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mongster 님의 서재입니다.

펠릭스전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夢ster
작품등록일 :
2014.12.22 00:00
최근연재일 :
2016.12.28 16:59
연재수 :
292 회
조회수 :
2,567,262
추천수 :
63,526
글자수 :
1,813,839

작성
16.12.28 16:59
조회
4,710
추천
107
글자
28쪽

291

DUMMY

291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하루건너 간격으로 쏟아지던 비는 본격적인 우기에 들어서자 밤낮없이 퍼붓기 시작했다.


"역시 이건 안 되겠는데요? 미스릴로 된 마법진은 괜찮지만 접촉부는 녹이 슬고 마모가 심합니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교체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역시 그런가? 교체할 부품은 있나?"

"글쎄요? 예비부품 준비는 넉넉히 했었는데 보시다시피 지금은 다들 이 모양인지라."

남자는 화이트 고램의 장갑을 벗겨놓은 무릎관절 뒤에서 나오며 말했다. 남자가 눈으로 가리킨 곳은 주기장 내부였다.


주기장은 정비를 받고 있는 고램들과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보였다.

"으음."

맴피스는 길버트 경의 화이트 고램을 정비하던 특기생 출신 정비사와 함께 갑갑한 시선으로 주기장을 바라봤다.

"우기가 시작되자 정비를 받겠다고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왔으니···. 재고가 있는지 여부는 창고에 직접 가봐야 알 수 있을 겁니다."

"자네들도 고생이군."

"예, 하아~ 진짜 아무리 지휘관이지만 우리 작전관은 정말···. 이번 작전을 대비해 정비반과 마법사들이 몇날며칠을 밤을 새가며 물자보급과 정비계획을 세웠는데 그걸 한방에 이렇게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다니."

정비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에드워드 왕자의 통지문이 있은 후 중부중계진 작전과는 난리도 아니었다. 너도나도 레드숄더를 잡기위해 전선에 나가겠다고 작전신청을 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기가 당장 내일 시작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지금 아니면 비가 그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거기다 우기가 끝나고도 레드숄더가 계속 활동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결국 중부중계진 전선은 한바탕 난리를 겪었다. 그동안 비는 언제나처럼 갑자기 쏟아졌다가 그치기를 반복했고 작전에 나갔던 고램들 중 상당수가 비를 맞고 돌아왔다.

그러다 본격적인 우기가 시작되자 그렇게 비를 맞았던 고램들에 기존 고램들까지 한꺼번에 정비를 위해 주기고로 몰려든 것이었다.


"일단 부품은 걱정 마십시오. 왕자님의 관심 덕분에 베인브릿지 사령관이 보급을 이쪽으로 최우선해서 돌리고 있으니.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거기다 이 빗속에 고램이 나갈 일도 없잖습니까? 특히나 길버트 소대는···."

"음, 그렇긴 하지."

정비사의 말에 맴피스 마법사도 쉬이 수긍했다. 우기는 크로비스군이나 에덜라드군 양쪽 모두에게 일종의 암묵적인 휴전 기간이었다. 어느 쪽도 고램을 허망하게 잃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맴피스 마법사에게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나저나 저 기사 분은 괜찮은 겁니까? 정비 전부터 멍하니 정신이 없어 보이는데."

"음? 아, 괜찮아. 그냥 개인적인 사정이 좀 있을 뿐이네."

"그래요? 하지만 이제 슬슬 덮어야 할 거 같은데 말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아, 그러지. 수고했네."

맴피스는 정비사를 격려해주고는 고램조종석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정비사가 정신이 없어 보인다던 기사, 펠릭스가 조종구를 착용한 채 멍하니 밖을 보고있었다.



펠릭스는 멍하니 주기고 밖 연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빗속에도 경비대의 고램과 비상 출동 대기 중인 고램 몇 대가 기름을 먹인 위장 천을 두르고 서 있었다. 그 발아래로 일단의 사람들이 북문을 통과해 들어오고 있었다.


"여~ 루츠! 어때? 성과는 좀 있었나?"

망루에서 경비를 서던 기사가 들어서던 사람들의 선두에 선 남자에게 물었다.

"아니, 틀렸어! 허탕이야! 그날 이후로 녀석은커녕 크로비스군 전체가 꼼짝을 안 해."

"그래? 역시 그렇군. 그나저나 몰골이 말이 아니구먼!"

"젠장! 당연하잖아? 이 비 좀 보라고. 이 비속에서 두개 지역이나 순찰을 돌다 왔다니까!"

"하하하! 수고했네! 가서 쉬라고!"

경비 기사와 말을 마친 루츠라는 남자는 자신의 소대를 이끌고 주기장 근처로 다가왔다. 루츠 소대 외에도 비슷한 꼴을 당한 소대들이 하나 둘 중계진으로 귀환하고 있었다. 빗속에 고램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레인저들이 나선 탓이었다.


산위의 중부중계진 전투는 보통 고램전이 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렇게 비가 오면 얘기가 달라졌다.

빗속을 틈타 적의 레인저들이나 저격수가 넘어올 수 있었다. 때문에 감시강화를 위해 그동안 쉬던 레인저들이 바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램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온다고 고램이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의 고램 부대도 비를 틈타 경계를 넘어올 수도 있었다.

그러면 레인저들이 야전에서 비를 피해 주둔해있을 적의 고램 부대와도 마주칠 수도 있었고 고램 밖으로 나와 있는 적의 라이더를 레인저나 저격수가 직접노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 그 중에 레드숄더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때문에 레인저들도 레드숄더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더해졌다.


"뭘 그렇게 정신없이 보고 있나?"

"아, 맴피스씨. 아뇨, 그냥 귀환하는 레인저들을 좀···."

"어디? 아~ 루츠 녀석 이구만."

조정석 부근에 올라선 맴피스는 펠릭스가 바라보던 곳을 쳐다봤다. 마침 주기고 앞을 지나던 루츠가 크게 재채기를 했다.

"푸헷취!"

"이런 루츠, 감기라도 걸린 건가?"

맴피스가 주기고 앞으로 지나가던 루츠를 향해 소리쳤다.

"아, 맴피스씨!"

"내가 치료해줄까?"

맴피스의 말에 루츠와 동료들이 멈춰 섰다. 그리곤 모두 맴피스와 동료들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

"맴피스 씨가 치료를요?"

"왜? 뭐가 잘못됐나? 마법사가 치료를 해주겠다는 게 무슨 문제가 있어?"

루츠 소대의 반응에 맴피스는 짐짓 기분이 나쁘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자 루츠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하하! 됐습니다. 행여 부대에 마법사들이 모두 없어지면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헙!"

농담처럼 대답하던 루츠의 말이 멈췄다. 그리더니 서둘러 손바닥으로 웃음을 가렸다. 그리곤 황급히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자신의 소대원들을 이끌고 건물지휘부로 사라졌다.

어느새 맴피스의 손에 파이어볼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쳇! 요즘 젊은 것들은 하여간. 어디 나중에 급하다고 고쳐달라고 하기만 해봐라!"

토라진 맴피스는 마나를 거두어들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펠릭스에게 향했다. 루츠와 맴피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펠릭스도 웃고 있다가 맴피스가 돌아보자 애써 웃음을 참기위해 얼굴을 찡그려야 했다.

4서클이나 되는 맴피스였지만 치료마법 솜씨가 형편없는 것과 도박판에서 여차하면 파이어볼 마법으로 판을 뒤집는 것으로도 유명했던 것이다.


"그래 무슨 일입니까 맴피스씨?"

"무슨 일이고 뭐고 정비 끝났네. 그만 보호 천을 덮어."

"벌써요? 아, 그렇군요."

그제야 정비사가 사라진 것을 눈치 챈 펠릭스는 고램에 오러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습기를 막기 위해 기름먹인 천으로 고램을 덮어두려는 것이었다.

펠릭스는 마치 이불을 덮듯이 발 아래쪽에 말아둔 천을 천천히 펴서 고램의 몸 위로 덮어나갔다.


고램을 눕힌 채 천을 허리까지 덮고 조종석에서 내린 펠릭스는 손으로 천을 당겨 마저 덮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고램의 양쪽에서 머리끝까지 천을 당겨 덮던 맴피스가 펠릭스에게 물었다.

"녀석은? 또 거긴가?"

"예. 벌써 며칠 째인지. 휴~ 여전합니다."

대답을 하면서 펠릭스는 한숨을 쉬었다. 칼에 대한 얘기였다.

"녀석 때문에 그렇게 멍하니 있었던 건가?"

"멍하니요?"

"그래, 정비하는 동안 자네 정신이 하나도 없더군."

"그랬군요. 제가 정신이 다른데 팔려있었나 보군요."

맴피스의 말에 펠릭스는 한동안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마도 반은 칼이 걱정 되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반은? 그럼 고민거리가 또 있단 말인가?"

"고민이라기보다는 이 분위기라고 할까요? 방금 전의 그 루츠 경의 소대도 그렇고. 쉽게 적응이 되질 않는군요. 동료들이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부대에 넘치는 이 활력은 대체 뭔지···."

"아~"

맴피스는 그제야 펠릭스가 귀환하는 루츠의 소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랬지. 저번에 레드숄더에게 당한 브래넌 소대에 친구가 있었다고?"

"예."

펠릭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선에 있는 동안 펠릭스도 조금씩 위험을 만나고 있었다. 저번 동부 중계진에서는 소대의 안드레아나 드비어스 경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까딱했다간 레인저들이 전멸할 지도 모를 순간이었다.

이번 중부 중계진에 와서는 여러 번 죽음을 목격하기도 했다. 매트 소대의 전멸부터 레드숄더에 의한 여러 죽음들. 그러나 친구의 죽음을 경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건이 벌어진 이후 부대의 처음분위기는 애도와 분노였다. 그러다 왕자의 발표가 나오자 환희에 가까운 열기가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이어져오던 애도와 분노는 온데간데없었다.


이번 발표 이후로 레인저들의 자발적 작전참가율도 높아져있었다. 더욱이 이 궂은 날씨에 그렇게 고생해서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면서도 모두들 흥분과 기대감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방금 전의 루츠 소대도 그랬다.


펠릭스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록 자신도 부대에서 별 면식이 없는 사람들이 전사했을 때는 무관심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측은한 마음은 있었다.

이번에 오닐의 죽음에서 펠릭스는 친구들만큼 분노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피해를 입은 당사자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옆에서 누군가 웃고 환호하다니. 이런 건 뭔가 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뭔가 자신만 별세계에 온 듯 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거기에 갑작스럽게 변한 칼의 태도도 펠릭스를 당황스럽게 했다.


칼은 그 발표에 다른 기사들처럼 환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전에 느껴지던 분노의 감정도 아니었다. 펠릭스가 발표당일 회의장에서 칼에게서 느꼈던 감정은 표현하자면 분노를 넘어선 광기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동안 매 사건마다 냉정 침착했던 과거의 칼에게선 알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뭐라고 할까요? 마치 여기 사람들 전체가 광기로 미쳐 돌아가는 거 같다고 할까요?"

"광기라···. 사실 나도 좀 걱정이 되긴 해. 특히 길버트 경이 말이야."

"예? 스승님이요?"

"음, 내가 길버트 경과 알고 지낸지가 그럭저럭 10년이 되어가는 데 뭐랄까? 이렇게 흥분한 길버트 경은 처음 봤다고 할까?"

"스승님이 흥분을요?"

"그래."

맴피스의 말에 펠릭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부대 전체가 레드숄더 때문에 작전에 못나가서 안달인 이때에 느긋한 소대도 있었다. 바로 길버트 소대였다.


그날 발표 후 소대미팅에서였다. 칼은 바로 길버트 경에게 자신에게 내려진 고램 접근금지 명령을 철회해 줄 것과 작전에 적극적으로 나갈 것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그러나 길버트 경은 칼의 제안을 바로 무시해버렸다. 오히려 맴피스에게 우기를 대비해 고램들을 철저히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완전분해에 가까운 오버홀 급의 정비명령이었다.


부대의 레인저 기사 둘이 아직 부상병동에서 돌아오지 않은 지금 고램의 정비명령은 사실상 작전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날이후로 소대 분위기는 엄청 무거웠다. 다들 소대 막사에 남아있기가 껄끄러웠다. 특히 칼이나 길버트 경, 두 사람이 같이 있거나 한 사람이라도 막사에 있으면 다들 눈치만 살폈다.

평소 무게를 잡아주던 안드레아나 드비어스가 아직 복귀하지 않아서 더더욱 그랬다. 분위기 메이커인 피셔도 소대에 별로 붙어있지 않았다.

때문에 펠릭스도 이렇게 일부러 맴피스를 돕겠다고 고램 주기장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소대의 고램들의 정비는 예전에 끝난 상태였고 보고서 작성도 끝나 있었다. 쏟아지는 비에 작전으로 다른 소대 상당수가 나가버린 탓에 단체 훈련도 무리였고 길버트 소대는 작전도 나가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마치 휴가라도 받은 듯 기뻐해야겠지만 길버트 소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마디로 소대분위기가 엉망이었다.


"아니지, 어쩌면 처음은 아니겠군."

"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고 보면 작년에도 이와 비슷한 분위기였던 때가 있었지."

"작년이면···. 아!"

맴피스의 말에 펠릭스는 바로 레논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작년 초에 레드숄더가 나타났을 무렵에도 길버트 소대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자네도 아는 모양이군. 그러고 보면 갈등의 원인은 비슷한 건가? 그때도 공격적으로 나가고 싶었던 중견 라이더와 길버트 경의 방어적인 소대운영이 마찰을 빚었던 셈이니."

"···."

펠릭스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작년에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소대의 라이더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사망하고 두 사람이 중상을 입었고 소대원 10여 명이 사망했다는 결과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내용을 묻기가 두려웠다.


"저 우리끼리라도 어떻게 할 수 없을까요?"

"어떻게 라니?"

"작년에도 그랬다면 이 분위기가 이어져봐야 별로 좋을 게 없을 거 같아서 말입니다."

"으음. 확실히 그렇긴 하지."

펠릭스의 말에 맴피스 마법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각각 머리를 숙이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맴피스 마법사가 자리를 털며 일어나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끼리 이러고 있어봐야 정작 당사자들이 서로 화해하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지."

"뭔가 좋은 생각이 있으십니까?"

"별 수 있나? 길버트 경은 내가 가서 얘기를 해볼 테니 자네는 그 녀석을 어떻게 설득해보게. 결국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해서 얘기하게 하는 게 빠를 거야."

"휴~ 역시 그렇겠죠. 별 자신은 없지만 알겠습니다. 한번 해 보죠. 그럼."

말을 마친 두 사람은 주기고를 벗어나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주기고를 벗어난 펠릭스는 중계진을 남북으로 양분하는 중앙건물을 통과해 남쪽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비를 피해 한 건물 앞에서 들어서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중계진의 건물들 중에는 지붕과 벽으로 사방이 가려진 연습장도 있었다. 여러 이유로 비밀을 요하는 훈련 등을 원하는 사람들을 배려한 장소였다.


그날 전체 회의 후 길버트 경과 또다시 의견 충돌을 일으킨 칼은 다음날부터 이곳 훈련장 하나를 혼자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곤 정해진 일과를 제외하고는 아침 일찍 들어가서는 밤늦게 녹초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무슨 훈련을 하는지 때로는 식사도 거를 정도였다.


소대원들이야 길버트 경과 칼이 같이 있는 답답한 상황을 피할 수 있어 나름 한숨을 돌렸지만 펠릭스는 달랐다.

공식적으로 길버트 경에게서 칼의 감시를 명받은 펠릭스였지만 칼의 이런 행동을 가까이에서 보기가 괴로웠다. 때문에 직접 바로 옆에서 칼을 감시하는 대신 고램이 있는 주기고를 지키는 방법을 택했다. 때문에 지금도 맴피스 마법사와 주기고의 고램을 정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휴~"

펠릭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훈련장 문을 들어섰다.

"저기, 칼?"

문을 들어서며 펠릭스는 일부러 인기척과 함께 소리를 내어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문을 들어선 입구에는 재차 훈련장을 가리기위한 가리개용 벽이 막아서있었다.

"안에 있어?"

펠릭스는 조심스럽게 가리개벽 옆을 지나 훈련장 안으로 들어섰다.


훈련장 내부에는 이어지는 우기에도 불구하고 습기가 차있지 않았다. 문 반대편 벽에는 연단이 있었다. 훈련장 왼쪽 벽면에는 연습용 도구들이 가지런히 걸려있었고 그 앞에는 표적용 허수아비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바닥에는 물에 젖지 않은 모래도 살짝 깔려있었다.

칼은 그 모래바닥에 아무렇게나 큰대자로 누워있었다.

"칼?"

펠릭스가 다가가서 재차 부르자 칼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오! 펠릭스, 너 마침 잘 왔어. 나 좀 도와줘!"

"뭐? 어? 아 아니 나는···!"

그러나 칼은 펠릭스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펠릭스의 팔을 끌며 다짜고짜 허수아비 앞으로 끌고 갔다.

"이거 말이야.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나 혼자 서는 도저히 모르겠단 말이야. 아, 조심해! 거기 모래바닥의 흔적은 밟지 않도록 하라고!"

"아니 나는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펠릭스는 마지못해 칼이 가리키는 장소를 쳐다봤다.

"···이건?!"

펠릭스는 허수아비를 쳐다보곤 눈살을 찌푸리며 칼을 돌아봤다.


검술연습 타겟용 허수아비의 왼쪽어깨에는 이제는 익숙한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왼쪽 어깻죽지에서 가슴 가운데로 이어지는 선. 바로 레드숄더에게 당했다는 전형적인 상흔이었다.

아마도 반복해서 칼이 내려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새겨진 듯했다.

"맞아, 이쪽도 살펴봐."

칼은 펠릭스의 의문에 고개짓으로 확답을 주고는 다시 허수아비의 맞은편 바닥을 가리켰다.


허수아비 주변에 펼쳐진, 칼이 밟지 말라고 얘기한 모래위로는 복잡한 발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펠릭스가 서부 검술의 기초연습을 할 때 그렸던 보법의 도해와 비슷해 보였지만 그보다는 더 복잡했다.


발자국에는 깊이까지 더해져 있었다. 원래 이곳 연습장은 흙바닥으로 모래는 없었다. 이런 깊이까지 표현하기 위해 칼이 일부러 모래를 가져다 뿌린 모양이었다.

"칼, 이건? 이게 대체···."

"잘 봐. 어때? 못 알아보겠어?"

칼의 말에 펠릭스는 허수아비와 그 주변의 발자국 흔적들을 다시 돌아봤다. 그러자 그제야 그 흔적들이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이거?!"

"그래 맞아. 우리가 레드숄더와 만났던, 매트 경이 쓰러졌던 그곳의 흔적이야. 그날 펠릭스, 네가 망을 보는 동안 내가 병사장의 흑판을 빌려 그렸던 걸 다시 재현해 본거지."


순간 펠릭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뒤통수라도 한방 맞은 느낌이었다.

그날 그 참사현장에서 칼이 경계명령도 어겨가며 혹시나 있을지 모를 위험을 무릎 쓰고 조종석을 열어둔 채 무얼 했는지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전체 흔적을 다 기록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어쩌면 이게 레드숄더의 비밀을 밝혀낼 단서가 될 지도 몰라."

그러나 이미 칼의 설명은 펠릭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시선은 허수아비와 그 주변 바닥의 흔적을 정신없이 훑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맴피스 마법사와 했던 얘기 따위도 어느새 까맣게 날아가 버렸다. 복수심? 순수한 호기심? 아무래도 좋았다. 신경은 온통 그 흔적들에 쏠려들었다.


"이게 다야? 흔적이 이어진 것 같진 않은데? 여기서부터 기록한 거야?"

"그래. 애석하게도 그 앞쪽은 너도 기억할테지만 이미 흔적이 남아있질 않았으니까."

"하긴 그랬지."

그날을 떠올리며 펠릭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매트 경이 쓰러졌던 날, 펠릭스들이 레드숄더와 처음 마주친 그날, 현장에서 회수한 고램은 총 다섯이었다. 그 중 레드숄더에게 당한 흔적이 확실한 기체는 아군의 마이티 한기와 매트 경의 화이트 고램 한기였다.

그리고 당시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매트 소대의 마법사의 증언과 주변정황으로 보면 레드숄더 특유의 상흔은 없었지만 적의 블랙나이트도 어쩌면 레드숄더에게 당한 것일 수 있었다.


현장의 다섯 기의 고램 중 매트 경의 고램을 제외하곤 모두 지근거리에 모여 있었다. 지금 칼이 그려놓은 기록은 그 네 기가 모여 있던 곳의 흔적은 없었다. 그곳에서 떨어져 매트 경과 레드숄더 둘만이 싸운 흔적이었던 것이다.


당시 칼이 기록을 할 무렵에는 매트 경의 흔적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흔적들은 엉망으로 흐트러져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인원들과 고램들이 그곳에 몰려들어 혹시나 있을지 모를 생존자 구조와 뒤처리로 분주하게 움직였던 탓이었다.


"어때? 뭔가 좀 알거 같아?"

"잠시만!"

펠릭스가 정신없이 흔적을 훑어나가자 칼이 물었다. 그러나 펠릭스는 손을 들어 칼의 말을 제지한 후에 계속 발자국들을 따라갔다.

"이상하군. 특히 여기! 대체 어떻게 한 거지?"

"그렇지? 나도 그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더라고."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주목한 곳은 매트 경의 화이트 고램의 세 번 정도의 연속 공격이 끝나는 부분이었다.


화이트 고램의 힘은 마이티나 미니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칼과 펠릭스도 이미 마이티 고램으로 나이트급의 고램을 상대해본 경험이 있었다. 특히 최근 동부 중계진에서 블랙나이트 두기와 싸울 때의 실전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나이트급의 전력을 담은 공격을 받을 때마다 두 사람의 마이티 고램은 뒤로 날아갈듯 밀렸던 것이다. 만약 길버트 경이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면 어쩌면 두 사람, 혹은 누군가는 이 자리에 없을지도 몰랐다.


바닥의 흔적도 두 사람의 경험과 크게 차이는 없어 보였다. 매트 경의 화이트 고램은 착실하게 힘을 이용한 공격으로 레드숄더를 밀어 붙인 듯했다.

레드숄더의 미니트로 의심되는 기체의 발자국은 지그재그로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매트 경의 공격에 후퇴하는 모습이 분명했다. 발자국 중에는 나이트급의 힘을 이용한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주루룩 밀려난 자국도 있었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난 곳은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주목한 세 번째 공격이 끝나는 곳이었다. 미니트의 발자국이 깊게나있었고 보폭은 대각선 앞뒤로 길게 벌려져 있었다. 분명 힘으로 나이트급 고램의 공격을 막은 것이 분명했으나 밀려난 흔적이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걸까?"

"그러게 더구나 여기서부터는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펠릭스는 팔짱을 끼고 한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 이후 이어진 흔적은 아무리 두 사람의 경험이 짧다지만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곳에서부터는 무려 레드숄더의 미니트가 매트 경의 나이트급 고램을 밀어붙이는 흔적이 이어졌던 것이다.


미니트의 걸음은 앞으로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반면 매트 경의 화이트 고램은 중심이 흔들리는 흔적이 역력한 걸음이었다.

"보법의 변화는 그렇다 쳐도 대체 어떤 검법을 썼기에 훨씬 힘이 강한 나이급 고램을 밀어붙인 거지?"

"그러게. 그리고 여기!"

흔적을 따라오던 두 사람은 이윽고 허수아비 앞에 섰다.

"이 발 포지션의 변화는 대체···."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공감하듯 고개를 저었다. 허수아비 앞에서 미니트의 발 포지션이 어지럽게 변했다. 앞뒤로 넓게 벌려졌던 양 발이 모아졌다. 그리고는 자국이 겹쳐지며 일부 흔적은 발 앞부분이 이중으로 깊게 눌린 흔적이 나 있었다.


젊지만 그래도 거의 살아온 대부분을 검을 수련하며 보낸 두 사람이었다. 보법과 발의 포지션 변화만으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경험과 상식이라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 앞의 이 흔적은 그 둘 어느 쪽으로도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다.


"보통 강력한 공격을 받거나 힘 있는 공격을 하려면 자세를 안정되게 넓혀야 할 텐데."

"그렇지. 그런데 이 포지션 변화는 오히려 거꾸로야. 넓은 자세에서 양 발을 모았어. 이러면 힘을 분산시키기가 오히려 더 어렵고 균형을 잡기도 어려울 텐데. 거기다 이어진 이 겹치는 발자국은 대체···."

두 사람은 마지막 흔적에 이어진 결과물, 즉 허수아비를 바라봤다.


발의 흔적이 말해주는 것은 레드숄더의 미니트가 나이트급 고램의 힘을 받아냈다는 점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받아낸 정도가 아니라 이겨낸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그 점은 어느 정도 참작할만한 정황은 있어보였다. 나이트급 고램의 힘을 이겨내려고 해서인지 최소한 미니트의 발의 보폭이 넓게 이어지긴 했던 것이다.

인간의 경우는 상식적으로 가능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고램의 경우는 그렇게 한다고 두 고램 간의 힘의 차이를 매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레드숄더 특유의 피니쉬 기술이 나온 것으로 보이는 허수아비 앞의 흔적은 그 최소한의 상식마저도 뒤집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벌어져있던 발의 간격을 모았다. 그리고는 무언가 거의 같은 장소에서 양 발을 빠르게 변화시킨 흔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그 흔적을 이해하지도 해석하지도 못했다. 어떤 검술인지 보법만으로 알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었지만 거기에 더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움직임이었기 때문이었다.


"흐음~ 그동안 틀어박혀서 무얼 하는가했더니. 그래도 착실하게 이런 걸 하고 있었군. 분노와 복수심에 마구 검을 휘두르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펠릭스는 칼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펠릭스의 말에 칼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마냥 화만내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리고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사실 뜨끔했던 것도 사실이고."

"뜨끔해?"

"스승님 말씀대로 그때 내가 레드숄더와 싸웠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 그러기에는 상대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건 아닐까? 물론 나름 준비하고 있던 것도 있고 자신도 있었지만. 스승님이나 다른 소대 선임기사들 말대로 너무 기고만장 했던 건 아닐까? 다른 부대 기사들처럼 감정이 앞서서 너무 들떴던 건 아닐까?"

"···."

"반성이라고 할까. 자기 성찰이라고 할까. 우기가 시작되고 비를 좀 맞고 머리를 좀 식혔더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칼···."

칼의 말에 펠릭스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제야 맴피스 마법사와 얘기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당장 그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을 듯했다. 아니 이대로 놔둬도 조만간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화해할 것 같았다.


"뭐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그렇다고 레드숄더 사냥을 포기한건 아니야."

"뭐? 그럼 계속 할 거야?"

"당연하잖아? 오닐의 복수를 해야지. 그렇지 않다면 내가 뭐 하러 이 흔적을 연구하고 있었겠어? 그리고 얘기했잖아. 녀석을 잡으면 펠릭스 너와 내 문제도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고."

"칼~"

순간 칼이 레드숄더를 포기한 줄 알았던 펠릭스는 실망한 어투로 칼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름을 불렀다.

"자~ 자~ 그러지 말고 다시 잘 보라고. 이번에는 감정적이거나 즉흥적인 자만심이 아니라 제대로 된 분석과 해결책을 가지고 스승님과 다른 선임기사를 설득할거야. 그러니 좀 도와줘. 그래도 펠릭스 네가 나보다는 고램 조종경력이나 경험이 많잖아? "

"아~ 정말!"

칼의 말에 펠릭스는 짜증을 내면서도 다시 시선을 바닥의 흔적으로 돌렸다. 귀찮은 내색을 했지만 그래도 입가에는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여전히 레드숄더를 상대하겠다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칼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자, 여기 이 흔적 말이야. 이건 혹시 이런 자세로 받은 건 아닐까?"

"아니야. 말도 안 돼! 그게 아니라 이렇게 받고 이런 공격을 하려고 했던 걸 거야."

"무슨 소리야! 그게 오히려 말이 안 되지!"

곧이어 두 사람은 바닥의 흔적을 두고 서로 자세를 잡으며 티격태격 격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이윽고 목소리는 쏟아지는 빗소리를 뚫고 연습장 밖으로까지 흘러나왔다.


연습장 밖 처마 밑에서는 두 사람이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길버트 경과 맴피스 마법사였다. 조용히 듣고 있던 길버트 경이 옆에 있던 맴피스 마법사를 가만히 손짓해 불렀다.

잠시 무언가 귓속말을 나눈 두 사람은 옅은 미소를 띠고는 곧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연습장의 두 사람의 격론은 그 후로도 늦게까지 이어졌다.


작가의말


이번 편하고 다음편이 앞으로 상당히 중요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뭘 빼먹고 적은거 같아서 보고 또 봤습니다.


그래도 뭘 빼먹은 기분이...


년말이라 뭔가 정신이 없네요.

바쁘고 이리 밀리고 저리 치이고
거기다 시국까지...

그래도 올해 안에는 프롤로그 끝내자 했는데
결국 해 넘겨야 할 모양입니다.

늦어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펠릭스전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200회 자축 겸 반성 글. +22 15.10.15 4,866 0 -
공지 100화 자축 (정식 공지2) +16 15.05.09 4,058 0 -
공지 수정관련 15.02.21 3,627 0 -
공지 맞춤법 관련 사과문 +4 15.02.09 5,357 0 -
공지 일반연재로 올라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식 공지1) +12 15.01.10 30,912 0 -
» 291 +84 16.12.28 4,711 107 28쪽
291 290 +40 16.11.20 3,403 114 28쪽
290 289 +26 16.11.16 2,663 105 34쪽
289 288 +24 16.11.07 2,955 121 28쪽
288 287 +24 16.10.31 2,915 114 31쪽
287 286 +28 16.10.21 3,130 111 14쪽
286 285 +32 16.10.18 3,499 112 37쪽
285 284 붉은 용 사냥. +28 16.09.25 3,994 121 26쪽
284 283 +22 16.08.28 4,229 110 33쪽
283 282 +50 16.08.22 4,078 136 24쪽
282 281 +38 16.07.23 4,184 129 17쪽
281 280 +32 16.07.07 4,440 126 25쪽
280 279 +32 16.06.30 4,386 129 32쪽
279 278 +10 16.06.22 4,466 139 26쪽
278 277 +8 16.06.18 4,271 123 1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