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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경원수 님의 서재입니다.

초심을 지킨 회귀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구주부
작품등록일 :
2019.09.02 15:12
최근연재일 :
2019.10.24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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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0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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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동방의 꽃

DUMMY

기사들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황궁의 정예 병력 수십과 단 한 명의 싸움. 그렇지만 근위대장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푸른 불꽃에 휩싸인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기사들의 검이 부러지고 방패가 쪼개졌다. 마법사들이 멀리서 쏘아내는 공격은 근위대장이 만들어낸 보호막에 막혀 소용이 없었다.


“뭐야, 진짜 엄청 쎄네.”

“그야말로 일당백이네요 다른 사람들도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어느새 진화령과 비요른까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싸움은 점점 근위대장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황비의 안위를 우려한 마법사들이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백병전을 펼치는 기사들이 하나 둘 부상을 입고 이탈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뒤로 물러나고, 결국 황제의 근위대가 싸움에 나섰다. 애초에 제국 제일의 마검사를 상대로 전쟁이 아니라 전투로 이기기 위해선 개개인의 무력이 최강인 근위대가 투입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근위기사 한 명이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님, 이게 사실이란 말입니까.”

“너희가 보는 대로다. 나는 나의 하늘을 위해 검을 들 테니, 너희는 너희의 신념을 위해 검을 들어라.”


결국 싸움이 시작됐다. 다시보기 힘든 전투지만 더 이상 이러고 있을 수 없었다.


“우린 이제 가요.”

“이제부터가 진짜 같은 데요!”


진화령이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고, 누가 무인 아니랄까 봐. 그치만 우리 싸움구경 온 게 아니잖아.


“들키면 큰일 나요. 황비의 불륜 현장에 있다가 적발되면 최소 교수형이라구요.”

“하지만 저렇게 귀한 대결을···.”

“누나 빨리 가자.”

“···쳇.”


우리는 살금살금 왔던 길로 돌아와 냅다 도망쳤다. 도망치는 길에 잡신을 불러서 한가지 부탁을 했다. 잡신은 투덜대면서도 알았노라고 대답하곤 분수를 향해 날아갔다.



*



정원에서 한참이나 멀리까지 도망쳤다. 누가 쫓아오지 않는 걸 보니 다행히 들키진 않은 모양이었다.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긴장이 풀리니 배가 고팠다. 일단 가까운 식당에서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식사 중에 진화령이 말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황비 혼자일거라고 했잖아요.”

“미안해요, 내가 틀렸어요.”

“그 꿈, 진짜 믿을 만한 거예요?”

“가끔 내가 잘못 볼 때도 있어요. 아니면 잘못 기억하거나··· 꿈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꿈 속에서는 생생해도 깨고 나면 금세 흐릿해지는 거.”

“그러니까 말이죠. 그런 꿈을 믿어도 되겠냐는 거죠.”

“끄응···.”

“그래도 처음엔 황비가 혼자 정원에 있었잖아. 그러니까 꿈은 맞았던 거지. 안 그래, 형?”

“그건 그렇지.”

“···그것도 그렇네? 아무튼 다음부턴 잘 좀 봐요.”


다행히 비요른 덕분에 잘 넘어갔다. 그래도 내 잘못이라는 것은 변함없었다.

이 경솔한 놈. 멍청한 놈. 다 알았으면서도 이런 실수를 하다니.

결국 난 애송이인 것이다. 27년을 대한민국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갑자기 이세계로 떨어진 지 한달도 안 된 애송이. 회귀한 삶을 다 합치면 천 년을 넘게 살았겠지만, 회귀할 때마다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니까 아무 소용없다. 다만 지난 삶의 기억들이 남아서 지식으로 활용할 뿐이다.

그래서 더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데. 더 넓게 보고 종합적으로 판단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하는데, 지난 한 달 간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서 마음이 풀어져 버렸던 모양이다. 멍청한 놈 같으니···.

진화령의 목소리가 상념에 끼어들었다.


“무슨 생각해요?”


어느새 식사를 멈추고 멍하니 자책만 하고 있었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뭐가 떠올랐어요?”


그건 정원에서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 달렸다. 정원에서 황제가 직접 황비와 근위대장의 부정을 적발하는 경우는 나도 처음 맞이하는 것이라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식당 창문을 유유히 통과한 푸른 불꽃이 날아왔다. 잡신이었다. 부탁한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끝났어?”

“오냐.”


내가 부탁한 대로 상황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보고 온 잡신이 설명을 시작했다. 싸움은 결국 황제의 승리로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근위대장은 혼자 탈출해 버렸다. 황비는 끌려갔고.”

“황비를 두고 혼자 가버렸다고?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황비가 간청했거든. 당신은 제발 살아달라고. 황제가 이 자리에서 자기를 죽이진 않을 거라고.”

“아···.”


역시 그렇게 되었군. 결국 근위대장이 혼자 탈출한 것이다.

그런데 잡신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런데 황제한테 신 냄새가 나던데.”


비요른이 물었다.


“그게 뭐야?”

“신이 사람한테 들어갔다 나오면 남는 냄새다. 보통 며칠 정도 가지.”

“그럼 무명신이 나한테 들어왔을 때 나한테도 낫었겠네?”

“그렇지.”


가끔 신관들이 꿈에서 신을 영접했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바로 신관의 꿈속에 신이 찾아간 것이다. 그런 신관에게는 신 냄새가 남는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황제는 무교다. 황제는 만인 위에 선 인간으로서 자기 위에 어떤 존재도 두지 않는다. 그런 황제가 신 냄새가 날 일이 뭐가 있지?

내가 물었다.


“누군지 알겠어?”

“아니, 냄새만 갖고는 나도 모르지. 직접 만나보면 알아보겠지만.”


신이 황제를 방문한 적이 있다라··· 여태까지 몰랐던 새로운 정보지만 당장은 쓸모가 없었다. 황제를 만나서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내가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은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기다려 보죠.”



*



황제는 황제답게 결단도 행동도 빨랐다. 당장 오후부터 중앙 광장에 대규모 단상을 설치하기 시작하고 사방에 방을 붙였다. 방은 근위대장에게 전하는 황제의 메시지였다.


[처형은 3일 뒤, 처형대에 걸릴 목을 바꾸고 싶다면 근위대장은 황제를 배신한 대가를 치러라]


근위대장이 나타나지 않으면 기어코 황비를 처형하겠다는 뜻이었다. 불륜이 발각된 시간과 장소는 달랐지만, 결국 역사대로 흐르는 것이었다.


내막을 모르는 수도 시민들은 온갖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그러게 내 말이 맞다니까 그러네.”


어느 중년 여자 둘이 대화하는 들렸다. 우리는 수도의 분위기도 살피고 저녁도 먹을 겸 거리로 나와 있었다.


“전하랑 근위대장님이랑 사실 그렇고 그런 거였다니까! 그런데 근위대장님이 갑자기 이렇게 말을 한 거야.”

“뭐라고?”

“전하, 전 이제 여자가 좋습니다.”

“쯧쯧··· 요새 애가 말을 안 들어? 남편이 돈 안 벌어 와? 왜 이렇게 헛소리를 씨부린대?”

“왜? 이거보다 더한 배신이 어딨어? 처형대 세우는 거 봐, 그 여자 목이 걸리는 거라니까? 여자를 죽이고 싶지 않으면 너의 목을 바쳐라 이거지. 결국 여자를 살리기 위해 돌아온 근위대장의 목이 걸린 처형대의 날을 떨어뜨리는 전하의 눈에서도 한줄기 눈물이···.”

“이 여편네야, 쓰잘데기 없는 소리 말고 들어가서 애 밥이나 차려줘.”

“안 그래도 들어갈 거야!”


헛소리지만 묘하게 진실을 관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역시 아줌마들 눈치가 보통이 아니라니까···.


우리는 식당으로 들어가 저녁을 주문하고, 앞으로 계획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3일 뒤에 처형이 거행될 때 근위대장이 돌아올 거예요. 잡히러 온 게 아니라 황비를 되찾으러. 그런데 수도의 병력과 근위대가 힘을 합쳐도 근위대장을 못 잡아요. 근위대장이 금지된 힘을 쓰기 시작하거든. 결국 사람들을 다 물리친 근위대장이 황비를 되찾아가려는데, 문제는 황비가 죽어버려요. 그래서 근위대장이 꼭지가 돌아버리면 쾅, 마계와 연결된 게이트가 열리는 거죠.”

“음··· 그러면 병사들을 도와서 근위대장을 죽이면 되나?”


비요른 녀석, 살벌한 소리를 너무 쉽게 해버리네.


“우리 힘으로는 어림도 없어. 게다가 자기가 죽던 황비가 죽던, 둘이 못 만나게 되면 어차피 게이트가 열릴 거야. 근위대장의 목적은 오직 그거 하나니까.”

“그럼 무조건 근위대장이 황비를 되찾아야 하는 거예요?”

“일단은 그렇죠.”

“그럼 황비를 탈출시켜서 둘 다 도망치게 만드는 건?”

“그럴 수만 있다면야 방법이 될 수 있죠. 그런데 처형식 날은 어림도 없을 거고, 하려면 지금 해야 하는데··· 지금 황비는 자신의 궁에 갇혀 있을 거예요. 지금 거기만큼 경비가 삼엄한 데도 없을 걸요.”

“황비가 자기 궁에 갇혀있을 거라구요?”

“네. 3일 동안 자신의 죄를 참회하라 뭐 이런 거죠.”

“그럼 방법이 있을 수도···?”

“?”


비요른과 내가 의문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가운데, 진화령이 입을 열었다.


“실은 어제 밤에···.”



*



진화령은 기분이 한껏 좋아진 상태였다. 좋은 옷감으로 만든 고급스러운 새 옷도 사 입고, 반짝이는 목걸이와 귀걸이도 새로 샀다. 거기에 저녁까지 맛있었던 것이다. 호텔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춤추듯 가벼웠다. 성원씨랑 요른이는 뭘 먹었으려나?

광장 한쪽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이 동한 진화령이 음악 소리에 이끌리듯 다가갔다. 음악소리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틈을 비집고 들어간 진화령이 발견한 것은 노상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악사들과 춤을 추는 무희들이었다.

금세 이국적인 음악과 춤에 매료된 진화령은 다른 사람들처럼 손뼉으로 리듬을 맞추며 분위기를 즐겼다.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고, 마침내 음악이 끝나자 사람들이 박수를 쏟아냈다. 집시들이 모자를 들고 돌아다니며 돈을 걷기 시작했다.

진화령은 자신에게 다가온 무희의 모자에 남은 돈을 몽땅 쏟아 넣었다. 그 액수는 진화령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크게 놀랄 정도였다. 물론 가장 크게 놀란 것은 돈을 받은 무희였다. 동그랗게 눈을 뜬 무희에게 진화령이 미소로 화답했다.


“너무 좋아서요.”


그제야 무희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무희는 진화령의 손을 잡고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진화령은 웃음을 머금고 선뜻 따라 나갔다.

다시 음악이 시작되었다. 진화령에겐 익숙한, 수도 시민들에게는 낯선 동방의 음악이었다. 진화령은 오랜만에 듣는 고향의 음악에 흠뻑 취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명망 높은 진씨 가문의 넷째 딸로서, 진화령은 무공뿐 아니라 가무에도 조예가 깊었다. 진화령은 하나의 선이 되었고 원이 되었고 이윽고 꽃이 되었다. 구경꾼들은 처음 보는 놀라운 춤에 정신을 홀려 버렸다.

꿀을 탐한 나비가 꽃에 앉았다가 다시 날개를 떨었다. 꽃이 된 진화령이 마지막 몸짓에 그리움을 담아 나비를 떠나보낸 순간 음악도 끝이 났다. 구경꾼들이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진화령이 자세를 바로하고 꾸벅 인사를 보내고 나서야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남자들, 특히 혈기왕성한 청년들은 진화령에게 말이라도 걸고 싶었다. 하지만 제일 먼저 앞장선 인물을 보고 감히 나서지 못했다. 고급스러운 옷을 맵시 입게 빼 입은 잘생긴 청년이 양 손에 잔을 들고 진화령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동방의 꽃을 견식하는 진귀한 경험에 감사드립니다.”


마침 목이 마른 진화령이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달고 청량한 술이 달아오른 그녀의 몸을 시원하게 식혀주고, 은은한 꽃향기가 입안을 맴돌았다. 보통은 쉽게 마실 수 없는 굉장히 좋은 술이었다.


“고마워요. 좋은 미주로군요.”

“아무리 아름다운 술인들 당신께 비하겠습니까.”


그제야 진화령이 이채가 띤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동방에 조예가 깊으시군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제가 오늘 아름다운 춤을 보고 견문을 크게 넓혔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오늘밤 성심을 다해 보답을···.”


“잠깐잠깐, 누나.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한 비요른이 물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황비를 탈출시킬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더니 갑자기 웬 남자가 작업 거는 얘기가 나오나? 그런데 진화령의 입에서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 남자가 황비의 사촌이더라고. 황비궁을 관리하는 고관대작이라던데.”


세상에, 일이 이렇게도 풀리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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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내가 할 수 있는 일 19.10.14 73 3 13쪽
29 제국의 비밀 서고 19.10.11 80 6 13쪽
28 협박과 설득 19.10.10 95 6 11쪽
» 동방의 꽃 +1 19.10.09 91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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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마법사 길드 +1 19.10.07 95 5 14쪽
24 우리의 목적 19.10.02 103 5 8쪽
23 뒷풀이 +1 19.09.30 106 5 13쪽
22 결전의 마무리 +2 19.09.28 87 5 7쪽
21 다른 현실 +1 19.09.27 91 5 12쪽
20 해변의 결전 +1 19.09.26 97 5 14쪽
19 경고 (2) +1 19.09.25 95 6 10쪽
18 경고 (1) +1 19.09.24 104 6 15쪽
17 진화령 (3) +1 19.09.23 121 7 14쪽
16 진화령 (2) +1 19.09.21 135 6 9쪽
15 진화령 (1) +1 19.09.20 156 6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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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싱카리움 (1) +1 19.09.18 147 5 14쪽
12 화신 각성 (2) +1 19.09.17 139 6 10쪽
11 화신 각성 (1) +1 19.09.16 149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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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루비오코네의 운 나쁜 하루 +1 19.09.11 174 7 11쪽
8 신벌 +1 19.09.10 188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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