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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경원수 님의 서재입니다.

초심을 지킨 회귀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구주부
작품등록일 :
2019.09.02 15:12
최근연재일 :
2019.10.24 11:07
연재수 :
3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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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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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글자수 :
187,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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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6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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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비극의 끝 (1)

DUMMY

삐약이가 옥상 위에 내려앉는 동안 나와 비요른은 복면을 뒤집어썼다. 황제가 주관하는 처형식에서 깽판을 칠 건데, 대역죄인으로 몰려서 인생 종치면 안 되잖아.

바닥으로 뛰어내린 내가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않는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너 뭐야! 왜 황비를 노린 거야!”

“으···.”

“대답해!”

“꿈에서··· 그 분께서···.”


단 두 마디를 내뱉은 남자는 그만 까무룩 기절해 버렸다. 뺨을 수차례 후려쳤지만 눈꺼풀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젠장!”


남자가 황비를 노렸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꿈에서 그 분이 뭐 어쨌다고? 이것만 갖고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잡신이 의외의 말을 했다.


“야, 알 것 같다.”

“뭘?”

“얘한테서도 냄새가 난다. 황제한테서 맡은 것과 같은 신의 냄새가.”


퍼뜩 희미한 깨달음이 왔다. 그런데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생각인지라,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은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다 신의 농간이라고?”


황제가 황비와 근위대장의 밀회를 급습한 것도, 분노한 근위대장의 눈앞에서 황비가 죽어 버리는 것도, 어떤 한 신이 계획한 일이라고?

왜? 무엇을 위해서? 도대체 어느 미친 신이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 마계와 고속도로가 뚫리는 미래를 원하겠는가.

나도 모르게 잡신에게 따지듯 소리쳤다.


“말이 안 되잖아. 어떤 신이 그런 미친 짓을 해!”

“왜, 신은 미친 짓 안 할 것 같냐?”


물론 신도 미친 짓을 한다. 신들의 도시 툴라에서는 열두 신의 화신이 다른 신들의 성전을 파괴하고 신도들을 억압하며 강제로 개종을 요구했었다. 앞으로도 그들은 더 많은 힘이 필요할 때마다 더 억압적으로 나올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대륙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다는 나름의 명분이 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오로지 죽음과 혼란을 불러 올 뿐이었다.

의문스러운 것이 산더미였지만 깊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옥상 밖을 내다보던 비요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형! 빨리 뭐라도 해야겠는데!”


비요른의 옆에서 광장을 내다보니 처형대를 두텁게 둘러싼 수도기사단과 근위대장이 금방이라도 마주칠 기세였다. 당장 무엇이라도 행동에 옮겨야 했다.


황비의 암살을 막았으니 적어도 근위대장이 당장 폭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차라리 전쟁으로 부르는 것이 어울리는 전투가 벌어지게 둘 수는 없었다.


나와 비요른이 기절한 남자를 삐약이의 등에 태우고 날아올랐다. 삐약이는 공중을 크게 돌아 수도기사단의 뒤쪽에서 처형대를 향해 접근했다. 뒤늦게 처형대를 덮치듯 쏟아져 내리는 거대한 새를 발견한 병사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병사들은 화살을 발사하지 못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진화령이 병사들의 틈으로 뛰어들어 난투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진화령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미리 군중들 틈에 숨어 있다가 우리가 처형대로 접근하자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이대로 처형대에 착륙하나 싶었던 순간 하늘 한쪽에서 우리를 향해 십여 개의 마력탄이 날아들었다. 마법사 길드에서 출발한 전투마법사들이 도착한 것이다. 마력탄을 하나라도 맞으면 삐약이는 몰라도 우리는 다 추락할 판이었다.

비요른이 급히 활시위를 당겼지만, 이미 늦었다. 마력탄은 코앞까지 쇄도해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처럼 외쳤다.


“꽉 잡아!”


퍼버버버벙!


마력탄 폭발하는 소리만 연달아 귀청을 때릴 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삐약이의 머리깃과 날개, 꼬리깃이 오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삐약이가 강력한 보호막을 펼쳐낸 것이다!


“삐약이 만세!”

“삐약아아아아! 만세에에!”


나와 비요른이 만세를 부르짖는 사이에 삐약이가 황비 근처에 내려앉았다. 더 이상 마법은 날아들지 않았다. 혹시라도 황비가 말려들까 섣불리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약이의 등에서 얼른 뛰어내렸다.

황비에게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진화령이 그제야 한숨을 돌리더니 장난스레 말했다.


“휴··· 이번엔 안 늦었네요?”


윽. 아픈 델 찌르시네.


“앞으로도 안 늦을게요.”

“다음에 늦으면?”

“원하는 거 하나 들어 줄게요.”

“좋아요··· 야압!”


더 잡담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기합성을 내지른 진화령이 돌진해 오는 기사에게 뛰어들었고 비요른은 신력 화살로 그녀를 엄호했다. 무엇보다 든든한 것은 삐약이었다. 삐약이가 크게 날개짓을 하자 강력한 돌풍이 반대쪽의 기사들을 휩쓸어 버렸다.


그들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나는 내 역할을 해야 한다. 나는 황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황비 전하.”


황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제 보니 황비의 시선은 오로지 근위대장에게 붙박여 있었다. 지금 그녀의 세상에는 오로지 근위대장 뿐, 다른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꽤나 로맨틱한 상황이다만, 한가하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미리 죄송합니다, 황비 전하!


짝!


한 손으로 발개진 뺨을 감싸 쥔 황비의 눈동자에 그제야 빛이 돌아왔다. 나는 슬쩍 복면을 들어 얼굴을 드러냈다. 황비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또 뵙습니다. 그간 강녕 하셨죠?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 저희와 함께 여길 벗어나 주셔야겠습니다.”


하지만 황비의 시선은 금세 근위대장에게 돌아갔다.


“저기를 보세요, 나를 위해 죽음을 각오한 남자가 있습니다. 내가 어찌 그를 두고 간다는 말입니까.”

“어차피 근위대장님은 황비 전하를 쫓아오실 겁니다. 누가 지금의 근위대장님을 막겠습니까.”


황비가 선뜻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 와중에, 어느 기사의 외침에 함성이 터져 올랐다.


“황제 폐하께서 오신다!”

“근위대가 온다! 조금만 더 버텨라!”

“우아아아아아아!”


황궁 쪽에서 출발한 근위기사 부대의 맨 앞에 황제가 있었다. 흑마를 타고 언덕을 질주하는 기사들은 금세 처형대에 도착할 것이다. 젠장! 이 아줌마야, 진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수도 시민들을 다 죽이실 셈입니까!”


황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근위대장님이 황비 전하를 구할 때까지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것 같습니까. 수백? 수천? 아무런 죄도 없는 제국 시민들이 당신들 때문에 죽는단 말입니다!”


이를 앙다문 황비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아니, 울 때가 아니라니까요! 에라이, 묻지 말고 처음부터 그냥 납치를 해 버렸어야··· 그 순간 황비의 입에서 기다리던 대답이 나왔다.


“···가요.”

“삐약아! 비요른! 화령씨!”


황비의 손목을 낚아채고 같이 삐약이에 올랐다. 그 다음엔 비요른이, 마지막으로 기사 한 명을 날려 보낸 진화령이 훌쩍 뛰어 올라탔다.

삐약이가 세차게 날개짓을 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폭풍 같은 바람에 떠밀린 기사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나뒹굴었다.

서둘러 황비에게 물었다.


“황비 전하와 근위대장님만 아는 장소 없어요?”

“예?”


황비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돌아보기만 했다.


“그런 거 있잖아요. 둘만 아는 비밀의 장소!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어···.”

“고백한 곳이나 첫키스한 장소 같은 거!”

“으··· 라크샤 평원? 거기서 근위대장님이 처음으로 고백을···.”

“알겠습니다!”


갑자기 눈앞이 새까매지고 피부가 후끈거렸다. 지상에서 솟구친 검은 마기가 우리 앞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어휴··· 깜짝 놀라긴 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공격은 일부러 빗나간 것이 분명했다. 우리에게는 황비가 있으니까.


보호막을 펼친 삐약이가 근위대장의 머리 위로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목소리가 들릴 만한 높이에서 내가 우렁차게 외쳤다.


“근위대장!”


갑자기 내가 식상한 멜로액션물의 악역이 되는 것 같군.


“황비를 되찾고 싶다면 처음 고백한 곳으로 찾아와라! 반드시 혼자 와야 한다!”


우리는 갑자기 얼떨떨한 얼굴이 된 모두를 내버려두고 전속력으로 수도를 벗어났다.



*



밤이 내린 라크샤 평원은 쌀쌀했다. 우리는 평원 한가운데 덩그러니 자리한 폐허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삐약이에게 나란히 기댄 채 깃털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긴장을 내려놓을 틈이 없는 하루였다. 다들 피곤한지 별다른 말이 없어 조용한 가운데 가끔 날짐승의 울음소리만이 저 멀리서 들려왔다.

문득 나직한 목소리가 정적을 흩어놓았다.


“그 날도 오늘처럼 달이 밝았어요···.”


황제가 황비와 근위대를 대동하여 라크샤 평원으로 매사냥을 나온 어느 날 밤이었다. 진탕 취한 황제가 꿈에 취한 동안, 황비와 근위대장은 오래전에 무너진 신전의 폐허에서 무너지고야 말 사랑을 남몰래 속삭였다.


황제에게 황비는 사람보다 전리품에 가까웠지만, 근위대장에게는 단순한 사랑 그 이상이었다. 꿈결같이 달콤한 시간은 너무나 짧았고, 파멸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황비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내 목숨으로 값을 치를 수 있다면 언제라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그래서 오늘 처형대에 선 황비는 후회하지 않았다. 근위대장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무엇도 내 죄를 씻어주진 못하겠죠. 오늘 광장에 모여 있던 그 많은 시민들··· 그이를 막아선 병사들··· 그들에겐 아무런 죄도 없었는데··· 죄를 지은 건 우리 둘 뿐인데··· 나는··· 나는 다만···”


황비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기고 싶었을 뿐인데···.”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둠이 깔린 평야의 한 부분이 더욱 어두워졌다.


“왔다.”


일행들은 내 한마디에 잔뜩 긴장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모두가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우리는 무너진 입구를 지나 폐허의 안마당으로 나왔다. 밤공기는 아까보다도 더 싸늘해져 있었다.

밤보다 더 어두운 마기를 두른 근위대장이 천천히 걸어와 우리와 마주 섰다.

내가 양 손을 들고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싸울 생각 없습니다.”


근위대장은 아무 말도 없었다. 나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내 뒤에 선 황비에게 붙잡혀 있었다.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황비 전하, 가세요.”


조용한 발걸음이 나를 지나쳤다. 망설이듯 느릿하던 발걸음은 이내 급한 걸음이 되었고, 근위대장을 감싸고 있던 마기는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마침내 황비와 근위대장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황비는 근위대장의 품에 안긴 채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고, 황비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근위대장의 손이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전후 맥락 없이 이 장면만 본다면, 그래, 거의 숭고하기까지 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내 시선을 느낀 것일까, 문득 근위대장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나는 근위대장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떠나세요. 대륙을 떠나 어디든 제국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세요.”


근위대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렇게 끝이 났다. 비록 엄청난 수의 죽음이 있었지만, 제국의 심장부에 마계의 게이트가 열리는 최악의 사태는 피했다. 덕분에 멸망을 향해 가는 이 세상은 약간의 유예를 더 얻게 되었다.


그럼에도 난 속이 쓰렸다. 뜨거운 무언가가 명치 어딘가를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내 속을 타고 올라온 그것이 입 밖으로 뛰쳐나오고야 말았다.


“당신들 때문에 죄 없이 죽은 사람들을 잊지 마십시오.”


근위대장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고, 근위대장의 팔을 꽉 붙잡은 황비의 손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비극의 씨앗을 심은 것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말없이 참담한 진실을 받아들였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그때, 가늠할 수 없이 많은 마력이 평원 위에 모여 들더니 엄청난 수의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에피소드가 예상보다 길어졌습니다. 다음 편에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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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남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 19.10.18 60 3 13쪽
32 비극의 끝 (2) 19.10.17 74 4 9쪽
» 비극의 끝 (1) +1 19.10.16 77 5 12쪽
30 내가 할 수 있는 일 19.10.14 73 3 13쪽
29 제국의 비밀 서고 19.10.11 80 6 13쪽
28 협박과 설득 19.10.10 95 6 11쪽
27 동방의 꽃 +1 19.10.09 91 5 12쪽
26 미로정원 +2 19.10.08 101 6 12쪽
25 마법사 길드 +1 19.10.07 95 5 14쪽
24 우리의 목적 19.10.02 103 5 8쪽
23 뒷풀이 +1 19.09.30 106 5 13쪽
22 결전의 마무리 +2 19.09.28 87 5 7쪽
21 다른 현실 +1 19.09.27 91 5 12쪽
20 해변의 결전 +1 19.09.26 97 5 14쪽
19 경고 (2) +1 19.09.25 95 6 10쪽
18 경고 (1) +1 19.09.24 104 6 15쪽
17 진화령 (3) +1 19.09.23 121 7 14쪽
16 진화령 (2) +1 19.09.21 135 6 9쪽
15 진화령 (1) +1 19.09.20 156 6 10쪽
14 싱카리움 (2) +1 19.09.19 135 6 12쪽
13 싱카리움 (1) +1 19.09.18 147 5 14쪽
12 화신 각성 (2) +1 19.09.17 139 6 10쪽
11 화신 각성 (1) +1 19.09.16 149 6 12쪽
10 사전 준비 +1 19.09.12 161 6 9쪽
9 루비오코네의 운 나쁜 하루 +1 19.09.11 174 7 11쪽
8 신벌 +1 19.09.10 188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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