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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의 빌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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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티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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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7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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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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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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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필드의 빌런 4

DUMMY

*******


에밀리는 사나운 파도에 휩쓸린 느낌이었다.

자신이 모시게 된 한국인 감독과 발맞춰 일하긴커녕 그의 광기에 사로잡혀 피치 위까지 불려 나온 것이다.

심지어 그녀 품에는 감독과 태업하던 선수들의 서약서가 들려 있었다.


‘이게 맞아?’


분명 서늘한 날씨인데 등줄기를 타고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지. 감독님도 무슨 생각이 있으실 거야. 설마 아무 복안도 없이 그런 내기를 하셨을 리가······.’


그녀는 내심 중얼거렸지만 신해성은 여지없이 외쳤다.


“지금부터, 피터버러 감독 대 태업 중인 선수들의 원온원 매치가 시작됩니다! 두구두구두!”


······그냥 미친놈인가?

에밀리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나 태업 중인 선수들은 물론, 무슨 일인가 싶어서 구경 온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까지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러든 말든 신해성은 태업하다 불려온 선수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자, 그럼 경기장 4분의 1 지점으로 골대 하나를 옮기도록!”

“우리한테 골대를 옮기라고?”

“성인팀 와선 훈련 때도 우리 손으로 준비한 적 없는데, 그것도 모르나?”

“소품은 장비 관리팀 몫이고 선수들은 훈련에만 집중하는 게 상식입니다. 이건 어느 구단이든 똑같은 건데······ 아, 하긴. 4부 리그에선 선수들이 직접 하겠네요.”

“지랄한다.”


신해성이 비아냥거리는 선수들을 보며 한국말로 중얼거리자, 선수들이 발끈했다.


“뭐?”

“뭐라는 거야?”

“할 말 있으면 영어로 하시죠.”

“여긴 영국입니다. 당신 나라가 아니라고.”


역시 욕은 만국공용인 걸까?

안 그래도 감독 취임식에서 나온 말들로 인해 잔뜩 예민해져 있던 선수들이 반감을 드러냈다.

그래서인지, 주장 마크 로스 역시 이를 빌미 삼아 선수단 내 자신의 지배력을 은근히 과시했다.


“다들 그만해! 어차피 오늘 지나면 다시 볼 일 없는 인간이야. 지금 무슨 안일한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공식적인 서약서에 서명까지 한 이상 나중에 딴소리 못 해. 우리 손으로 감독을 교체하자고.”


하긴, 팀의 미래를 위해 경력 없는 동양인 감독을 내쫓을 수만 있다면 이깟 말 한마디 못 들어주겠는가?

다들 이런 생각으로 마지못해 골대를 옮겼다.

하나 정작 신해성은 그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구경 나온 선수들에게 물었다.


“골키퍼 봐줄 사람? 둘만 나와서 골문을 좀 지켜줬으면 하는데. 지금은 훈련이 아니니까 소속은 상관없어.”


선수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하나 태업하는 선수들 중 주장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각자 친한 사람이 있어서인지 성인팀 선수들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들이 가만히 있자 어떻게든 기회를 잡고 싶은 유스팀 골키퍼 둘이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손을 들었다.


“저희가 골문 봐도 될까요?”


어쨌든 피터버러 선수단과 신임 감독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역량을 뽐낼 수 있는 기회.

다들 감독을 탓했으면 탓했지, 어린 선수들을 탓할 리는 없기에 지원자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이지. 아직도 안 나오고 뭐 해?”


신해성이 승낙하자 유스팀 골키퍼 둘이 피치로 나왔다.

이제 어느 정도 구색이 갖춰진 셈.

다만, 퍼즐 하나가 잘못 끼워진 것처럼 이질감이 들었다.

바로 신해성의 차림새 때문이었다. 그는 여전히 셔츠바람에, 바지, 운동화 차림이었다.


“아!”


그 사실을 뒤늦게 눈치챈 에밀리가 말했다.


“제가 장비 관리팀에 가서 사이즈 맞는 훈련복이랑 축구화 가져올게요!”

“됐어요. 뭐 그렇게까지.”


신해성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운동화를 벗어서 반듯이 놨다. 이어서 양말 두 짝도 모두 벗어버린 뒤 잔디를 밟았다.


“옛날 생각나고 좋은데.”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말했다.

물에 젖은 잔디의 느낌이, 꼭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축구화도 없어서 맨발로 공을 차던 어린 시절로 돌아온 것 같았다.

동시에······ 역시 자신이 있을 곳은 아직 터치 라인 밖이 아닌 안쪽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쩌다 우연히 떠맡게 된 감독직도 나름 흥미진진했지만 직접 공을 차는 것만 못했다.


“에밀리, 두 눈 크게 뜨고 영상이나 찍어둬요. 피터버러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니까.”


장난 같은 몰골에 거창한 언사.


“광대가 따로 없군.”


마크 로스가 비웃으며 먼저 나섰다. 승산이 확실한 게임을 두고 팀원들 뒤로 숨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제가 먼저 하죠.”


보는 눈이 있어서 그런지 그는 최소한의 존중을 보이며 공을 가져왔다.


“선공은 양보하겠습니다.”


팍!


그가 거칠게 공을 밀어주었다.

좋은 패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기 마련.

하나 마크 로스가 보낸 공은 공격적인 의도뿐이었다.


‘형편없는 공이구만.’


하지만 이런 생각과 달리, 신해성의 입가에는 어린아이 같은 미소가 걸렸다. 그는 맹렬하게 날아든 패스를 가볍게 차올렸다.


툭!


공이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수직으로 떠올랐다.


‘옳지.’


신해성은 이를 무릎으로 받았다.


퉁!


퉁, 퉁······.


왼쪽, 오른쪽 무릎으로 번갈아 트래핑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주위에서 감탄사가 터졌다.


“뭐야?”

“터치 좋은데?”

“그러게. 느낌있어.”


선수들은 척 보면 안다.

몸에 힘이 들어가 있는지, 공과 얼마나 친밀한 사람인지.

당연히 신해성은 모든 면에서 공과 하나였다.

그래서인지 간단한 몸동작에 구경꾼들은 홀딱 매료됐고.


반면 맞은편의 마크 로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압박을······.’


그가 거리를 좁히려는 순간, 신해성의 터치가 길어졌다.


툭······.


무릎으로 공을 띄우지 않고 앞으로 길게 떨구며 발등으로 받은 것이다.


퉁!


공이 마크 로스의 허리 높이로 지나갔다. 애매한 높이 탓에 그가 공을 놓쳤고, 신해성이 갑자기 속도를 올리며 따라붙었다.


퉁! 퉁!


그는 공이 지면에 닿기 전에 차고 달렸다. 커진 보폭에 따라 걷던 걸음이 빠른 뜀박질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공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신해성이 자신의 박자에 맞춰 트래핑을 하고 있다는 뜻.

그야말로 완벽한 볼 컨트롤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저글링 드리블······!”

“거짓말!”


좌중이 술렁이고 있었다.

그럴수록 마크 로스는 목이 타들어갔다.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어차피 일 대 일은 개인기 싸움이다.

남미 선수도 아니고, 동양인 감독에게 이런 프리스타일 축구를 보게 될 줄 상상도 못했던 것이 실책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

순간적으로 신해성을 놓친 마크 로스는 전속력으로 따라붙으며 골대를 등졌다. 그처럼 골문 방향을 막으며 반대쪽을 열어두었다.

기왕 추월당한 김에 상대를 비스듬히 밀어내며 터치 라인 바깥으로 몰아가려는 속셈이었다.


하나 세계 정상급 개인기를 지닌 신해성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높게 트래핑한 공이 떨어질 지점을 앞질렀다. 그렇게 자신을 뒤쫓는 마크 로스를 유인한 뒤, 갑자기 멈춰서며 떨어지는 공을 뒷발로 찍어찼다.


팍!


“······!”


신해성의 바디페인팅에 속아서 한 걸음 더 나갔던 마크 로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미 과부하가 걸린 그는 뒷공간으로 빠지는 공을 홀린 듯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땐 이미 신해성이 방향전환 후 마크 로스의 등 뒤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공을 소유한 뒤로부터 아직 한 번도 지면에 닿지 않아, 흙이나 풀 한 가닥 묻지 않은 채 떨어지는 공을 향해 다리를 휘둘렀다.


뻐엉!


깊게 감아 찬 공이 안쪽으로 휘어지며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짧은 예비 동작과 너무나도 빠른 구속, 부메랑 같은 궤적에 골키퍼는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철썩!


“말했잖아? 나 축구 잘한다고.”


쥐 죽은 듯 조용해진 경기장에 신해성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다들 마른침을 삼킬 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저게 가능한 건가?

그것도 맨발로?

불편한 바지까지 입고?


충격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한껏 실력 발휘를 한 신해성이 재차 입을 열었다.


“자, 다음!”


미꾸라지들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하얗게 질려서 까무라치기 직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들 선수로서의 인생이 걸린 서약서에 서명을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좆됐다!’


뭐 그런 느낌을 받고 있으리라.

하지만 신해성은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곧 떠날 놈들이야 무슨 상관인가?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방금 광경을 목격한 나머지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이제부터 저 눈빛들은 점점 더 공손하고 사려 깊게 바뀔 터였다.

그때, 두 번째 주자가 나섰다.


“다음은 제가 하죠.”

“노아 콜드웰?”


신해성이 아는 체를 하자 센터백, 노아 콜드웰의 눈이 커졌다.


“제 이름을 아십니까?”

“어제 밤새고 공부 좀 했지. 이름, 포지션, 장단점 등등. 특히 미꾸라지들은 더 열심히 외웠어.”

“아······!”


노아 콜드웰의 동공이 흔들리는 찰나.

신해성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다른 구단에 영업 뛰려면 선수들에 대해 자세히 파악해놔야지. 안 그래?”

“······.”

“서약서도 썼겠다, 너희 계약금과 주급을 깎는 한이 있어도 우리 구단에서 먹는 이적료만은 제대로 받고 보내야 할 거 아냐.”


멋대로 착각하고 감동할 뻔했던 미꾸라지들 사이에서 “제기랄”, “빌어먹을!”, “진짜 나쁜 자식” 같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하나 신해성은 전혀 타격받지 않고 상대를 보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다른 팀에서 용돈 받아가며 뛰고 싶지 않으면 지금 존나 열심히 뛰도록.”


그 말에 노아 콜드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존나 잘못 건드렸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드는 눈치였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땐 눈동자에 빳빳한 독기가 서려 있었다.


“이제 좀 볼만하군. 그래, 이래야지.”


이래야 재밌지.

뒷말을 생략한 신해성이 공을 툭 차주며 말했다.


“먼저 해.”


이미 수상할 정도로 실력이 좋은 감독의 개인기를 관람한 바 있는 노아 콜드웰은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꽉 물었다.


‘지면 끝장이다. 신임 감독은 우릴 봐주지 않을 거야. 뺏기면 다시 뺏는다. 결국 먼저 한 골 넣는 쪽이 이기는 거야. 5대 1이니 체력이라도 빼자.’


크게 심호흡한 노아 콜드웰이 천천히 공을 몰고 나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발끝이 불안정하게 느껴지는지.


반면 신해성은 슬슬 거리를 좁힌 뒤 일정 간격을 둔 채 뒤로 빠졌다.

지난 대결이 공격부터 시작했다면 이번엔 수비부터 시작이다.

공을 빼앗아서 공격해야 하니 한 단계 어려워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축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골키퍼 빼고 모든 포지션에서 활약할 수 있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거듭난 선수, 감독들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던 그런 선수가 바로 자신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상대 선수 역시 포지션과 스타일이 계속 바뀌는 데다, 무려 영혼이 걸린 감독직과 선수들 미래가 걸린 계약을 두고 캐삭빵을 벌이는 중이다.

그야말로 스릴 넘치는 상황에 신해성은 입술을 핥았다.


‘넌 어떤 맛일까?’


항상 그렇지만 공을 찰 땐 영원히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횡격막이 오르내릴 때마다 전율이 느껴진달까?

앞으로 피치에서 지워버릴 상대가 넷이나 남았다는 생각에 기대감이 만발한 신해성이 확 치고 나오는 상대에 발 맞춰 달리며 강하게 붙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압박하려는 찰나.

불시에 공을 멈춘 노아 콜드웰이 빈공간으로 허를 찌르는 슛을 때렸다.


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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