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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경원수 님의 서재입니다.

초심을 지킨 회귀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구주부
작품등록일 :
2019.09.02 15:12
최근연재일 :
2019.10.24 11:07
연재수 :
36 회
조회수 :
5,653
추천수 :
227
글자수 :
187,994

작성
19.10.10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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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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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협박과 설득

DUMMY

저녁 식사를 마친 우리는 광장으로 나갔다. 사람들 잘 보이는 곳에 진화령이 혼자 앉았고, 나와 비요른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주시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 하나같이 진화령을 흘낏대며 지나갔다.


“화령이 누나가 예쁘긴 예뻐. 그치, 형?

“뭐··· 그야 그렇지.”


그야 광장 한가운데 배우나 아이돌이 앉아있으면 엄청 시선이 끌리겠지. 한국이나 이세계나 이런 건 다 똑같았다.

눈길을 주는 사람은 많아도 선뜻 나서서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는데, 화려한 마차가 한 대 서더니 어떤 남자가 내려서 진화령에게 다가갔다. 남자를 향해 반가운 듯 인사한 진화령이 우리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 놈이구나.

나와 비요른이 다가가자 남자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누구신지?”

“황비님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흠칫 놀란 남자가 진화령에게 차갑게 물었다.


“처음부터 이런 의도였습니까?”

“무슨 소리실까, 잊었어요? 접근은 그쪽이 먼저 한 거였다구요. 오늘 다시 보자고 한 것도 그쪽이잖아요.”

“···뭘 원하는 겁니까.”


내가 말했다.


“일단 좀 앉죠. 편하게 계세요, 긴장하고 계시니까 주변에서 자꾸 쳐다보잖아요.”


우리는 광장에 늘어선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여전히 긴장된 표정의 남자를 향해 용건을 꺼냈다.


“긴장하지 마시고요. 그냥 몇 가지 질문에 답변만 해 주시면 됩니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질문은 우리가 합니다. 서비스로 이번만 대답해 드릴게요. 우리는 멸망을 막는 사람들입니다.”


대답을 듣는 남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멸망을 막는다니, 자기를 놀리는 거라고 생각하겠지.


“첫 번째 질문입니다. 지금 황비 전하, 황비궁에 계시죠?”

“···.”

“아니라는 것도 아니고, 모른다는 것도 아닌 걸 보니, 아무래도 거기 계신가 봅니다?”

“···내가 정체도 모를 괴한들에게 그런 걸 말해줄 줄 알았습니까.”

“어제 오전에 미로정원에서 황비님과 근위대장 사이의 로맨스가 결국 파국을 맞이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그 자리에 직접 계셨죠. 하지만 근위대장은 도망쳤고, 여왕님은 지금 궁에 감금되어 계십니다. 아닙니까?”


충격 받은 남자의 얼굴이 정답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남자가 입을 열 타이밍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 마세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중요한 건 당신이 황비궁의 관리관이라는 겁니다. 황비궁의 모든 걸 책임지는 당신이 황비님의 로맨스를 전혀 몰랐을까요? 아니면 알면서 모른 척 하고 있었을까요? 심지어 무슨 일조를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

“그렇다면 저는 황제 폐하께 당신에 대해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요?”

“나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관리관의 외침에 주변의 이목이 확 집중됐다. 아차 싶은 관리관이 다시 조용해지자 곧 사람들은 다시 제 할 일로 돌아갔다.

이제 관리관은 우리를 뭐라고 생각할까, 황궁의 비밀 감찰관? 어쨌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웃음 띤 얼굴로 친절하게 말했다.


“저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협조하느냐에 따라서 제 생각이 정해지겠지요.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황비님은 지금 궁에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우리는 비밀리에 황비님을 뵙고 싶습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는 황비님의 편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우리를 기꺼이 도울 겁니다, 맞습니까?”

“아까 묻기만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관리관이 애써 낮춘 목소리로 성을 냈다. 그래봤자 하나도 안 무섭다.


“지금 묻고 있잖아요. 당.신.이.도.울.거.지.요? 물론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어차피 관리관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



두근두근, 심장이 조급증 걸린 것처럼 뛴다. 그야 사자 아가리로 머리를 들이밀고 있으니 당연하겠지. 우리는 관리관을 따라서 황비궁에 들어와 있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복도에 우리 네 사람의 발소리만 울렸다. 이미 밤이 깊어 창밖은 어둡고, 군데군데 마력등이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복도의 끝, 큰 문 앞을 기사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문 앞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서 섰고, 관리관이 한 발 나서서 입을 열었다.


“황비 전하의 상심을 달래러 멀리 동방의 진귀한 악공과 무희를 모셔왔으니 문을 열어 주시오.”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잘라 말한 기사는 비켜 설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관리관은


“황비 전하께서는 몇 시간 째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계시오. 전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정녕 모르겠소? 폐하께서 황비 전하를 이곳에 두신 것은 마음과 생각을 정리하라는 것일저, 혹여 기어코 전하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한다면 무엇으로 그 죄를 씻으려고 하오?”

“그러나···.”


남자는 기사의 말허리를 단숨에 잘라버리고 말을 이었다.


“내가 오늘 모셔온 분들은 멀리 동방의 신비로운 음악과 춤으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데 일가견이 있는 귀한 분들이오. 나는 다만 황비 전하의 마음을 달래어 혹여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할 따름이니 폐하께서도 달리 생각하시지 않으실 것이오. 내가 누구요? 황비 전하의 사촌이오. 나를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소.”

“···.”

“내가 소싯적부터 지켜본 바, 황비 전하는 여리고 책임감이 강한 분이시오. 지금 전하께서는 순간의 미혹에 황제 전하에게 상처 입힌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계시오. 정녕 황비 전하의 옥체에 피가 흐르고 당신은 분노하신 황제 폐하의 단칼에 귀신이 되어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은 무덤에 들어가는 꼴을 보아야만 정신을 차리겠단 말이오.”


멸문지화라니,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협박에 질린 기사가 옆으로 비켜섰다. 다른 기사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이 양반 말하는 솜씨를 보니 내 어줍잖은 협박 따위에 넘어갈 양반이 아닌 것 같다. 광장에서 내 억지에 넘어간 것은 정말로 두려워서 그랬던 게 아닌 모양이다. 3일 뒤 처형당할 황비의 사촌으로서 무슨 수라도 쓰고 싶었던 거 아닐까.


관리관이 문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황비 전하, 들어가겠습니다.”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관리관은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열었다. 우리는 관리관을 앞세우고 방에 들어섰다.


넓은 방은 어둡고 조용했다. 커튼 틈으로 새어드는 달빛만으로 어렴풋하게 방의 모습이 드러났다. 침대 한 켠에 여인의 그림자가 미동도 없이 걸터앉아 있었다. 황비였다. 테이블 위에는 접시 위의 음식과 컵에 따라진 물이 손 대지 않은 채로 놓아져 있었다.


“황비 전하. 무어라도 드셔야지요.”


관리관의 말에 황비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관리관이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낙담한 표정이었으리라.

내가 진화령을 보고 말했다.


“부탁해요.”


진화령이 품에서 피리를 꺼냈다. 관리관이 챙겨 준 동방의 악기였다. 창가 아래 선 진화령이 달빛을 받으며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밖의 기사들은 황비 전하의 마음을 달래는 가무가 시작된 줄로 알 것이었다.

나는 황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맞추고 말했다.


“황비 전하, 저희는 전하를 구하러 왔습니다.”


바닥만 쳐다보던 눈동자가 스르르 움직여 나와 눈을 맞췄다.


“저희와 함께 나가시지요. 저희가 모셔다 드릴 수 있습니다.”


황궁은 제국에서 가장 경계가 삼엄하고 방호가 철저한 곳이지만, 주로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는 것과 황제의 경호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삐약이를 불러서 전력으로 도망치면 잡히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황비는 쉬이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내가 덧붙였다.


“근위대장님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폐하께서 자신은 죽이지 않을 것이란 황비님의 말씀을 믿고 피눈물을 머금고 탈출하셨지만, 아시잖습니까, 광장에서 처형대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나는···.”


황비의 메마른 목소리에는 아무런 생기가 없었다. 사건이 터진 지 고작 몇 시간 만에 이렇게나 시들어 버린 것이다.


“···나는 그럴 만한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제국의 아비를 배신하고 제국의 방패가 주인의 가슴을 찌르도록 만든 사람입니다.”


황비와 근위대장의 로맨스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지금 황비는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 말하고 있지만, 글쎄, 자책 외에는 아무 생각도 못하고 있는 상태일 것이다. 게다가 지금 중요한 건 누구의 잘못인지가 아니었다.


“3일 뒤 황비님이 처형대에 설 때 근위대장님이 돌아올 것입니다. 근위대장님은 황비님을 구하러 왔으되 자신을 바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황비님을 되찾으러 오는 것입니다.”

“···.”

“그러면 어찌 되실지 아실 겁니다. 수많은 시민이 죽고 다칠 겁니다.”

“근위대장님 한 명에게 상처 입을 만큼 제국은 나약하지 않습니다.”

“그···.”


말문이 턱 막혔다. 황비의 말이 맞는 것이다. 근위대장이 아무리 강력한 마검사여서야 수도의 전력을 상대로는 어림없다. 3일 뒤의 근위대장이 진정한 위협이 되는 것은 금단의 힘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말해 봐야 믿을 리가 없지. ‘미래를 봤다고요? 무슨 개똥같은 소리세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살짝 열고 나간 관리관이 곧 돌아오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곧 오실 걸세. 지금 황궁에서 출발하셨다네.”


젠장, 되는 일이 없냐. 황비의 그림자 진 얼굴에서 빛나는 눈동자는 처연하고 슬펐지만,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이미 마음을 정한 눈이었다.

황비는 여린 사람이다. 끝까지 나쁜 사람일 수가 없는 것이다.

후···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겠다. 그런데 내일이던 모레던 다시 온다고 해도 황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황비의 태도를 보면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근위대장이 직접 찾아온다면 모를까···.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황비의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근위대장이 직접 찾아온다면···


“황비 전하.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3일 뒤 처형장에서 정말로 큰 참사가 벌어집니다. 지금 황비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면, 저는 참사를 막기 위해 근위대장님을 찾아뵙고 황비님의 의중을 전해 드릴 것입니다.”

“···그래주면 좋겠습니다. 베로칸, 그 사람은 죄가 없어요. 결코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려면 황비님의 말씀이라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 목걸이를 주십시오. 근위대장님께 그걸 보여 드리면 저희를 믿으실 수 있을 겁니다.”


황비는 주저 없이 목걸이를 벗어서 나에게 건넸다. 황비는 이 목걸이의 정체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방을 나서고 문을 닫기 직전, 방 안에서 소리 죽인 흐느낌이 들렸다. 자신을 꽁꽁 얼린 빙산이 녹아 흐르는 소리였다.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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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비극의 끝 (1) +1 19.10.16 76 5 12쪽
30 내가 할 수 있는 일 19.10.14 73 3 13쪽
29 제국의 비밀 서고 19.10.11 80 6 13쪽
» 협박과 설득 19.10.10 95 6 11쪽
27 동방의 꽃 +1 19.10.09 90 5 12쪽
26 미로정원 +2 19.10.08 101 6 12쪽
25 마법사 길드 +1 19.10.07 95 5 14쪽
24 우리의 목적 19.10.02 103 5 8쪽
23 뒷풀이 +1 19.09.30 106 5 13쪽
22 결전의 마무리 +2 19.09.28 87 5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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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싱카리움 (1) +1 19.09.18 147 5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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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화신 각성 (1) +1 19.09.16 148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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