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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은퇴 용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만찬가
작품등록일 :
2023.01.25 09:01
최근연재일 :
2023.03.10 09:08
연재수 :
45 회
조회수 :
1,662
추천수 :
8
글자수 :
279,336

작성
23.02.0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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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9. 휘둘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DUMMY

용액을 삼키자마자 반응이 즉각적으로 일어난다.


내 몸에서 검붉은 아우라가 바깥으로 뻗어 나온다.


흔히 마족들이 내뿜는 마족의 마력이 몸을 다 채우다 못해 바깥으로 발산된다.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서류들이 사방으로 날라가고 기물들이 여기저기 파손되며 벽에는 할퀸 듯이 살벌한 상흔이 남는다.


"말도 안 돼! 이건 마족의 기운이잖아!"


"있을 수 없다! 어떻게 용사가 마족의 마력을 가질 수 있는 거지?"


용사도 사람이니까요. 하물며 성기사도 아니고 어둠 속성에 내성을 가진 것도 아닌데 몸이 스펀지 마냥 쫙쫙 마족의 마력을 빨아들일 수밖에.


곧바로 내 몸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억."


온몸의 관절이 자기 마음대로 꺾이고 휘더니 확장한다.


짧지 않지만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짧다고 할 수도 있는 내 팔과 다리가 멋대로 길어지고 근육이 부풀어오른다.


좁았던 가슴이 넓어지고 굽혔던 등이 멋대로 활시위를 당긴 활처럼 펼쳐지며 커진 척추뼈에 맞게끔 피부가 재구성된다.


나름 신축성 좋게 제작된 내 옷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지고 늘어난다.


한 마디로 사지가 찢어지고 뼈와 살이 분리된다고 표현해도 무방한데.


정작 아무런 감각이 없다. 아무런.


오히려 마족의 마력이 몸에 채워들어오는 감각이 기분좋게 몸을 고양시키면서 그 쪽으로 신경이 쏠린다.


용액에 마취약이라도 첨가한 걸까? 아니면 뭔가 기분 좋게 만드는 성분의 물질을 넣었다거나.


둘 중에 맞다면 후자 쪽인 것 같은데.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주로 파괴적인 충동이 나를 에워싸려 든다.


내 몸이 변화함에 따라 내 얼굴도 제멋대로 부풀어오르기 시작한다.


"후, 후하하하! 어리석은 놈! 그 마족의 피는 일회성으로 제작된 도구다! 사용하면 비약적으로 힘을 늘려주지만 흉측한 마족의 모습으로 변하고 힘이 다하면 재로 변하지!"


"아버지?"


귀족 A의 뒤통수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네놈의 오만함이 너를 스스로 파멸로 몰고 가는 구나! 비록 여기에서 우리를 죽인다고 한들 네놈 또한 지옥으로 사라질 테지. 용사가 없는 대륙 따위, 우리 손바닥 아래에 있는 것과 다름없지! 예정과는 다르지만 이로써 계획에 크게 다가서게 되겠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 치던 주제에 잘도 입을 놀리는 구나.


"자아, 용사여! 어디 그 흉측한 모습으로 날뛰도록 해라! 그리고 마물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죽이다가 비참하게 죽어라! 이거 참으로 용사다운 최후를 맞이하는 구나! 으하하하하!"


"아버지?"


왜 나를 디스하는데 자꾸 자식새끼까지 스플래시 대미지를 입히는 거지?


베르나트는 아마 내가 괴물이 되어서 몸의 통제를 잃고 마음껏 날뛰다가 죽는 결말을 상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거 어쩌냐.


그의 애로사항에 결부되는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일단 하나는 괴물로 변하기 위해서는 신체가 확장과 변이를 거쳐야 하는데 나는 그저 확장에 그쳤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어딜 봐서 흉측한 모습이야? 이게."


내 정신이 너무나도 말똥말똥하다는 점이다.


"아니!"


특유의 악당이 짓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던 베르나트의 안색이 파랗게 질린다.


그도 그럴 게, 그쪽으로 뻗은 내 손은 아주 멀쩡한 사람의 손을 하고 있거든.


"어째서냐. 어째서 마족의 피를 삼키고도 마족으로 변하지 않는 거지? 아니, 그 이전에 어떻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지?"


나는 그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이 없다.


내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가 주요 관심사라 거울을 찾는 게 먼저거든.


평민과 귀족의 방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거울이 있느냐 없느냐다.


그리고 역시나 베르나트의 방 한쪽에는 큼지막한 전신거울이 붙어 있다.


아까 마력이 발산될 때 조각조각 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것만으로 내 모습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하지.


"음. 호오."


가까이서 확인해보니 효과가 놀랍다.


우락부락한 몸은 아니지만 지방 한 군데 찾아볼 수 없고 잔근육 조차 하나 빠짐없이 몸에 박힌 것처럼 조각 같은 몸.


잊고 지냈던 황금 비율의 초콜릿 복근.


동글동글하던 턱선은 날카로워졌으며 눈은 앳된 티를 벗어나 그윽하고 깊어졌다.


지금의 나는 누가 봐도 성인의 몸을 갖고 있는 남자로 볼 수밖에 없다.


나는 완전히 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마족의 기운을 뿜뿜 뿜어내고 있다는 점?


"그, 그 모습은 용사! 상층부에서 들었던 정보대로의 모습이야. 사칭범이 아니었던 건가?"


귀족들은 의심도 많지. 한 번 사람이 말을 하면 곧이곧대로 들어먹는 법이 없으니.


"옷 좀 빌린다."


아무리 내 몸이 조각 같아도 알몸은 부끄렁.


"아니,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용사라도 마족의 살육 충동은 억누를 수 없을 터!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더라도 마족의 마력이 몸을 안쪽에서부터 좀먹고 있을 터!"


"아, 이거?"


나는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마족의 마력을 한 줌 잡는다.


그리고 한 번 움켜 쥐자.


"꺄아아악!"


귀를 찢을 듯한 마물이 비명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사라진다. 동시에 마족의 아우라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사람을 죽이라고 귓가에 대고 기분나쁘게 속삭이던 마족의 이명도, 마족의 마력도 내 안에서 깨끗이 없어진다.


일반적이라면 이걸로 마족을 지울 수 없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지.


털썩. 이 광경을 목격한 베르나트는 어처구니를 상실한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털썩 주저앉는다.


"허억! 이,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마족이 사라지고 남은 건 성장한 내 육체와 힘이 상승하는 버프 효과.


이런 상승 효과 경험은 정말 오랜만이다.


이미 나 정도의 경지에 오른 몸에도 강해졌다는 게 체감될 정도면 일반인들 같은 경우에는 차원이 다른 힘을 얻을 정도의 효과잖아.


"이야. 이거 좋다. 비밀병기 값 하는데? 이 좋은 걸 너희들만 쓰고 있었냐? 야. 몇 개 더 없냐? 같이 좀 쓰자."


"어,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그게 전부야!"


"에이 씨. 진짜 귀족이 쪼잔하게 한두 개 좀 나눠 쓰자는데 그게 그렇게 아까워?"


"아까운 게 아니라 진짜 없다니까! 최근에야 미숙하게나마 정제에 성공해서 양산화 과정에 들어갔단 말이야! 이건 그 시작품··· 헉!"


아, 까비. 눈치챘네.


떠벌리기 좋아하는 귀족 특성 상 그냥 놔두면 고문 안 해도 자동으로 필터링 없이 떠벌릴 때가 많으니까 유도 한 번 해봤는데.


"오케이. 최근에 마족의 피를 군수품으로 제작함. 메···모."


나는 파피루스 하나를 슬쩍 해서 깃펜으로 들은 것들을 슥슥 메모한다. 아까 내가 있는 것도 모르고 떠든 것까지 함께.


"혹시 내가 더 들어야 할 거 있어? 마족의 피를 제조하는 공장이라든가, 상층부에 대한 정보라든가."


"이, 이, 이···!"


"오. 이, 그 다음에 뭐?"


"이 같잖은 평민이 어디까지 나를 능멸해야 속이 시원한 거얏!"


베르나트는 얼굴이 홍다무처럼 시뻘겋게 변해서는 쓰러져 있던 몸을 일으켜 내게 달려든다.


그러면서 품 속에서 뭔가를 찾는데, 아마 더 없는지 더듬더듬거린다.


나한테 휘두르거나 던질 무언가를 찾는 모양인데.


그러던 그는 자기 어깨에 박혀 있던 암기를 손으로 잡는다.


그걸로 나한테 갖다 박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죽어라, 이 용사 놈! 너 죽고 나 죽자!"


"···어. 잠깐만. 너, 그거 만지면."


열이 뻗친 나머지 잠깐 잊었나?


어깨에 박힌 부분은 날붙이 쪽이 아니라 손잡이 쪽이었고, 자기가 잡으려는 쪽이 날붙이 쪽이라는 걸.


그리고 날붙이에는 독이.


"···앗."


뭔가를 깨달은 듯 아차 싶은 표정을 짓는 베르나트지만.


쿵!


내쪽으로 달려오다가 게거품을 물며 맥없이 앞으로 쓰러진다.


중년의 남자였던 그의 얼굴이 녹빛으로 변했다가 점점 검푸른 색으로 썩어들어가더니 이윽고 녹아서 뼈만 남는다.


와우.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베르나트의 등신 같은 행동에 얼척이 없어야 할까, 아니면 여유 부리다가 극독에 닿았으면 뼈도 못 추렸겠다는 걸 깨닫고 그로테스크한 이 장면 연출에 기겁을 해야 할까.


아니, 자기 아빠가 등신처럼 죽는 걸 두 눈으로 본 아들내미가 있는데 무슨 반응하기가 좀 그렇잖아.


내가 베르나트의 뼈다귀를 바라보듯, 마찬가지로 그쪽으로 바라보던 귀족 A와 눈이 딱 마추친다.


얘도 자기 아빠지만 이렇게 죽은 거에 대해서 얼척이 없는 표정인데.


"······."


"······."


어, 어색해.


"내, 내가 그런 거 아니다? 나 아무짓도 안 했다?"


"······."


"그, 그럼 내일 아카데미에서 보자? 안녕?"


냅다 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아니, 어색하잖아.


그래도 손바닥 펴고 빠빠이 했는데 봐준 거 보면 앙금은 없다고 봐도 되겠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얘 아버지가 죽은 걸 옆에서 위로해주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잖아.


게다가 아는 것도 별로 없어보이는데 고문할 필요성도 못 느끼겠고, 불쌍하고.


입막음을 위해서 제거하는 편이 가장 깔끔하지 않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래. 혹시나 귀족 A가 악한 마음을 품고 오늘 있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보고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귀족 A가 보고하는 곳은 예의 상층부일 테고 그 흔적을 잡을 수 있으면 나야 땡큐지. 훨씬 일을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으니.


오히려 그 쪽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애를 그냥 죽여? 그저 차별적인 말 좀 한 애고 실제로는 아직 아무 짓도 안 한 애를?


세탁기 돌려주려는 건 아니지만 걔가 차별적인 말 한 것도 자기 아버지가 분탕질 하라고 시켜서 그런 거고, 애초에 아버지 마인드 상태가 저 꼴이었는데 자식 교육이 잘 됐겠어?


그리고 내가 쟤 였으면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을걸.


"좋아. 결과적으로 적의 간부도 처리하고 정보도 얻은 셈이니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겠군."


혹시나 누가 이 광경을 봤을까,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일부러 소리 내서 말해본다.


그래도 진짜 들으면 안 되니까 모기 소리만하게.


내가 왜 낯 뜨거워지는지 모르겠네.


엑스트라의 뒤를 밟은 것 치고는 얻은 수확이 크다.


베르나트가 의도치 않게 죽어버리는 바람에 더 많은 정보를 못 얻은 건 아쉽지만.


우선 이 아카데미에 기생충처럼 암약하는 귀족 집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는 평민이 섞여 있을 수도 있지만 귀족과 평민을 분단시키려는 행동이나 애초에 귀족과 평민이 물과 기름인 점을 감안해서 귀족이나 혹은 그 위쪽에 위치한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겠지.


편의상 X 집단이라고 해두자.


그리고 그 X 집단의 목적은 귀족과 평민의 분단, 그리고 마족의 피를 정제해서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마족 군사를 일으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거겠지.


내가 직접 사용해봤으니 그 효과는 잘 알고 있다.


그 정도의 양으로도 초인적인 힘을 갖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으니 훨씬 적은 양으로 희석하면 안정성을 높여 한 번 사용해서 죽지 않으면서도 피에 굶주린 마족 군단을 만들 수도 있다.


문제는 더 있다.


마족의 피를 섭취한 나를 괴롭힌 건 버프 효과보다 그 중독성에 있다.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며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지던 묘한 승리감 혹은 쾌감.


그리고 살육의 갈증.


마족이 사람만 보면 대화도 없이 죽이려는 게 이런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나?


지금은 제작 초창기라고 해서 불안정하다고 해도 만약 마족의 성분에서 중독성을 띄는 성질만 추출해서 새로 정체시킨다면?


그게 수상한 하얀 가루지 뭐야.


어느 쪽이든 양산화에 성공해서 암시장에 퍼지는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기껏 마왕 잡아놨더니 이것들은 마족의 피로 뭔 짓거리를 하는 거야."


뭐 세계정복 같이 애들 장래희망에나 써 놓을 법한 짓을 하는 단체라도 되는 건가.


얘기 하는 걸 들어보니까 집단 규모도 한두 명 정도가 아닌 것 같더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체불명의 놈들이 벌일 수 있는 갖은 짓거리들의 가짓수가 머릿속에 불어나니까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다.


"어쨌건 남은 건 이 정보를 교장에게 전하는 것뿐이군."


나는 손에 쥐고 있는 파피루스를 바라본다.


아카데미를 부숴달라.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의뢰는 그냥 들어주기는 힘들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나 혼자서 처리하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커.


한참 전에 밑작업이 들어가 있던 일인 것 같고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이대로 의뢰에 착수하기에는 수지타산이 너무 안 맞거든.



고작 입학 시켜준 것 하나 가지고 아카데미의 암약 단체를 뿌리 뽑아달라? 그것도 규모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되는 걸?



용사의 사명감으로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도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나한테 있어서 용사라는 개념은 마왕을 잡는 것. 그걸로 끝.


끝판왕을 잡아줬으면 나머지는 경비대에 맡기던가 기사단에게 맡기던가 해야지 이제 일반 시민인 신분인 사람에게 뭘 바라? 감정 호소로 되는 것도 정도껏이지.


솔직히 저들이 마족의 피로 뭔가를 만들던 나한테 피해만 안 오면 내 알 바 아니다.


외뢰도 거래다. 위험도에 합당한 대가를 줘야 움직이지.


그리고 내가 예상하기에 교장은 내게 더 털어놓을 게 있을 거다.


이건 대등한 거래 이전에 신뢰의 문제라, 그녀가 내게 진심을 털어놓은 다음에야 의뢰의 얘기를 들을 거고.


만약 지금까지처럼 나한테 뭔가를 숨기거나 모르쇠를 한다면.


그 때는 나도 이 학교를 떠나면 그만이다.


신뢰 없는 사람과 거래하는 건 이제 질색이야.


국왕과의 계약서?


까짓 거 다시 용사 하면 되잖아. 그냥 인근에 대가 없이 몬스터나 몇 번 잡고 청구 비용 청구하면서 살지 뭐.


이제 마왕도 없는데 누가 나랑 싸워서 이겨?


그래. 지금이라면 원정대 없이도 혼자서 마계를 쓸어버릴 수도 있겠지.


문득, 헤이즈의 얼굴이 떠오른다. 오늘 다시 만나서 그런 걸까.


"갈 때 가더라도 작별 인사는 하고 가는 게 좋겠지?"


띵-


"엇."


뭐지.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눈앞이 아득해진다.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으며 앞으로 쏠리는 무게 중심을 세우려고 발에 힘을 주는데.


정면을 바라보던 내 시야가 빠르게 아래로 곤두박질 친다.


안에 있던 힘이 급속하게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일어서려는데.


다리에 바짓단이 계속 걸려서 다시 한 번 앞으로 넘어진다.


"도대체··· 왜 이래?"



힘겹게 상반신만 일으키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과 바닥의 차이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양손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어지러워서 헛것을 보는 게 아니다.


내 몸이 도로 작아지고 있는 거야.


마족의 피 효과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적어도 몇 십 분은 버틸 줄 알았는데?


아직 시작 단계라서 마족의 피가 불완전한 건가?


아니, 그렇다고 정신까지 쏙 빼놓을 건 또 뭐야?


"이런··· 제기랄."


안 된다. 길 한복판에서 자빠질 수는 없다.


지금 집단 X가 어디에선가 나를 죽이려고 주시할 수도 있는데 이대로 정신 잃고 쓰러지면 죽기 딱 좋단 말이야.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힘껏 눈을 뜨려고 힘을 주는데 왜 반대로 눈이 감기는 것 같지?


"남이 주는 거 함부로 먹는 거 아니랬는데······."



그 말을 내뱉고 난 뒤, 나는 완전히 눈을 감고 들고 있던 고개 마저 바닥에 떨군다.


점점, 의식이 멀어져 간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멀리서 굽 높은 구두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또각.


내 앞에 구두가 멈춘다.


"어머. 용사님?"


조숙하고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아른거리듯 귓가를 간질인다.


그런데 잠깐. 이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헤이즈? 쉐릴? 교장? 공주?


아니. 아닐 거야.


정신을 거의 잃어가는 와중에도 한 녀석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사람들과는 훨씬 비교도 안 되는 위험한 녀석.



왜 지금 타이밍에 그 녀석 얼굴이 떠오르는 거지?



부르르. 미동도 하지 않는 몸에서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든다.


"누가 길거리에 알몸인 상태로 쓰러져 있어서 와봤더니 용사님이셨군요? 설마 용사님과 이렇게 재회하게 될 줄은. 아아. 이것 또한 신의 뜻인 걸까요. 맞아요. 이것 또한 운명인 것이에요. 저와 용사님 사이에는 신조차 끊을 수 없는 붉은 운명의 실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빠른 재회를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신을 구실처럼 들먹이면서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는 여자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명밖에 만나 본 적 없다.


아니, 아마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한 명이 아닐까?


아니야. 아닐 거야.


분명 정신을 못 차려서 환청을 듣는 거야! PTSD가 몸에 뿌리 깊게 박혀서 그 때를 강제로 기억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아아. 맞아요. 용사님께서 저를 맞이하러 오신 거예요! 모두와 헤어진 뒤, 저와 맺어지기 위해서 몰래 뒤를 밟으신 게 분명하답니다! 보세요. 버선발도 아니고 나체가 되어서까지 저를 보러 오시다니! 아아. 어찌 이리도 앙큼하시고, 어찌 이리도 귀여우실 수가 있는지."


이런 씨발!


야! 몸아! 일어나! 너 지금 안 일어나면 너 좆돼! 너 뒤져! 나중에 눈 뜨면 돌이킬 수 없어진다고!


제기랄! 이거 어떻게 해야 일어나는 거야! 깰 수가 없잖아!


"좋아요. 용사님과 함께 하는 곳이 마계라고 할지라도 그곳이 허니문이고 이 상황 자체가 랑데뷰라 할 수 있겠죠. 그렇게 저를 거부하시더니만 실은 저와 같은 마음이셨다니! 저는 너무 기뻐요! 우리, 그럼 지금부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보아요."


지금 나 들어 올린 거야?


나 어디로 데려 가는 거야?


나 납치 당하는 거야?


야! 눈 떠! 제발. 제발!


으아아악!


"다시는 제 곁에서 떠나지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용사님. 우후후후."


용사 살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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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4. 흑막 사냥을 나선다 (3) 23.02.07 27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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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 휘둘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2) 23.02.03 42 0 13쪽
» 9. 휘둘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23.02.02 35 0 18쪽
8 8. 아카데미의 흑막 (3) 23.02.01 35 0 16쪽
7 7. 아카데미의 흑막 (2) 23.01.31 35 0 21쪽
6 6. 아카데미의 흑막 23.01.30 34 0 11쪽
5 5. 계획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5) 23.01.29 34 0 10쪽
4 4. 계획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4) 23.01.28 46 0 15쪽
3 3. 계획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3) 23.01.27 78 0 18쪽
2 2. 계획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2) 23.01.26 156 3 15쪽
1 1. 계획이라는 게 쉽지가 않다 23.01.25 294 5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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