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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경원수 님의 서재입니다.

초심을 지킨 회귀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구주부
작품등록일 :
2019.09.02 15:12
최근연재일 :
2019.10.24 11:07
연재수 :
3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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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8
추천수 :
227
글자수 :
187,994

작성
19.09.1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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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루비오코네의 운 나쁜 하루

DUMMY

루비오코네의 신전으로 발을 옮겼다. 입구는 장대한 홀로 이어졌다.

한쪽에 포션을 판매하는 창구가 있었다. 포션 판매는 신전의 주 수입원 중 하나다. 기도로 정화한 약수에는 신의 영험함이 깃들었다. 포션의 효과는 신의 힘에 따라, 기도하는 신도의 신앙심에 따라 달랐다.


“여기서 뭐가 제일 좋아요?”

“이겁니다. 대신관님이 직접 축성하신 귀한 성물입니다.”


판매를 담당하는 사제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병 하나를 들어올렸다.


“들어 봐도?”


부드럽게 미소 짓는 사제에게 병을 넘겨받았다. 걸죽하고 짙은 주홍 빛깔의 액체가 부드럽게 찰랑였다. 과연 영험해 보이는구만. 병 아랫부분에 붙은 가격표를 보니··· 어마어마했다. 한국식으로 환산하자면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 살 수준이었다.

이렇게 비싼 물건을 그냥 꺼내주는 이유는? 신전에서 도둑질이나 강도짓을 할 미친놈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 같은 놈 말이지.

마개에 힘을 주자 뽕!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뽑혀 나왔다.


“지금 뭐 하시는···!”


두 눈이 휘둥그레진 사제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창구를 돌아 나왔다. 나는 얼른 입구에 입을 대고 꿀떡꿀떡 마셔 버렸다. 아파트 한 채가 부드럽게 목을 넘어갔다.

살면서 이렇게 상쾌해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온 몸에 활력이 넘쳐흘렀다. 아마 내가 모르는 잔병까지 싹 나았을 것이다.

아주 기분 좋게 외쳤다.


“삐약아!”


아무 것도 없던 홀의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거대한 새가 나타나 날개를 펼쳤다. 환상조가 본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홀 안의 사람들이 대경실색하며 주저앉았다.

헐레벌떡 달려오다 제자리에 얼어붙은 사제에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사제님은 나가. 뒤지기 싫으면.”


사제는 나와 삐약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문 밖으로 도망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노호가 홀을 쩌렁쩌렁 울렸다. 올려보니 2층 큰 문 앞에서 금박 입힌 신관복을 멋들어지게 차려 입은 노신관이 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스러운 전당에서 이 무슨 행패란 말입니까!”

“사제님. 제가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노신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상하겠지. 갑자기 쳐들어 온 난동꾼이 대뜸 부탁드릴 것이 있다니.


“지금 사제님들을 다 내보내 주시지 않겠습니까. 불쌍한 사제님들 다치시면 안되잖습니까.”

“사제들이 다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제가 오늘 여길 없애버릴 생각이거든요.”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삐약아, 다 부숴버려!”


빼애애애액!


삐약이가 길게 우는 소리에 홀 안의 모든 사람이 귀를 틀어막았다.

번쩍하는 순간에 홀의 지붕을 뚫고 하늘 높이 올라간 삐약이가 폭격하듯 내리꽂히며 신전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신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건물 무너지는 소리 사이사이로 사람들의 비명이 낭자했다.


“으아아악!”

“신이시여! 저희를 구원하소서! 어어억!”


비명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째 좀 걱정되는데···. 그렇지만 환상조는 말을 다 알아듣는 똑똑한 녀석이다. 그렇지, 삐약아? 사람들 안 다치게 조심하는 거 맞지?

사제고 신도고 참배객이고 할 것 없이 대부분이 건물 밖으로 도망쳤다.

한 무리의 사제들이 노신관의 곁에 모여들었다. 하나같이 꽃과 칼이 그려진 사제복을 입고 있다. 신전의 전투사제단이다. 전투사제들이 날개를 휘둘러 홀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있는 삐약이를 향해 기도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사제단에게서 신력이 일어나더니 삐약이를 향해 그물처럼 덮쳐갔다. 어찌나 강력한지 흐릿한 기운이 아니라 물리적인 파도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웬만한 악마조차 찢어버릴 만한 신의 권세였다.

하지만 삐약이는 가볍게 날개를 털어 기운을 떨치고 부리로 잡아 찢어 버렸다.

기도를 멈춘 사제단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뻔하다. ‘한낱 괴수가 우리 신의 기적을?’ 하지만 환상조는 한낱 괴수가 아니란 말이지.


“진짜 폭삭 무너지는 꼴 보기 싫으면 직접 오라고 해!”


사제단은 수장의 지휘를 받아 다시 기도를 시작했지만 삐약이는 거리낌 없이 철거를 이어갔다. 오히려 전투사제들이 하나 둘씩 탈진하면서 쓰러지기 시작했다.

결국 노신관이 2층의 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열린 문 안쪽, 높은 제단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노신관이 보였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압력이 몸을 내리눌렀다. 왔구나.

낌새를 챈 삐약이가 등 뒤로 날아 내려와 양 날개로 나를 지키듯 감쌌다.

그 목소리가 울렸다.


“어느 미친 놈이 영멸을 원하는가!”

“나다!”

“또 너···!”


목소리에서 당혹감이 뚝뚝 묻어났다. 필멸자 따위에게 하루에 두 번이나 당하고 있으니 그럴 만하지. 난생 처음 겪는 새로운 경험일 거야.


“네놈에겐 영멸도 자비로우리. 영혼을 뽑아내 가시의 관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해 봐.”


목소리가 뚝 끊겼다. 사제들의 얼굴에도 하나같이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신한테 이렇게 막나가는 사람은 처음 보시죠?

그렇지만 신은 단어가 주는 이미지보다 직접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엄청난 신력 소모 때문이다. 그러니 신도 이판사판으로 나오면 모를까, 웬만해선 환상조가 지키는 나를 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방법을 가장 잘 알고 있다. 때론 당사자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더욱 아프다는 것도.


“비요른. 그 애가 너에겐 꽤 특별한 것 같더군.”


압력이 확 사라졌다. 비요른에게 돌아간 것이다. 그 애의 영혼을 괴롭히기 위해···.

뭐, 안 될 테지만.

목소리는 금새 돌아왔다.


“얕은 꾀를 쓰다니!”

“그러니까 문단속을 잘 하셨어야지.”


아까 점집 앞에서 잡신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너 화신 만들어 줄게.”

“지금? 여기서? 당장?”

“꼭 나 아니어도 되지?”

“그게 무슨 소리냐?”

“좀 있으면 비요른한테서 신이 나갈 거야. 그러면 네가 들어가.”

“신이 왜 나가? 그리고 어차피 내 화신도 안할 거 같은데?”

“그냥 때 되면 들어가서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지금 비요른 속에 잡신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한 몸에 두 신이 들어갈 수는 없다.

루비오코네는 자기 자리를 잃은 것이다.


우르르릉.


신전의 잔해들이 저절로 떠오르더니 산사태처럼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순간 밤이 된 듯 시야가 까맣게 가려졌다가, 날갯짓 소리와 함께 다시 확 밝아졌다. 삐약이가 용오름을 불러일으켜 잔해들을 하늘 저 멀리로 날려버린 것이다.

지릴 뻔 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이 양반 진짜 화났나 보다. 필멸자 한 명을 죽이기 위해 직접 위력을 행사하다니. 신력도 엄청나게 소모되는데다, 신들 사이에서 지탄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신전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폭삭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갈 데까지 가자는 건가? 나야 삐약이가 지켜준다 해도 저기 사제들은?

다급하게 외쳤다.


“나랑 내기하자!”

“필요 없다. 너의 영혼을 갈아 마시고 말리라.”

“그럼 영혼을 걸고 내기하자!”

“···말해 봐라.”

“나한테 들어와. 나를 굴복시키면 내 영혼은 너의 것이다. 실패하면 다시는 나타나지···.”

“그렇게 되리라.”


시야가 순식간에 하얗게 타버리더니 다음 순간 아무런 빛도 없는 암흑 속에 떠 있었다.

별 없는 우주 한가운데 떠 있는 기분. 영혼의 공간이다.

멀리서 두 개의 태양이 떴다. 아니다. 태양이 아니라 눈이다. 태양계만큼 거대한 신이 눈을 떴다.

신은 자신의 존재를 대상의 영혼에 투영한다. 필멸자가 자신의 그릇(영혼)을 유지하며 받아들이기엔 신의 존재감은 아득하게 거대하다. 그래서 결국 둘 중 하나다. 그릇이 깨어지거나, 영혼이 신에게 동화되거나.

죽거나, 화신이 되거나.

루비오코네가 나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역사와 위업과 위대함이 밀려왔다. 이것이 조금 전까지 비요른이 겪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말했잖나. 한 몸에 두 신이 들어올 수는 없다고.

또 다른 두 개의 태양이 떴다. 먼저 뜬 태양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밝았다. 먼저 뜬 태양은 새로운 태양에 압도당해 빛을 잃어버렸다.

암흑 공간을 가로지르는 빗금이 한 줄 두 줄 그어지더니, 이윽고 전부 부서져 쏟아져 내렸다.


“마라···.”


정신을 차리니 신전의 홀이었다. 모든 것이 방금 전 그대로였다. 영혼의 공간에서의 시간은 찰나일 뿐이었다.

압력은 사라져 있었다. 사제들은 무릎 꿇은 채 절실하게 기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응답받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한동안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잔해 사이를 휘적휘적 걸었다. 금붙이를 몇 개 집어 들고 신전을 나섰다.



*



무당에게 금붙이를 주고 이빨을 돌려받았다.

비요른은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흔들자 눈을 떴다.


“여기는···.”

“이제 괜찮아. 안전한 곳이야.”


물로 목을 축인 비요른이 흐린 눈으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세상이 암흑으로 변하고··· 신이 나에게 흘러들어와···? 아니, 나를 덮어써···?”

“말하지 않아도 알아. 지금은 좀 더 쉬어.”


갑자기 비요른이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흐리멍텅하던 눈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외침을 토해냈다.


“마녀가 아니었어. 마녀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그 놈이었어!”


루비오코네의 역사가 밀려들었을 때 내가 본 것을 비요른도 봤던 것이다. 주홍 마녀는 수많은 영혼을 강제로 취해 보석으로 만들었고, 비요른의 형은 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홍 마녀는 화신으로서 루비오코네의 의지를 대행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은 신의 바람대로 섬의 괴수를 깨우기 위해서.

그러니 비요른의 진정한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상대는 신이다. 비요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불꽃을 활활 태우면서도 박차고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한낱 필멸자에 불과한 인간이 어떻게 위대한 신을 죽인단 말인가.

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

“신을 죽여야 하는데···?”


이놈 저놈 함부로 부르는 것도 모자라 결국 죽여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토록 불경한 대화라니.


“그래, 도와줄게. 내가 누구라고?”


히죽 미소 짓는 내 얼굴을 본 비요른이 망설이다 대답했다.


“···형.”

“그래. 동생은 형만 믿어라. 대신 오래 걸릴 수도 있는데.”

“얼마가 걸려도 상관없어.”

“그럼 나만 잘 따라 와. 반드시 복수하게 해 줄 테니까.”


그리고 이번엔 비요른을 그렇게 보내지 않겠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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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진화령 (1) +1 19.09.20 156 6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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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싱카리움 (1) +1 19.09.18 145 5 14쪽
12 화신 각성 (2) +1 19.09.17 138 6 10쪽
11 화신 각성 (1) +1 19.09.16 148 6 12쪽
10 사전 준비 +1 19.09.12 159 6 9쪽
» 루비오코네의 운 나쁜 하루 +1 19.09.11 173 7 11쪽
8 신벌 +1 19.09.10 187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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