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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과몰입러
작품등록일 :
2023.08.25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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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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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038

작성
23.08.2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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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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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1쪽

9 요새를 지키는 사람들 (1)

DUMMY

9


요새를 지키는 사람들 (1)




비망록(備忘錄)


글자 그대로 잊지 않으려고.

준비하려고 기록한 글이다.


하지은 박사가 남긴 글들은 특별한 제목이 없었다.

애초에 책을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 박사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글을 정리했고, 이것을 그녀 사후에 다시 주제별로 재배열하고 취사선택해서 유진 그룹이 만든 것이 바로 저 비망록이다.


비망록의 내용은

1 하 박사 생전의 연구에 대한 정리

2 그녀가 떠난 이후 미래 예측과 회사가 나가야 할 방향 제시

3 마지막으로 회장, 바로 유진을 위한 안배

크게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임원용, 직원용, 대외공개용으로 따로 나뉘어 발표되었으며, 유진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주요 내용을 거의 암기하다시피 하는 최고의 헌장이었다.


유진이 깨어난 직후부터 지겹게 들었던 것이 바로 이 비망록에 나오는 하 박사의 유언이었다.

바로 그 원본이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원본인지 어떻게 믿어?’


원본을 내미는 사람 자체를 믿을 수 없는데.


“나는 이 그룹의 회장이고, 전용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어요.

그런데 중간에 엘리베이터가 서고 당신과 마주치게 되었군요.

당신은 누군가요?”


“하 박사님의 방계 후손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저희 가족은 대대로 박사님의 유언 집행을 맡고 있다고요.”


“유언 집행을 맡고 있다면 변호사인가요?

그렇다면 비서실을 통하거나 적절한 절차를 밟아 면담을 신청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이런 식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건 상당히 불쾌하네요.”


하지연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계속 미소를 지었다.


“아까도 놀라게 해드려 죄송하다고 사과드렸죠.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그래요. 그 사과는 일단 받죠.

그러면 나는 가보겠습니다.

내일 남강민 실장을 통해 다시 연락하세요.”


“이런 방식으로 갑자기 찾아와서 화가 나셨군요.

하지만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해해주세요.”


소리라도 질러서 사람을 불러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여기가 69층이니 70층에 근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연이라는 이름과 박사를 너무 닮은 그녀의 외모 때문에 망설여졌다.


“제가 회장님과 만나는 걸 다른 사람들은 몰라야 하거든요.

특히 7인 위원회는요.

아, 남강민 실장은 알아도 괜찮아요.

그를 비서실장으로 뽑은 게 우리거든요.

남 실장은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7인 위원회는 그룹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이다.

그런 그들이 몰라야 한다는 말의 의미가 뭘까.


“7인 위원회의 눈을 피해야 한다고요?”


“네, 회장님은 모르시지만 회사 내에서 그들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거의 없죠.

저 위 70층에도 회장님보다 그들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있어요.”


유진은 7인 위원회를 잘 모른다.

하지만 오늘 대통령궁에서 김 대통령도 이 여자랑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7인 위원회가 나한테 적대적이란 말입니까?”


“정확하게는 7인 위원회의 구성원들 상당수죠.

회장님.

회장님이 깨어나시기 전에 7인 위원회는 그룹에서 어떤 존재였을 것 같나요?”


자신들이 주인이라고 생각했겠지.

오면서 읽은 비밀보고서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다.

7인 위원회 구성원 한 명 한 명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성향을 설명하고 있었다.


“회장님만 깨어나시지 않았다면 그들의 세상은 좀 더 오래 지속되었겠죠.

회사의 지분 대부분은 회장님한테 있지만 그 행사는 그들에게 위임되어 있으니까요.

회장님이 계속 캡슐에 계셨으면 영원히 그들 세상이었겠죠.

법적으로는 살아계시니 상속세 때문에 회사가 쪼개질 염려가 없고요.”


납득은 간다.

논리적인 이야기지.

오랫동안 호랑이 없는 곳에서 여우가 왕노릇을 했는데, 이제 호랑이가 돌아왔다.

그러면 여우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호랑이에게 달려와 충성을 맹세하는 이도 있겠지만, 호랑이를 잠재우려는 자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호랑이일 때 얘기지.’


“그럼 당신은 7인 위원회에 맞서 내 편을 들겠다는 건가요?”


“위원회에 맞서던, 타협하던, 항복하던.

회장님이 정하시면 따르는 게 우리의 의무입니다.

백 년 하 박사님이 그렇게 정하셨으니까요.”


뭔가 왕당파의 충성 맹세같이 낯간지럽긴 하지만 좋은 말이다.


“그럴듯하군요.

나는 7인 위원회를 잘 몰라요.

하지만 당신도 잘 몰라요.

당신이 그들보다 더 믿을만한지 어떻게 압니까?”


그래, 7인 위원회는 그룹 최고의 실세다.

지금 그들과의 분열을 부추기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어느 쪽 말도 아직 확신을 못하겠네요.

그러니 지금은 나가 주세요.”


그런데 여기 69층은 뭐하는 곳이지?

만일 이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69층을 폐쇄해야겠다.


“회장님.

제 말에 대한 보증인이 있다면 믿을 건가요?”


보증인?


“당신이 누구를 보증인으로 내세울지는 몰라도, 나는 그 보증인을 또 믿어야 되는지 고민할 거에요.

그러니 오늘은 일단 나가주세요.”


“회장님이 신뢰하시는 보증인이 있잖아요.”


신뢰하는 보증인 누구?

지금 유진이 어느 정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닥터 에이프릴과 남강민, 채일우 정도죠.

오늘 김유석 대통령과 대화는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했지만 아직은 비즈니스 관계일 뿐.


생판 처음보는 사람을 신뢰하게 만드는 보증인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비망록은 원본이라고 했죠?

표지도 하 박사님이 직접 제작하신 겁니다.

겉표지를 열고 뒷면을 봐주세요.”


하지연의 말대로 표지를 열었다.

안에 뭐가 있지?


“이건?”


겉표지 후면에는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손바닥 자욱이 찍혀 있었다.


“누구 것인지 짐작가시죠?

회장님의 손을 거기에 맞춰 대어 보세요.”


왠지 유진의 손바닥 모양이어야 이야기가 진행되는 상황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의 손바닥 모양이 뜬금없이 왜.


-파팟.


갑자기 그를 둘러 싼 온 공간이 까맣게 물들었다.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유진은 조금전까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도 모르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귀신 나올 것 같은 분위기인데.’





“한유진씨.”


올 것이 왔다.

유진은 눈을 감을까 소리를 지를까 잠깐 고민했다.


그런데?

22세기에 그를 한유진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없다.

직함은 한국 최고의 재벌 회장이고, 나이는 한국인 최고령인 그를 누가 이렇게 이름으로 부른다는 말인가?


“나 기억해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유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하지은 박사님?”


유진의 시야가 멈춘 곳에 하지은이 서 있었다.


“역시 기억 못하는군요.”





***





“어디를 그렇게 유심히 보는 거에요?”


“발이요.”


“발은 왜?”


“귀신은 발이 없다잖아요.

둥둥 떠다니니까.”


“유진씨, 그 썰렁한 블랙 유머는 여전하군요.”


“그럼 당신은 누굽니까?

왜 70년 전에 죽은 하 박사의 흉내를 내고 있죠?”


“왜 제가 하지은이 아니라고 확신하시죠?”


아무리 봐도 하지은이다.

유진은 하지은을 일년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지켜봤다.


저 목소리는 어떻게 잊겠는가?

1년 내내 매일같이 들었던 목소리 아닌가.

불과 일주일 전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듣던 목소리다.


그래서 더더욱 납득이 안 갔다.

만일 정체불명의 하지연이라는 여자가 만든 환각이라면 이렇게 완벽할 수 있을까?

게이트에서 나왔다는 아이템 중에 이렇게 정교한 환상을 만드는 물건이 있는 걸까?


“아니요.

당신은 하지은 맞네요.”


아무리 봐도 부정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이 통째로 꿈이 아니라면.


“저는 70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들었죠?”


“죽은 사람이 자기가 죽은 날까지 기억하나요?

10년 전, 20년 전 이렇게 업데이트까지 하면서.”


하지만 저 여자가 하지은이라는 걸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다.


“들어주세요.

시간이 많지 않아요.

아직은 시스템이 많이 불안정하거든요.”


“시스템이요?”


“네, 저는 죽기 전에 제 인격을 디지털화해서 기계로 옮겼어요.

지금 저를 표현하면 인공 지능이라기 보다는 인공 인격(Artificial Personality)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인공인격?

그게 가능해요?”


“몰라요. 그냥 저질러 봤어요.

일단은 저는 살아 있을 때의 기억을 대부분 갖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게 꼭 생전의 하지은과 동일 인격이라는 확신은 없어요.

하지은이 전기 신호와 기계로 삶을 이어가는 건지.

아니면 요상한 기계가 하지은인 척 하는 건지.”


그러면 저 사람은, 아니 저 존재는 하지은인 건가? 아닌 건가?

당사자도 모르는 일을 유진이 알 수는 없었다.


“왜 그렇게 했죠?

내가 느끼기에 하 박사님은 영생 같은 데 집착할 성격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옛날 어렸을 때 본 만화 중에 기계몸을 얻어 영생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우주를 누비는 작품이 있었다.

하 박사는 그걸 현실화한 걸까?


“걱정이 돼서.”


“네? 무슨 걱정을?”


“제가 한유진씨를 떠나보냈잖아요.

하얀 쪽배에 유진씨를 실어서.

돛대도 삿대도 아니 달고 서쪽 나라로요.”


생각해보니 동면캡슐이 흰색이긴 했다.


“그래도 은하수로 흘러보낸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걱정을 해요.”


“미래는 어쩌면 먼 은하수보다 위험할 수 있으니까.”


갑자기 버퍼링이 왔는지 하지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말해주지 못한 것들도 있어서요.”


“어떤 걸?”


“저는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한유진씨가 왜 아픈 건지.”





***





꿈인지 대화인지 회상인지 모르겠지만.

하지은과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어둠이 사라지고 다시 주위가 밝아지자 좀전에 하지연과 같이 있었던 69층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랜만에 하 박사님과 대화를 나누니 좋으셨어요?”


하지연이 싱긋 웃는다.

하 박사도 가끔 웃었는데, 저랬었나?


“네, 옛 친구를 만나니 좋네요.”


유진의 시간 감각으로는 일주일 전이지만, 지구에서는 백 년 전에 헤어진 사람과의 대화였다.

‘사람’인지는 다시 생각해봐야겠지만.


“하 박사님이 저에 대해 뭐라고 하시던가요?

못난 후손이 잘난 조상님 말씀을 지키느라 고생이 많다고 위로해주시던가요?”


“당신을 믿으라는군요.”


“믿어주시면 좋겠어요.

우리는 하 박사님이 70년 전에 남겨주신 유언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는 존재거든요.”


“아까부터 우리라고 하는데, 혼자가 아니라 조직인가요?”


“그렇죠.

혼자 모든 걸 할 수 있는 존재는 신이나 동물 밖에 없잖아요.”


에이프릴, 남강민, 채일우.

여기 와서 유진이 신뢰하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모두 하지연의 ‘우리’가 뽑았다고 한다.


결국 세 사람에 대한 신뢰는 하지연에게 달려 있고, 하지연에 대한 신뢰는 하지은으로부터 나온다.


결국 모든 것은 다시 하지은 박사에게 돌아간다.


믿자.

22세기의 세계에서 유진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한 사람이 아닌가.


어차피 하지은을 불신한다면 유진의 존립 자체가 모순이 된다.


유진은 하지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해봅시다.”


하지연은 환하게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다시 인사드릴게요.

제7 본부장 하지연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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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 깨어난 회장님 (5) 23.08.27 381 7 12쪽
5 5 깨어난 회장님 (4) +2 23.08.27 437 6 12쪽
4 4 깨어난 회장님 (3) +3 23.08.26 500 9 12쪽
3 3 깨어난 회장님 (2) +2 23.08.25 603 9 11쪽
2 2 깨어난 회장님 +2 23.08.25 756 9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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