기는 소유세의 성격이 강하며, 매출이나 유통량 같은걸 따지지 않는다.

정률제가 아니라 정액제인 셈이다.


이런 조세 구조는 형평성에서도 맞지 않고 세입의 측면에서도 세수를 늘리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상업세를 물품 가격에 따라 거두게 할 것이다.


호조참의 이극규에게 설명한 것이 이것이었다.


"전하의 성지가 지극하나, 과연 그걸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정말 좋은 아이디어야. 이제 그걸 누가 하지?


"? 누가 세긴 누가 세. 녹은 왜 받나?"


"?"


안될 거 같은 일이어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뺑이를 치다보면 다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애초에 그것 때문에 평시서를 혁파한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평시서 소속 관원은 꼴랑 4명이다. 이걸론 제대로 된 일 아무것도 못한다.

경식이 보기에는 얘들이 하는건 가아끔 시전 설렁설렁 돌아다니는게 전부인 수준이다.(평시서 관원들이 들으면 '전하, 지금까지 저희를 그런 눈으로 보고 계셨습니까?!' 라고 하고 싶겠지만)


이제 그러지 못할 것이다. 일이 100배는 많아질테니.




신료들은 아니 전하! 상인들은 계속 돌아다니고 물건 가격은 계속 오르내리는데 대체 어떻게 그걸 파악해서 세금을 거두라는 겁니까! 하고 계속 따졌다.


왕은 뻔뻔하게 '그걸 못해? 왜 못해?' 라는 태도로 또 절목을 내렸다.


방법은 간단하다. 한강에서 상업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용산, 마포, 서강 세 포구에 방(坊)을 만든다.

지금은 밀매상들이 몰려서 만들어진 자연 취락인 것을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도시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세계 용사 박경식의 미래지식 치트가 발동한다.


박경식은 이 조선에 라부아지에의 지혜를 도입하기로 했다.


화학이 여기서 왜 나오냐고?


화학 이야기 아니다. 박경식은 문과라서 라부아지에가 화학에서 뭘 했는지도 잘 모른다.


라부아지에는 화학자이기 전에 탁월한 실력의 징세청부업자(* 왕에게 선금을 주는 대신 징세권을 할당받은 업자.)이기도 했다.


'파리 사방을 두르는 성벽을 만들어서 성문마다 세관을 설치하면 파리를 드나드는 모든 물건과 사람에 세금을 매길 수 있겠지?' 라는 끝내주는 아이디어를 입안, 그대로 실행했다.


그리고 그 벌어들인 돈으로 다이아몬드를 태우는 실험 같은 걸 했다. 프랑스 혁명 때 목이 잘린 건 다 이유가 있다.(*2)

박경식은 라부아지에가 화학에서 뭘 발견했는지는 잘 기억 못해도 이런 에피소드는 잘 기억했다.


하여간 조선은 아직도 돈이 없고 무엇보다 급한 관계로 저 '경강 3방' 에는 일단은 목책에 진흙을 바른 단순한 벽(* 목책도니성木柵塗泥城을 말함.)을 두르는 것으로 진행했다.

아무튼 사람이랑 물건 다니는 거 통제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 경강 3방은 도성으로 들어오는 물자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포구들.

여기 길목을 이렇게 막고 들어오는 물자를 통제, 감시한다면 신료들이 걱정하는 '물건 파악 대체 어떻게 하냐고!' 는 일도 아니다.


물론 세를 매기면 포구가 아닌 곳에서 밀매하려는 놈들은 당연히 나오겠지만, 공권력은 둬서 뭣하나? 그런 거 잡아야지.


전국에 이런걸 적용하는건 조선의 지금 경제력과 행정력으로는 언감생심이지만, 한양은 조선 최대의 소비도시요 상업도시.

한양의 물류를 장악하는 것만으로도 지금보다는 훨씬 넉넉하게 세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물류 통제는 이걸로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값은 어떻게 정하지? 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 호조참의 이극규도 나름 생각이 있어 말했다.


"전례를 상고하여 시준법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 가해 보입니다."


위에서 말한, 관헌들이 시전 상인 대표들이랑 협의해서 정하는 고정가격제를 말하는 것이다.


"땡. 틀렸네."


"예?"


신하들은 왕이 감정이 격해지거나 당황하면 말투랑 어휘가 이상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대화에서 뭐 때문에 왕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나 순간 저도 모르게 용안을 올려봤다.


왕은 지금 웃고 있었다.


저러면 꼭 비의를 강하겠다면서 또 신하들 부르던데.




박경식이 생각한 제도는 경매였다.


경식이 조선에 와서 보고야 안 건데, 조선에는 경매라는 제도가 없는듯 했다(*3). 일단 위에서 말했듯 시전에서 거래 자체가 나라가 허락한 가격으로만 가능하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이런 고정가격제는 반드시 암시장을 낳는다. 경제학에서는 초과수요가 발생해서 그렇다고 말하는데, 한마디로 웃돈 주고서라도 더 사려는 사람들이 생긴다는거다.


박경식이 지폐와 쌀 교환 역시 일종의 고정환율제를 운용하고 있는 상태인데, 용산에 보란 듯이 암시장이 발생해서 쌀과 지폐가 매집되고 있던 것도 비슷한 원리다.


그에 대한 원리를 무슨 선을 찍찍 그어 그린 기묘한 그림 - 지금 경식은 최고가격제에서 초과수요가 발생하는 원리를 그래프를 그려 설명 중이다 -으로 왕이 설명을 하는 것을, 신료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경식은 또 다시 이세계 용사의 고독함을 느껴야 했다.


대신 '금상이 즉위하고서 계속 느낀건데 금상께서는 대체 어디서 저런 지식을 얻었단 말인가?' 하는 의혹의 눈초리만 받았다.


경식은 그런 의혹의 눈초리를 무시했다.


그리고 조선인을 위한 눈높이 교육을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서야,


"한양 시전에서 파는 잡물을 사서 지방에 비싼 값으로 파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것일세."


라고 설명하여 신료들이 비로소 알아들었다.


"그러나 전하께서 강하시는 경매로 잡물을 매매하게 하면 반드시 물가가 크게 오를 것입니다."


하고 호조 쪽에서 말했다.


맞다. 잘 알아들었네. 사실 결국 적정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선에 따라 정해지는 법이다.

최고가격제를 폐지해서 암시장을 제도권 내 시장으로 되돌려도 가격이 오르는건 못 막는다.


하지만 지금 정책 의도가 바로 서울의 물가를 올려서 지방의 물자를 끌어들이는 건데 뭐 어쩔건가?


지금이야 다들 지방에서 돈이 그닥 급하지 않아서 상인들이나 지폐를 매집하고 있지만, 세금 낼 때가 다가올 수록 서울로 우르르 와서 물건을 팔려 할 것이다.


"그러한 소식은 모리에 밝은 자들만 모여 흥리(興利)를 취할 것인데, 한성의 부민들이 괴로울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경매의 법이 필요한 것이오. 경매의 값은 만인이 볼 수 있으니, 그 낙찰되는 값을 인쇄하여 전국에 뿌리게 하면 더 많은 상인들이 빠르게 서울로 올라올 것 아니오?

내가 지폐를 팔 때 경기, 충청, 황해에서 값을 후하게 해줘서 미곡을 끌어들인 것과 같은 이치요."



인쇄기를 통한 정보혁명.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와 관련된 이야기는 종교개혁 정도가 유명하지만, 사실 인쇄술로 인해 엄청난 수혜를 입은건 상인 계층이다.


책을 팔아서 돈을 벌었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구텐베르크 인쇄로 만들어진 것 중 제일 유명한건 성경이지만, 사실 인쇄기의 진가는 같은 형식이 반복되는 행정적 서류에서 발휘되었다.

지금 경식이 말하는 시세표 같은게 그렇다.

이런 시세표는 원래 역사에서 유럽에서는 길드 내부 정보로 돌아다녔지만, 이제 조선에서는 전국민에게 공표한다.


경제학에서 제일 효율적이라는 정보가 공개된 완전경쟁 시장.

물론 현실에서는 단 한번도 없었던 이상 속의 존재지만, 경매와 시세 전국 공개를 통해서, 이전의 지정가격제도나 암시장보다는 훨씬 유사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



"서울의 물가를 올려 상인들을 끌어들이려면 돈을 풀어야 하는 법.

이제 인쇄기가 충분히 만들어졌으니, 지폐의 발행을 크게 늘리도록 하시오.


호조는 관헌들과 각사이노에게 줄 녹과 료를 지폐로 계산하여 올리시오.

또한 각사는 공장들을 동원할 때 지폐로 료를 지급하고, 지폐로 걷는 공장세는 추후 이르겠소.

화매소에서 미곡을 사며 지폐를 팔던 것 역시, 앞으로는 내가 내린 경매의 절목에 따라 하시오.

평시서를 혁파하고 세울 아문의 이름은 이조에서 정하고 관헌을 추천해 올리시오.


경강삼방에 대한 개략적인 절목은 이미 내렸으나, 빈전에서 논의하여 상세한 절목을 올리시오.

진행 사항은 5일마다 계본으로 올리고, 특히 경강삼방에 대한 절목은 이번 달 내로 마무리하시오."


뭣? 마지막 말에 신료들 모두의 뒷골이 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 왕은 정말 부하 미치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했다.




경강삼방의 주민들의 시안이 작성되고, 포구에 대충이나마 목책을 두르고, 사주인들의 집이 헐려 관세사(평시서가 바뀐 아문)로 개조가 완료 된 후.


한강에서는 보기 드문 배들의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근대의 전투는 주변을 초토화 시키지는 못하는게 일반적이라 전투가 벌어지면 주변 백성들이 나와서 구경하는게 상례다. 특히 이런 해전이면 더 안심이다.


딱히 컨텐츠가 없이 일상을 보내던 한강변 백성들은 한강에서 벌어지는 실사판 캐러비안의 해적을 보러 나왔다.


"거기서라! 거기서라고!"


"뭔가 오해가 있으신데 우린 수적이 아니외다!"


쫓기면서 억울하다 항변하는 이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평안도에서 내려온 상인이었다.


전근대에는 상인이랑 도적이 대체로 겸직이었다는걸 감안해도 이들은 선량한 편이었다.


너무나 선량해서 관아에 호구 털린 경험이 많아 관헌을 보면 일단 도망치는게 버릇이 된 것 뿐이다.


"아니, 우리가 너흴 갈취하겠다고 하기라도 했느냐? 안심하고 용산포로 돌아가서 팔라니까!"


조선 관헌들의 '안심하여라 백성아' 는 미래 한국 정부의 '안심하십시오 국민 여러분' 만큼이나 믿음직했다. 수장이 이 씨라는 것도 기묘한 공통점이었다.


애초에 용산은 얼마 전에 관아가 와서 박살 낸 곳 아닌가.

소문으로 듣기는 무슨 역적이 숨어 있어서 임금이 직접 나섰다고는 하는데, 그보다 중요한건 교역 중개업자들인 사주인들이 용산에서 싹 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상인들 입장에서는 조정이 또 상인들에게서 뭘 삥 뜯으려고 한 짓 아닌가 생각이 먼저 들만하다.


사실 사주인들이 원래 불법 상인이기도 하니, 사주인과 거래한게 트집 잡혀 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경창에서 쌀과 지폐 바꿔주는게 재개되었다고 해서 들어가볼까 포구 근처에서 알짱거리면서도, 관헌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서 무슨 공사를 자꾸 하니 불안해서 배를 못 대고 있는 참이었는데, 이렇게 수군이 튀어나오니 겁을 먹고 도망치는 것이다.(*4)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평안도랑 함경도에서 미곡을 가지고 와서 남쪽에 파는게 불법이었던지라 상인들도 일단 찔리는게 있어서 더 그렇다.


"주상 전하께서 선상들이 사주인들에게 갈취 당하는 것을 어여삐 여기셔서 새 법을 경장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다! 경창에 쌀을 팔러 온 상인이 맞으면 돌아와라!"


"...?"


그제야 쫓기던 선상들이 멈춰섰다. 설마 관헌이어도 주상 이름을 팔면서 개수작을 부리진 않을 것 아닌가.


"그게 참말입니까?"


"참말이다! 다만 관에서 방을 설치한 마포, 서강, 용산 외에 함부로 배를 대어서 매매를 해서는 안된다.

삼방에서 거래하면 증첩을 주어 화물을 관아에서 지켜주지만, 방 바깥에서 매매하면 벌할 것이야."


어차피 그들이 쌀을 팔러 온 곳은 관아인 경창이다. 이 관헌이 말하는 세 포구가 그 경창이 설치되어 있는 곳. 달리 팔 곳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관헌 말대로 배를 대기로 했다.


이 결과에 실망한건 강 주변에서 구경하던 백성들 뿐이었다.


"뭐야, 수적 때려잡는거 아니었어?"


"시시하게 끝났구만."


"우리 내기한 것은 어찌되는가?"


"저거면 잡힌거로 쳐야하는 것 아닌가? 내가 이긴걸세."


"저게 잡히긴 뭘 잡혀? 지금 보게, 쫓기던 배가 되돌아가는데 관아의 배는 내버려두고 있지 않은가."


"그게 왜? 관아의 배가 바싹 붙어서 포기하고 얌전히 돌아가는거 아닌가!"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억지야!"


"어어, 이놈이 사람 잡으려드네!"




쫓기던 배도 쫓던 배도 모르는 싸움이 한강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것을 뒤로 하고, 쫓기던 배의 선주 평안도 선상 길상이네가 배를 댄 용산포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딱봐도 서리 같은 이가 배를 댄 길상이네에게 와서 물었다.


"경창에 쌀을 팔러 온 것인가? 선상 같은데 방에는 처음 오나?"


"경창에서 지폐를 판다는 방을 보고 온 것은 처음입니다."


"그럼 선안(船案)에 등록해야겠군."


하면서 배의 크기를 보거나, 배의 주인, 배에 누가 얼만큼 타고 있는지, 어디 출신이며 무엇을 주고 사고 파는지 같은걸 캐묻고 적었다.


"무언가 역을 져야합니까?"


"크흠, 대단한 역이랄 건 없고, 지폐 1전만 내게. 저 관고에 이 등록장을 내밀면 이것저것 봐줄 것이야."


"이것저것 봐준다는게...?"


"1전 낼건가, 말건가? 이 등록장이 없으면 여기서 장사 못하네."


관헌들이 평소처럼 뭔가 갈취를 하려고 하니 길상이네는 되려 안심했다.

원래 등록장 작성비는 2문인데 8문이나 서리가 다른 주머니에 챙기고 있다는 사실은 길상이는 모르지만, 아무튼 1전이면 그다지 비싼건 아니다.


길상이가 주저하지 않고 1전을 내자, '설명료' 8문을 받은 서리가 이어 말했다.


"좋네. 크흠. 바쁘니 한번만 설명할테니 잘 듣게. 이 선안에 등록되어 등록장을 가진 선상들은, 관에서 물건을 함부로 갈취하지 않을 것이네."


처음부터 너무나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또한 관에서 설치한 방 내에서 세를 내고 거래한다면, 경강에서 마음대로 장사할 수 있네. 그리고 방에서 열리는 경매에도 참여할 수 있어.


경창에 미곡을 팔고 지폐를 사는 것도 선안에 이름이 올라 있어야 하고 등록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한 관이 설치한 방의 관고에 지폐를 내고 물건을 맡기면 증첩을 주고 물건을 지켜줄 것이며, 관고에 물건을 맡긴 것을 담보로 잡는다면 화매소에서 지폐를 빌릴 수도 있네.


방에 설치된 관아의 방저(坊邸)에서도 지폐를 낸다면 묵을 수 있네.


자네가 1전을 바친 것으로 나라가 베푸는 은혜가 이렇게 크네."


"...지금 그것들이 전부 참말입니까?"


"내가 뭣하러 거짓을 말하겠나? 갈취하려고 했으면 진작에 했지. 못 믿겠으면 저기 군자감, 관고, 방저, 경매장에 가서 물어보게. 다들 등록장만 제시하면 맘대로 하라고 할 것이야."


"조선에 살면서 이런 법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는데 나라가 뒤집히기라도 한 것입니까?"


"뒤집히긴 뭘 뒤집혀. 주상께서 상인들을 어여삐 여기셔서 내리는 은혜인걸 모르겠느냐? 대역죄인 되려는게 아니라면 헛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짐 내리게."


또 관헌이 임금을 거론하자, 그제야 길상이네는 안심하여 맥이 빠졌다.


"우리가 성군이 나신 걸 여태 몰랐네!"


라면서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까지 했다.


현대인 용사 박경식이 봤다면 '아니, 그것 가지고 운다고?!' 라고 당황하겠지만, 원래 전근대인들 감수성이 좀 현대인들이랑 구조가 많이 많이 다르다.


그리고, 상인들이 여태 조선에서 탄압 받은 정도는 미래에서 박경식이 피상적으로 배운 것에 비해 훨씬 혹독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인권 선언에서 '사유재산권을 보장한다'는 구절은 심심해서 들어간게 아니다. 그 이전 전제군주정에서는 권력 앞에서는 재산권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관이 함부로 갈취하지 않는다' 는 선언은 사유재산권에 비해서는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으나, 지금 길상이네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왕이 그들을 신경 써준 건 그들 생애에서는 처음이었다.


적어도, 지금 한강 포구에 들어온 상인들에게 지금 왕은 성군이었다.


---


<이하 미주>


*1 : 흔히 알려져 있는 신해통공과 관련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은 언제 주어진 것인지 불명확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양란 후의 17세기 쯤으로 추정하고 있죠.


*2 : 라부아지에의 이런 일화는 한국 인터넷에 알려져 있는 것은 다소 밈에 가깝습니다. 파리의 성벽은 고대부터 있었고 성벽 관문마다 세관이 설치되어 있던 것은 지중해 문명권에서는 고대부터 보이던 풍경이었지요. 라부아지에가 처형된 원인은 담배의 질을 높히고 소비세를 증대하기 위해 담배 품질 관리제도와 조세 제도를 매우 엄격하게 개혁한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소시민 자영업자들이 대부분인 담배 소매상들이 라부아지에의 까다로운 제도를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라부아지에를 고발한 것이죠.


*3 : 고종 시절 조선은 공박(公拍)이라는 단어로 경매를 불렀습니다. 이 단어는 일본과 인천 조계 조약을 맺으면서야 실록에 처음 나타납니다. 조선에서 경매는 자생적으로 나타난게 아닌 서구와의 접촉으로 들어온 개념으로 보입니다.


*4 : 이 해프닝은 태조 7년 12월 기사의 사건을 모티프로 한 것입니다. 포구에 드나들던 상선들을 사수감 관헌들이 조운에 방해된다며 쫓아냈는데, 기타 물자들이 들어오지 않아 도성의 물가가 치솟았습니다. 흔히 상업이 몰락했다고 알려진 조선 극초기에도 선상들이 도시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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