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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은퇴 용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만찬가
작품등록일 :
2023.01.25 09:01
최근연재일 :
2023.03.10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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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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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79,336

작성
23.02.0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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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3. 흑막 사냥을 나선다 (2)

DUMMY

"흠흠흠."


날씨가 화창하고 햇살이 나를 반긴다.


새로 장만한 저택에서 맡을 수 있는 신선한 집 냄새와 고풍스러운 양식은 지금껏 내가 누릴 수 없던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변두리에서 쇠똥 냄새만 맡으며 평민들의 하소연을 들어줘야만 했는데 이제 그딴 것은 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으 똥 냄새. 생각만 해도 아직 내 옷에서 똥 냄새가 아른거리는 것만 같구나!


하지만 그런 고충은 마당 정원의 꽃내음을 맡으면 말끔히 해소가 될 문제다.


잘 있어라 쇠똥구리들아. 계속 구르던 대로 구르다가 굴러 떨어지려므나.


"주인님. 데르망 령에서 가져온 홍차입니다."


"오오. 그래. 고맙군."


한창 창가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자니 어여쁜 메이드가 수레차에 비치된 홍차를 따라 내 책상 위에 다소곳이 올려놓는다.


"음. 향이 좋군. 잘 마시지."


내가 흐뭇하게 미소 짓자 메이드도 나를 따라 웃는다.


얼마 전까지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여인이 내 방에 함께 머무른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던가.


꼴에 귀족이긴 했으나 불어 터진 할망구나 할아버지만 급료 쪽쪽 빨아먹으려고 억지로 다니던 티가 나도 함부로 내쫓을 수도 없었다.


몰락 귀족, 그것도 남작이라는 귀족 밑발치에 발이나 슬쩍 담그고 있는 어설픈 귀족의 시종인이 될 사람 따위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것도 얼마 전이지.


그래. 얼마 전.


내게 남작 지위를 하사하신 알르몬드 백작님의 부름이 나를 새롭게 만들었다.


내게 선택을 하게 만드셨지.


이대로 추레하게 살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삶을 살아볼테냐.


처음에는 새로운 삶이라는 게 마족의 피로 장사질을 하는 장사치라는 얘기를 듣고 줄을 잘 선 건지 의문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후회 따위는 없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탄탄대로라는 게 입증이 되었으니까.


비록 지금은 제조 공장에서 정제된 마족의 피를 유통하는 유통책에 불과하지만 백작님께서는 내게 잘 해주고 있다면서 기대감을 드러내셨고.


여명 묵시록의 상층부 또한 나를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조만간 계획이 성공하면 내게 자작의 위치 마저 약속하셨다.


이제 밑바닥 귀족이라는 오명에 치를 떠는 것도 얼마 안 남았단 말씀이야.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아아, 그래. 필요하면 부르지."


메이드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틈, 나는 그 틈에 그녀의 옷 사이로 슬금 비추는 가슴골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할망구들한테는 차마 입히지 못했던 메이드복, 이제 와서 후회 한 점 없다.


내 취향의 옷을 알아서 입어주는 여자들은 이제 널리고 널렸으니까.


물론 처음부터 몸에 손을 댈 정도로 교양 없는 귀족은 아니지만 어차피 시종인과 몸을 맞대는 건 귀족의 일상 아니겠어?


쟤도 그럴 목적으로 높은 급료 받고 있는 거니까. 설마 집 청소 좀 하고 차 따른다고 그렇게 비싼 돈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테지.


아이는 스무 명 정도가 좋겠군.


그리고 나는 잘 나가는 귀족의 딸과 결혼해서 잘 사는 거지.


아아. 행복하다. 하루하루가 행복해.


내가 이렇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도 다 알르몬드 백작님과 여명 묵시록 덕분이지.


나는 그 분들께 충성을 맹새했다.


내가 위로 올라갈 수만 있다면 설령 마족이라 해도 신봉하겠어.


"어머. 이 차 향이 좋네요."


"그러게. 어지간히 좋은 찻잎을 가져왔나봐. 여행 다니면서 이렇게 좋은 차를 마신 적도 드문데."


"이 쿠키도 좀 드셔보세요."


"오. 쪼꼬 개이득. 나 쪼꼬 개 좋아하는데."


"독도 없는 것 같은데 좀 싸갈까요? 가는 길에 먹게."


"좋지."


하하하하. 이런 개구쟁이들.


아빠 얼굴 보는 것보다 과자가 먼저란 말이야? 도대체 누구를 닮은 건지.


"응?"


잠깐만.


나 자식새끼 없는데?


자식새끼는커녕 품은 여식도 없는 모쏠노총각이란 말이야.


그러면 내 방에서 들리는 여자랑 꼬맹이 목소리는 도대체 누구 건데?


나는 창가에서 몸을 돌린다.


쨍그랑!


"꺄아아아아악?!!"


살면서 지금까지 내 본 적 없는 계집애 같은 비명소리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터져 나온다.


너무 놀란 나머지 아끼는 찻잔을 떨궈 깨지는 것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피.


피다.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쓴 꼬마와 수녀가 소파에 앉아 천진난만하게 과자를 깨물어 먹으면서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마족? 마족인가? 내가 마족의 피를 유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죽일 속셈으로 온 것인가?


히익! 내 비명소리를 들은 마족 두 놈이 이쪽을 바라본다.


"하이요."


죽음이 내게 손짓한다.


경비병. 이번에 저택에 오면서 비싼 돈 주고 고용한 백여 명의 정예병들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겨, 경비병! 경비병은 무얼 하고 있는 거야!"


"여기 있사옵니다."


"헉!"


대신 대답한 건 소파에 앉아 있는 꼬마다.


그가 바닥에서 들어올린 건, 머리다.


분명히 본 적 있는 투구 안쪽의 사람의 머리가 눈을 헤까닥 한 채로 혀를 내밀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뒤집어 쓰고 있는게 다름 아닌?


말도 안 돼. 다들 전 기사 출신에 한가닥 하는 사람들만 선출한 건데 이렇게 아무 소리도 없이 전멸을 했단 말이야?


마족이로구나. 그것도 어마어마한 위치의 마족인 거야.


마왕이 죽었다면서 아직도 이런 마족이 대륙에서 날뛰고 있다는 건가?


마족의 피로 장사질을 하고 있다는 게 들통 난 게 틀림없다.


"우리가 여기 온 이유는 알고 있지?"


마족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피로 빨갛게 물든 이빨을 드러낸다.


음, 마족은 이빨이 길쭉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건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내 목숨이잖아.


하지만 나는 귀족. 명예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명예로운 사람이다.


더군다가 나는 알르몬드 백작님의 가신이자 여명 묵시록에게 충성을 맹세한 몸.


설령 상대가 마족이라고 해도 이 뜻, 결코 굽히지 않으리라!


"엉헝헝헝! 제발 살려주세요, 마족님! 저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그냥 알르몬드 백작이 시킨 대로 엘릭서 유통책만 맡았을 뿐이에요! 그 자식은 여명 묵시록의 심복이고 여명 묵시록 아지트는 대륙 최북단에 위치한······!"



펑!



///



"도대체 얘는 뭐하는 애지?"



아니, 뭐하는 애였지로 말을 바꿔야 할 것 같다.



나를 마족이라고 착각하지를 않나 갑자기 자기 혼자 급발진해서 나불거리다가 머리가 터져서 죽어버리질 않나.


남은 시체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지면서 싸늘하게 식어간다.


정보를 누설하지 못하게 입막음을 하려고 고독이라도 먹인 것인 걸까.


머나먼 동쪽 나라에서는 고독을 먹여서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배신할 경우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는 조직도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튼 귀족한테까지 이런 짓을 해놓은 걸 보면 꽤나 비밀 유지에 충실한 악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얘가 하려던 말 중에서 중요한 것도 섞여 있었던 것 같은데.


"분명히 아지트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자식이, 스포일러 할 거면 제대로 하던가 어중간하게 해서 뒷내용 궁금하게 만드네. 거슬리게.


"그래도 아까보다는 소득이 있었네요."


"그러게."


공장을 박살낸 다음에 곧바로 리스트에 적힌 남작령을 찾았을 때, 그 곳의 남작은 '내 목숨을 가져갈 지언정 내 명예와 충성심만은 가져가지 못 할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자결했다.


적이지만 충성심만큼은 인정할 만 하다. 내가 지금까지 본 귀족들 중에서 충성을 다 하는 몇 안 되는 귀족이었다.


그 충성심을 하필 광기 집단에 쏟았다는 게 넌센스지만.


나는 쿠키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는다.


부드럽게 바스러지는 쿠키의 식감 안에 오돌토돌한 초코칩이 비집고 들어와 혀에 사르르 녹는 게 일품이다.


"알르몬드. 알르몬드 백작이라."


"아는 사람인가요?"


"몰랑."


그냥 진지한 표정으로 이름 몇 번 되뇌이면 왠지 생각하는 거 같고 멋있어 보이잖아.


아무리 원정길 10년 차라고 해도 귀족들 이름 다 외우면서 다닐 정도로 사교적이진 않았으니까.


"파피루스에 적혀 있지 않을까?"


나와라 만능 파피루스!


하지만 책상을 뒤져서 파피루스나 집필한 흔적이 보이는 서적을 뒤져봐도 엘릭서의 생상량과 공장의 위치, 납품책 같은 것만 적혀 있을 뿐 알르몬드 백작에 대한 정보는 이름 말고는 보이지 않는다.


혹시 금고 같은 곳에 별도로 정보를 숨겨두는 치밀함을 갖고 있다거나?


생각이 나서 책상 아래쪽을 바라보니 3중으로 된 잠금 장치가 걸린 금고가 정말로 있었다.


우지끈!


보물상자를 찾아 기쁜 마음으로 금고 입구를 잡아 뜯고 안을 살핀다.


하지만.


"애걔?"


안에 들어 있는 건 금괴랑 서류 한 장.


그리고 그 서류 한 장 마저도 여인들의 이름으로 보이는 것들만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이 사람들 이름은 왜 적어 놓은 거지? 여명 쪽 관계자인가?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란 말이야. 이런 게 아니라 백작이나 그 위쪽 정보가 들어 있어야지.


"얘 그냥 허수아비 같은데? 털 게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분명히 아는 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니까. 아지트 어쩌고 하는 애가 아무것도 안 적어놨다고?


말하는 거 보니까 그렇게 똑똑한 것도 아닌 것 같더만.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왔네."


"응?"


이게 누가 하는 말이지? 아리아의 목소리는 아닌데.



분명히 집 안의 병사들은 전부 처단했을 텐데, 생판 모르는 목소리가 담담하게 내 귓가에 멤돈다.



문쪽에서 들리는 목소리라 자연스럽게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는데.



후욱!



"우와!"



갑자기 내 눈앞에 세 개의 단검이 날아든다.



그것도 보통 힘으로 던진 게 아니라 돌아본 순간에 이미 내 눈을 파고들려고 날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나는 가까스로 뒤로 허리를 꺾어 피하지만.



보이지 않는 시야에서 살기가 느껴져 몸을 한 바퀴 회전한다.


반 바퀴 쯤 회전했을 때,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칼을 꽂아 넣는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잠깐. 복장이 메이드?


그녀의 복장에 시선이 팔린 그 찰나, 칼을 꽂아넣는 자세를 유지하던 그녀의 눈이 내 모습을 빠르게 쫓는다.


이어서 공중에 떠 있는 나를 향해 두 번의 칼부림.


나는 그대로 세 바퀴 빠르게 회전해 뒤에 있는 책상 위로 올라선 다음 그녀를 향해 날아들듯이 정면으로 발차기를 날린다.


그런데 그녀가 그걸 피한다.


심지어 내 속도를 눈으로 쫓는다?


바닥에 착지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그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려 있다.


왜 웃는 거지?


생각하던 그 때, 문득 옆구리에 바람이 들어온다.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내 옷 한쪽이 그녀의 칼에 반으로 갈려서 힘없이 펄럭인다.


"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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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 흑막 사냥을 나선다 23.02.05 31 0 15쪽
11 11. 왜 다 옷부터 벗어재껴 23.02.04 37 0 18쪽
10 10. 휘둘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2) 23.02.03 42 0 13쪽
9 9. 휘둘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23.02.02 34 0 18쪽
8 8. 아카데미의 흑막 (3) 23.02.01 34 0 16쪽
7 7. 아카데미의 흑막 (2) 23.01.31 35 0 21쪽
6 6. 아카데미의 흑막 23.01.30 34 0 11쪽
5 5. 계획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5) 23.01.29 34 0 10쪽
4 4. 계획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4) 23.01.28 46 0 15쪽
3 3. 계획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3) 23.01.27 78 0 18쪽
2 2. 계획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2) 23.01.26 155 3 15쪽
1 1. 계획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23.01.25 294 5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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