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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경원수 님의 서재입니다.

초심을 지킨 회귀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구주부
작품등록일 :
2019.09.02 15:12
최근연재일 :
2019.10.24 11:07
연재수 :
3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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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7
추천수 :
227
글자수 :
187,994

작성
19.09.0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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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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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또 처음부터야!?

DUMMY

온갖 사물이 분열하면서 사라져가는 세상 속에서, 최종 보스 <종말>은 시야를 가득 메우는 거대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동료들은 진작에 쓰러져 혼자 남은 지 오래였다. 탄막 게임마냥 쏟아지는 공격들을 하나하나 쳐낼 때마다 체력이 뭉텅뭉텅 깎여 나가서 내 체력도 바닥이었다.

아니 왜 이렇게 안 와? 더 이상은 힘들다고.

집채만 한 마력탄을 쳐내면서 나도 모르게 비명처럼 내지르고 말았다.


“빨리 좀 와라!!!”


그 순간 세상이 찢어지는 소리가 천지간을 뒤흔들었다. 검게 소용돌이치는 불길한 하늘의 한 귀퉁이가 길게 찢어지고, 열두 개의 날개를 퍼덕이는 검은 마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반가워라. 늦진 않았네.


“약속은 지켜라, 인간.”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씩 웃으며 엄지를 척 들어줬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괴성을 내지른 대마룡은 이내 숨을 크게 들이켜고, 종말을 향해 브레스를 뿜어냈다.


콰르르르!


종말이 두르고 있는 혼돈의 외피가 브레스에 녹아내렸다.

잘한다 우리 마룡이! 종말을 죽여 버리렴!

물론, 막타는 내 몫이었다.

저 높이, 외피가 녹아내린 자리에 붉은 심장이 노출됐다. 나는 온 힘을 모아 심장을 향해 날아올랐다.

종말의 무수한 공격을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 다만 검을 놓치지 않게 양손으로 꼭 쥐고, 한줄기 빛이 되어 심장을 향해 날았다.

마침내 검 끝이 심장에 닿는 순간, 온 힘을 다해 밀어 넣었다.

종말은 형언할 수 없는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심장부터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먼지처럼, 연기처럼.

디딜 자리를 잃은 나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거꾸로 뒤집힌 시야 속에서, 분열하던 세상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의식이 흐려졌다.

이번에야말로···!



*



그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시벌?”


발작하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

끝 간 데 없이 넓고, 티끌 한 점 없이 그저 새하얀 공간.

땅 위에 내려앉는 수천 마리의 검은 까마귀 떼.

그리고 흰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감격 어린 표정.


“드디어 오셨군요···!”


환장하겠네, 또 처음부터야!? 도대체가 보스까지 잡았는데 처음으로 돌아오는 게 어딨어?


“반가워요. 저는···.”


저는 여신이고 여기는 어디고 당신은 세상을 구하러 왔고 어쩌고저쩌고··· 토씨 하나 안 틀린 대사를 천 번을 넘게 들었다. 요약하면 ‘이세계에서 소환된 용사여, 세상의 멸망을 막아 주세요!’

다 아니까 스킵하자.


“알아요. 반지 주세요.”

“그걸 어떻게···.”

“어차피 줄 거잖아요.”


손을 척 내밀고 단호한 표정으로 여자의 눈을 응시했다.

시야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 새하얀 공간에서 눈도 깜빡 않는 수천 마리의 검은 까마귀에게 주목받고 있다. 여기는 정신병 생기기 딱 좋은 곳이다. 빨리 나가야지.

설명도 듣지 않고 반지부터 요구하는 태도에 여자는 당황했지만, 결국엔 언제나처럼 자기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서 내 손바닥에 올려줬다.

오른손 검지에 반지를 끼웠다.

까마귀가 일제히 날아오르며 폭풍이 이는 듯 바람이 몰아쳤다. 까악대는 소리가 고막을 찢어놓을 듯 파고들었다.

빌어먹을 까마귀들. 처음엔 딱 한 마리였는데, 여기 올 때마다 한 마리씩 늘어나더니 지금은 셀 수도 없다.

세상이 어두워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언제나처럼.



*



내 소개를 해보자.

28세, 남자, 군필, 대학 졸업 후 1년 넘게 알바 자리나 전전하다가 겨우 취직.

어느 날 퇴근길에 갑자기 이세계로 소환됨.

···이렇게 억울할 수가 있나! 차라리 취직하기 전에 불려오면 덜 억울하기라도 하지. 비록 1년 계약직이지만, 이제야 방구석 벗어나서 사람 사는 기분을 맛보는 중이었는데 끌려오다니. 집구석 구박데기에서 집안의 기둥 된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다고 주지육림의 하렘왕을 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곧 멸망할 세계의 구원자라니, 순 뺑이만 치는 역할이잖아.

심지어 최종보스를 때려잡아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회귀 인생은 너무하지 않냐?

그랬다. 천 번이 넘게 회귀했고, 몇 번이나 세계를 멸망시키는 원흉인 <종말>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그럼 이세계의 구원자로 돈방석에 앉아서 여생을 누리던,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서 다음날 출근하던 해야 할 텐데, 어찌 된 게 내가 죽던 종말이 죽던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


얼굴에 뜨거운 햇빛을 느끼며 눈을 떴다.

한낮의 숲길이다. 항상 여기에서 시작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늘 아래 바위에 가 앉았다. 허리춤의 수통을 꺼내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뻐근한 팔다리 스트레칭을 좀 하다보면,


“꺄아아아악!”


저 너머에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숨넘어갈 듯 위태로운 소리지만 급할 것 없다··· 라는 사실을 아는데, 아는데도 심장이 제멋대로 두근두근 뛰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도, 비명 소리를 ‘처음’ 듣는 순간엔 이렇게 되어 버렸다.

일단 비명 소리를 무시하고 반대편 길로 갔다. 조금 가다보니 수풀 사이로 빛나는 것이 보였다. 버려진 단검이다. 이걸 안 챙기고 갔다가 끔살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까이 가서 단검을 주워 들었다. 수십 수백만 번 손에 쥔 무기인데도, 손바닥에 낡은 가죽 손잡이가 감기는 느낌이 어색했다.

당연하지, 이번 생엔 ‘처음’이니까.

하필 그 따위 대답을 해 가지곤.


···


하얀 세계의 여신이 소원을 물어본 건 처음 한 번 뿐이었다.


“당신은 영원히 되풀이되는 인생을 살게 될 겁니다.”

“당신이 이 세상의 멸망을 막을 때까지.”

“시련과 고난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고, 때로 약간의 기쁨과 성취감과 행복이 당신을 찾겠지만 신기루처럼 사라지겠죠.”

“그런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요.”


당시엔 찬스가 한 번 뿐인 줄 몰랐다. 알았으면 훨씬 고민해서 대답했겠지. 그래서 그냥 단순하게 생각했다.


음··· 끝없이 되풀이 된다라.

어렵고 지루하고 끝없이 먼 길을 반복해야 가야 한단 말이지.

그렇다면 역시···.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다.


“초심을 잃지 않는 거죠.”


이런 학교 교육 잘 받은 병신 같으니···.

덕분에 이 꼴이다. 처음으로 회귀할 때마다 싹 다 날아간다.

육체만 원래대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이 세계에서 행한 경험도, 경험으로 얻은 능력도, 경험으로 얻은 이해도, 경험으로 변한 성격도 싹 다 날아가고, 맨 처음 하얀 세계로 끌려왔을 때로 돌아간다.

남는 건 기억과 지식 뿐.


···


한 손으로 쥐어 보고, 다른 손으로 쥐어 보고, 손바닥에서 빙글 돌려도 보고, 허공에 던졌다 받기도 하면서 감각이 익숙해질 때까지 칼을 가지고 놀았다.

손에 좀 익으면 동작 연습을 했다. 땅에서 뭘 줍듯이 몸을 숙이다가, 순간적으로 팽그르르 돌아서 팍!


“꺄아아아아악!”


연습하는 동안에도 여자의 비명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되게 보채네. 거 좀 기다리쇼! 곧 죽을 양반이 뭐 그렇게 급하다고. 아니면 내가 죽겠지만.

동작이 좀 익숙해진 느낌이 들었다. 칼을 뒤춤에 꽂고 비명 소리를 향해 걸었다.


비명 소리를 쫓아 야트막한 언덕을 넘었다.

땅바닥에 옷이 걸레짝이 돼서 헐벗다시피 한 여자가 쓰러져 있다. 눈이 마주치자 허겁지겁 기다시피 다가왔다.


“살려주세요.”


무섭다.

알아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다. 아니지, 아니까 무서운 거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데, 경험하는 건 처음이니까.

겉옷을 벗어서 여자에게 두르고 길가 바위에 앉혔다. 여자가 쓰러져 있던 바닥에 떨어진 배낭을 들고 와서 바위 옆 나무 둥치에 내려놓았다.

여자 옆에 앉아서 가만히 기다리자, 좀 진정이 된 여자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아는 얘기다. 아는 얘긴데··· 얘는 아까 여신처럼 스킵하면 안 되고 잘 들어야 한다.

의심하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되거든. 그러면 바로 전투로 들어간다.

지금은 절대 못 이기는 상대, 결과는? 끔살.

끄덕끄덕 공감하는 척하면서 얘기를 들었다. 여자는 처음 들으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썰을 한참이나 풀더니, 목이 마르다며 배낭의 물통을 달랬다.

때가 됐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긴장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몸을 일으켰다.

나무 둥치 앞에서 허리를 숙여 배낭을 여는 척하면서, 눈은 배낭이 아니라 발치를 잘 보고 있다가 그림자가 힐끗 하는 순간, 연습한 것처럼 몸을 핑그르르 돌려서 등 뒤에서 습격해오는 여자를 피하고 뒷통수를 힘껏 밀어 버렸다.


쾅!


여자의 얼굴이 나무에 처박혔다. 재빨리 칼을 뽑아서 새하얀 목 뒤를 찍었다. 칼날이 살을 찢고 뼈를 부수면서 파고들었다. 소름이 쫙 돋아서 손잡이를 놓아 버렸다.

여자의 시체가 나무에 기댄 채 서서히 미끄러지다가 옆으로 쓰러졌다. 무릎에 힘이 빠진 나도 허물어졌다.

손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심장은 가슴뼈를 부수고 튀어 나갈 것만 같다.

첫 경험. 첫 살인.

아니, 사람은 아니지만··· 하여튼, 난 원래 개미보다 큰 벌레 죽이는 것도 못하는 사람이다. 바퀴벌레도 때려죽이지 못하고 으악으악 비명이나 지르다가 쓰레받기로 내다 버릴 정도란 말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더라도 충격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언젠간 다시 익숙해 지겠지만···.

한참을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다가, 겨우 진정이 되어 일어섰다.


···


뭐든지 첫인상이 중요하다.

이세계에 뚝 떨어지자마자 사람 속여먹는 마족을 만나게 되는 건 이런 의미인가?


[여기서는 항상 뒤통수 조심해라.]


맞는 말이다. 더불어 이런 뜻도 있겠지.


[아는 것만으로는 소용없다.]


‘결정적인 순간에 홱 돌아서 피하고 나무에 대가리 처박기’ 동작 연습을 제대로 안했다가 알면서도 당한 적 여러 번이다.

미리 아는 것은 단지 기회일 뿐이다. 기회를 제대로 잡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쓰러진 여자의 시체를 뒤집어서 얼굴을 드러냈다. 동공이 크게 벌어져 온통 새까만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무섭다. 그래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런 것에 빨리 익숙해져야한다. 공포에 사로잡히면 몸이 굳는다. 세상 모든 걸 알아도 정작 필요할 때 움직이지 못하면 당할 수밖에 없다.

주먹만 한 바위를 주워다가 입가를 내리쳤다. 입이 박살나면서 피가 튀었다. 몇 번 더 내리치자 이빨이 부서졌다. 이빨 조각에 베이지 않게 조심해서 입 속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피와 이빨 잔해 사이에서 송곳니 한 쌍을 꺼냈다.


흡혈마 중에서도 매혹의 분파는 상대의 피를 빨 때만 송곳니가 돋는다. 그래서 알면서도 속는 척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처음 만났을 때 틈을 봐서 심장에 칼을 박는 게 편하고, 무엇보다 더 안전하다.

이 송곳니를 상대방에게 박아 넣으면, 상대방은 그의 노예가 된다. 몇 번이나 되어 봤는데··· 추천하고 싶지 않은 기억뿐이다. 흡혈마를 소탕하러 온 모험가들에게 썰려 죽을 땐 그나마 다행이다. 고문이 취미인 귀족에게 팔리건 건···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물론 썩 나쁘지 않은 기억도 있다. 가시의 여왕님 마음에 들었을 때는··· 나는 내 인생에 여왕님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흠흠, 하여튼.

어허, 똘똘이 이 녀석. 다시 자리에 앉지 못할까.


가방에서 꺼낸 붕대로 송곳니를 잘 감싸서 가방에 넣었다. 송곳니는 비싸게 팔 수 있어서 초반에 큰 도움이 된다. 마굿간에서 자는 대신 푹신한 침대에서 뜨끈한 밥상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지. 그래도 팔지는 않을 생각이다.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것이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았다. 부지런히 가면 해질녘엔 마을에 도착한다.

빨리 가서 쉬어둬야 한다. 오늘 죽기 싫으니까.


작가의말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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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제국의 비밀 서고 19.10.11 80 6 13쪽
28 협박과 설득 19.10.10 94 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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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마법사 길드 +1 19.10.07 95 5 14쪽
24 우리의 목적 19.10.02 103 5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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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결전의 마무리 +2 19.09.28 87 5 7쪽
21 다른 현실 +1 19.09.27 90 5 12쪽
20 해변의 결전 +1 19.09.26 97 5 14쪽
19 경고 (2) +1 19.09.25 95 6 10쪽
18 경고 (1) +1 19.09.24 104 6 15쪽
17 진화령 (3) +1 19.09.23 121 7 14쪽
16 진화령 (2) +1 19.09.21 135 6 9쪽
15 진화령 (1) +1 19.09.20 156 6 10쪽
14 싱카리움 (2) +1 19.09.19 135 6 12쪽
13 싱카리움 (1) +1 19.09.18 147 5 14쪽
12 화신 각성 (2) +1 19.09.17 138 6 10쪽
11 화신 각성 (1) +1 19.09.16 148 6 12쪽
10 사전 준비 +1 19.09.12 161 6 9쪽
9 루비오코네의 운 나쁜 하루 +1 19.09.11 174 7 11쪽
8 신벌 +1 19.09.10 188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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