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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경원수 님의 서재입니다.

초심을 지킨 회귀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구주부
작품등록일 :
2019.09.02 15:12
최근연재일 :
2019.10.24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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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2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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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현실

DUMMY

만원 버스, 30분을 시루 안 콩나물처럼 서 있다가 정자역에서 겨우 자리에 앉았다.

의자에 몸을 묻고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간밤 내내 꿈을 꿔서인지 유난히 피곤했다.

길고 이상한 꿈이었다. 마법과 드래곤이 살아있는 판타지 세상의 멸망을 막는 꿈이라니.

아직 졸려서인지 만원버스에 몸을 실은 지금보다 꿈이 더 현실 같았다.

아니면 나는 꿈으로 현실도피 할 만큼 인생이 불만족스러운가?

물론 그렇지.

판교에서 내렸다.

사원증을 태그하고 8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28살, 모바일 게임 QA 10개월 차.

군대를 전역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1년 넘게 취직을 못하고 알바자리를 전전하다가 겨우 잡은 일자리. 비록 1년 계약직이지만.

원래부터 게임을 좋아해서 업계에 관심이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일자리를 얻게 돼서 기뻤던 것도 잠시다.

포괄임금제라는 명목으로 수당도 나오지 않는 야근이 반복되는 매일.

지루한 단순 작업이 반복되는 정신적 노가다에 가까운 일의 성질.

피라미드의 맨 아랫돌에 낀 먼지에 가까운 취급.

그래서 기쁨이나 열정은 사라진지 오래다. 지금은 그냥 눈 뜨면 기어나가고 새벽에 기어들어오는 기계적인 패턴의 반복.


“성원씨, 빨리 이리 와 봐.”


QA 파트장이 성난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제야.

파트장의 자리로 가자 냅다 서류철이 날아왔다. 얼굴에 퍽 부딪친 종이묶음이 파라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사무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주섬주섬 서류를 집어 보니 일전에 올린 버그 리포트다.


“이거 또 터졌잖아. 신고 엄청 들어왔다잖아. 일 이따위로 할 거야?”

“이거 임의 재현 안 되서 다시 발생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던 건데요···.”

“누가 그래? 밤을 새서라도 찾아야 될 거 아냐.”

“파트장님이···.”

“내가 뭐.”

“파트장님이 보류 지시하신 건데요.”

“근데 뭐.”

“네?”

“내가 죽으라면 죽을 거야? 일 제대로 못한 걸 왜 내 탓을 해?”


개새끼. 지가 한밤에 술 쳐먹고 사무실 기어 들어와서 다 퇴근하라고 해 놓곤 지랄이지.


“성원씨, 계약 기간 두 달 남았나? 연장 안 할거야? 어디 부르는 데 있어서 이래?”

“아닙니다.”

“근데 왜 일을 이따위로 해?”

“죄송합니다.”

“가. 가서 제대로 해.”


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후 파트장은 마우스를 집어 던지더니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맞고에서 물린 모양이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분을 삭이는데 누가 어깨를 툭툭 쳤다.


“커피?”


옆자리의 정 사원이었다. 작년에 같이 입사한 동기이자, 나이가 같아서 친구 먹은 사이다.


탕비실에서 믹스커피를 한 잔씩 타서 옥상으로 나왔다. 군데군데 담배 피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새끼 지랄이 어디 하루이틀이야? 그냥 그러려니 해.”

“그럴 거야.”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 어디 하루이틀인가. 잊어 버려야지.


“오늘 모임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풀자. 다 나온대.”

“무슨 모임?”


아차하는 기색의 정 사원이 서두르듯 대답했다.


“어, 얘기 안 했나? 오늘 7시에 모임 있어. 내가 전달하기로 했는데 깜빡했네. 미안하다.”


뻔하다. 니가 날 부르기로 한 게 아니었겠지. 애초에 나만 없는 단톡방에서 나온 얘기였겠지. 그렇지만 넌 나만 따돌리는 게 미안하니까 자기가 실수한 척 한 걸 테고.

식은 커피를 단숨에 마시고 자리로 돌아왔다.


···


파트장한테 붙잡혀서 모임 장소에 늦었다. 정 사원이 앞장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왔어? 늦었네.”

“아, 왜 이제 와.”

“빨리 와, 벌써 한잔씩 했다.”


정 사원을 발견하고 반갑게 부르는 사람들의 눈빛이 뒤이어 들어오는 나를 발견하자 실망스럽게 변했다. 대놓고 티 내지는 않았지만 다 느낄 수 있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고기에 술이나 마시려고 온 거니까.

술이 몇 잔 돌고, 사람들의 얼굴은 빨개지고, 입은 가벼워졌다.


“야, 오늘 얘한테 진짜 그지 같은 일이 있었는데, 니가 얘기해.”


옆자리 정 사원의 부추김에 오늘 파트장과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걔가 개새끼네. 오빠, 진짜 기분 나빴겠다.”


대각선에 앉은 성 사원이 공감하게 맞장구를 쳤다. 성인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애교 있고, 무엇보다 어리고 귀여운 이 모임의 아이돌 같은 존재.


“이거 마시고 잊어 버려. 쨘-.”


소주잔을 부딪치고 입 안에 털어넣자 기분이 좀 좋아졌다.


화장실에 갔다 오는데 건물 입구에 서 있는 정 사원과 성 사원이 보였다. 바람이라도 쐬는 모양이다.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친구는 왜 왔어? 오빠가 불렀어?”

“내가 불렀을 리가 있나. 벌써 알고 있던데 뭐. 왜, 걔 싫어?”

“아, 몰라. 그냥 싫단 말야. 재미도 없고 찌질하고··· 얼마 전에 여친이랑 깨졌다매? 애초에 어떻게 사귄 건지 몰라.”

“질린 거겠지. 오빠는 계속 안 질리게 해줄게.”


두 입술이 포개졌다.

나는 도망치듯 건물을 떠났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머릿속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만이 너의···]


···


원룸 방의 문을 여는데 현관에 낡은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술 냄새가 훅 끼쳐왔다.

술이 불콰하게 오른 아버지가 깡소주를 마시는 중이었다.


“왜 오셨어요.”

“이리 와서 앉아 봐라.”


주섬주섬 신발을 벗고 앞에 앉았다.


“너 아직도 거기 오락 만드는 데 다니냐.”

“네.”

“사내 새끼가 언제까지 그따위로 살 거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면 정신을 차려야지.”


평소라면 그냥 ‘네네’ 했을 텐데. 그래야 이 자리가 그나마 빨리 지나갔을 텐데.

아는 데도 오늘은 욱하고 말았다.


“제가 어때서요.”

“너 아빠 친구 진형이 알지. 걔 아들이 이번에 삼성에서 대리 달았다더라. 근데 넌 뭐냐? 마약 같은 거나 만들고··· 그렇다고 돈이나 많이 버냐? 겨우 쥐꼬리만 한···.”


오른손이 불타듯 뜨거웠다. 동시에 지렁이가 피부 속을 기어다니는 듯이 가려웠다.


[참지 마··· 내가 도와줄게···]


머릿속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말했다.


“아버지. 그만 하시죠.”


들은 체도 안 한 아버지는 소주잔을 채우면서 원망을 쏟아냈다.


“니 애미가 진작에 아들 새끼가 이 꼬라지가 될 걸 알고 집을 기어나간 거 아냐.”

“나가세요.”

“내가 왜 나가. 이 집 보증금 누가 댔어. 어? 여기가 니 집이야? 내 집이지.”


머릿속 목소리가 더 달콤해졌다.


[저 입을 틀어막아···]


이를 꽉 깨물고 목소리를 떨쳐냈다.


“그럼 내가 나갈게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을 나섰다.


싸구려 모텔방 침대에 누웠다.

토할 것 같은 기분 속에서 목소리만 끊임없이 들려왔다.


[내가 도와줄 테니 나에게 맡겨···]



*



지각했다.

다행히 파트장은 자리에 없었다. 조용히 자리에 앉자마자 정 사원이 물었다.


“어제 언제 갔어? 갑자기 없어졌더라.”

“그냥. 속이 안 좋아서 일찍 나왔어.”

“말이라도 하고 가지. 인애가 서운해 하더라.”


목소리가 혀를 날름대며 끼어들었다.


[거짓말이야. 너도 알잖아?]


“아니까 닥쳐.”

“뭐?”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눈앞이 번쩍했다. 뒤통수를 후려갈긴 파트장이 노성을 질렀다.


“이 새끼야! 어딜 조용히 기어 들어와!”


뒤통수를 감싸 쥔 채 기어들어가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더니 출근도 제대로 못 해? 이런 새끼는 대체 뭘 보고 뽑은 거야.”


오른손이 근질근질했다. 벅벅 긁는데도 나아지질 않았다.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말을 걸었다.


[왜 그러고 있어. 일어나서 머리를 날려 버려.]


“이런 새끼는 당장에 짤라 버려야 되는데. 진짜 세상 좋아졌다. 응? 좋아졌어.”


[다신 말 못하게 혀를 뽑아 버려. 할 수 있어. 도와줄게.]


“하여간 두고 봐. 내가 너 죽어도 연장 못하게 만든다.”


[심장을 뽑아서 눈앞에 보여주는 거야. 그게 마지막 장면이 되게.]


“야! 말을 해!”


발길질에 채인 의자가 흔들렸다. 애써 버티고 있던 내 정신이 무너졌다.

벌떡 일어나서 파트장에게 주먹을 날렸다. 아래턱이 통째로 사라진 파트장의 얼굴에서 피가 쏟아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홉뜬 파트장이 서서히 무너졌다.


“어, 어어어?”


의미 없는 물음을 흘리는 정 사원의 넋 나간 얼굴을 향해 물었다.


“재밌냐?”

“어어?”

“갖고 노니까 재밌냐고.”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 아니었다. 팔을 휘두르자 정 사원의 머리통이 통째로 사라졌다.


“꺄아아아악!”


사무실이 비명으로 가득 찼다. 시끄럽다. 거슬린다. 닥치는 대로 팔과 다리를 휘둘렀다. 온갖 집기가 부서지고 날아다녔다. 사람이 피분수를 터뜨리며 죽어나갔다. 남 주임, 차 대리, 박 과장··· 모두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모두 나를 깔보고 비웃던 사람들.

비명이 솟구칠수록, 피바다가 더 짙어질수록 희열에 차올랐다.

바닥이 무너져서 아래층으로 떨어졌다.

많은 직원들이 잔해에서 일어서는 나를 쳐다봤다. 몇몇은 아는 얼굴이다. 박 사원, 김 부장···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모르는 얼굴이 더 많았다. 아예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나와는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

···.

···상관없다.



*



정신을 차렸을 때는 폐허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넓은 대로 양옆으로 늘어선 높고 번쩍이는 유리 건물들은 모두 무너져 날카로운 무덤으로 변해 있었다. 잔해에 파묻혀 죽어가는 자들의 신음이 무거운 안개처럼 바닥을 흘렀다.

감격에 찬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사납게 메아리쳤다.


[이제 너와 함께 세상으로 돌아가 다시금 사룡이 천하를 지배하리라!]


“넌 안 나갈 건데?”


시큰둥하게 말하고 왼손날을 휘둘러 오른 손목을 잘라버렸다. 검은 연기가 꿈틀대는 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지금껏 머릿속에서 울리던 목소리의 주인인 사룡이 당황한 기색으로 외쳤다.


[무슨 짓이냐!]


“가짜 세상에서 볼 일은 끝났어.”


단호한 말투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사룡이 짓이기듯 말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냐.]


“어제 회식 자리에서. 정신이 확 들더라. 그거 아니었으면 진짜 완전히 넘어갈 뻔 했어. 이름이고 나이고 직업이고··· 환경이 똑같으니까 성격 같은 건 꾸며내도 알아차릴 수가 없더구만. 나도 진짜 나인 줄 알았어.”


[어떻게 알았느냐.]


“나 모솔이었거든.”


[···?]


“여자 만나 본 적 없다고.”


여자랑 헤어지려면 일단 만나야 하는 것이다. 모솔은 헤어질 수가 없다.

이걸 사룡의 실수라고 볼 수는 없다. 무협지에 나올 법한 시대의 상식으로는 눈코입 다 달렸고 팔다리 멀쩡한 남자기 27살 먹을 때까지 모솔이라는 걸 상상할 수도 없었을 테니.

사룡은 겨우 말문을 열었다.


[다 알았으면서 왜 이제야 환상에서 깨어났지.]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거든.”


[네놈이 감히 나를 이용해···!]


분노에 찬 목소리로 고함치는 사룡을 무시하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잘 놀다 간다. 솔직히 두 번은 못 깨어날 것 같아서 또 오진 않을 거야. 잘 있어라!”


마음을 먹고 눈을 감았다. 사룡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눈을 뜨자 호텔방 천장이 보였다.

얼른 묵룡권갑을 벗어서 집어던졌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신과 신력 대결을 한 날 저녁부터 묵룡권갑의 진기를 전력으로 끌어올려 몸을 회복시켰다. 그러다가 결국은 사룡의 꼬임에 넘어가 무의식 속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이번엔 운이 좋아서 빠져나왔지만, 다음에도 같은 행운이 반복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땐 결국 사룡에게 정신을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 언제지? 화들짝 놀라 커튼을 걷자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해안이 보였다. 저 멀리 섬처럼 거대한 고래의 대가리도 보였다.

아뿔싸, 늦었다!

해안을 향해 전력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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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협박과 설득 19.10.10 94 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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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경고 (1) +1 19.09.24 104 6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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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진화령 (2) +1 19.09.21 135 6 9쪽
15 진화령 (1) +1 19.09.20 156 6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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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싱카리움 (1) +1 19.09.18 147 5 14쪽
12 화신 각성 (2) +1 19.09.17 138 6 10쪽
11 화신 각성 (1) +1 19.09.16 148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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